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48화, 신입 환영 잔치
엘프와 인간 사이에 이루어진 조약을 알기 위해서는 약 이천년이라는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 당시에는 엘프가 인간을 지배하던 시기였다. 인구의 수도 인간보다 월등히 많았으며 자연의 힘을 받아들여 마법을 다루는 엘프는 그야말로 전 세계의 지배자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러다 보니 오만해질 때로 오만해진 엘프들이 어려울 때 똘똘 뭉치는 인간의 습성을 너무 무시하고 큰 화를 당하게 되었다.
인간은 엘프를 제외한 아인들과 동맹을 하여 엘프를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사이가 나쁜 드워프는 말할 필요가 없었으며 소인족인 노움, 그리고 수가 적은 거인족 자이언트까지 합세하여 엘프와 일전을 펼쳐 그들을 숲으로 몰아넣었다.
이때 인간의 왕국, 아니 초대 인간 제국인 세큐레 제국의 황제가 연합의 장으로 추대되었다.
이 후, 엘프는 숲의 일족이라 불리며 인간과 서로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겠다는 불가침 조약을 맺은 뒤 다른 모든 종족과도 같은 조약을 맺게 된다.
이때 엘프와 인간, 그 외 모든 아인 종족들이 맺은 것이 이 조약이다.
다만 이 대 전쟁의 이후 노움족은 종족의 수가 턱없이 줄어들어 자신들만의 영토에 영구 방호벽을 세워 그 안에 기약 없는 잠적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자이언트 종족은 자신들의 영토 대부분이 파괴되어 아직도 척박한 곳에서 힘든 생활을 영위하는 중이다.
그나마 손재주가 뛰어난 드워프들은 산지에 자리를 잡아 거대한 대장간을 건설, 인간들과 상호호환 관계를 맺으며 나름의 세력을 구축해 나아갔다.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은 엘프였지만, 숲으로 빠르게 도주한 것이 꽤 큰 도움이 되어 지금은 예전의 영광은 아니어도 꽤 많은 과거의 유산들을 되찾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가장 큰 이득을 본 인간들은 엘프들이 가지고 있던 대부분 영토를 손에 넣고는 지금 그 어떠한 종족보다도 많은 수의 종족이 되었다.
다만 가장 먼저 세상에 만들어진 인간들의 제국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뿔뿔이 흩어져 수많은 왕국과 제국으로 나뉘게 되었다.
이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세큐레 제국 또한 점점 그 국력이 약해져 이제는 왕국이라 불리는 곳이 되었다.
이 세큐레 왕국이 바로 라이저 산맥 가까이 위치한 페이머스 도적단과 연계하는 왕국이라는 것이 아이러니할 뿐이다.
“크…. 으….”
장황하게 설명하긴 했지만, 결국 이 조약은 모두 이 세계에서 일어난 일이요. 그들 사이에서만 이루어진 그들의 조약이다.
조약의 이행은 모든 일에 중립을 표방하지만, 어디까지나 자연을 사랑하는 엘프와 더 친한 정령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인간들이 저주라고 칭하는 것은 인간의 눈에는 정령이라는 존재가 보이지 않기 땜문이다.
정령들은 이 세계 어디에라도 존재한다. 숲에도 산에도 강에도 들에도, 인간들의 세상 역시 정령들이 함께하고 있지만, 정령사로 전직한 인간이 아닌 한 정령을 볼 수 없기에 조약을 어겨서 생긴 불행은 조약의 저주라고만 생각한다.
실제로는 조약이 어겨지는 순간 그 주변에 있던 정령이 조약을 먼저 어긴 자에게 적절한 벌칙을 부과하는 것이다.
그 대상이 강하면 자기보다 상급의 정령을 부르고, 또 불러서 행해지기에 대상이 강하면 강할수록 조약 이행이 더디게 되는 문제가 있지만, 그 어디에서도 정령의 눈을 피해갈 수 없기에 어쨌든 조약은 이행된다.
