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46화, 지크리스
흠칫!!!
“헉!!!”
눈을 뜸과 동시에 몸을 용수철처럼 튕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의 상황을 살피니 이곳은 내 방이 분명하다. 어제 의식을 잃기 전에 확실히 이곳에 도착한 것이 기억났다.
마지막으로 확인한 것은 지크리스가 내 몸을 들어 올려 욕실로 향하던 상황이다.
몸이 깨끗한 것을 보니, 그녀가 내 몸을 닦아내 주는 수고를 한 모양이었다.
“으음….”
“아?!”
옆자리에서 숨결이 느껴졌다. 어둠에 동공이 익숙해지니 실루엣이 보였는데 지크리스였다.
나와 함께 침대에 누워 간호해 준 것인가? 모로 누워서 자는 자세가 내 옆을 지키는 듯한 모양새였다.
편안하게 잠들어 있는 그 얼굴을 보니 내 기분도 조금 나아지는 기분이었다.
“이제…. 아른거리지 않네?”
일시적인 충격으로 인한 쇼크가 왔던 모양이었는지, 이제는 이상 현상이 없었다.
머리를 찌르던 두통도 없었고 어지러워서 매스꺼워진 가슴도 안정되었다.
짖은 비린내를 풍기는 피가 말끔하게 제거되어서 그런지 몸도 상쾌했다.
“이거 원…. 도움부터 받아 버렸네.”
옆자리에 그녀에게 이불의 절반을 덮어 주며 다시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는 카밀라 이후로 느껴본 사람과 사람의 온기를 나누며 천천히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
이른 아침, 지크리스를 거느리고 식사를 한 뒤 바로 훈련장으로 향했다.
그녀는 이미 실력의 검증이 끝난 파직 기사 출신의 노예다.
아직은 노예의 인장을 벗지 못한 예비 단원의 신분이지만, 앞으로 그녀가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 저 노예 인장을 빠르게, 또는 늦게 벗을 수 있으리라.
자리를 잡고 편안한 무기를 고르게 한 뒤 다시 앞에 서는 그녀의 모습을 관찰했다.
길이가 썩 괜찮게 긴 목검을 손에 쥔 그녀의 모습은 정갈하고 또 빈틈이 없어 보이는 자세였다.
“솔직히 말이야. 전투 면에서 내가 널 가르치는 일이 없을 거 같아.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나보다 강하거든.”
“자만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제 부족한 실력을 한 번 확인해 주시고 교정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씀해 주시길.”
“후…. 겸손도 지나치면 화가 되는 법이야.”
“그 말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자. 시작해 보자. 다른 년들은 지금쯤 죽어라. 언덕을 오르고 있겠지. 특별 대우할 생각 없으니 오늘 지쳐 쓰러질 때까지 나랑 춤이나 추자.”
“좋습니다! 오십시오!!!”
그렇게 나와 그녀는 훈련장에 광풍을 일으키며 격돌하고 또 격돌했다.
그녀는 역시나 기사 출신이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내 두 개의 짧은 목검은 그녀의 긴 목검 한 자루를 뚫지 못하고 번번이 공격에 실패하였다.
방어에 전념하면서 움직임을 관찰하던 그녀는 천천히 리듬을 바꿔가며 공격을 시작했다.
오른쪽을 노리고 들어오는 검격, 오른손의 단검으로 그것을 쳐내며 왼손으로 반격에 나서려 하지만, 복부에 느껴지는 묵직한 느낌에 뒤로 두 걸음 물러나야 했다.
짧고 강한 발차기였다. 물러나서 본 장면은 차올린 발을회수하는 그녀의 모습이었다.
“기사가 검만 쓴다고 생각한 겁니까?”
“쿨럭…. 크…. 아니 그냥 기사라는 존재를 잘 몰라. 내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투보다는 사무직에 있던 년이라서. 이런 기습에는 좀 약한 편이지.”
“일개 도적단치고는 확실히 강합니다. 기사는 동 레벨 도적보다 능력이 두 배 강합니다. 기습이 아니라면 상성 상 상대하기 쉽지는 않죠.”
“이상하네. 기사에서 파직당했으면 지금 네 직업은 노예여야 정상 아니야?”
“누가 절 파직했다 하더라도 전 뼛속까지, 그리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도 검을 숭배하는 기사입니다. 이 숭고한 의지를 파직 따위로 꺾을 순 없지요.”
“하…. 강한 의지로 직업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 이건가….”
“계속 해도 되겠습니까?”
“그래. 이래서는 내가 너에게 훈련을 받게 되는 거 같네.”
“상관없습니다. 직속 상관과 무예를 겨루는 것은 익숙합니다. 대부분 저보다 약한 자들이라 얼마 안 가 시샘하며 그만두곤 했지만요.”
“음- 적어도 난 아직 배울 점이 많아서 말이야. 앞으로도 좀 고단하게 부려먹을 거 같네.”
“시원하게 땀을 뺄 기회를 주신다니 고마운 말이군요.”
“좋아. 다시 간다!!!”
