소설리스트

〈 1화 〉[프롤로그] (1/507)



〈 1화 〉[프롤로그]

인간의 눈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거대한 군세가 일어섰다.


지평선 너머까지 끝도 보이지 않는 군세는 막는 것은 산이던 강이던 무시하고 파괴하며 진군했다. 그들의 손에는 불과 칼이 들려 있었으며 호흡에서 불을 내뿜는 말을 타고 달리며 산을 뒤엎는 용종의 등에  기병창을  기사도 있었고, 도시 하나를 몸뚱이로 짓눌러 무너트릴법한 거대한 괴수의 등 위에 성을 세워 요새로 만든것 또한 있었다.

그리고 그 군세의 가장 높은 곳, 수천의 병사들이 받쳐 들고 있는 화염과 칼날로 장식된 옥좌 위에는  남자가 권태로운 눈으로 세상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는 전 차원을 통틀어  없는 경지의 초월자.

수억이 넘는 군세와 함께 진군하는 그는 이미 수개의 별을 멸망시켰다. 정복하고 파괴하고 지배하고 약탈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는 전쟁의 화신이였다. 이것은 비유가 아닌 그의 초월자로서의 위치를 의미했다.

그런 군세가 향하는 곳은  사내의 앞이였다.


벌레 새끼하나 지나가지 못하게 포위하고 수십개의 이능력과 마법, 진법, 술법들이 공간과 일대를 점령한 것에 남자의 권능마저 더해지니 도망칠 수 없게 되었다. 하늘에는 이미 빼곡하게 늘어서 있는 괴조 기사단과 용종들이 그들의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만약 남자의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별을 부술 정도의 집중 포화가 사내에게 떨어질 것이다.


"자, 도망칠 곳은 없다"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자리에서 도망칠 수 없을거라고 자신하는 남자는 턱을 괴고 느긋하게 사내를 내려다 보았다.

그의 눈에는 오만함이 깃들어 있었다. 당연하듯이, 수많은 군세 위에 존재하는 그는 그만한 오만함을 가질 자격이 있었다.

"이제 어찌할테냐?"


수억이 넘는 군세 앞에서 사내는 인상을 찌푸렸다.

한번 쓱, 주위를 둘러보고는 대놓고 남자를 노려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너도  할 일 없는 병신 새끼다. 나 하나 잡자고 이만큼 끌고 오냐?"


"겨우 이 정도로 말인가? 차원을 넘어 별을 정복하는 나에게 있어서 이 정도 병력은 많은게 아니다. 단지 일부만 데려온 것 뿐"


그는 전쟁의 화신이였다. 신도 넘어서는 초월자이기에 차원을 넘어서 자신의 군세를 불러오는 능력을 지녔다. 다만 그 숫자가 많으면 소모되는 힘이 크기에 일부만 불러왔을 뿐이다.

남자가 정복한 행성만 수개였다. 그걸 생각하면 수억이란 군세는 단지 일부에 불과할 뿐이다.


"그니까 나 잡는데 겨우 이만큼 끌고 온거냐고"


"흐음, 확실히 너는 강한 초월자다. 너보다 강한 존재는 본적이 없을 정도로. 과거 내가 쓰러트렸던 적들도 너 만큼 강하진 않았을거다"


"거 우물 안 개구리네. 나보다 더 쌘 초월자가 얼마나 쌓여 있는데 그런 개소리냐? 차원 넘고 행성 몇개 정복했는데도 그걸 몰라?"


"정보나 지식이야 앞으로 모아가면 될 뿐"

"......뭐, 모르는게 죄는 아니고 배우지 않으려는게 죄일 뿐이니 본론으로 넘어가자"

사내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사내의 외모는 평범하게 생겼지만 눈매가 험악하게 생겨서 모든 인상을 망치고 있었다. 선행을 한다 하더라도 모르는 사람은 손가락질을 할법한 얼굴이였다.


하지만 지금 사내의 얼굴은 눈매에 못지 않게 일그러져 있었다. 분노 그 자체를 드러내는 듯한 모습은 섬뜩해서 평범한 사람이라면 절로 기겁할만한 흉신악살의 외견이였다.

