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24화, 스틸 베어.
“제길…. 된통 걸렸군.”
아까의 위치에서 얼마 가지 못한 곳에서 바논의 발이 멈추고 말았다.
파파니의 고기 향에 이끌린 흥분한 스틸베어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이제 수중에 남은 고기는 없었고 스틸베어는 입맛을 다시며 바논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바논은 질기고 맛없는 인간이지만, 지금그에게는 파파니 고기의 향이 물씬 풍기고 있다.
흥분한 스틸베어의 눈에는 지금 바논이 걸어 다니는 거대한 파파니로 보일 뿐이었다.
스틸베어의 맹렬한 돌격을 보며 바논은 그대로 등을 돌려 가까운 곳에 있는 거대한 나무 위로 단번에 올라갔다.
스틸베어의 직선 이동 속도는 엄청나게 빨라 레벨이 낮은 인간의 속도로는 놈의 추격을 뿌리칠 수 없다.
한번 달리기 시작하면 무식하게 직선으로만 달리기에 민첩하게 피하면 선회가 안 되는 놈의 공격을 피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그 위협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일반적인 곰과 다르게 스틸베어의 몸은 육중하기 그지없어 이족보행을 할 수 없었다.
높은 곳에 올라갈 수만 있다면 일단은 스틸베어의 위협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다.
냉정한 판단으로 바논은 자신의 목숨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파파니 고기 냄세에 흥분해버린 스틸베어를 너무 가벼이 여겼다는 것이다.
“으아아아!!!”
스틸베어는 이족보행은 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앞발을 사용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놈은 바논이 기어 올라간 나무로 가까이 와서 그 위를 올려다보더니 앞발을 강하게 휘둘러 나무기둥을 때렸다.
놈의 앞발에 맞은나무기둥이 크게 흔들렸고 중앙에 움푹 팬 구멍이 생긴다.
굵은 나뭇가지에 매달려서 중심을 잡고 있던 바논에게는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흔들리는 나무에서 겨우겨우 다시 중심을 잡는 바논, 그러나 스틸베어의 공격은 매섭게 이어진다.
“크어어어!!!”
콰직!!!
또 나무가 크게 흔들렸고 놈이 가격한 곳이 크게 파여나간다.
바논은 덜덜 떨리는 몸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조금만 긴장을 풀기만 해도 그냥 떨어지기 일보 직전에 놓여 있었다.
스틸베어는 웃는다는 표현을 쓸 수 없는 마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정말 유쾌하게 웃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린 맛좋은 거대 파파니가 떨어지려고 하는 순간이다.
저놈이 떨어지면 그 큰 입을 쩍! 하고 벌려 한입에 삼켜 버리리라.
그런 생각을 하며 저 위에 매달려 있는 바논을 가지고 놀고 있다.
“젠장…. 고기가 하나만 더 남아 있었어도….”
눈앞에 고지를 남겨두고 이대로 추락을 하고 마는 것인가.
조금만 더 가면 이제 남은 것은 가도를 달려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뿐.
그러한 길을 눈앞에 두고 가지 못하는, 또 목숨마저 위협을 받고 있다니 눈물이 절로 앞을 가리는 기분이었다.
절망에 빠진 바논에게 더욱 큰 절망을 안겨주는 장면이 펼쳐졌다.
스틸베어가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는 듯 자신의 앞발을 높이 쳐들고는 나무를 내려칠 준비에 들어간 것이다.
저 일격이 가해지면 자신이 나무에서 떨어지지 않아도 나무가 먼저 결딴날 판이었다.
스틸베어가 흉흉해 보이는 기세로 나무를 공격하려던 그때. 저 멀리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바논!!!”
바논도 들어본 적이 있는, 아니 절대로 잊어버릴 수 없는 친구의 목소리였다.
스틸베어의 위협에 노출된 상황에서도 그는 그 목소리를 절대 잊어버리지 않았다.