그 뒤로, 비 온 뒤 먼지 나도록 철저하게 얻어맞아서 온몸이 얼얼할 지경이었다.
훈련이 끝난 뒤 지크리스가 내 몸을 이곳저곳 두드렸는데 두드린 부분이 정말 시원했다.
순간적으로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올 뻔한 것을 겨우 참아내야 할 정도였다.
편안해진 몸을 살살 꺾고 비틀고 살살 털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나니 한결 편안해졌다.
“몸 여기저기 다 조지셨네요. 몸을 쓴 다음에는 잘 풀어주는 것도 필요한 행동입니다.”
“내 주변에 그런 걸 조언해줄 사람이 없었다고.”
“이제부터는 제가 있으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참나…. 너 노예치고 넉살이 너무 좋은 거 아냐?”
“음…. 솔직히 지금 전 반쯤 자포자기한 상태입니다. 기사도 파직당하고 가문에서도 파문을 당했습니다. 충격이 좀 커서 말이죠.”
“그런 것 치고는 꽤 즐긴 거 같은데?”
“잡생각을 지우는데 몸을 움직이는 것만큼 좋은 방법이 없습니다.”
“즉, 지금은 머리가 좀 시원해졌다?”
“네.”
“그럼 이제 어때? 기사였던 몸인데 도적으로 활동할 수 있겠어?”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한가지는 알 것 같군요.”
“뭔데?”
질문을 받은 지크리스는 대답을 하기 전에 가까이 다가와 쪼그려 앉아 시선을 마주했다.
“전 사람 보는 눈은 좋습니다. 도적단의 생활은 장담할 수 없지만, 이루스의 밑에서는 만족스런 생활을 할 수 있을 듯합니다.”
“관상 보는 기사라니…. 이상한 조합이네.”
“다 쉬셨으면 계속하실까요?”
“뭐?! 아니 무슨 놈의 체력이 그리 넘쳐나!”
“노예 생활 중에는 마음껏 몸을 풀 기회가 전혀 없었으니까요. 지금까지 근질거리던 몸을 한 번에 움직이는 격이죠.”
“미치겠네.”
“자, 시작하시죠.”
그렇게 한동안 더 지크리스와 함께 시간을 보내야 했다.
나도 카밀라에게 수련 중독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 편이었는데 그녀는 날 넘어서는 더 대단한 수련 광이었다.
쉬는 시간은 약 5분 그리고 몸을 움직이는 시간이 55분, 이것을 열 번 진행하고 나서야 그녀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어흑….”
아니 정확히는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몸을 풀어주는 지압법을 알려 주겠다면서 몸을 씻은 뒤 침대에 날 눕힌 그녀가 등 뒤에 올라타서 몸 여기저기를 꾹! 꾹 누르는 중이다.
참 이런 호사를누리게 되다니…. 우르자인에게 고맙다고 선물이나 줘야 할까 보다.
온몸의 혈류가 확실히 퍼지도록 몸을 풀어준 뒤 그녀는 알려준 지압법을 시험해 보라며 침대에 누웠고 이번에는 그녀의 위에 내가 올라탔다.
내가 누르는 곳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면서 여긴 얼마만큼의 힘으로 얼마만큼의 시간을 들여 누르라 등등의 지압법을 알려 준다.
지압법을 공유함으로 내가 그녀에게, 그녀가 나에게 지압을 해 줄 수 있게 되니 이득이었다.
훈련으로 하루가 날아가 버렸으나 몸은 오히려 개운한 기분이 만연했다.
다만 여자끼리 누르고 만지고 하는 건 뭐랄까 기분이 좀 이상하기도 했다.
튜테, 레오나와 동성 관계를 맺은 뒤로 필요 이상으로 동성의 접촉을 느끼면 기분이 묘하게 변하였다.
이러다가 진짜 나 역시 동성에도 개방적으로 변해 양성애자가 되는 건은 아닌지불안하기도 하다.
[“있어? 나 들어간다.”]
노크 없이, 대답도 듣지 않고 카밀라가 방안으로 침투해 들어 왔다.
그녀의 표정이 제대로 일그러져 있었다. 지크리스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문 뒤 방 한쪽으로 이동해 우두커니 서서 대기했다.
“잰 진짜 고분고분하네. 어떻게 구워삶았대?”
“아니 내가 구워 삶아졌어.”
“뭐래…. 농담할 기분 아니거든. 하…. 진짜 엘프 그 개 쌍년 다루기 좆나 힘드네.”
“엘프? 그 엘프 노예 말하는 거야?”
“그래…. 진짜 골치 아파, 실력은 넘쳐나는데 진짜 다루기 힘들어.몸에 피가 아니고 자존심이 돌고 있는 느낌이야. 진짜 콧대가 높아.”
“흐음….”
“에렌 말씀이시군요.”
“그래. 그년. 넌 잘 아는 모양이지?”
“실제로 같은 상단에 노예로 있었으니까요. 말없이 무뚝뚝하고 주변에 사람이 다가오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는 여자였습니다.”
