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도둑잡기
욕실에서 나와 탈의실에 도착한 나는 지금 곤란을 겪고 있다.
“무슨 옷이…다…”
살면서 여자 옷을 단 한 번도 스스로 입어본 적이 없었다.
신계에 있을 때 입은 옷은 구멍난 곳에 손, 발, 머리만 집어넣으면 되는 옷이었기에 여기도 비슷한 옷차림일줄 알았더니…여기 옷장에 있는 여성의 옷은 진짜 하나같이 다 고풍스러운 귀족 아가씨들이 입을 법한 드레스들 뿐이었다.
차라리 한국처럼 바지입고, 셔츠입고 하면 될 것을 온갖 속옷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숄까지 입는 방법도 각양각색 종류도 수십가지라 어떻게 손대야 할지 막막했다.
일단 간단한 실크 속옷을 입고 뭘 더 입어야 하나 고민하는데 이든이 뿅! 하고 나타났다.
“이거 어떻게 입는지 모르겠…뭐야 언제 다 입었어?”
“나는 마법으로 입을 수 있어. 도와줄까?“
“그런 마법도 있어? 도와줘.”
“그래.”
마법이면 막 슝슝 쏘고 쾅펑 터지는 것만 있는게 아니라 저렇게 생활적인 마법도 굉장히 많았다.
이든처럼 나도 마법으로 옷을 입혀주겠지 하며 멀뚱멀뚱 서 있는데 이든이 옷장을 뒤지더니 고급스러우면서 가벼운 느낌이 드는 크림색의 옷을 들고 왔다.
“…?”
저걸 입혀주겠단 건가? 그래도 딱히 불편해 보이진 않으니 만족했다.
그런데 이놈이 마법은 안쓰고 직접 옷을 입혀주는게 아닌가!
“뭐해? 마법 안써?”
“아깝게 시리. 내가 직접 입혀주고 싶었어. 안돼?”
“…그래..네 맘대로 해라.”
저 큰 강아지처럼 똘망똘망한 눈으로 바라보면 어쩔 수가 없다.
그리고 이왕 입는거 어떻게 입는지 알아야 하기 때문에 그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혹시라도 눈치없이 옷 입히는 도중 여기저기 터치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나름 신사적인 종족이라 그런지 그런 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는 뭐…서로 장난치듯 이런 저런 대화를 하며 식당으로 향했다.
“우와아! 이게 다 뭐야?”
정말 중세 귀족의 식탁처럼 긴 식탁 위에 빈 자리 하나 없이 온갖 산해진미로 꽉꽉 차 있었다.
우와 저걸 어떻게 다 먹지? 아니 그 전에 손도 안 닿는데 그냥 눈으로 감상하는 건가?
“오늘은 특별히 힘 좀 썻지.”
“힘 좀 쓴김에 기둥뿌리까지 뽑히겠다.”
“드래곤의 레어인데 이정도로 기둥 뿌리가 뽑히면 안되지.”
“근데…다 먹을 수 있어? 종류별로 한입씩만 먹어도 다 못먹겠다.”
“드래곤인데 설마 다 못먹을까봐? 모자라면 사냥좀 다녀오면 돼.”
맞아 너 드래곤이었지. 너무 친근하게 굴어서 까먹었다.
“밥상앞에서 너무 떠들었다. 빨리 먹자. 또 배에서 꼬르륵 소리 날 것 같아.”
슬슬 허기가 지다 못해 위가 아프다. 뇌에서도 빨리 눈앞에 펼쳐진 진수성찬을 먹으라고 성화다.
“념념념”
“…”
“오물우물우물”
“…”
“옴뇸뇸”
“이티아? 천천히 좀 먹어. 체하겠다.”
“암냠냠냠”
돰뱀이 뭐라 한 것 같지만 별로 중요한 말은 아닌 것 같으니 그냥 무시하고 먹는것에 집중했다.
워낙 종류가 많아 한입씩만 맛보는데도 아직 반도 못 먹었다.
