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43화, 범죄자를 떠맏다.
“헐….”
아침, 언제나 깨어나는 시간에 깨어나 방의 상태를 본 내 입에서 나온 바람 빠지는 소리다.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점점 머릿속에서 샘이 솟아나듯 떠오르기 시작했다.
문을 따고 들어온 세 명의 괴한이 떠오른다. 가슴을 만졌다가 이빨 몇 개가 나가버린 모죠 그리고 그 모죠가 이끌고 온 부하로 추정되는 남자들이다.
그들이 지금 뭔가 잔뜩 빠져나가서 홀쭉해진 모습으로 자리에 쓰러져 있었다.
미약하게 숨을 쉬고는 있는데 이따금 힉! 힉! 하고 소리치는 것이 정상이 아닌 듯싶다.
마지막 기억에 모죠가 삽입을 시도했다는 것 정도만 기억이 난다. 그 이후로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마치 도중에 필름이 잘린 것처럼 완전히 기억에서 지워져 있었다.
“윽!”
하지만 음부에서 느껴지는 뭔가 이질감이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단편적으로나마 알려주고 있다.
비릿한 밤꽃의 향기가 가득한 방과 욱신거리는 하반신, 그리고 이리저리 흩어진 옷가지 등등….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아직 아무도 오지 않은 듯 조용하기만 했다.
분명 문밖을 지키고 있던 동료 한 놈이 더 있었는데 문이 열려 있고 놈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도망을 쳤다고 생각된다.
놈들이 아직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 틈을 타 놈들의 옷으로 손과 발을 결박하고 한구석에 몰아 둔 뒤 옷을 갖춰 입었다.
“뭐, 뭐야?!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이루스 너 괜찮아?!”
때마침 내 방에 온 카밀라가 반 안의 상황을 보고 까무러치게 놀라 뛰어들어와 날 끌어안으며 이리저리 확인한다.
괜찮다고 대답한 뒤 의식을 잃은 세 놈의 강간범들을 내려다보았다.
싸늘한 내 눈을 거울로 본다면 아마 레이저가 나오는 것은 아닐까 싶다.
잠시 시간이 지난 후 카밀라와 함께 대두령 제이슨의 방에 호출이 되었다.
제이슨 역시 간밤의 일을 보고로 들은 모양이다. 방에 들어가니 제이슨이 조금 일그러진 얼굴을 하곤 우릴 바라보았다.
“몸은 어떻지?”
“조금 욱신거리긴 하는데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요.”
“다행이군. 놈들에 관한 보고는 들었다. 카밀라 네가 말한 강간 미수범들이 바로 그놈들인 모양이야.”
“예…. 꼬리 잡기가 힘들어서 계속 오리무중이었는데 이번에 제대로 잡은 거죠.”
제이슨은 혀를 차면서 보고가 된 세 명의 남자의 정보를 확인했다.
서류로 잘 정리된 정보, 아마 우르자인이 정리해둔 것이리라.
서류를 다 확인한 그는 별로 중요한 인물들은 아니었는지 그 서류를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흥. 증거가 없을 땐 그냥 두었지만, 이렇게 뚜렷한 증거가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감히 내 명령을 어긴 놈들이야. 이루스의 능력을 알게 된 놈들이기도 하지. 잡소리 나오지 않게 처리한다. 이루스, 놈들의 목숨을 네게 주마. 죽여서 입을 막아라.”
“제, 제가…. 요?”
“그래. 너 말이다. 복수도 할 겸 확실히 처리해 버려. 배신자 공개 사형으로 갈 필요도 없다. 그런 노력도과분한 놈들이야. 목을 베어 버리던 심장을 뚫어 버리던, 네 마음대로 요리해. 어차피 이정도의 남자 단원들은 금방 채워 넣을 수 있어.”
