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38화, 놀티아.
이야기는 이랬다.
그때 세연이는 에탄에게 강제로 당한 뒤 도적단원들의 더러운 욕망을 푸는 대상이 되었다.
그렇게 정신이 거의 무너진 세연이는 다른 여사원들의 보살핌을 받게 되었는데, 상황이 상황이라 다들 자기 몸 챙기기도 힘들 판이어서 그녀를 제대로 보살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장은 계속 에탄의 비위를 맞추려고 어차피 망가진 그녀를 다시 사용하자는 말까지 할 정도였다.
결국, 총대를 메고 창명 선배와 기우 선배가 나서서 몇몇 여사원의 도움을 받아 그녀를 보살피게 되었다.
정성으로 돌보는 기우 선배와 창명 선배의 노력으로 인해 세연이가 차츰 정신을 차렸고 그쯤에 창명 선배는 다시 혼자 총대를 메고 도적단의 명예 단원이 되었다.
그리고 기우 선배는 계속 세연이를 보살피며 그녀의 건강이 돌아올 때까지 지극정성을 쏟아부었다고 한다.
그 노역에 애인이 없던 기우 선배의 보살핌을 받으며 차츰 그에게 반한 세연이가 기우 선배에게 고백했다.
그 결과 두 사람은 눈이 맞았고 사귀게 되었다는 흔한 이야기였다.
모두에게 멋진 기사님이 공주님을 구하는 듯한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마음속 한구석에서 그를 생각하는 마음 하나로만 버텨온 나에게는 너무도 슬픔 이야기였다.
기사님을 좋아하던 마을 아낙은 그 마음을 전하지 못하고 쓸쓸히 사라졌다.
아마…. 이야기에 외전이 있다면 이런 내용이 적히지 않았을까?
“우신아... 괜찮아?”
“미안해…. 좀 더…. 시일을 두고 말해줬어야 했는데.”
“아니에요. 차라리 잘 되었어요. 빨리 알아서 마음고생이 좀 덜하니까. 세연아…. 기우 선배 잘 부탁할게.”
“고, 고마워 우신아.”
“아…. 그리고 앞으로 이루스라고 불러줘요.”
“이루스?”
“저쪽의 내 이름이야. 앞으로는 그렇게 불러줘요. 아직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는데 원래 이름을 사용하면 햇갈리거든요.”
“그, 그렇게 할게…. 우…. 아니 이루스.”
“이루스…. 뭔가 원래 이름하고 비슷하면서도…. 너무 다르네.”
“그런가…. 난 그래도 꽤 마음에 든 이름이야.”
마음은 슬프지만…. 두 사람의 앞길에 축복이 가득했으면 한다.
점심 시간도 되었겠다.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데 밖에서 단원 놈이 날 불렀다.
“간부님, 같이 식사나 하시렵니까? 처음 오셨으니 여기 잘 모르실 텐데 제가 안내하죠.”
“아니. 나 원래 여기 사람이라니까 그러네.”
“아- 아-, 그게 아니고요. 우리 단원들이 밥 먹는 곳이 다로 정해져 있거든요. 여기 사람들이 우릴 무서워하는 경향이 있어서 지정한 곳에서 밥을 먹지 않으면 조금 소란스러워 져서 그 지정된 곳을 알려드리려는 겁니다.”
“그래? 알았어. 그럼 그곳으로 가자. 미안, 아무래도 난 도적단 소속이라 같이 점심 못먹을거 같아.”
“아니야. 이해해. 나중에 또 올 거지?”
“그럼. 쉬는 날에 시간 괜찮으면 올게. 그때 또 보자 세연아. 기우 선배도요.”
“그래. 나중에 또 보자.”
작별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원 녀석은 이미 준비를 마치고 입구에 서 있었다.
입구에는 날 배웅하기 위해 과장과 사장이 나와 있었다.
“그…. 간부인 것도 몰라뵙고….”
“부디 용서를….”
“뭐, 그럴 수도 있죠. 그런데 실수는 한 번으로 충분하니까. 무슨 말인지 알죠?”