별거 없는 자신과도 항상 술을 마시고 어울리는 존재…. 이 세계에서 결코 느낄 수 없는 다른 세계의 매력을 가진 여성. 이루스였다.
그녀가 지금 저 멀리서부터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이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기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비록 이렇게 되면 자신은 배신자의 낙인과 함께 도적단으로 다시 연행되겠지만, 지금은 그런 건 중요치 않았다.
자신을 돕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스틸베어에게 달려오고 있는 친구의 우정이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그는 전혀 무섭지 않았다.
만약…. 자신이 이루스에 의해 다시 연행되더라도…. 감내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이미 그녀가 이곳에 온 이상 포위망은 더 넓혀졌을 터…. 탈출은 이미 실패한 것이다.
‘끝났구나.’
실패하는 한이 있어도 시도는 해 보고 싶었다.
지금까지 어디서 뭘 하는지, 살아는 있는지 모든 소식을 숨기고 친구의 도움을 받아 어머니의 소식을 받아보고 있었다.
그런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고 계속 도적으로 살 바엔 차라리 잡혀 죽는 한이 있더라고 시도는 해보고 죽고 싶었다.
비록실패했지만, 지금 그는 여한이 없었다. 자신이 부족하여 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까.
적어도 자신을 잡으러 온 사람이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으니 더욱 그랬다.
*****
수색이 한창일 때 어디선가 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스틸베어의 소리야.”
“가까운데요? 조금만 더 가면 소리의 근원지가 보이겠네요.”
“혹시 모르니까 베로니는 주변 살피면서 이루스를 챙겨.”
“맡겨 줘요. 누님!”
여기까지 말한 카밀라가 속도를 높여 달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베로니 역시 내 옆에서 속도를 점차 높였고 나 역시 두 사람을 따라 빠르게 이동했다.
주변의 환경이 빠르게 지나가며 어느 순간 빽빽한 나무 숲에서 공터 비스무리한 공간에 들어섰다.
“있다!”
“바논!”
“저 녀석 하필이면 나무에 올라갔잖아. 올라갈 거면 좀 두꺼운 나무로 올라가지 저런 얄팍한 나무에 올라갈 건 또 뭐람….”
“누님 어쩌죠? 위험해 보이는데?”
“배신자는 무조건 살려서 데려간다. 눈에 보이는 스틸베어는 한 마리뿐이니 빨리 정리하고 놈을 포박하겠어. 베로니! 날 도와!”
“하하하! 근질거리던 참에 잘되었네. 야! 이 자식아!!! 이쪽이다!!! 워어어어!!!”
우렁찬 베로니의 소리가 숲을 흔들 정도로 크게 울려 퍼졌다.
그런 큰 소리를 가까운 곳에 있는 스틸베어가 듣지 못할 리가 없었다.
놈은 나무를 때리려던 행동을 잠시 멈추며 고개를 돌려 베로니와 눈이 마주쳤다.
“크렁!!!!!!”
자기도 목소리 하난 크다는 것을 어필하려는 것일까?
베로니의 큰 호통에 화답하는 듯 녀석이 입을 쩍! 벌리며 포효를 토해냈다.
슬쩍 곁눈질로 베로니를보았다. 그녀는 지금 전투 전의 흥분으로 즐거운 듯 웃고 있었다.
“좋아! 좋아! 어서 덤비라고 이 곰탱아! 이 형님이 상대해 주마!!!”
‘넌 여자고…. 저 스틸베어가 수컷이라는 전제는 어디에 깔린 거야….’
중요한 내용은 아니지만, 난 이때만 해도 몸집이 크고 근육이 발달한 쪽이 암컷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이게 아니고, 내 옆에서 흥분으로 부들거리던 베로니가 쏜살같이 뛰어 나갔다.
쾅!!!
