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8화 〉49화, 엘프조련. (48/70)



〈 48화 〉49화, 엘프조련.

공부를 위해 인간 세상에 나온 엘프가 인간의 교활함에 속아 노예가 되는 것은 흔한 일에 속한다.
그러나 어차피 엘프는 장수의 종족 천년을 우습게 살아가는 그들에게 잠깐의 노예 생활은 오히려 인간 군상들을 공부하는 좋은 시간이 된다.
하여 여기 있는 엘프 에레니스 또한 잠시의 유희로 인간들의 노예가 되어 흥미진진한 여행길에 올랐다.
뭐 사실 인간들의 법을  모른 그녀가 행한 무전취식과 난동이 문제가 되어 이런 상황이  것이지만, 엘프에게 주먹을 휘두를 수 없는 인간들이 그녀를 노예로 팔아 버렸다.
그러나 엘프라는 고급화 전략으로 팔리지 않는 애물단지라 노예 상단에서도 골머리를 쌓고 있던 그녀였는데 이번에 도적단에서 괜찮은 가격에 팔리게 된 것이다.
도적단 생활, 그것은 엘프가 경험해 보지 못한 값진 공부였다.
인간 도적단은 법에 어긋나는 생활을 하며 야만적인 인간들이 모여있는 그야말로 무법천지의 인간 군상이 모두 모여있는 총본산이나 마찬가지다.
이곳에서 자신이 얼마간 생활하며 적절한 순간 몸을  자신의 엘프 마을로 돌아간다면 엘프들에게 더 다양한 지식을 공유할  있다는 생각에 그녀는 속으로 들떠 있었다.
인간들은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지 못한다. 그것이 무기가 되어 오만함을 유지하고 자신의 상관이라 땍땍거리는 붉은 머리 여성의 명령에도 콧방귀만 뀌며 나름의 생활을 유지했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구에엑!!!”

강렬한 충격, 이것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강렬한 충격이다.
내장이 다 입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이 충격에 무릎이 절로 꿇려졌다.
게워낼 것도 없어서 위액만 역류하는 상황에 지금 그녀는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몰라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뒤진다. 말만 하는  아니야. 진짜 물리적으로 뒤지기 전에 말 곱게 들어라.”

귓가에 아른거리는 저 여자의 목소리, 정령들이 전해주는 내용에 따르면 이 세상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고 한다.
정령들이 힘을 쓰려 해도 다른 세상의 존재이기에 자신들의 힘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전해오고 있다.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만 하며 정령들은 옆에서 지금 상황을 보며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욱…. 제길!’

그리고 그때부터 그녀의 시련과도 같은 고생길이 시작 되었다.

*****

“말로 하니까 점점 뒤처지지? 당장 달리지 못해! 체력 단련을 우습게 보냐!!!”

카밀라에게 반쯤 강제로 에레니스를 떠맡게 된 뒤 지크리스와 그녀 두 사람을 함께 훈련 시키며 엘프 조련을 시작했다.
지크리스야 워낙 체력이 좋고 실력도 좋아서 따로 단련시킬 필요도 없지만, 아직 도적단에 익숙해지지도 않은 그녀를 혼자 두기에도 좀 그렇게 하니 같이 단련에 임하고 있다.
이 에레니스라는 엘프 여성은 체력은 나쁘지 않았다. 순발력도 좋고 달리는 속도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지구력은 정말 형편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그녀는 단거리에 능하지만, 장거리에는 완전 젬병이라 할 수 있다.
훈련장 달리기가 다섯 바퀴 이르기까지는 잘만 뛰더니 여섯 바퀴가 지나가면서 점점 속도가 다녀지기 시작했다.
일곱 바퀴에 점점 입을 벌리고 거친 숨을 쉬더니 여덟 바퀴가 되자 저 멀리 뒤에서 천천히 달려오고 있다.
내 경우 아침 훈련장 스무 바퀴는 기본이고  상태에 따라 두세 바퀴를 더 뛰기도 하며 지크리스의 경우는 서른 바퀴를 뛰어도 전혀 지치지 않는 데 반해 그녀의 지구력은 정말 형편없었다.
열 바퀴를 돈  그녀가 열 바퀴를 돌 때까지 훈련장 중앙에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터덜터덜 걷는 것인지 뛰는 건지 모를 중간 단계의 속도로  바퀴를 왕복한 그녀는 숨이 넘어갈 듯 헉헉거리며 엘프답지 않게 땀을 흠뻑 흘리고 있었다.
정령의 도움을 받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기에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본인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못 해?”

“하아…. 하아…. 다…. 닥쳐!”

“또 입 함부로 놀리다가 처맞으려고 그러나?”

“윽….”