난 예전에 사장이 날 갈굴 때 하던 말을 그대로 돌려 주었다.
물론 이보다 더 많은 내용이 뒤를 이었지만, 그렇게 꼰대 같이 굴고 싶지는 않았다.
부들부들 떨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만 보아도 지금 속에서 열불이 터지고 있으리라.
“앞으로 여기 사람들 잘 부탁할게. 특히 저 두 사람, 나랑 가장 친하거든.”
“여부가 있겠습니까. 간부님 말대로 하죠.”
제법 싹싹하고 말이 잘 통하는 녀석이라 마음에 들었다. 난 밖으로 나가는 도중에 그의 이름을 물었다.
“이름이 뭐지? 난 이루스야.”
“아. 이루스 간부님이로군요. 전 갈프입니다. 묵직한 한 방의 갈프.”
“너도 이명이 있어?”
“뭐. 우리 에탄 조에 이명 없는 놈이 드물걸요? 다들 그게 재미고 또 자기 힘을 나타내는 지표니까요.”
“그래…. 그래…. 알았어.”
여하튼, 그렇게 묵직한 한 방의 갈프와 같이 동행을 하게 되었다.
다시 도심으로 나와 힐끔거리며 우릴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어딘가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몇몇 가게들이 문을 열고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손님들이 대부분 나와 비슷한 색감의 옷을 입은 도적단원들이었다.
“이 일대는 저희가 식사하는 구역이라 보셔도 됩니다. 이곳에 오시면 되도록 이 일대에서 식사를 해 주세요. 아, 다른 사람들도 이리 대려 오셔도 상관은 없습니다. 다만 시비가 조금 붙을수도 있으니까 간부들이 식사하는 이른 열 두시에는 피해주세요. 지금처럼 말이예요.”
“알았어. 혹시 더 알아야 하는 게 있어?”
“혹시 기프트 가지고 계십니까?”
“아니. 하지만 은화를 가져 왔어.”
“잘 하셨네요. 여기서는 기프트 사용하시면 안 됩니다. 모두 은화, 금화로 계산해야 해요.”
“뭐…. 도적단 내부도 아닌데 기프트를 사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도 안 했어.”
여러 식당 중에 그가 향하는 곳은 대형 돈가스를 파는 가게였다.
그리고 이곳에 열린 식당은 대부분 양식점이나 퓨전 요리 같이 느끼함이 기반으로 설정된 요리들을 하는 곳뿐이었다.
“다른 곳은 좀 매워서 전 여기서 자주 먹어요.”
“한국 입맛이 좀 맵긴 하지.”
“아, 이곳 분이셨죠 계속 까먹네! 이거.”
“이야?! 여기서 밥 먹는구나. 이거 우연이야.”
“놀티아?”
“놀티아 형님!”
“뭐야. 너도 있었냐? 아…. 그 회사 담당이 너였지. 이루스한테 무례를 저지른 건 아니지?”
“설마요. 다른 조에 속해 있다고 해도 간부님인데 어떻게 제가 감히 무례를 저지릅니까.”
“그래. 네가 그 점이 참 마음에 들어. 앞으로도 종종 찾아올 테니까 알아서 잘 모셔.”
“네! 형님!”
“둘이 잘 아는 사이야?”
놀티아는 자연스럽게 내 옆자리에 앉으면서 갈프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내 친한 동생이지. 이명도 내가 지어준 거야.”
“어쩐지 촌스럽더라.”
“뭐야? 이거, 이거 내 미적 감각을 못 따라오는 사람이 하나 더 있었네.”
“형님 미적 감각이 너무 별나서 그런 걸 수도 있습니다만.”
“시발 뭐라고? 이 새끼가 기어오르냐?”
“하하…. 죄송합니다.”
시끌시끌한 와중에 나만 대화에 끼지 못해 조용히 있었다.
아니 대화에 끼지 못하는 게 아니라 끼지 않았다고 하는 편이 더 옳을 것이다.
지금은 기분이 너무 좋지 않았다. 그야 마음속으로 사랑하던 대상을 오늘 잃었으니까.