그리고 내 손에 닿지 않는 음식은 어떻게 먹어야 하나 했는데 벽에 조용히 서 있던 사용인(종족을 모르겠다.)들이 직접 접시를 하나하나 내 앞에 가져다 두고 내가 한번 맛본 음식은 다시 뒤로 가져갔다.
돰뱀이 잘 훈련 시켰는지 내 표정을 보고 맛있다고 생각한 것은 조금 거리를 두었을 뿐 멀리 가져가진 않았다.
“이티아. 나랑 결혼하자.”
급히먹다가는 체 할 수도 있기에 중간중간 글라스 담간 와인도 한두모금 마셨다.
여기는 술도 맛있구나?
돰뱀의 취향인지 아니면 드래곤들이 다 그런지는 몰라도 식탁에 올려진 음식 대부분이 육류였다.
간혹 어류나 조류도 있긴 했지만 요점은 고기가 많다는 것 이었다.
훌륭해! 내가 딱히 가려먹진 않지만 그래도 사람이라면...채식주의자가 아닌 이상 고기에 먼저 손이 가는건 어쩔 수 없지?
“이티아? 나랑 결혼해줘.”
개자스…아니 돰뱀자슥이 기껏 무시하고 모른척 해 줬더니 기어코 쐐기를 박았다.
“우물우물…히어(싫어)”
“!!!!”
내겐 원대한 계획이 있다. 그리고 그 계획을 이루기 위해선 여기저기 쏘다녀야 하는데 이놈 하는 짓거릴 보니 곱게 안 놔줄 것 같아서 단칼에 거절했다.
근데 너 왜 충격받은 얼굴이냐? 상처받은 얼굴이 아니라?
돰뱀…이든은 내가 단칼에 거절할 줄 몰랐는지 적잖게 당황한 모습이었다.
설마 쩨쩨하게 먹는걸 빼앗지는 않겠지?
전보다 더 빠르게 씹고 삼키기를 반복할 때 이든은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물어왔다.
“왜…왜? 이티아도 처음이었잖아.”
“으물…꿀꺽.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는 법이지.
처음은 특별하긴 해도 소중하진 않아.”
“어…어떻게 그럴수가…이티아도 기분 좋았잖아!”
“응. 기분이야 좋았지. 근데 그거랑 너랑 결혼하는거랑 뭔 상관인데?”
“그…그치만…원래 드래곤은 처음 만난 짝과 이어지는 게 보통…”
“진짜? 그럼 드래곤은 처음 만난 짝이 하루아침에 죽어버리면 평생 독신으로 살아?”
“그…그건 아니지만…그래도 보통은 혼자 살지?”
“너처럼 젊은 드래곤도? 만난지 얼마 안된 사이에 헤어져도?”
“나랑 헤어질거야?”
예리하게 내 말속에 담긴 뜻을 알아차린 이든이 울먹거리는 눈으로 쳐다본다.
안됬지만 아가야, 미인계는 안 통한 단다.
“응.”
“왜…? 내가 그렇게 싫어?”
“싫진 않지?”
“근데 왜?”
“…”
갑자기 말문이 턱 막혔다. 얜 왜 이렇게 꼬치꼬치 캐묻는 거람?
대화하느라 입이 놀고있자 배에선 다시 아우성을 쳤다. 빨리 대화를 끝내고 밥을 먹으라고.
“난 신력 모아야 해.”
“얼마나?”
“음…신격을 회복할 만큼?”
“지금 신 아니야?”
“아직 예비 신이야. 그래서 권능도 제대로 조절 못하고 신전도, 신관도 없지. 그래서 신력을 모으려고 아르고니아로 내려 온 거야.”
“그렇구나…그럼 신력은 어떻게 모아?”
“너 지금 나 취조하니?”
“빨리이 내가 도와줄 수도 있잖아?”
맞는 말이지…사실 아까전에 확인해놓고 배고파서 헛것이 보이는가 싶었다.
[신력이 500 증가되었습니다.총 신력은 16222입니다.]
곰곰히 세어보니 이든은 나한테 입으로 한번 기승위로 한번 후배위로 한번 총 세번 사정을 했다. 그리고 욕탕에서도…자위를 했나 보네. 그래서 총 1501의 신력이 들어와 있었다.
