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남부도시 웰링턴
우리는 노을이 완전히 지기 전에 레어로 돌아왔다.
이든의 마법으로 옷을 입을 수 있지만 그래도 바다의 소금기나 모래가 잔뜩 들러붙은 상태라 그냥 보온마법만 받고 알몸으로 저택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욕실로 옮겨져 따끈한 욕탕에 몸을 뉘었다.
하아-좋다. 그나저나 하루 빨리 아이를 보고 싶어서 당장 유희를 떠나자니…참 이든 답다.
“이티아 님 팔을 들어주세요.”
메이도 정들었는데…그러고 보니 사용인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메이. 나 이제 황도로 가.”
“네?”
내 몸에 비누칠을 하던 손이 멈췄다.
“원래 한달쯤 뒤에 갈 생각이었는데 맘이 바뀌엇…메이?”
훌쩍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메이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훌쩍…그렇군요…”
“아니 메이, 울지 말고. 그래도 가끔씩 보러 올 테니까… 응?”
결국 욕탕에 있는 동안 메이를 달래줘야 했다.
나도 헤어지고 싶진 않지만 어쩔 수 없잖아. 메이를 데려갈 수도 없고…응?
문득 떠오른 생각을 이든에게 말했다.
“이든. 네가 유희를 떠나면 다른 사용인들은 어떡해?”
“음…보통은 그냥 레어에 남겨두고 유희를 가지. 고향에 돌려보내는 용도 있고.”
“넌 어떻게 할 거야?”
이든은 내 물음에 핵심을 단번에 꼬집어냈다.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네가 말하는 대로 할게.”
”난…데려가고 싶은 시녀가 있거든.”
사실 메이 말고 다른 사용인들은 어떻게 되는 상관 없었지만…
“그리고 다른 사용인들은 원하면 고향에 보내줬으면 좋겠어. 괜찮아?”
“물론. 어차피 대부분 인간이라 유희가 끝나면 다시 데려와야해.”
이든은 내 의견을 받아주었다.
그럼 메이에게도 설명을 해 줘야겠네.
“이든. 그럼 언제 갈거야?”
“난 최대한 빠르면 좋지만…내일 모래 어때?”
“나야 뭐. 챙길것도 없는데. 알았어.”
이틀이면 메이가 준비하는데 충분할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더 시간을 끌기도 그래서 알겠다고 하고 메이에게 갔다.
“메이! 세상에 아직까지 울고 있던거야?”
메이의 방에 가니 얼굴이 엉망이었다.
욕실에서 간신히 진정시켰는데 방에 가서 다시 울었나보다.
“흐끅, 흐끅…”
“메이. 진정하고. 울지마 좋은 소식이 있어.”
“훌쩍, 뭔가요…?”
아직 목소리가 돌아오진 않았지만 울음은 얼추 멎었다.
“메이 들어봐 우리 함께 있을 수 있어.”
“킁, 네?”
“이든이 유희를 가면서 사용인들에게 자유를 줬거든. 고향으로 가고 싶은사람은 가도 좋고, 계속 남고싶은사람은 그래도 좋고.”
“드, 드래곤 님이요?”
“응응. 그래서 혹시 너가 좋다면 나랑 함께 가지 않을래?”
“제가…이티아 님과요?”
“응, 난 제국 황도에 가서…말해도 될라나?”
“네?”
음…메이는 날 마법사로 알고 있을 텐데... 그냥 밝힐까?
“메이. 난 황도로 가서 창관을 열 거야.”
“그렇군요.”
“사실…말 안한게 있는데 나 마법사가 아니라 여신이야.”
“그렇군요.”
“어?”
읭? 뭐지? 왜이렇게 반응이 미적지근해?
세상에! 말도 안돼! 여신님이요? 장난하지 마세요! 까지는 아니더라도 와! 대단해요! 정도의 반응은 들을줄 알았는데…
“메이. 왜 이렇게 반응이 시원찮아? 알고 있었어?”
“당연하죠! 모르는 게 이상하다구요!”
아~ 알고 있었어?
“대체 언제부터?”