그러니 지금 여기 문제가 하나 생겨났다. 방금 엘프가 인간에게 거하게 복부를 얻어맞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 인간이 조약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조약에 의해서만 상대에게 벌칙을 부과하는 정령들이 그 벌칙 이행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깜짝 놀란 정령들이 이 인간이 조약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미리 알려왔지만, 조약을 믿어 오만한 성격을 가지게 된 이 엘프가 대처를 너무 늦게 해버렸다.
그 결과가 바로 땅에서 숨을 몰아쉬며 고통스러워하는 에레니스의 모습이다.
엘프가 얻어맞았는데도 그 어떠한 조약의 저주가 일어나지 않자 깜짝 놀란 카밀라는 바로 이루스에게 다가가 그녀의 안부를 물었다.
“뭐, 뭐야?! 너 괜찮아?”
“괜찮아. 아무 문제 없어.”
“어떻게…. 아! 세상에…. 그러고 보니 넌…. 이 세상 사람이 아니구나. 그랬어….”
눈치 빠른 카밀라는 이게 어떻게 된 건지 빠르게 유추해 낼 수 있었다.
이루스는 이곳 세상 인간이 아니다. 즉 조약에서 벗어난 인간이란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이루스는 엘프를 때려도 그 어떠한 조약의 저주를 받지 않는다.
이는 저 엘프 역시 마찬가지로 이루스를 공격해도 된다는 뜻이지만, 일단 지금은 통쾌하니 그것까지는 생각지 않았다.
그리고 이때부터 이미 잘 조련이 되어 이루스에게 절대복종하는 지크리스를 그냥 두고 이루스가 엘프 에레니스를 집중적으로 마크하기에 이르렀다.
“꺄!!!”
명령을 내리는 카밀라를 향해 에레니스가 성난 얼굴로 이를 드러내자 득달같이 달려온 이루스가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 고개를 뒤로 꺾었다.
그리고는 귓가에 스산하게 속삭이며 그녀에게 으르렁거린다.
“어디서 이를 드러내? 죽고 싶어?”
“미, 미안하다….”
“반말해 정신 못 차리지?”
“미, 미안합…. 아악!!! 죄송합니다!!!”
눈물까지 흘리며 제대로 만난 임자에 에레니스는 철저하게 교육을 받는 중이었다.
원거리에서는 그 누구도 이길 수 없는 엘프였지만, 어디까지나 정령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이세계의 인간에게는 정령이 힘을 사용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손을 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 세계에 속하지 않은 이질적인 존재이기에 자신들이 손을 댔다간 이상 현상이 생길 수도 있기에 다들 쉬쉬하고 있었다.
결국, 그것은 에레니스가 자신의 힘으로 이루스의 마수를 벗어나야 한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정령의 힘을 빌리지 않는 엘프의 힘은 그저 반쪽짜리에 지나지 않는다.
마법을 사용할 때까지 자신들을 보호해주는 정령의 힘이 없다면, 화살을 집중해서 날릴 때까지 주변을 봐주는 정령의 힘이 없다면? 그야말로 공격을 할 수가 없다.
남은 것은 이루스의 손길에 철저하게 교육을 받는 일뿐이었다.
“뭐해! 공격해! 활을 쏘라고!”
“아, 알았다고!”
“시발 꼭 소리를 질러야 말을 듣지? 너 전투 끝나고 보자.”
“히, 흐윽…. 죄송해요….”
처음과 같이 도가 지나친 주먹을 휘두르지 않고 가끔 뒤통수를 친다거나 머리카락을 잡아채는 정도로도 이젠 에레니스가 고분고분 말을 들었다.
한번 매운맛을 단단히 보았더니 이젠 그 매운맛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듯 보인다.
다만 이를 드러내거나 눈을 치켜뜨는 행동은 자존심이 남아서 그런지 계속되었다.
오만한 말투 역시 맞을 때만 바뀌고 그 이외에는 계속 유지하고 있으니 꺾이지 않는 그 자존심도 참 대단했다.
“사냥은 이걸로 충분해 보이네. 슬슬 돌아들 가볼까?”
“튜테팀하고 미스틸팀 역시 사냥을 끝냈겠지?”