다만…. 내가 내 마음을 전하지 않고 미뤄서 이리된 것을 누구 탓을 할까.
다른 사람에게 화풀이해 보았자 나만 꼴사나워질 뿐이다. 이럴 땐 그냥 입을 다물어서 그런 상황을 원천 봉쇄하는 게 답이었다.
조용히 나온 식사를 마치고 조용히 일어나 돈을 낸 뒤 조용히 가게를 빠져나왔다.
두 사람은 아직도 대화를 나누는 중이라 내가 나갔는지도 모르는 모양이다.
“조금 추운가….”
내가 저곳으로 떠난 시기는 가을, 그리고 지금은 점점 겨울이 다가오고 있는 기시였다.
온도가 제법 낮아지고 있어서 어깨 부분이 조금 시린 듯 했다.
아니 내 마음에 시린 것인가? 그래서 그렇게 느껴지는 지도 모르겠다.
평소에는 이러고 다녀도 딱히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데 지금만 이러는 것을 보면 그게 맞을 것이다.
“하아….”
“왜 그렇게 죽상이야?”
“어?”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돌아보니 놀티아가 서 있었다. 갈프는 이미 자기 위치로 돌아간 것일까? 보이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물론 그 이상 필요 없는 접촉을 하지 않고 날 바라보고만 있다.
“응? 왜 그렇게 죽상이냐고. 무슨 일 있었어?”
“뭐... 여러 가지 있었다. 내가 떠난동안 바뀐 것도 참 많고 말이야.”
“흠….”
놀티아가 한 걸음 더 나에게 다가 왔다. 그의 손이 내 손을 잡았다.
평소라면 벌써 주먹이 날아갔을 수도 있는데 그의 표정이 천박하지 않아서 내 주먹이 움직이지는 않았다.
“술 한잔 할까?”
“너 일 안 해도 돼?”
“난 오늘 오전 근무만 하기로 되어 있어. 그리고 내일은 쉬는 날이지. 원래 갈프 놈이랑 갈려고 했는데 놈이 네 표정 보고 너한테 떠넘겼다.”
“좋은 동생 뒀네.”
“좋긴 씨불…. 어쨌든. 갈 거냐?”
“그래…. 가서 마시자.”
“좋은 대답이군.”
의기투합한 나와 놀티아가 아직 낮인데도 불구하고 빨리 열린 주점을 찾아 안으로 들어갔다.
작은 서양 맥주 전문점이다. 아직도 이런 가게가 살아 있다니 의외였다.
“여기 맥주도 많고 다양해서 우리 애들이 좋아하는 곳이야. 아 솔직히 소주는 진짜 맛 없더라. 뭐 그게 맛있다고 그것만 먹는 애들도 있긴 한데. 참 별종이지?”
“나도 처음에는 싫어했는데 마시다 보면 그거 중독된다.”
“진짜?”
“그래. 나중에 한 번 제대로 마셔봐 안주랑. 입에서 못 때.”
“뭐…. 넌 저쪽이랑 이쪽 술을 다 마셔 봤으니 믿을 만하긴 하네. 그래 알았다.”
나 역시 소주가 입에 잘 맞는 날이 있긴 하다. 그래도 지금은 싸구려 흑맥주에 완전히 꽂혀 버렸지만, 확실히 소주가 맛도 도수도 약해서 그런지 손이 잘 안 갈 수도 있었다.
이 가게도 한번 와본 기억이 있다. 분명 마시고 싶은 술은 알아서 카운터에 계산하고 가져가고 안주만 자리에서 주문하는 형식이었다.
그런데 커튼이 왜 있는지는 의문이었다. 원래는 이런건 없었는데 말이다.
“이, 커튼은 뭐야?”
“아. 개인 자리마다 나누어 둔거야.”
“왜 그런 짓을 하지?”
“우리 단원들이 가끔 이곳에서 사귄 여자를 데려오면 그대로 하거든.”
“아…. 그래서 이렇게 변한 건가?”
“그리고 이 커튼은 방음 되는 물건이야. 우리 세계에서 온 거거든.”