“평범한 여성이 이렇게 예쁠 리 없잖아요!”
“장난치지 말고.”
“장난 아니에요. 얼굴을 보자마자 사랑에 빠진것도 그렇고. 책에서 읽었던 미의 여신님과 너무 비슷해서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창관은…색욕의 여신의 전설은 유명하니까요.”
“…”
색욕의 여신의 전설이란 그냥 전대 이티아가 최초로 창녀란 직업을 정착시킨 이야기다.
사실 내가 창관을 여는것도 거기서 아이디어를 얻었지.
“으흠 흠! 그러면 말이 편하겠네. 난 예비 미와 색욕의 신 이티아야. 섹스를 통해 신력이 얻고 신격을 얻어야 해. 그래서 내가 창관을 열려고 하는데…따라와 주겠어?”
“제가 뭘…할 수 있을까요? 저도 창녀처럼 몸을 팔아야 하나요?”
“네가 싫다면 당연히 안해도 돼. 아니 오히려 너한텐 매니저를 맡기고 싶어.”
“매니…저요?”
“응. 내 전속 비서처럼 내 스캐줄을 관리하고 옷차림이라든가 목욕시중이라던가…”
“…보통 비서가 목욕시중까지 드나요?”
“어쨌든! 내 거의 모든 것을 케어해 줘야 하니까. 특히나 목욕 후 메이의 마사지가 없으면 개운한 느낌이 들지 않는걸?”
메이의 특기라 할 수 있는 마사지는 정말 돈 주고 받아야 할 정도로 뛰어나다.
“그래서…같이 갈 거지?”
“당연하죠! 정말 고마워요. 이티아 님 없이 어떻게 살아야 하나 걱정했는데…”
“에이, 아냐. 출발은 내일 모레니까 그때까지 준비하면 돼.”
“네? 내일 모레요?”
“응. 혹시 시간 부족해?”
역시 여자의 짐을 싸는데 이틀은 너무 모자란 시간일까?
“저는 괜찮은데, 이티아 님은요! 짐 다 싸놓으셧어요?”
“나? 아니? 그냥 편한 여행복만 준비했는데?”
“하아…그럴 줄 알았어요. 이티아 님것까지 챙기려면 시간이 조금 모자랄 거 같은데…”
“나는 괜찮아!”
“제가 안 괜찮아요! 여기 예쁜 옷이 얼마나 많은데 옷이라도 좀 챙겨갈게요.”
어차피 이든이 같이 가니까 옷이야 사면 되지만…저렇게 완강하니 그냥 마음대로 하게 두었다.
“그럼 내일 모래 가니까 잘 쉬어 둬.”
“네. 맡겨두세요.”
이로써 마음의 짐도 덜었다.
창관의 매니저는 원래 생각하고 있던게 아니었지만 막상 메이에게 시키고 보니 창관에서 일할 신관들을 관리할 개인 매니저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일단 그건 그때가서 생각해야지.
그 뒤로 나는 저택 여기저기를 돌며 사용인들과 작별인사를 했다.
요리사도 데려갈까 했는데 여동생이 혼자 살고있대서 그냥 포기했다.
***
우리는 이제 출발하기 위해 레어 앞 공터에 모여있엇다.
“짐은 다 쌌어?”
“내가 가져갈 게 뭐가 있다고. 메이가 다 준비했어.”
“메이는 어디있어?”
“저, 저! 여기 있습니다!”
이든은 그리 무서운 주인이 아닌데 메이는 군기가 빡 들어가 있다.
안 그래도 주종관계라는 수직적 관계인데 그 주인이 아르고니아에 단 한명있는 드래곤이다.
나야 이든과 수평적인(어디까지나 이티아 생각)관계를 맺고 있어 딱히 위압같은게 느껴지지도 않지만 메이는 또 다르겠지.
“메이 짐 이리 줘. 이든이 아공간에 넣어준데.”
“네, 넷!”
정말 바리바리 싸들고 왔네. 거대한 가죽 가방 두개분량의 짐을 이든에게 넘겨주었다.
“이티아, 내가 준 아티팩트는 다 챙겼어?”
