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26화, 계약 그리고 마지막
어느새 시간이 조금 지나 밖이 부산스러워 지고 있었다.
슬슬 다들 잘 시간이라 마지막으로 도적단을 정리하는 중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런 늦은 시간인데도 난 아직 내 방이 아닌 이 도적단의 대 두령, 제이슨의 방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계약이라는 말에 눈을 크게 뜨고는 흥미가 돋는다는 표정으로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 그의 입이 열렸을 때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듯한 말이 들려왔다.
“우르자인에게 들은 건가? 크크큭. 뭐가 되었든 실로 유쾌하군. 저 약하디약한 세상에서 넘어온 계집이 이젠 고양이를 넘어 표범이 된 것인가? 내 휘하의 누군가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참으로 유쾌한 일이야.”
저 남자의 안에서 생각되고 있는 내 존재감이 변화한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술에 취해 헛소리하는 것일까….
물론…. 지금은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모조리 이용해야 한다. 그가 술에 취해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
“좋다. 계약을 받아들여 주지. 단, 나에게 큰 이익이 없다면 계약은 성립하지 않는다. 자, 원하는 바를 말해봐라.”
다시 그의 입에서 원하는 바를 말하라는 명령과도 같은 어조의 말이 떨어졌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보상으로 받는 것이 아니기에 내가 원하는 것을 받기 위해 제이슨에게도 그와 합당한 것을 주어야 했다.
난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라 제이슨에게 줄 것을 먼저 이야기 했다.
“당신이 원하면…. 언제든지 원하는 자의 레벨을 흡수해 줄게.”
“호? 내가 원하는 자의 레벨을 흡수해 준다? 즉 벌을 주는 일에 도움을 주겠다는 뜻이로군?”
“그래. 단…. 횟수는 무제한이 아니야. 내가 원하는 바를 듣고 당신이 원하는 횟수를 정하면 그대로 따라주지.”
“좋아. 아주 흥미로운 제안이야. 도적단은 항상 기강이 서지 않으면 반란이나 반역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지. 그런 상황에 네 능력은 상대의 레벨을 확실하게 저하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수단이지. 일단 레벨이 낮아진 놈들은 제압하기도 쉬우니 말이야.”
“…….”
“그런데 네 능력. 네 마음대로 다룰 수 없는 거 아니었나?”
“레벨을 흡수하는 것이 내 의지와 상관없는 것뿐이야. 그러니 상대방의 레벨을 흡수하는 건 실패하지 않아.”
“그렇군. 그렇다면 확실히 계약의 내용으로 적합하지.”
“하지만, 벌을 받을 자를 내가 직접 유혹하거나. 놈에게 다가가서 날 노출하는 짓은 하지 않을 거야. 주말에 내가 일하고 있는 유흥 방의 깊은 곳으로 유도해서 처리하라고. 뭐 그건 당신이 알아서 할 일이지만.”
“좋아 벌을 주는 녀석의 취급은 내가 알아서 처리하지. 그럼 이제 네가 원하는 바를 말해봐라.”
“내가 원하는 것은….”
지금 이 계약으로는 절대 바논을 살릴 수 없다.
바논의 생명을 구할 수는 없지만, 그가 죽기 전까지는 편안하게만들어 줄 수는 있다.
달싹이며 천천히 떨어지는 내 입에서는 바논의 편안한 죽음을 위한 계약 내용이 흘러나왔다.
“나에게…. 놈의…. 바논의 남은 생명 하루를 줘.”
“큭큭큭큭큭…. 똑똑한 년이로군. 배신자의 생명을 하루 달라…. 이거 참 보상이 구미가 당기니 거부하기가 힘들군. 크하하하핫!!!”
“…….”
놈에게 내가 줄 수 있는 것을 먼저 말한 것이 제대로 먹혀들어 갔다.
그는 내가 말한 것을 듣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내가 그에게 줄 것과 그가 나에게 줄 것을 저울질 하는 모양이다.
“세 번이다.”
“…….”
“네가 말 한 것, 내가 원하는 자의 레벨을 흡수해 주겠다는 것을 세 번 이행해라. 그렇다면 이 계약을 받아들이지.”
“좋아. 하겠어.”
“시원해서 참 좋군. 받아라.”
휙!!!
텁!
나 품으로 날아오는 작은 함을 받아 들었다. 함을 열어 보니 그곳에는 작은 반지 하나가 들어 있다.
“그 반지를 손에 끼고 계약은 성립되었다. 라고 말하면 너와 나의 계약이 성립된다. 방금 나눈 대화 내용을 토대로 계약이 진행되지. 그리고 너와 나 두 사람은 그 계약을 절대 위반해서는 안 된다. 만약 위반하는 사람은 그 즉시 모든 레벨을 초기화 당하지.”
“초기화….”
“이런 건 신용이 생명이잖아? 내 레벨 200을 지금 이 자리에 걸겠다는 말이다. 그만큼 난 계약에 아주 민감하지. 자. 반지를 끼고 시동어를 외쳐라.”
함 안에서 작은 반지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내 왼손 검지에 끼웠다.