“그럴 거야. 지크리스하고 에레니스는 이루스 네가 인솔해, 남은 사람들은 내가 인솔해서 돌아갈게.”
“이제 이 년 나한테 아예 맡기려고?”
“그게 효율이 높잖아. 엘프를 때릴 수 있는 건 도적단에 단 둘뿐이다고.”
“둘?”
“쥬린, 그 아이도 거기서 넘어왔잖아. 그러니까 둘이지. 음…. 뭐 그 아이는 아직 교육 중이니 제대로 된 교육이 가능한 사람은 네가 유일하지만.”
“아…. 이해했어.”
조약에 해당하지 않은 사람, 즉 정효린, 쥬린 역시 그에 해당한다.
다만 그녀는 아직 교육 중인 예비 단원에 불과하니 보조 간부인 이루스와는 그 궤가 달랐다.
그렇기에 지금 당장 이 에레니스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이루스가 유일한 것이다.
“뭐해. 따라와.”
“윽…. 인간 따위가 감히….”
“좋게 말하니까 또 기어오르지?”
“윽…. 미…. 죄송…. 합…. 으으…. …다.”
“말 똑바로 해!”
“죄송합니다!!!”
“그래. 그래야 착한 아이지.”
“크흑…. 구, 굴욕이야…. 굴욕….”
엘프를 조련하는 이루스의 실력에 지크리스는 혀를 내둘렀다.
사람 보는 눈이 확실했던 지크리스, 그녀가 괜히 이루스에게 대들지 않은 것이 아니다.
상명하복이 투철한 기사라도 자기보다 실력도 뭣도 없는 자를 그냥 따를 이유가 없다.
은연중에 흘러나오는 이루스의 기세가 남다르지 않아 보여 알아서 기었던 것이 정답이 된 것이다.
‘잘못했으면 내 복부에 이루스의 주먹이 꽂혀 있었겠군.’
물론 그녀도 호락호락한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이곳은 어디까지나 도적단의 영역이고 자신은 혼자 이곳에 떨어져 있는 것이다.
괜한 일로 에레니스처럼 뻗대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인간과 엘프의 조약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은 본인의 힘뿐인데 이루스와 1대 1이라면 겨우겨우 이길 수는 있어 보이지만, 그다음에는 절대 불가능한 싸움이 이어질 것이다.
그러니 알아서 이루스에게 복종하며 처신을 잘 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에레니스가 처한 상황을 보며 자신이 바른 판단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근대 참…. 호쾌하게 잘 때렸는데 멍은 하나도 안 들었단 말이지…. 대단한데.’
이루스의 주먹에 맞은 에레니스의 복부는 매우 깨끗했다. 살짝 붉게 물들긴 했지만, 시간이 지났음에도 푸른 멍 자국은 생기지 않았다.
사냥한 스틸베어의 시체를 들고 돌아간 도적단의 아지트에는 삼삼오오 모여 있는 여 도적단원들과 그러한 이들을 모두 아우르고 있는 우르자인의 모습이 보였다.
카밀라와 이루스들이 도착하니 사냥한 스틸베어의 고기로 잔치가 시작 되엇다.
잡식인 스틸베어의 고기는 질기고 너무 딱딱했지만, 특유의 조리법이 존재하여 꽤 부드러운 고기로 변화한 스튜로 탈바꿈하여 모두에게 주어졌다.
스틸베어 스튜와 흑맥주로 이루어진 조촐하지만, 흥겨운 파티, 그 안에서 즐기지 못하고 있는 것은 새로이 합류한 사람들이었다.
술잔을 들고 어딘가로 향하는 이루스, 그녀는 잠시 걸어가다가 어딘가에 털썩 주저하지 않았다.
“헉…. 누…. 누구세요?”
“나? 기억 안 나니? 저번에 상단에서 널 살 때 나도 같이 있었는데.”
“아…. 그때 제가 정신이 없어서…. 지금 다시 알려 주시겠나요? 이번에는 잊어버리지 않을게요.”
“난 이우신, 지금은 이루스라고 불리고 있어. ㈜OOOO에서 일했었어”
“헉!!! 그, 그럼 혹시…. 당신도 지구에서!”