“응. 네가 준 아공간 아티팩트에 다 넣어놨어.”
짤랑짤랑 하고 작은 주머니 모양의 아티팩트를 보여줬다.
“그래. 그거 잘 챙겨놔 비싼거니까.”
“비싼거야?”
“아티팩트 자체가 다 비싸지 뭐. 아공간은 난이도가 높은 마법이라 더 가치가 있을 뿐이야.”
“오옹~”
내 것은 작은 주머니처럼 생긴 아티팩트라 핸드백처럼 매고 다녀야했지만 이든은 마법으로 공간을 생성해서 그 안에 짐들을 그냥 넣고 공간을 지우면 끝이었다.
“다 된거야? 신기하네.”
“응. 이티아도 마법에 관심 있어?”
“당연하지.”
“그럼 나한테 마법 배워볼래?”
옆에 있던 메이의 눈이 휘동그래지는게 보였다.
드래곤이 마법스승을 자처하다니 마법사들이 들었다면 눈이 뒤집힐 만한 소리였지만 아쉽게도 나한텐 소용 없었다.
“나 마법 못써. 신계에 있을 때 마법 못쓴다고 선고받았어.”
나 뿐만 아니라 비셴테나 레피오스도 못쓴다.
신들 전체가 다 못쓰는 건 아니라는데…뭐 우리한테는 신력이 있으니 상관 없지만.
“준비 다 했으면 이제 출발하자. 날아서 갈 거지?”
“응. 제국 남부까지만 날아서 가자. 밧줄 챙겨왔지? 내 몸에 묶어.”
그렇게 말하고 이든은 순식간에 드래곤 모습으로 돌아갔다.
나는 침착하게 내 몸에 밧줄을 단단히 고정했고, 멍하니 서있는 메이에게도 밧줄을 묶어주었다.
“어…어? 이티아 님?”
메이는 설마 하는 표정으로 내게 설명을 요구했고, 나는 답해주었다.
“이든이 드래곤 모습으로 변해서 타고 갈거야. 그래도 한 삼일? 이틀? 정도 걸리려나.”
“허억! 드래곤 님 등에 올라탄다고요? 그런 불경스러운…”
“뭐 어때.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드래곤 라이딩을 해 보겠어?”
“으, 으으…”
이렇게 말했는데도 아직 안절부절 못하는 메이를 잡아끌고 이든에게 다가갔다.
“나랑 메이좀 올려줘. 그리고 보온마법도 부탁해.”
“크흥. 내 팔 밟고 올라와.”
엎드린 상태에서 팔을 우리쪽으로 뻗어 오르막길을 만들어 주었다.
이러고 보니 비행기 타는 것 같네.
나는 심히 부담스러워하는 메이를 데리고 이든의 등에 안착했다.
거대한 등판에 달린 돌기에 밧줄을 꽉 묶자 전처럼 밧줄이 알아서 고정되었다.
물론 자세는…대롱대롱 매달린 것 같지만. 나중에 안장이라도 만들어야 하나?
“그럼 출발할게!”
후우웅!
이든이 땅을 박차고 날아오르자 격한 부유감이 몸을 감쌌다.
비행기처럼 안정감이 있진 않지만 이렇게 하늘에서 풍경을 바라보는 것도 꽤 운치가 있었다.
…물론 한 2시간 정도만.
“우읍…욱…”
“이티아 님? 이티아 님!”
“으에…메이 멀미약…아니 수면제 같은건 우븝…없어?”
“있긴 한데…드래곤 님이 아공간에 넣으셔서…”
“아으…일단 잠깐만 멈춰봐. 조금만 쉬었다 가자…”
나는 치밀어 오르는 토기를 간신히 억누르며 이든의 등짝(?)을 팡팡 쳤다.
“이티아? 왜그래?”
“웁…으에…”
도저히 말을 할 상황이 아니라서 메이에게 손짓을 하자 메이는 어떻게든 상황을 설명하려 애를 썻다.
다행히 이든은 등 뒤에 상황을 얼추 알고 있었는지 곧장 육지로 착륙했다.