그러자 반지에서 미약하게 빛이 일어났다. 그것을 기점으로 시동어를 외치자 반지가 사라졌다.
“?!”
“반지는 네 몸속에 흡수되었다. 흡수된 반지의 안에는 맹독이 들어 있지. 레벨 초기화의 맹독이. 계약을 위반하는 순간 그 맹독이 터져 나와 모든 레벨이 초기화되는 것이다.”
“그런가…. 알았어. 이거면 확실히 당신의…. 대 두령님의 말을 믿을 수 있겠네요.”
“큭큭큭, 암표범에서 다시도적단 단원 이루스로 되돌아갔다. 이건가?”
“쉬러 가겠습니다.”
“그래. 편히 쉬어라.”
제이슨의 축객령과 함께 난 그의 방을 나와 다리가 풀리는 바람에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으…. 윽….”
그와 한 공간에서 무시무시한 기세를 받아들이며 대화한다는 것은 이렇게나 고역인 일이었던가….
평소에는 몰랐으나 계약이라는 말에 반응한 그의 기세는 정말 남달랐다.
자리에 꼿꼿하고 당당하게 서 있었다고 느꼈지만…. 그건 인내심으로 겨우 버틴 것에 지나지 않았다.
“아아…. 씨발 지렸네….”
실로 오랜만에 방광 조절에 실패하고 말았다.
물론 방광을 모조리 비워내는 실태를 저지르지 않았지만, 아주 약간 새어 나와 버리고 말았다.
팬티가 축축한 기분이 참으로 찝찝했다. 날 이런 상태로 만든 제이슨이 있는 방을 한 번 흘겨봐준 다음에 내 방을 향해 터덜터덜 발을 옮겼다.
슬슬 그 방 너머로 여인의 아찔한 신음이 들리기 시작해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
다음 날 아침, 제이슨은 계약대로 내 방에 바논을 데려왔다.
영문도 모르고 아침부터 내 방에 끌려온 바논은 어안이벙벙해 보인다.
간수들이 바논을 이곳에 처넣자마자 바로 내 방의 밖으로 나가 문을 닫고 경비를 시작했다.
배신자의 신병을 다른 곳에 감금했을 뿐이다. 즉 그들의 근무지가 창고에서 내 방 입구로 바뀌었을 뿐이란 것이다.
“먹어 바논.”
상 위에 잔뜩 차려진 음식들, 바논은 그 음식을 보자마자 배에서 꼬르륵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잠시 시간을 주니 상 위에 차려진 음식들이 빠르게 바닥을 보였다.
물까지 목으로 삼키고 난 그는 살 것만 같은 표정이 되어 날 바라보고 있다.
“배고파서 죽는 줄 알았네…. 고마워 그런데 이게 다 어떻게 된 거야?”
“있어 그럴 일이. 네가 죽는 것은 바뀌지 않았지만, 죽기 전까지는 내 감시 아래에서 편안하게 있어도 좋아…. 친구에게 주는 마지막 배려가 이것뿐이라 미안할 따름이야.”
“무슨…. 그런 소리를 하고 그래.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여준 것만으로도 난 감지덕지라고. 배고픔에 질려 공포에 떠는 하루밤의 고통은 정말 말로 이룰 수가 없었다고. 뭐…. 비록 남은 시간은 내일 아침까지지만, 그동안 잘 부탁한다.”
“그래…. 편히 쉬다가 가…. 아…. 종이 준비해 달라고 했지? 여기 있어.”
“이야! 고마워. 이걸로 친구 놈에게내 마지막을 전할 수 있겠어.”
“널 잡아 온 공으로 네가 그동안 숨겨둔 비상금까지 내가 받았어. 이거 네 친구에게 편지와 함께 보내줄게.”
“거듭…. 고맙다 이루스. 이런 말밖에 할 말이 없네.”
“내가 살던 세상엔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 말이 있어. 편안하게…. 가기만 해주면 돼. 남은 거 다 훌훌 털어 버리고.”
“이제 원은 없어. 내 마지막을 친구에게 전할 수 있고 적지만 돈도 보낼 수 있으니까. 내 친구가 그동안 날 대신해서 어머니를 부양한 것만 생각하면 이 돈도 너무 적지만…. 아…. 어머니 임종을 지키지 못하고 먼저 가게 생겼네.”
“아…. 그래. 이거 받아. 상단에 내가 맞아둔 거야.”
“어?”
그가 잡혀 온 바로 다음 날, 상단이 도착했고 그에게 전해진 편지는 자마칸 두령을 통해 그와 가장 친했던 나에게 전달 되었다.
아직 편지의 내용은 확인하지 않았으나, 왠지 모르게 좋은 내용 같지는 않았다.
편지를 찬찬히 읽어본 그의 두 눈에서는 천천히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어머니….”
“…….”
편지의 내용을 물어볼 필요도 없을 거 같다. 아마…. 그의 어머니가 임종하신 내용이 적혀 있을 것이다.
한참을 편지를 쥐고 조용히 울던 그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 편지를 고이 접어 자신의 입어 넣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천천히 씹어 삼켰다. 마지막 어머니 가시는 길을 보지 못한 불효에 저렇게라도 행동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편지를 삼킨 그는 조용히 펜을 집어 들고 종이에 글자를 적기 시작했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준 뒤에 침대에 걸터앉았다.