첫 타격의 공포가 뇌리에 깊이 박혀 있는지 그녀는 가끔 입을 내밀거나 독설을 날리긴 해도 지시를 불이행하지는 않게 되었다.
솔직히 스틸베어 사냥 때 그녀가 조금만 더 협조하는 모습을 보였으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자기 생각만 하면서 오만하게 군 대가를 받는 것이니 미안한 감정은 거의 없었다.
조금만  고분고분하게 굴어 준다면 당장이라도 날 선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텐데 아쉬울 따름이다.
도적단 생활은 그 누구 하나 다르지 않게 힘든 생활이다. 이런 생활 속에서 목숨과 등을 맡길 수 있는 상대는 누구도 아닌 같이 일하는 단원, 그중에서도  팀에 속한 인원들뿐이다.
그런데 매사에 오만하고 말을 듣지도 않는 사람이  있다면 내 생명이 위태로운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한 꼴이 생기기 전에 이 오만함을 어떻게 해서는 꺾어놓아야 한다.
도적단을 위해서가 아니다. 여성 단원, 그리고 내 생명을 지키기 위함이다.
지금 정령의 힘을 빌리지 말라고 지시한 것도 다 그녀의 오만한 자존심을 깎아내려는 고육지책이었다.
너 혼자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지시키려는 작전이다.

“그렇게나 천한 인간, 무식한 인간, 야만적인 인간, 노래를 부르더니 정작 네가 인간 이하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네?”

“크윽….”

“아니면 혹시 그건가? 인간들에게 엘프가 가진 가련함을 보여주겠다. 뭐 그거? 엘프는 이렇게 약한 존재이니 인간들이여 우릴 보호해라. 이러는 거야? 약한 것도 자랑이다. 그치?”

“입 닥쳐! 닥치라고!!!”

한껏 그녀를 조롱하니 역시나 독기가 덜 빠진 그녀가 정령의 도움을 받아 주먹을 휘둘러 왔다.
무기를 들지 않고 훈련에 임하는 훈련장이다.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무기는 자신의 몸뿐이다.
그러나 눈에 다 보였다. 정령들의 도움을 받는다 해도 그 정령들이 나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니 자신을 강화하는 선에서 그 도움은 끝이다.
어차피 그녀는 궁술을 연마한 원거리 특화의 엘프다. 원거리에서 적의 목숨을 취하는 것은 잘 할지라도  거리에서 싸우는 근접전에서 큰 효율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것은 그녀와 같이 훈련하면서 내가 깨우친 사항이다.
반면에  경우는 단검을 주로 사용하기에  근접전에 너무도 익숙하다.
카밀라에게도 훈련을 받았고 나 자신도 충분히 훈련했으며 지크리스에게도 부끄럽지만, 지도를 받았다.
무작정 달려들어 주먹을 휘두르는 것을 가볍게 피해준 뒤 그녀의 발을 걸어 앞으로 중심을 쏠리게 했다.

“헉!!!”

기우뚱 한 그녀가 앞으로 엎어질 듯하다가 곡예를 하듯 한 손으로 땅을 박차더니 공중에서 한 바퀴 돌아 자리에 꼿꼿이 섰다. 정령의 도움을 받고 몸도 가벼우니 중심을 찾는 것이 빨랐다.

“이 인간 년!!!”

그러나  번 학습했는데도 그녀는 무작정 주먹을 휘둘러 왔다.
하품이 나올 정도로 그 공격의 궤도가 눈에 훤히 보인다.
주먹질을 두어  피한  반격할 준비를 했다. 주먹을 쥐지는 않고 손바닥을 강하게 쳐올렸다.
원래라면 아가리에 주먹을 꽂아 넣었을 테지만, 그래도 같은 여자인데 어떻게 얼굴을 때리겠는가.
손바닥으로 적당한 힘을 가해 그녀의 뺨을 후려갈겼다.

짜악!!!

“아악!!!”

아무래도 타격에는 약한 모양이다. 하긴 저리 빼빼 말랐고 인간에게 피해를 받지 않는다는 믿음으로 똘똘 뭉쳐 있었을 터이니 고통에 민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옆으로 꼬꾸라진 그녀는 한참을 볼을 잡고 눈물을 터트렸다.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진정할 때까지 기다렸다.

“인간 주제에 어째서! 어째서 엘프를 때릴 수 있는 거야! 인정 못 해. 못한다고!!! 이 불순물 같은 더러운 년!!!”

“입 털 시간 있으면 일어나서 덤벼, 찍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상대해  테니까.”

“찌…. 찍소리라고!!!”

“그래 쥐새끼 소리. 엎어져서 계집애답게 질질 짜기나 하고. 엘프들은 다 그래? 뭔 잘못을 해서 노예가 되었고 여기까지 흘러들어왔는지 내가 알 바 아닌데 단체에 소속이 되었으면 그 단체의 규칙은 깨트리지 말아야  거 아냐!”

“인간들의 규칙 따위 내가 알 바 아냐!!! 난 그냥 인간들의 삶을 경험해 보기 위해 온 거지 너희들 명령에 따르기 위해 온  아니라고! 네가 뭔데  공부를 이렇게 망치는 거야!”