"내가 꽤 오래 살았지만  중에서 내 마누라 내놓으라고 시비터는 새끼는 니가 처음이다 더러운 페도 새끼야"

"그녀의 내면은 수천년의 시간을 살아왔을텐데?"


"나야 오랫동안 같이 살아서 사랑하는거지. 너처럼 예쁘다고 찝쩍대는 놈이 아냐. 사랑이란건 외견의 형태가 중요한게 아니라 내면이 중요한거지. 하기사 전쟁만 해본 새끼가 사랑이 뭔지 알겠냐?"

남자와 사내는 서로 양보해줄 수 없었다.

서로의 중요한 것이 걸려 있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중 하나는 반드시 죽는다.

"나도 내 목숨 소중한건 알아서 나보다 격이 높은 초월자한테 싸움은 안걸어. 근데 내가 분노조절장애가 있거든? 씨발, 빡쳤는데 나보다 쌔든 격이 높든 그게 대수냐? 넌 오늘 팔다리 부러트린 다음에  먹이고 기게 하다가 산채로 내장을 뽑아서 뒈질 줄 알아라"


"나는 자비롭다. 스스로 죽음을 맞이한다면 너의 죽음도 존중해줄터. 스스로 벌주를 마실 생각인가?"

"남의 마누라 뺏으려고 드는 금발 양아치 NTR남 같은 새끼가 어디서 적반하장질이야? 느그 애미가 그렇게 가르치든? 내가 어지간해서는 패드립 안치는데 넌 그런거 없어 새꺄"

남자는 무심하게 손을 들어올렸다. 그의 지휘에 맞추어 수억의 군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내를 죽이기 위해 검과 창을 들고 마법과 이능력을 준비한다. 남자가 든 손이 내려진다면 전쟁이 시작될 것이다.


"편한 죽음을 등지고 가시밭길을 선택하겠다면 그렇게 해주마. 너에게 알려줄 이름은 없으나 나의 고향에서는 전쟁의 마왕으로 경배받던 몸. 그 위명 아래에 죽도록 해라"

남자의 손이 내려지려던 찰나.

"너는 전쟁의 군주(War Lord)지. 다수의 폭력으로는 동격의 초월자들도 애먹을게 뻔하고. 근데 말이다"

키이이잉!!!


사내의 안광이 번뜩였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것이 바람을 타고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아무도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 심지어 이 자리에서 가장 격이 높은 남자조차도 말이다.

"나는 대마왕이다 씹쌔야"


가장 먼저 기이함이 보인 것은 하늘이였다.


하늘을 비행하고 있던 괴조와 용종들이 땅으로 추락했다. 그들의 거대한 몸집들은 땅의 병사들의 몸뚱이를 짓이겼지만 아주 미약한 비명조차 없었다.

그 누구도 비명을 지를  없는 몸이 되었으니까.

이 자리의 수억의 군세 누구 하나 살아 있지 않으니까.


"무, 슨!!!"

남자는 경악에 빠진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자신의 기감을 펼쳐보았다. 그와 정신적으로 연결되어 있던 군세의 단 한명도 살아 있지 않았다. 수억의 군세에서  한명조차!!!


"꿈에서나 나올법한 괴물들의 '악몽의 군세'도 아니고  단위로 움직이는 '죽음의 군세'도 아니고 흉악하기로는 지랄맞은 '침식의 군세'도 아닌 허접 쓰레기들이나 끌고와서 개판치면 날 이길거라고 생각했냐? 싸우기 전에 생각해봤어? 너랑 나랑 상성이 어떤지?"

남자와 사내의 차이는 명백했었다.

초월자로서의 격도 분명 남자가 위였고 병력의 숫자나 힘의 크기로서도 분명 남자가 위였다. 하지만 남자가 간과한 것이 있다면 사내가 무엇을 의미하는 초월자인지 알지 못했던 것이다.