예비 신인 레피오스와 비셴테가 100정도 주었으니 드래곤인 이든은 한번 사정할 때 마다 500이나 주는 가 보다.
역시 드래곤…솔직히 말해서 얘만 잡고 쥐어짜도 신격은 금방 회복할 수 있지 않나 싶다.
“섹스.”
하지만 난 한 놈한테 매여 있을 생각은 없었다. 매일 밥만 먹을 순 없잖아?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거.
“섹스? 그럼 이티아도 나랑 섹스해서 신력을 얻었어?”
“음 한번 할 때마다 500씩 들어와.”
“그럼 더욱 나랑 같이 살아야 되는 거 아냐?”
“난 굳이 내가 혼자 몸 굴려서 신력을 모을 생각이 없어.”
요즘 누가 발로뛰냐? 아랫사람을 굴려야지.
“아르고니아 전역에 내 신전을 짓고 신력을 빨아먹어야지. 그걸 생각해서라도 네 레어에만 박혀 있을 순 없어. 그리고...같은 개체와 여러 번 섹스하면 들어오는 신력이 점점 줄어.”
물론 마지막 말은 거짓말이다. 그런거 없다.
하지만 왠지 이놈이라면 자기랑만 섹스하고 여기저기 신전만 짓자고 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거짓말이지.
좋아! 합리화 완료! 사실 그냥 잡아떼도 이든이 자신에게 뭐라 할 순 없었겠지만 그녀는 그래도 이든과 관계를 끊을 생각은 없었다.
이러나 저러나 피그맨에게서 구해지기도 했고, 이런 진수성찬을 차려주기도 했고.
섹스도 기분 좋았고, 신력도 많이 주고…뭐야? 얘 왜이리 착해? 게다가 드레곤이니 짱짱 세지, 레어에 돈도 어마어마하게 쌓여 있을게 분명했다.
집도 잘 살고 생긴것도…드래곤답게 타고난 미형이니 눈이 돌아갈 만한 신랑감이긴 하네.
괜히 내가 천하의 썅x 같잖아? 이런 순진한 놈 마음가지고 장난이나 치는…
괜시리 이든이 가여워졌다.
쯧쯧 불쌍한 놈.
어쩌다 매료에 걸려서…딱히 이든에게 매일 생각은 없지만 그의 마음을 외면할 생각 또한 없다. 어떻게 할까…
‘’후…조금만 시간을 줘. 생각해 볼게.”
물론 남을지 말지를 생각하는게 아니라 어떻게 그의 마음에 보답을 해줄까 하는 생각이다.
완전 나쁜 년 처럼 나몰라라 하고 가버리기엔 내가 너무 착했던 것 같다.
이든도 내가 진지하게 고민해보겠다고 하자 더 이상의 구애는 하지 않았다.
당분간 이든의 레어에 눌러살면서 신력도 좀 빨아먹고 해야지.
레피오스처럼 착한 호구가 될 생각은 없으니까. 그래도 빨아먹을 건 빨아먹을 생각이었다.
식사도 얼추 끝나가고 이든은 내 생각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싶은지 더욱 살가워졌다.
“이티아. 밥 다 먹고 나랑 보물들 보러가지 않을래?”
“보물들? 네가 모은거?”
“응. 내가 모은것들 뿐 아니라 아버지가 아르고니아에 살 때 모으신 것들도 있어. 네가 원한다면 줄 수도 있어.”
그 말에 뒤에 기립해 있던 사용인들이 미약하게 동요했다.
“그래도 돼? 보물이잖아.”
“괜찮아. 내겐 이티아 너만큼의 보…”
“그만. 거기까지. 내가 먹은걸 토해내게 하고 싶지 않으면 더 이상 말하지 마. 아니 그보다. 대체 그 말투는 어디서 배운 거야?”
“제국의 귀족들은 다들 이런 말투를 하던걸?”
“아무래도 황도에 가는 계획은 좀 늦출 필요가 있을 것 같아. 그런 말투로 청혼을 받는 귀족 아가씨들이 불쌍해.”