거대한 망치로 스틸베어의 몸을 때리는데 그 어디에서도 육질이 다져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마치 망치로 쇠를 두드리는 듯한 날카로운 소음이 들려왔다. 놈의 이름이 왜 스틸베어인지 이제 좀 알 것 같았다.
“으럅!!!”
콰앙!!!
콰앙!!!
베로니는 한 번의 공격으로 끝내지 않고 망치를 계속 휘두르며 스틸베어의 넋을 빼놓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엄청난 완력이었다. 저 무겁고 큰 무기를 자유자재로, 그것도 한 손으로 다루다니 정말 대단한 모습이다.
“넋 놓지 말고 가서 네 친구를 구해…. 아니…. 포박해.”
“알았어….”
베로니는 망치로 녀석을 공격하다가 도중에 잠시 망치를 거두고는 비어있는 왼손을 이용해 놈의 등가죽을 꽉 쥐었다.
그리고는 힘으로 놈을 끌어당기며 놈의 위치를 나무에서 더 멀리 떨어트렸다.
“이리 와라. 형님하고 면담 좀 하자.”
“크어엉!!!”
퍽!!!
스틸베어는 끌려가는 것을 느끼며 망치에 얻어맞으며 잠시 놓았던 넋을 찾았고 눈앞에 있는 베로니의 배를 향해 앞발을 강하게 휘둘렀다.
그러나 베로니는 그 앞발의 공격을 받고도 꿋꿋하게 뒷걸음질 치며 놈을 끌어당긴다.
“크핫! 좋아. 더 해봐! 더 해보라고! 정말 짜릿했어!”
고통을 즐긴다? 아니. 고통이라 생각하는 것도 아닌 듯했다.
스틸베어의 그 엄청난 앞발이 스치고 지나간 나무기둥을 보며 다시 베로니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복부에는 그 어떠한 상처도 없고 그저 맞은 부위가 조금 붉게 변했을 뿐이었다.
완력뿐만이 아니라 엄청난 강도의 몸도 가진 듯했다.
현재 카밀라 소속 단원 중에 가장 레벨이 높은 사람이 바로 저 레벨 48의 베로니다.
역시…. 레벨은 모든 강함을 나타내는 지표란 말인가…. 저런 괴물 같은 전투가 가능하다니 말이다.
“내려와.”
“그래….”
“멍청한 녀석….”
“후후…. 미안하다.”
“뭐가?”
“너한테…. 친구를 잡게 만들어서.”
“입 닥치고 있어….”
차라리 도망치려고 하거나 좀 더 저항했다면 내가 더 냉정하게 반응을 할 텐데.
이 상황에 사과라니 정말이지 나쁜 친구를 둔 기분이었다.
그러나 저항하지 않고 얌전하게 잡혀준 바논 덕분에 안전하게 이 자리를 이탈할 수 있었다.
내가 바논을 구출한 것은 확인한 카밀라가 움직였다.
스팟!!!
피슷!!!
딱 두 번이다. 소음이 울린 순간이, 딱 두 번이었다.
처음 소음과 함께 카밀라가 눈앞에서 사라졌고 두 번째소음에서 스틸베어의 목이 몸과 분리되었다.
지금까지 수련하면서 그녀와 겨루었지만…. 지금까지 그녀가 날 많이 봐주었다는 것을 지금 이 장면 하나로 알 수가 있었다.
고블린이나 잡으면서 나 자신이 강해지고 있음을 점점 직감했지만, 난 아직도 우물 안의 개구리였던가….
스틸베어의 목을 간단하게 잘라낸 카밀라는 사용한 무기인 채찍을 다시 돌돌 말아서 허리에 장착했다.
“네 덕분에 약점을 노려서 쉽게 잡을 수 있었네.”
“에이. 뭘 이런 걸 가지고 누님 실력이 뛰어난 거죠.”
“칭찬을 해줘도 꼭…. 그만 돌아가자. 베로니는 이 녀석 몸 챙기고 이루스는 바논 저 녀석 도망치지 못하게 확실히 감시해.”