“공부 좋아하네! 네가 싫은  팍팍 내면서 위에 군림하는 싸가지 없는 얼굴로 잘도 공부한다. 지껄이는구나.”

그녀의 멱살을 잡아 얼굴을 가까이 끌어왔다.

“아윽!”

“잘 들어. 온실 속에서 화초처럼 자란 모양인데 여긴 네가 살던 엘프 마을이 아니라고.  지금 도적단에 속한 거야. 네 처지도 이해 못 하는 머저리 같은 머리를 계속 달고 있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여기서 죽어 나가는 거야. 알았어!!!”

솔직히 사람을 이렇게 몰아 세우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 역시도 말이다.
그나마 블랙 기업의 말단 직원으로 일한 기억이 있어 그때 받은 한풀이를 한다는 생각으로 선배들의 가르침, 즉 갈굼이라는 것으로 사용해 보았다.
여기에 카밀라에게 배운 남을 갈구는 스킬까지 더해지니 환상의  환장 걸래 문 년이 탄생했다.
나도 내가 이렇게 남을 잘 털 수 있다는 것을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는데 새로운 일면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물론 에레니스를 털 때마다 기분은 참 좆같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면 나 역시 상처를 받는 기분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흐윽…. 어흑…. 시발!!!!!!”

그녀 역시 도적단 생활을 하면서 욕이 입에 붙어버리고 말았다.
엘프가 인간의 욕을 외치며 울부짖는 모습은 가히 보기 좋은 장면은 아니었다.
곱고 예쁘고 아름다운 얼굴이 일그러지고 그 앵두보다 어여쁜 입에서 쌍욕이 나오다니 말이다.
그녀에게 충분히 울 시간을 주며 잠시 쉴  뒤로 돌아보니 지크리스가 굳은 얼굴이 되어 있었다.

“왜 그래?”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 언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얼굴이 새파래진 것이 오늘따라  상태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지크리스의 몸 상태도 좋아 보이지 않고 에레니스도 지칠 때로 지쳐서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기로 하며 정리를  뒤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앞으로 저년을 어떻게 구워삶아야 할지 참으로 고민이다.

*****

XX XX XXXX 지크리스 일지

『훈련은 그리 어렵지 않다. 오늘 상관의 참모습을 알게  뜻깊은 날이다. 엘프를 갈구는  모습은 어찌나 매섭고 훌륭한지 같은 동성임에도 반할 것만 같았다. 엘프를 때릴 수 있는 존재인 다른 세상의 인간, 그쪽 세상 여성들은 다 저렇게 기가 센 것일까? 아니다. 같은 동기인 쥬린의 경우를 보면 그녀가 남다른 면목이 있어 보인다. 내일은 또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사뭇 기대가 크다. 지금까지 저렇게 거대한 사람은 겪어본 적이 없다. 그녀를 통해 내 내면의 무언가를 더욱 발전시키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휘하의 부하를 단번에 사로잡는 냉철한 지휘관, 적어도 지금 나에게는 그런 면모가 필요할 것이다. 배울 점이 차고 넘치는 분이다. 앞으로도 그녀를 잘 보필해야겠다.』

“흠….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까.”

지크리스는 오늘 있었던 일을 빠짐없이 일지에 기록해다.
기사단에 속해 있을 때는 하루도 빠짐없이 적었던 일이었지만, 노예가 되면서 잠시 적지 못하게 되었었다.
노예로 생활하던 때의 일은 천천히 정리하기로 마음먹고 일지를 적은 뒤에  곳에 살며시 올려 둔다.
지금은 아직 자신만의 공간이 없어 이루스의 방에 같이 기거하는 중이라 괜히 이런 거 적는다고 들키는 건 조금 모양이 팔린다고 생각한 것이다.

‘음…. 정말이지. 같은 여자가 저리 꼴리는 경우는 처음이란 말이야…. 이러다가 내 취향이 바뀌겠어. 사람 터는 기술이 장난이 아니네….’

강하고 서릿발 같은 눈, 그리고 입에서 흘러나오는 신랄한 독설들, 그리고 그 독설에 당한 엘프가 우는 모습은 참으로 구경하기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엘프를 때릴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었고 오늘 그녀는 참 살아오면서 보기 힘든 일을 눈앞에서 목격한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딸깍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 지크리스는 화들짝 놀라서 의자를 치우고 일어났다.
노크하지 않는다는 것은 방의 주인이 들어온다는 뜻이다. 방의 주인은 당연히 이루스 그녀 뿐이다.
문이 열리며 그녀의 모습이 보이자 지크리스는 왠지 긴장되는 기분이 들었다.
훈련 중에 보여준 그 모습이 아직 뇌리에 남아 그녀의 얼굴에 겹쳐져 보였기 때문이다.

“왜…. 그래? 놀라서.”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하…. 아무것도요.”

“싱겁기는…. 씻을까?”

“그, 그럴까요? 하하하….”

지크리스는 아마 한동안 이루스의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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