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11. 체력단련.
“거기서 뭐 해!”
“음?”
타이밍 좋게 카밀라가 등장했다.
게이트는 계단 옆에 설치되어 있고 이 복도는 계단과 연결이 되어 있다.
그러니 내 목소리와 에탄의 목소리가 충분히 들릴 거리였다.
대충 시간을 끌면서 그와 대치하고 있으면 그녀가 도와주리라는 내 생각은 맞아떨어졌다.
“칫. 약아빠진 년 같으니라고. 생각 잘 해봐!”
“…….”
에탄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카밀라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혀를 차고는 날 옆으로 밀치며 성큼성큼 복도를 빠져나가 사옥 안으로 사라졌다.
모르긴 몰라도 카밀라가 대 두령의 말을 전달하면서 또 으르렁거렸을 것이다.
카밀라와 그의 사이는 매우 좋지 않아 보였으니 안 봐도 훤하다.
“배운 대로 잘 했네?”
“제가 학습은 좀 빨라요.”
“이빨 보이지 마라. 누가 웃어도 좋댔어?”
“죄송합니다.”
“흥. 재미없네. 부하 놀리는 재미도 몰라? 농담한 거라고.”
“제가 성격이 워낙 재미가 없어서.”
“뭔가 결심을 한 표정이네. 말투도 원래대로 돌아온 것처럼 자연스럽고. 이제 미련은 없지.”
“예. 가죠….”
뒤를 돌아보며 내 친구, 선배들이 갇혀있는 방향을 한 번 바라본 뒤 마지막 미련의 끈마저 잘라내 버린다.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마지막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 내며 그녀에게 대답했다.
“이제 미련 따위 없으니까요.”
“가자.”
“네”
고향 세계로 돌아온 직후, 다시금 연고도 없는 땅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벌써 세 번째 게이트 이용이다. 처음에 느꼈던 울렁거림도.
두 번째 느낀 어지러움도 이제는 없다. 자연스럽게 통과하여 새로운 세계에 이동했다.
“저기…. 간부님.”
“카밀라라 불러도 좋아. 간부와 단원은 단계 하나 차이야.우리 자마칸대는 두령님을 제외하면 존칭을 붙이지 않아도 좋으니까 이름만 불러. 정 어색하면 간부라고만 불러도 좋아.”
“네. 카밀라 간부. 전 이제부터 뭘 하면 좋은가요?”
“오늘부터 체력을 단련할 거야. 그러니까 각오하는 게 좋아. 난 우리 대의 단원이 약한 꼴은 절대 못 보니까. 발목을 잡을 거 같으면 대 두령님의 말대로 널 돼지우리에 넣어 버리고 남자들 벌줄 때 사용할 거야. 알아들었지?”
“네…. 네!”
체력 단련이라…. 지창욱 선배의 인도로 한 번 가보았던 헬스장에서도 며칠 버티지 못한 나였다.
그 정도로 체력이 형편이 없는 편인데 과연…. 잘 될까 싶다.
하지만 돼지우리에서 남자들 벌주는 도구 역할이 되기는 죽기보다 싫었으니 노력해야 하겠다.
카밀라의 뒤를 따라 도착한 곳은 이들의 아지트 밖의 산이었다.
산에 아지트가 있다니…. 이러면 도적이라기보다는 산적이 아닐까?
뭐…. 자기들이 도적이라고 하니 그냥 그러려니 하겠지만, 산 중턱에 있는 아지트의 존재는 공격하기 까다롭고 방어하기는 수월해 보인다.
“지금부터 산을 타고 오를 거야.”
“네?”
순간 잘못 들었나 싶어 귀를 의심하여야 했다.
산을 타라는 말은 이해가 가는데…. 지금 이곳에는 깎아지는 절벽과 같은 오르막길을 제외하면, 카밀라와 함께 걸어온 아지트로 되돌아가는 길뿐이었다.
산을 타고 오르라는 말은 이 절벽이나 마찬가지인 오르막길을 오르라는 말일 것이다.
“말대답할 시간 있으면 출발하는 게 어떨까? 혹시 체벌이 있어야 잘 하는 타입?”
촤악!!!
그녀의 채찍이 내 다리의 땅을 정확히 때린 뒤 되돌아간다.
그 무시무시한 장면에 침을 꼴깍 삼키며 앞으로 가도 뒤로 가도 모두 지옥뿐인 이 상황을 한숨으로 넘겼다.
“가, 갈게요.”
“맨 위에 깃발이 있을 거야. 훈련용으로 놓은 거니까 그 깃발 찍고되돌아와. 다시 말하지만. 여기서 저 위까지는 훤히 보이니까 도중에 되돌아오는 꼼수 따위는 통하지않아. 네 모습이 내 눈에 보이지 않는 위치가 깃발의 위치니까 조금이라도 네 모습이 보였다면 돌아오는 순간 넌.”
촤악!!!
또 한 번 채찍이 땅을 후려쳤다. 먼지가 일고 모래가 튄다.
저 채찍이 몸을 때린다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식은땀이 흐를 것만 같았다.
이 절벽 같은 오르막을 내가 타고 오를 수 있을까?
“출발해!”
불호령 같은 외침에 난 나도 모르게 발을 놀렸다.
높이가 엄청난 오르막길이다. 다행히 도중 도중에 깊이 박혀 있는 바위들 덕분에 밟을 곳이 있어서 그것을 이용해 오르막을 점차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헉…. 헉…. 헉….”
저질 체력이 벌써 신호를 보내오고 있다.