파사사사사-
넓직한 공터가 아닌 숲속에 착륙하느라 나무가 여럿 넘어갔지만 나는 그런데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황급히 허리에 묶은 줄을 풀어내고 땅을 밟은 나는 한동안 헛구역질하느라 혼이 쏙 빠져나갔다.
“이티아 괜찮아?”
“이티아 님…”
분명 저번에 바다 갈 때는 멀쩡했는데…그때는 너무 짧게 타서 그랬나?
“하아…이제 좀 진정됐어. 이든 네 아공간에서 짐좀 꺼내줘. 수면제라도 먹고 자게.”
내 허약한 몸은 약도 잘 받았다.
약이라기보단 허브 추출물 이지만 들이키고 이든의 등(드래곤 상태)에 기대니 금새 잠이 들었다.
“…!...아!”
아으…시끄러워.
“이…! …세요!”
노이즈가 낀 것처럼 머리가 멍하다.
“으으…아으음…”
천천히 눈꺼풀을 움찔거리며 눈을 떳다.
주변은 어둑어둑 땅거미가 져 있었다.
“으음…여기 어디야?”
“여기는 제국 남부 도시 웰링턴 근처 숲이에요. 여기서 옷 갈아입고 들어가려고요.”
“제국 남부…벌써? 하루만에 도착한거야?”
“하루라뇨. 삼일 걸렸어요.”
삼일? 난 깬 기억이 없는데?
내가 의문을 표하자 이든이 덧붙였다.
“이티아는 삼일 내내 잤어. 한번도 안 깨고.”
“삼일 동안 잠만 잤다고?”
“응. 깨워도 안 일어나고 일어나면 또 멀미할 것 같아서 안 깨웠지.”
확실히…멀미를 심하게 하긴 했다.
빠른속도로 휙휙 지나가니 눈이 핑글팽글 돌고, 몸이 고정되어 있지 않아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바람에 머리가 어질어질 했으니…
“진짜 안장을 만들기 전까진 못 타겠다.”
이든에 등에 토하지 않은게 용할 정도였다.
“그럼 이제 어떻게 들어가?”
지금 있는 숲은 지대가 높아서 시선을 멀리 던지면 도시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도시를 빙 둘러 쌓은 높은 성벽이 꽤나 고풍스러워 보였다.
문제는 그 고풍스러운 성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는 것.
이든이 맘먹고 날면 못 들어갈 리 없지만 이제 유희를 시작하는데 드래곤 모습으로 들어갈 수는 없을테고…
“밤에는 못 들어가?”
“밤에는 통행증이 없으면 못 들어가요. 통행증은 도시에서 발급되고요.”
“뭐야. 그럼 그냥 야영해야하나?”
“아니 우리는 정당하게 들어갈 거야.”
“어떻게?”
“내 설정 벌써 잊었어? 난 상인이잖아.”
“상인이 뭐? 상인이면 성에 들어갈 수 있어?”
“그건 아니지만 내가 가지고 온게 있잖아.”
“뭐…아아!”
생각났다. 흑해 물고기!
“근데 그거가지고 들어갈 수 있어?”
“바다 물고기를 판다고 하면 영주가 버선발로 튀어나올걸?”
“근데 그걸 여기다 팔게? 가격이야 네 맘대로지만 차라리 황도에서 파는게 어때?”
“물론 많이는 안 팔거야. 신선하게 보관하고 있으니 그냥 맛만 보여주려고. 네 친구를 찾는동안 머물곳도 필요할 테니 교섭하는 동안 영주 성에서 지내자.”
“그거 좋다! 그럼 난 용병으로 할까? 자유롭게 돌아다니려면 그게 좋을 거 같아.”
“음…그래.”
왠지 이든이 탐탁치 않아 하는 것 같지만 뭐 어때.
나는 대충 용병들이 입을 만한 얇은 가죽갑옷과 재킷, 검정색 스타킹에 반바지를 입었다.
이든은 상인처럼 각종 금품을 덕지덕지 치장했고, 메이도 상단의 직원처럼 깔끔하게 차려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