"너랑 동격의 다른 초월자였다면 내가 죽었겠지. 근데 나는 문명을 심판하는 대마왕 중에서 '사회'를 담당하거든? '전쟁'이란건 결국 사회와 사회의 충돌이라고"


병사들의 시체를 짓밟으며 사내는 옥좌로 걸어갔다. 수억이란 생명을 단숨에 빼앗았으면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눈으로 똑바로 남자를 노려보았다.


"'사회'로는 아무도 날 죽일 수 없어. 네가 나보다 격이 높고 강한 초월자라도 다수는  이기지 못해"


사내를 죽이기 위해서는 압도적으로 강한 개인이 필요하다. 절대 다수는 사내를 죽이기는 커녕 지금처럼 한순간에 죽어나갈 뿐.


별 하나의 모든 생명을 죽이는 것은 남자도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파괴하지 않고 오로지 생명만 죽이는 일은 사내만 가능하다. 한순간에 문명의 이기들을 전부 두고 사회만 죽여버리는 힘은 경외 이전에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이명은 최흉(最凶)이였다.


"상황 참 재미있게 됐지? 네가 이 주변에 쳐둔 결계에 힘을 보태서 병사들이 싹다 뒈져도 계속 유지되고 있어. 아무도 여기서 도망칠 수 없다는 소리는 아무도 여기로  수도 없다는 소리이기도 하지"

남자는 승리를 확신했기에 도망갈 길을 차단하기 위해 자신의 힘을 사용해 일대에 결계를 쳐두었다. 상당한 힘을 사용했지만 결국 남자가 쓴 힘이기에 거두는건 어렵지 않다.


단지 시간이 걸릴 뿐이고 그 시간 동안 무사할거라는 보장이 없다.

그는 전쟁의 화신. 하지만 전쟁이란건 홀로 하는게 아니다.


홀로 다수를 죽이는건 결국 학살일 뿐이며 남자가 전력을 발휘할  없다. 일기토도 아닌 이상 1대 1의 싸움을 전쟁이라 부를 사람은 없으니까. 더군다나 남자와 연결된 다른 권속들을 부를 수도 없다.


상대의 퇴로를 막았다고 생각한게 도리어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었던 것이다.

"남자 둘이서 한 여자를 두고 싸운다면 공평하게 1대 1로 싸워야지 씹쌔야, 하물며 임자 있는 여자라면 니가 페널티를 먹어도 모자랄 판에. 어딜 바글바글 벌레 떼처럼 몰려와서 약탈하려고 들어? 그런거 없으면 여자 꼬실 능력이 없어서 그러냐? 전쟁터에서 힘으로 여자만 따먹던 놈이 뭘 알긴 알겠냐마는"


"크윽......! 네 놈!!!"

"먼저 시비 턴것도 너고, 먼저 남의 마누라 내놓으라고 지랄한 것도 너고, 먼저 군대 끌고  것도 너야. 이제 그 책임을  차례다"

사내는 방긋 웃으며 주먹을 날렸다.


"아까 어떻게 할지 미리 말했었지? 일단 팔다리 부터 부러트리고 보자"

 초월자가 격돌했다. 싸움은 가장 높게 떠 있던 해가 지고 다음날 다시 가장 높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남자는 전쟁의 화신이기에 홀로 힘을 발휘할 수 있는데는 한계가 있지만 사내보다 높은 경지의 초월자였다. 궁지에 몰렸다고 해도 쉽게 상대할 자가 아니다.

하지만 결국 승리한건 사내였다.


"어, 떻게. 내가, 내가  수가 있단 말인가? 승리의 군주로서 여태껏 무패행진을 하던 내가........!"

"져본 적도 없는 새끼가 승리를 논해? 개소리 지껄이지 마라. 로드(Lord)가 된지 얼마 되지도 않은 허접 새끼가 세상 넓은줄 모르고 지랄 떤 것 자체가 지는게 마땅한 일이야. 너를 한주먹에 죽일 절대자도 있는 마당에 나한테 죽는데 무슨"


사실 사내는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가 말했다시피 남자와 동격의 다른 초월자와 싸웠다면, 그리고 결계 때문에 그가 초반에 발이 묶이지 않았다면, 그가 대인전에 약하지 않았다면, 초월자로서 경험이 적지 않았다면, 여러 이유 중에서 하나라도 맞지 않았다면 지금 죽는 사람은 남자가 아니라 사내가 됐을 것이다.