“알았어.”
“알았습니다.”
크헝!!!
“쯧…. 한 놈이 더 오는군.”
“마침 부족했는데 잘 되었네요. 놈은 제가 상대해도 되죠?”
“안돼. 시간이 너무 걸리면 다른 놈들이 깨어날지도 모르니까 아까처럼 행동한다.”
“에이…. 아쉬워라.”
못내 아쉬워하며 또 다른 스틸베어를 향해 달려가는 베로니, 그리고 그 뒤에서 두 존재가 격돌하기를 기다리던 카밀라가 날 돌아본다.
“녀석 데리고 일단 고블린 구역까지 이동해. 그곳이라면 위험하지는 않을 테니까.”
“알았어. 무사히 돌아와.”
“하. 뭐라니? 날 뭐로 보고 그런 걱정을 해…. 뭐…. 걱정은 고맙다.”
쾅!!!
격돌한 베로니와 스틸베어를 바라보며 카밀라가 움직였다.
잠시 보인 그녀의 볼이 붉어졌다는 기분을 느끼는 순간 다시 그녀의 소리가 울렸다.
“달려!!!”
“가자 바논.”
“으, 응!”
바논의 손을 묶은 밧줄을 잡아 끌며 빠르게 스틸베어 서식지를 주파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피부가 찌릿할 정도로 느껴지던 그 특유의 분위기가 많이 가신다.
대충 고블린 서식지에 도착한 것인지 스멀스멀 놈들의 살기가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고블린이나 워리어는 이제 내 상대가 되지 않는다.
레벨이 높아지니 여유가 생기는 기분을 드디어 느낀다.
뭐 아까의 그 괴물같은 전투를 보면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들지만, 나중엔 나역시 저렇게 되는 것일까….
안전한 곳으로 오니 손이 묶여서 얌전히 끌려오는 바논이 신경 쓰였다.
그는 입을 꽉 다문 채 나에게 얌전히 잡혔고 달아나려는 시도도, 발버둥도 없었다.
왠지 모르게 그런 모습이 나에게 짜증을 준다. 차라리 발버둥을 치지…. 제 죽을 곳으로 얌전히 따라오다니…. 시발 새끼.
“뭐라 할 말 없어?”
“무슨 말….”
“놔달라거나 뭐 그런 거. 나 그래도 네 친구인데 그런 부탁 정도는 한 번 해봐야 하는 거 아냐? 아니면…. 날 뿌리치고 도망이라도 치려는 발버둥을 치란 말이야.”
“됐어…. 친구에게 폐를 끼칠 수 없다고.”
“이미 끼칠 만큼 끼쳤어. 자식아…. 지금 네가 널 데려가면 너 죽어…. 친구를 죽을 곳으로 데려가게 하다니…. 넌 진짜 시발 새끼야…. 좆 같은 새끼라고”
“알고 있어…. 미안하다.”
“사과하지 마!”
“미안….”
“사과하지….”
“…….”
“…마.”
후…. 이 문답은 나에게 별로 이롭지 않았다.
그저 기분만 더 잡칠 뿐이었다.
그렇게 나와 바논은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지 않고서 결국 도적단 아지트의 입구 가까운 곳까지 당도하게 되었다.
“여기 있었군.”
거리가 벌어졌던 카밀라와 베로니가 합류했다.
베로니는 망치를 등에 메고 양어깨에 사냥한 스틸베어의 목 없는 시체를 들쳐메고 있었다.
나에게 다가오는 카밀라, 그녀는 내 손에 쥐어진 바논을 결박한 밧줄을 넘겨 받는다.
“가자.”
“카밀라.”
“허튼 생각 하지 마. 안 그러면 너도 죽어.”
“…….”
바논은 결국, 도적단 아지트에 감금 당했다.
아무것도 없는 빈 창고에 거적때기 하나 걸치지 않는 자연 그대로의 상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