문득…. 생각이 들었다. 도적단에 입단한 뒤로 마수를 숱하게 죽이긴 했는데 지금까지 인간을 죽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마수와 인간이 생명, 다르다고 하면 다르고 같다고 하면 같을 텐데 왜 이리 몸이 떨리는 걸까.
카밀라가 적절하게 나서서 제이슨과 이야기를 나눈 뒤 날 끌고 나오지 않았으면 거기서 망부석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부들부들 떨리는 팔을 잡아서 방으로 데려다준 카밀라가 침대에 앉으며 가까이 붙었다.
“이게 첫…. 살인이겠네?”
“응…. 저쪽에서는 그럴 일이 없으니까.”
“마음 굳게 먹어. 도적단인데 사람 하나 죽이지 않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
“알아…. 바논의 죽음도 두 눈으로 보았어. 근데 내가 하려니 좀 두렵긴 하다.”
“그렇겠지. 그래도 해야 해. 이곳에서 살아가려면 말이야. 네가 죽이지 않으면 결국 상대가 널 죽이는 것이 이 세상에 이치라고. 밤에 다시 올 게, 그때까지 마음의 준비를 단단해 해둬. 아 참, 튜테가 오늘 임무를 쉬라더라.”
“아…. 맞아 튜테한테 말한다는 게….”
“내가 다 말해 뒀어. 모죠, 펄, 첸 그리고 문을 지키던 놈이 하나 있었다고 했지?”
모죠와 같이 누워 있던 남자들의 이름이 펄과 첸인 모양이다.
카밀라의 질문에 어제 기억을 떠올린다. 확실히 있었다. 문밖에서 들려온 남자의 목소리를 확실히 들었다.
“확실해 한 사람 더 있었어. 문밖에서 자기가 망을 본다고 했고 문이 닫혔어, 그 뒤에 세 사람이 날 윤간했으니 한 사람이 더 있는 게 맞아.”
“좋아. 확실한 일망타진이 필요한 시기라 이건 자마칸 두령에게 물어봐야겠다. 의심이 아닌 확신이니 이젠 그도 뭐라할 수 없겠지.”
똑똑
“손님인가? 난 이만 가본다. 잘 쉬고 있어.”
“그래.”
카밀라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다가 문을 두드린 사람과 눈이 마주친 모양인지 잠시 멈추었다.
“얼씨구? 오크도 자기 말하면 온다더니.”
“오크보다 오우거라고 해주지 않겠나?”
“오크나 오우거나 둘 다 자지만 큰 병신들인데 뭐. 아무튼, 무슨 일 때문에 온 거야?”
“당연히 사과하러 왔지. 내 소속 놈들의 소행이니…. 나에게도 잘못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니까.”
“음 알았어…. 그리고 좀 있다가 나 좀 봐 두령. 아무래도 공범이 하나 빠져나간 모양이야.”
“알았다. 내 최대한 협조를 하지.”
“그래. 이루스. 자마칸 두령이야. 만날 거지?”
“응. 괜찮아. 들어오시라고 해.”
“난 갈 테니까 들어가 봐. 허튼짓하면 거길 잘라버린다?”
“알지, 알아. 하하하 역시 카밀라는 입담이 화려하고 억세서 좋다니까.”
“입 다물어 난 대 두령의 여자야.”
“그래, 그래 내 알았다고 하지 않나. 하하하.”
카밀라가 막고 있던 문에서 몸을 치우며 밖으로 나가니 그 문으로 덩치가 크고 힘이 좋아 보이는 빡빡 밀어버린 대머리의 남자가 들어왔다.
눈 한쪽에는 긁힌 사처가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자칫 험상궂어질 거 같은 인상이 웃음이 많아서 보완되는 이 남자가 바로 자마칸 두령이다.
처음 그를 본 건 예전에 이곳으로 납치되기 전에 에탄의 어깨너머로 힐끗 본 순간이었다.
그 뒤로는 가끔 환전소에 들릴 때 얼굴을 보곤 했다.
“몸은 좀 괜찮나?”
“예. 다행히 다치진 않았어요.”