“그래…. 어찌 보면 내가 1호 납치 한국인이지 않을까? 여기 끌려온 지 한 석 달 되어 가고 있는 거 같아.”
“아!!! 저, 정말 반가워요! 전 끌려온 지 한 달 되었어요. 으으…. 저 여기 끌려와서 지금까지 혼자라고만 생각했는데! 허어어어엉!!!”
즐거운 잔치와 어울리지 않게 한쪽에서는 울음이 터져 나왔다.
다른 사람들은 그곳에 이루스가 있는 것을 보고 별 상관을 하지 않았다.
다른 신입들도 이곳에 익숙하게 만들어야 하니 저쪽은 이대로 두고 다른 사람들에게 몰려 들어가 이것저것 캐물으며 친분을 다지기에 바쁜 것이다.
이루스가 등을 쓰다듬어 주니 점점 안정된 정효린이 입을 열고 이루스와 안정적으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전 경기도의 OO에서 동내 파출소 여경으로 일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곳에서 게이트가 열렸고 함께 출동했던 선배들은 모두 괴물 같은 인간들에게 당해 무장이 해제되었고 전 용병이라는 사람들에게 납치당해 이렇게 이곳에 끌려 왔어요. 그 뒤에는 몸값이 높은 이 세계 미모가 뛰어난 노예로 전락했죠.”
“뭐…. 이쪽 세상에서는 우리 한국 여자들이 꽤 높은 미모로 취급되더라고. 거기에 이 세계에서 넘어왔다니 다들 군침을 꽤 흘렸을 거야. 그런데 용케 안 팔리고 여기까지 왔네?”
“그게…. 이 도적단에서 큰 금액을 제시할 거라고 절 끝까지 숨겨 두더라고요.”
“흠…. 역시 도적단하고 연결된 상단이라 그런지 편의를 봐주었네. 그 덕분에 네가 다른 이상한 곳에 끌려가지 않은 거야.”
“고, 고마워해야 하는 부분이죠?”
“전혀. 그보다 괜찮아? 제이슨이 널 겁탈했다던데?”
“아…. 네…. 저 첫 경험은 아니고 그…. 좀 잘해주셔서 생각보다 괜찮았달까…. 하하….”
“그래도 다행이네! 난 제이슨한테 당하고 처녀가 날아가서 한동안 우울증에 걸렸거든.”
“헉! 그럴 수가…. 그보다 저 스물한 살인데 그쪽은….”
“나 스물둘이야. 저쪽 기준으로”
“아! 언니! 앞으로 잘 좀 부탁해요. 언니! 저보다 여기 오래 계셨으니 앞으로 많이 가르쳐 줘요!”
“넌 미스틸 간부 소속이야. 가끔 만나서 술 한잔 할 수는 있겠지만, 나랑 같이 하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을 거야.”
“그래도요! 아아…. 정말 여기 혼자만 있는 기분이었는데…. 이제 좀 살 거 같네요. 같은 세상의 사람이 있으니까요.”
“저 미안한데. 너도 여기 넘어오면서 레벨 생겼지.”
“네! 능력도 생겼어요. 제 능력은”
“잠깐. 잠깐! 함부로 능력 말하지 마. 그거 네 생명을 살리는 최후의 무기야! 숨겨! 누가 물어봐도 함부로 이야기하지 마!”
“제, 제이슨 두령한테는 이야기했는데요.”
“그거야 목숨의 위협을 받았을 테니 하는 수가 없었잖아. 그래도 다른 사람들한테는 숨겨! 네 능력은 네가 가진 마지막 보루야. 그러니 그 누구한테도 이야기해주지 마, 나 역시 마찬가지야.”
“아. 알았어요…. 고마워요. 언니. 이렇게 알려주셔서.”
“아니야…. 이제 고통의 시간이 시작될 테니…. 너도 각오를 해둬. 나도 정말 죽을 뻔한 적이 몇 번인지 셀 수도 없으니까.”
“으아….”
그렇게 이루스의 말을 들은 정효린, 쥬린의 힘 빠지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잔치가 점차 무르익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