“그거야 엘프년들 특성이지. 신기할 것도 없어. 그보다는 그 자존심이 넘치는 게 더 문제야. 일단 도적단에 입단했다는 것도 이해하고 자기 힘 닫는 데까지 도움을 주겠다고 말도 하긴 했어.”
“음? 그럼 뭐가 문제야? 잘 된 거 아닌가?”
“명령을 절대 듣지 않아. 그년 첫마디가 이거였어. 난 내 실수로 노예가 되었고 도적단에 입단하게 되면 이 도적단이 사라질 때까지 절대 배신하지 않겠다. 그러나 나에게 명령을 내리지 마라. 내 실력은 뛰어나고 너희 인간들의 몸놀림 따위는 눈에 훤히 보이니 내가 알아서 너희의 움직임을 보조하겠다. 인간 따위의 명령을 받을 생각 없으니 만약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일찌감치 포기해라. 이딴 식으로 이야기했다고!!!”
엘프라는 존재에 대한 것을 잘 모르지만, 상당히 오만한 느낌이 강한 종족이라 생각된다.
반지를 두고 여러 종족이 싸우는 소설이나 영화, 아니면 RTS 게임에 등장하던 종족으로 기억된다.
적이도 내가 접한 매체에서 그려지는 엘프는, 인간을 적대하거나 아름다움을 가진 미의 종족, 또는 자연을 사랑하는 무 살생의 종족이라거나 모든 종족에게 중립을 유지하는 비폭력의 종족 정도로 알고 있었다.
지금 카밀라가 설명하고 있는 엘프와 부합하는 것이라고는 거의 없다. 인간을 적대한다기보다는 자신들의 아래로인식하고 있는 느낌이다.
“아, 이루스는 엘프를 잘 모르지?”
“예? 이루스. 엘프를 모르는 겁니까?”
“아…. 그거 설명 안 했구나. 나 이곳 세상 사람이 아니야. 너랑 같이 팔려온 그, 이 세계 여자 기억나? 그 여자랑 같은 곳에서 왔어.”
“저, 정말인가요? 그런 느낌을 전혀 받지 못했는데….”
“이곳에 온 지 두 달이 훨씬 넘었으니 이젠 그냥 이곳에 동화된 상태지 뭐.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엘프란 종족은 도대체 뭐 하는 종족인데 그리 오만한 거야?”
카밀라는 이를 갈면서 설명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녀는 바로 방문을 열고 나가면서 대답했다.
“어휴 빡쳐, 화풀이 좀 하려고 왔더니 그럴 분위기도 아니네. 괜히 두 사람 잘 지내는데 분위기 깨고 싶지 않으니 불청객은 이만 퇴장한다. 지크리스 엘프에 대한 건 네가 이루스에게 설명해 줘.”
“그러죠. 살펴가세요 간부님.”
“그래.”
쾅!
화가 풀리지 않은 카밀라가 문을 강하게 닫았다. 결국, 그녀의 화풀이는 문이 대신 받게 된 것이다.
우두커니 서 있다가 다시 침대로 다가와 한쪽에 걸터앉은 지크리스는 엘프에 관한 것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먼저 엘프는 숲의종족입니다. 인간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깊은 숲속이나 동굴에서 생활하기도 하고 고산지대에서 생활하기도 합니다. 이에 따라 숲 엘프, 동굴 엘프, 산 엘프로 그 분류가 나뉘는데 사는 곳 말고는 다른 점이 없는 그냥 같은 종족이니 그렇게 알고 계시면 됩니다.”
“흠- 흥미로운 이야기네. 나 이곳에 와서 다른 종족이란 것을 처음 보고 처음 배워보거든.”
“그렇군요. 계속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엘프들은 인간들의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 숲, 산, 동굴이 점점 사라진다는 이유로 인간을 혐오합니다. 다만 함부로 인간을 공격하거나 죽이는 짓은 하지 않고 그들의 영역으로만 들어가지 않으면 딱히 적대 행동도 하지 않습니다.”
“음, 음, 그렇구나.”
“또 한 놈들은 자신들을 숲의 아이라 칭하며 이 세계의 모든 종족 중에서가장 고등 종족이라고 칭합니다. 그 때문에 그들은 은연중에 오만과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게 되었죠. 해서 엘프들은 다른 종족을 모두 자기 아래로 대합니다. 당연하다는 듯이 말이죠.”
“문제 있는 종족들이네. 노예로 잡히는 이유를 알 거 같아. 그딴 식으로 나오면 누구나 다 짜증 내고 해를 끼치려 하지.”
“맞는 말입니다. 다만 모든 엘프가 다 그런 경우는 아니니 그 점은 참작해 주십시오.”
“알았어. 나도 한 종족 전체를 색안경 끼고 볼 생각은 없어.”
치익!
엘프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맥주 캔을 따 한 모금 들이킨다. 그러자 지크리스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녀의 눈이 내 손에 쥐어진 맥주 캔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아. 우리 세계 술이야.”
“술…. 입니까?”
“그래…. 조금 줄까?”
“아니요. 괜찮습니다.”
대답하는 그녀의 모습이 조금 당황스러워하는 느낌이었다.
왜 저러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