“하…. 이런 곳까지 잘도 침투했군. 한 잔 줘.”
“그래. 마셔. 마시고 풀어. 뭔가 안 좋은 게 많아 보이는데. 다 풀어라.”
“그래. 마시자.”
서로 잔에 맥주를 왕창 따른 뒤에 서로의 잔을 마셨다.
나 한잔, 그리고 놀티아가 한잔, 가져온 맥주는 바로 동이 나서 다음엔 양 손에 두 개씩 들고 돌아왔다.
가져온 네 병의 술도 다 마시니 술기운이 올라왔다. 원래는 이렇지 않은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맥주가 단지 모르겠다.
“후…. 왜 이렇게 빨라. 따라가기 힘들게.”
“기분이 좆같아서 그런다.”
“왜, 뭔데? 말해봐. 그럼 더 편해질지 누가 알아.”
“몰라도 돼 개인적인 일이고 이거 말하면 진짜 쪼다 같을 거 같아.”
“에이. 그럼 더 궁금해지는데. 일단 술 더 가져올게.”
놀티아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맥주를 가지러 이동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놀티아가 다시 돌아왔다.
그런데 그가 앉아야 할 반대편 자리를 두고는 내 옆자리에 와서 굳이 앉았다.
“뭐하냐?”
“술 따라주기 편하려고.”
“수 쓰지 마. 죽여버리는 수가 있어.”
“워워…. 내가 이렇게 보여도 여자에게는 참 친절하고 신사 같단 말이야.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고.”
“그래? 그건 좀 의외인데? 기억해 둘게.”
“지금 나 놀리는 거 같은데?”
“그건…. 네 생각에 맡기지.”
퐁!
맥주병의 뚜껑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내 잔에 맥주가 따라진다.
놀티아는 그것을 내 손에 쥐어준 다음 자진의 잔에도 맥주를 따랐다.
“마시자.”
“마셔.”
그렇게 또 한잔의 맥주가 서로의 입으로 들어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잔을 내려두려는 그때 내 옆구리에 거친 감촉이 일어 바라보니 놀티아의 손이 들어와 있었다.
“수 쓰지 말라니까 그러네.”
“솔직히 네 표정 실연당한 여자 표정이거든. 그냥 두기가 너무 처량하고 아깝단 말이야.”
“하…. 신사는 그런 것도 다 아는 거야?”
“아무렴, 내가 도적단 되기 전에는 잠깐 귀족가의 하인으로 일해서 이런 건 또 빠삭하다고. 하녀들이 주인에게 배신당했을 때 표정하고 똑같아 지금 네 표정이.”
“하…. 시발. 정확해서 반박도 못 하겠네.”
놀티아의 몸이 좀 더 나에게 밀착해 들어왔다. 그의 손이 내 복부에 닿아 있었다.
그런데…. 술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가슴속에 쌓인 거대한 돌덩이의 압력 때문인지 그의 접촉이 심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개새끼야. 너 일부러 여기 데려왔지?”
“뭐…. 그렇지. 부정은 안 할게. 그래서. 어쩔래? 싫다면 여기서 그만두고. 알겠지만, 나는.”
“신사라고? 하…. 신사들 다 죽는소리하고 있네.”
그는 짧게 웃은 다음 술을 한잔 더 따라 주었다.
그리고 난 그 술잔을 받아서 내 입에 흘려 넣었다.
그것이 내 대답이었고 그는 그 대답을 제대로 알아들었다.
눈치가 정말 좋은 남자였다. 여자를 많이 상대해 본 실력이 있어 보이는
일단 레벨을 흡수하면 안 되니 그를 레벨 흡수 불가 대상으로 지정을 했다.
술잔을 다 비우니 그의 얼굴이 천천히 내 얼굴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달콤한 술 향이 가득한 그의 혀가 내 입으로 들어왔다.
복부에 있던 그의 손 역시 점차 아래로 내려와 날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왜인지 모르겠다…. 싫지 않은 이유가 왜인지 모르겠다.
오히려…. 이 상황이 흥분되고 또 짜릿한 이유를…. 전혀 모르겠다.
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