정확히 말하면 보지가 미칠 듯이 아프긴 하다. 방망이 찜질을 얼마나 당한 건지 아릿한 감각에 앉았다 일어나기도 힘들다.
거기에 가만히 있으면 모르지만, 허리를 꼬거나 몸을 말거나 하는 행동을 하면 복부가 아프다.
개자식들이 내 복부를 어찌나 강하게 쳐댔는지. 마지막에는 발로 차기까지 했으니 말해 무엇하랴.
그러나 그런 걸 일일이 말해 약한 티를 내기 싫어서 꾹 참고 있었다.
자마칸은 방 중앙으로 와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괜히 신경이 쓰여서 그에게 앉으라고 하니 탁자 아래에 집어넣었던 의자를 빼서 그곳에 앉는다.
“공범이 있다고 하던데…. 혹시 기억나는 건 없나?”
“너무 어두웠고 잠에 취해 있다가 급습을 받은 바람에 아쉽지만…. 얼굴을 보진 못했어요. 목소리만 겨우 들었긴 하는데. 약간 거친 음성에 말투는 평범했던 거 같기도 하고….”
문밖의 공범이 목소리를 낸 직후에 바로 이들의 폭행이 시작되었기에 솔직히 더 많은 것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때는 살기 위해 복부에 힘을 주고는 최대한 버티는 것 말고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55레벨로도 버티기가 버거운 공격을 받았으니 어련하겠는가.
모든 일이 다 끝난뒤 정신을 다시 차리고 레벨이 86으로 올라 있어서 어찌나 당황했던지.
그리고 갱신된 새로운 하이드레인의 효과, 내 정신을 보호하기 위한 새로운 인격이 몸을 지배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덕분에 내가 기절하고 그 이후에 일어난 모든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니…. 유감이군. 하지만 내 이번 일에 확실한 책임을 지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공범을 잡아 넘겨주지. 살리든 죽이던 모든 것을 이루스 자네에게 위임하겠네.”
“공범의 경우는 딱히 해를 입지 않았으니 자마칸 두령께서 해결해 주셔도 되는 걸요.”
“그래서는 내가 성이 차지 않아서 말이네. 뭐. 어디까지나 공범을 잡았을 때의 이야기니까 그건 그때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지. 쉬는데 미안하게 되었어. 편히 쉬어 난 이만 가보지.”
“살펴 가세요.”
밖으로 나가는 자마칸 두령의 얼굴엔 근심이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믿었던 단원들에게 뒤통수를 거하게 맞은 것 아닌가.
아마도 지금까지 의심을 받아 오면서도 단원들을 지켜주었을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사실로 드러나서 자신의 믿음이 송두리째 배신당했으니 오죽할까….
치한 사건에서 내가 모죠의 이빨을 날린 것이 이 일의 발단이 되긴 했지만, 전혀 미안한 감정은 없다.
그때도 난 치한 피해자였고 이번에도 역시 강간의 피해자다.
놈들은 자신들이 지금까지 저지른 일에 대한 심판을 받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그들을 죽여야 하는 내 마음이 조금 안정을 찾는 기분이었다.
죽어 마땅한 것들을 죽이는 일이니 괜히 심란해할 필요 없는 것이다.
풀썩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니 두근거리던 가슴이 점점 진정된다.
살인이라는 것을 생각하기만 해도 가슴이 이리 뛰다니, 내가 도적이 되었다고 해도 아직 내면에 남은 것은 약하디약한 이우신일 뿐이다.
겉으로는 강한 척을 하고 있지만, 속은 아직 지구에서의 이우신이란 말이다.
만약, 오늘 그 세 명의 목숨을, 아니 공범까지 잡혔을 경우는 네명으로 쳐야 한다.
그 네 명의 목숨을 취하고 나면…. 난 어떤 변화 맞이하게 될 것인가….
정적을 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가만히 있기만 하면 더 기분만 잡칠 뿐이다.