“…그리고 우리 아버지가 어머니께 청혼할 때에도 쓰던 말투야.”
“…”
저런 어쩐지 고상하고 기품 넘치더라.
“그 말을 먼저 해야지 못된 도마뱀아. 너 땜에 나만 나쁜 년 됐잖아!”
앞으로 제국 귀족들 따먹을 일이 많을 것 같은데 그때마다 저 버터바른 말투를 들어면 이든의 아버지가 생각이 날 것 같아 무섭다.
여차저차 해서 지금 우리는 보물전에 도착했다.
역시 드래곤의 보물창고는 이래야지! 싶을 정도로 번쩍번쩍한 것들이 무더기로 쌓여있는 모습에 눈이 아플 지경이다.
“어때? 여기가 내 보물창고야. 여기서 금화는 그냥 먼지 같은 거지. 벽면을 보면 무려 3000년 전 드워프 장인이 만든 전설의 검도 있고…”
이 검이 이렇고, 저 방패가 저렇고, 이 예술품이 어떻고…마치 관심있는 여자애에게 자신이 덕질하는 부분을 알려주는 덕후같다.
절대 내가 지구에 있을 때 이런 적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산더미처럼 쌓여있네. 이게 다 얼마야?”
“보물들의 가치를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음…다 팔면 제국의 반 정도는 살 수 있지 않을까?”
“굉장하네. 근데 이런건 왜 모으는 거야? 묵혔다 비싸게 팔려고?”
“음 그건 습성같은거야. 까마귀가 반짝이는 것을 좋아하듯 드래곤들은 비싼거 화려한 거에 사족을못쓰지. 인간들도 각종 취미가 있잖아? 드래곤들도 각자 성향에 따라 모으는 보물들이 조금씩 달라져. 나 같은 경우는 아티팩트를 좋아하지.“
“그 마법 부여된 거?”
“응 간단한 마법이 부여된 것부터 마법사들이 심혈을 기울인 역작까지. 그래봐야 내 마법엔 명함도 못 내밀지만 그냥 보고있으면 기분이 좋아.”
관심있는 주제에 대한 대화는 재미있지. 그런의미에서 나도 열심히 대꾸해주고 싶으나 난 마법에 관해선 완전히 문외한이라 반응도 심심하게 나올 수 밖에 없다.
“역시 이티아에겐 별로 재미가 없구나?”
“응. 아무래도 난 마법을 다루지 못하니까. 권능 같은 거면 몰라도. 별로 흥미있진 않네.”
“그렇다면 여기 이걸 봐! 이건 5급의 배리어가 들어간 아티팩트인데, 목에 걸고 배리어! 라고 외치면 자동으로 배리어가 쳐져.”
그러니까 피규어에 대고 팬티보여줘! 하면 팬티를 보여준다고? 미안하지만 이 정도 소리로밖엔 안 들린다.
그러자 이든은 내게 시범이라도 보이듯이 직접 목에 아티팩트를 걸어주었다.
“자. 이제 네가 직접 말해봐.”
“배리어.”
후웅! 이든이 쓸 때는 안보였지만 지금은 뭔가 불투명한 막 같은게 원형으로 내 몸전체를 감싸듯 펼쳐져있다.
이게 배리어구나? 이든은 능력을 증명하듯 통통 건드려 보았으나 배리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잠깐 놀려줄까?
이든이 배리어 안으로 침입하지 못하는 것을 깨닫고 일부러 옷을 살짝 들춰 팬티가 슬쩍 보이게끔 하였다. 덤으로 한쪽 어깨끈도 내렸다.
“!!!”
“어때? 이래도 들어올 수 없어?”
이래도? 이래도? 하듯이 팬티도 슬쩍 내려 허벅지에 걸치게 하고 옷을 살짝 더 올려 배꼽까지 보이도록 노출했다.
“아! 마법은 금지야. 마법 쓰지 말고 배리어를 깨뜨리면 마음대로 하게 해.줄.게♥”
요사스런 눈웃음은 서비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