남의 편지를 훔쳐보는 취미는 나에게 없다.
“바논. 잠시 나갔다 올 테니까. 얌전히 있어.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밖에 간수들에게 부탁하고.”
“그래…. 오늘 쉬는 날이 아니구나.”
“응. 금방 나갔다 올게.”
오늘은 마수 사냥을 해야 했다. 하지만 카밀라에게 몸이 아프다고 하며 고블린 몇 마리만 사냥해서 돌아왔다.
그녀도 이미 바논이 내 방에 와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오늘 사냥해 온 고블린을 정산하고 다시 방으로 돌아오니 그곳에는 바논이 않고 있었다.
다 적은 편지를 봉투에 넣어 잘 봉합하고는 그 앞에 앉아서 무표정한 얼굴로 날 기다리고 있었다.
“볼일은 다 본 거야?”
“몸 아프다고 설렁설렁하고 빠졌어.”
“나 때문에 그렇게까지 해주는 거냐…. 난 정말 좋은 친구를 뒀구나.”
“난 정말 개새끼를 친구로 뒀고.”
“흐흐흐. 그래…. 개새끼…. 맞는 말이네.”
마수를 사냥하느라 더러워진 몸을 씻고는 간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침대에 걸터앉았으나 그러는 동안에도 바논은 무표정한 얼굴일 뿐이었다.
내일이 되면 죽을 몸이라는 것이 그의 온몸을 짓누르고 있는 것일까.
내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데도 그는 반응이 전혀 없었다. 정신적으로 죽어가는 모양이다.
“바논.”
“….”
“야. 바논!”
“어…. 으응…. 그래…. 불렀어?”
“너 마지막 가는 모습을 나에게 그런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은 거야?”
“하…. 하하…. 그래…. 나답지 않았나? 그래도…. 죽음 앞에서까지 그런 밝은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무리 나라도 힘들다.”
“그래…. 무서울 거야. 나도 이해해. 난 미노타우로스 내장까지 들어갔다가 나온 년이니까…. 죽음의 공포를 너무도 잘 알아.”
“아…. 그랬지…. 변이한 미노타우로스에게 잡아 먹혔었지.”
“그런데…. 너 아직 안 죽었어. 지금은 살아 있는 인간이야. 마지막 남은 시간인데 그렇게 멍하니 보낼 거야? 마지막 가는데 원 없이 뭔가 하다가 가야 하는 거 아니냐고.”
“지금…. 내가 뭘 할 수 있겠냐…. 남은 거라고는 이 빈털터리의 몸뚱이뿐인데.”
“그거면 돼.”
“뭐?”
“네 몸뚱이면 된다고 이 씹탱아!”
바논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난 그가 이해할 수 있도록 돌려 말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바논. 너 내 능력 모르지.”
“어? 아…. 응 몰라. 대 두령이 함구를 내렸거든.”
“바논. 너 발기 부전이나 뭐 그런 거 없지?”
“가, 갑자기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이 새끼야!”
“윽…. 음…. 없어.”
“그럼 됐어. 할 거 다 한 거지?”
“아…. 응….”
“바논…. 네 레벨 나에게 줘.”
“뭐라고? 레벨을 달라니…. 무슨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거야. 난 그런 능력이 없다고.”
“나한테 있어. 레벨을 흡수하는 능력.”
“레……. 레벨을 흡수한다고?”
“그래. 네가. 살아 있었다는 그 증거…. 레벨을 내가 가져갈게…. 날 통해서 계속 살 수 있게. 가는 길에 네가 살아 있었다는 증거를 나에게 남겨.”
“…….”
잠시 고민을 하던 그는 이내 결정을 내렸는지 고개를 들고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내 옆자리에 걸터앉으며 뭘 어떻게 하면 되는지 물어왔다.
“뭘 하면 돼?”
“자지부터 세우면 돼.”
“어…. 음…. 뭐?”
“자지 세우라고. 지금부터 섹스할 거니까.”
“뭐, 뭣?!”
당황한 그를 침대로 밀어 넘어트리며 내가 그 위로 올라갔다.
우르자인에게 배운 요염한 표정이 잘 듣는 모양인지 하반신에서 묵직한 것이 느껴졌다.
*****
그 뒤로 나와 바논의 소리가 밖으로 많이 들렸는지 아침에 나가보니 간수들이 묘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바논은 그들에게 연행되었다. 난 끝까지 그의 뒤를 따라 형장까지 이동했다.
거대한 검을 들고 있는 집행자의 앞에 꿇어앉은 그의 얼굴에 천이 씌워졌다.
그 천이 씌워지기 전에 나와 마주 보던 그의 표정은 죽음 앞에서도 웃고 있었다.
쓰각!
난 눈을 감지 않고 그의 마지막을 끝까지 봐주었다….
이렇게 난 이곳에서 사귄 가장 친한 친구를 떠나보냈다.
그가 남긴 마지막 편지와 레벨을 마지막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