편안한 복장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향하는 곳은 훈련장이다.
그곳에서 땀이나 빼고 머리를 맑게 만들어야겠다.
아직 그들의 목숨을 거두기까지는 잠시의 시간이 남아 있으니까.
*****
“야. 상단이 왔다.”
“뭐야? 상단이 오는 게 뭐 대순가?”
훈련장에서 땀을 빼며 다른 생각을 일절 안 하고 있을 때, 등 뒤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왔다.
도적단원인 남성 둘이었는데 상단이 들어온 것을 가지고 한 남자가 방정을 떨고 있다.
고개를 돌리니 동료로 보이는 남자가 싱거운 표정으로 그 말을 받아주었는데 방정을 떠는 남자가 뒤이어 한 말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인다.
“시발! 그냥 상단만 왔으면 내가 이런 말 하겠냐?”
“그럼 뭔데?”
“실로 오랜만에 노예를 끌고 왔어. 노예 상단이라고!”
“오?! 그게 정말이야?!”
“그래. 여자 노예는 사유재산이라고 사면 다 우리 소유가 된다 이 말이야. 그러니 가서 선점하지 못하면 쫄쫄 굶게 될걸?”
“시발 이럴 때가 아니네. 기프트 가지러 가자.”
“뭐래 넌 기프트 가지러 가던지. 난 이미 챙겨 왔거든. 나중에 보자.”
“저, 저 배신자 새끼!!!”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몇몇 남자들도 솔깃한 표정을 지으며 훈련장에서 멀어졌다.
“노예?”
“궁금하니?”
“헉!”
또다시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이번에는 바로 귀 옆에서 들려와서 깜짝 놀라고 말았다.
뒤돌아보니 우르자인이 서 있었다. 그녀가 귀에 바짝 입을 대고 말을 한 것이었다.
내 표정이 볼만한 것인지 그녀는 유쾌한 웃음을 지으며 팔짱을 껴왔다.
“우리 자기. 노예가 궁금해요?”
“우르자인. 제발 밖에서는 자기라고 하지 마.”
“왜 친근하고 좋기만 한데. 아아…. 어쩌다가 그런 불한당 놈들에게 당한 건지. 괜찮은 거지?”
그리 말하며 복부에 손을 대고 살며시 어루만지는데, 솔직히 내가 여자인데도 그 손길이 나쁘지 않았다.
근질근질하면서도 부드럽고 따듯하다. 아픈 복부에 스며들어 치유해주는 느낌이랄까.
“헉! 잠깐, 사람 혼 빼놓고 지금 뭐 하는 거야!”
“어머- 벌써 정신 차렸네. 아쉬워라.”
하마터면 그녀의 페이스에 넘어갈 뻔했다.
아쉬움이 철철 넘치는 표정을 한 그녀는 나와 조금 거리를 벌렸고 마치 따라 오라는 듯 솟짓을 하며 앞서 나갔다.
“알려줄게. 노예란 무엇인지. 그리고 오늘 들어온 노예 상단에서 뭘 팔고 있는지.”
“불법은 아니지?”
“노예 상인은 왕국에서 지정한 합법적인 노예만을 취급하지. 뭐... 도적단과 거래를 하는 상단이면 불법적인 일에도 조금 손을 대긴 하겠지만, 일단 구입하는 건 전혀 문제가 없어. 산 놈한테는 잘못이 없거든.”
“대책 없네.”
그녀와 함께 환전소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처음 보는 거대한 천막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녀는 그 천막을 향해 거리낌 없이 다가가 천으로 된 입구를 걷어 올렸다.
후끈한 열기가 느껴지는 엄청난 환호가 들려오는 공간이다.
그곳에 발을 들이자 구역질 나는 남정네들의 냄새가 진동했다.
우르자인은 그런 장소를 아주 익숙하다는 듯 가볍게 활개친다.
앞서가는 그녀를 따라잡기 위해 열심히 발을 놀려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