"잘 가라 씹쌔끼야.  몸뚱이는 내가 잘 써줄께"

"잠깐.....크아아아아아악!!!"


"내장 뽑는거 가지고 엄살도 심하네. 난 말이야 흘러내리는 내장 뱃속에 쑤셔넣으면서 싸웠어 새꺄. 고작 그걸로 비명이나 지르고 정신력 형편없네"


팔다리가 부러진 남자의 배를 갈라 산채로 내장을 쭉쭉 뽑아내 사방에 흩뿌렸다. 그의 몸뚱이가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키더니 이내 미동을 멈추었다.

위업으로 칭송될 전투의 승자는 사내였다.

"..........아"

하지만 그의 몸도 정상은 아니였다. 그가 유리했다고 하지만 남자와 그의 차이에는 커다란 격차가 있었다. 그 격차는 너무나도 커서 태고 이래로 그 누구도 그 격차를 넘어 승리를 쟁취한 자가 없다.


수많은 차원을 넘어 널리 알려져도 이상할게 없는 위업이였다. 그만큼의 부상을 입는 것도 당연했다.

멀쩡한 뼈를 세는게 더 빠른 상태인데다 오른팔은 잘려서 덜렁거리고 심장은 이미 날아간지 오래였다. 단지 자신의 힘으로 심장의 기능을 대신해 버티고 있던것 뿐. 모든 힘을 다해 심장의 기능을 대신할 정신력이 없는 이상 그가 죽는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였다.

사내는 조용히 앉아 그들이 싸운 여파를 감상했다.

땅이 갈라지는걸 넘어 별의 내핵이 화산처럼 치솟고 중력이 비틀려 대륙이 떠오르는 광경은 장관이였다. 권능과 힘에 의해 박살난 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대폭발과 함께 흔적도 없이 우주의 티끌로 사라질 것이다.

애초에 거기까지 갈 필요 없이 사내의 몸은 지금의 여파만으로 죽을 정도로 약해져 있었다. 지금은 두사람의 싸움으로 인근의 막대한 힘의 밀도가 그를 보호하고 있지만 그것마저 사라진다면 사내도 그 여파에 휩쓸려 죽을게 자명한 일이다.

"......끝났습니까"

하늘에서 소녀가 내려왔다.

은발의 아름다운 소녀는 인형같은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신이 있었다면 그녀의 외형은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다고 생각될만큼 아름다웠다. 어린 소녀의 모습을 넘어 성인이 된다면 미모만으로 경국지색(傾國之色)을 넘어 경성지색(傾星之色)이  장래성이 엿보였다. 하지만 무뚝뚝하고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얼굴은 그런 외모의 일부를 깍아내리고 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그녀의 눈에는 걱정이란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아, 왔어? 되도록이면 이렇게 죽는건 보여주기 싫었는데"


"배우자의 죽음을 지키는것도 아내의 의무입니다"

소녀는 조심스럽게 사내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피와 흙, 그리고 내장 조각으로 얼룩진 그의 얼굴을 조금이나마 깨끗하게 닦아준다.


별이 부서져 멸망해가는 순간이였으나 지금  사람의 시간은 아무도 방해하지 못한다.


"치료하면 안되겠습니까?"


"물리적인 상처가 아닌지라......놈의 의지가 깃들어서 쉽게 치료 못할거야. 그 전에  죽을거고"

어쩔 수 없는 죽음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죽음이 끝이 아니였다.

사내는 무한히 환생을 거듭할테고.

소녀는 무한한 수명이 있으니까.


"다음 생에 보자"

"네, 다음 생에 봅시다"


사내가 숨을 거두기 직전, 소녀는 그의 입술에 작별의 키스를 했다.


최흉의 대마왕은 그렇게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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