팔다리가 다 후들후들 떨려오고 호흡도 거칠어졌다.
하지만 아직 절반도 오르지 않은 초반 구역이다. 오늘 해가 다 떨어질 때까지 과연 저 위에 오를 수 있을지 난감하다.
텁!
“으…. 윽!”
간신히 다음 바위를 향해 손을 올렸다.
이러고 보니 암벽등반을 하는 기분이다.
물론 스포츠 등산은 안전장비를 모두 하고 밑에 매트릭스도 깔아주고 즐기는 그야말로 취미다. 이처럼 목숨을 걸고 하는 행위가 절대 아니었다.
발을 헛디디면 바로 굴러떨어질 정도로 가파른 경사다.
만약 바위가 무성한 이런 곳에서 굴러떨어지면 그냥 죽을 팔자였다.
그런 공포감 때문에 심장이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이대로 되돌아가면 저 채찍에 맞아 죽을 판이다. 오도 가도 못하게 된 것이다.
심한 처사에 치가 떨려왔지만, 뒤에서 재촉하는 목소리에 계속 손과 발을 놀렸다.
물론 등산에 비하면 그 각도가 심하지는 않았다.
한 50도 정도의 각도일까? 그래도 나에게는 그 정도 각도라 해도 지옥이다.
“멈추면 못 올라가! 어서 올라! 어서!!!”
“예!!!”
악에 받친 목소리로 대답을 하며 찢어지는 소리를 질렀다.
이게 기합인지 비명인지 분간도 안 된다.
지금 내 표정이 어떨지 모르지만, 아마 거울을 보면 일그러질 때로 일그러져 있지 않을까?
문득…. 머릿속에서 어젯밤의 일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제이슨, 그 남자가 날 마음껏 강간하던 그 장면이었다.
으득!!!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필요 없는 기억이 떠올라 기분만 잡쳤지만, 그게 또 그렇지만도 않았다.
분노가 힘을 준다는 말이 아예 말도 안 되는 소린 아니었던 듯하다.
지금 내 몸에서는 나도 모르던 힘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으아아아아!!!”
손을 한 번 움직였다. 그러자 머릿속에서 장면이 바뀌었다.
내 음부에 그 자식의 성기가 들어오는 장면이었다.
뒤돌아 있기에 그 장면을 볼 수 없는 상태였는데 마치 눈앞에서 제삼자의 입장으로 생생히 본 듯 머릿속에 구성되고 있다.
그 강렬한 고통이 느껴지자, 몸의 고통이 조금 가신다.
그리고 또 한 번 발을 디딜 힘이 솟아났다.
이윽고 다음 돌을 향해 손을 올리자 이번에는 그 수염이 덕지덕지 난 야성적인 제이슨의 느물거리는 얼굴이 떠오른다.
“흐아아아!!!”
이번에도 힘이 솟아올랐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와중에 초인적인 힘이 발의되는 것일까?
이젠 산을 타고 오르는 것이 내가 몸에 명령을 내리는 것인지 아니면 내 명령을 벗어난 몸이 멋대로 움직이고 있는지도 헷갈리기 시작했다.
“하악…. 하악….”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현실일까….
열심히 오른다고 올랐는데 어느새 정상이다.
눈앞에 있는 저 깃발이 그것을 나타내는 증표, 어느새 이 깎아지는 오르막을 다 올라온 것이다.
“다…. 왔다….”
뒤를 돌아보니 오르막의 아래로 카밀라의 모습이 보였다.
높이가 워낙 높은 곳이라 표정도 읽히지 않는 거리다.
그런데도 그녀의 표정이 눈에 박히는 느낌이다. 그녀는 날 바라보며 미소짓고 있는 듯했다.
그녀의 미소를 뒤로하고 내 몸이 전부 사라질 위치, 즉 깃발의 위치로 다가간 뒤 깃발을 한번 눌렀다.
굳이 이럴 필요는 없었지만, 이 한 번의 터치로 내가 이곳에 올라왔노라 하는 증표로 삼고 싶었다.
내려오는 길은 더 험난했다. 이미 몸은 체력이 고갈되었고 무게가 아래로 실리는 기분에 뼈마디가 아려오는 느낌이었다.
내일 일어나면 아마 몸 이곳저곳이 다 쑤실 것이라 예상되었다. 그래도 다행히 아무런 사고 없이 무사히 아래로 내려와 카밀라의 앞에 당당히 섰다.
“잘했어.”
그녀의 짧은 치하 한마디, 그러나 그 한마디에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들었다.
이 오르막을 타고 올랐다가 내려왔다. 바로 내가 말이다.
내가 이룩한 일이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어제 당한 치욕은 전혀 치욕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이지 이런 기분은 처음 느껴보는 신비한 기분이었다.
그래…. 몸을 한번 욕보인 것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내 목숨을 버릴 정도로 큰일일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방금 내 몸,그리고 정신을 모두 혹독하게 단련시킨 이 오르막은 한순간의 치욕보다 더 큰 공포와 목숨의 위협을 가해 주었다.
어제의 나는 너무도 무력하고 약한 존재라는 것을 이제야 알 거 같았다.
앞으로 내 세계가 원래의 모습을 찾지 못하면 이 세계를 그리고 내 세계를 힘으로 맞서 싸우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괴물 같은 자들, 그리고 괴물들, 그런 것들에게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내 몸을 지킬 힘과 능력이 꼭 필요하다.
여자라고 불가능하다 뒤로 숨는다면 나에게 남겨지는 것은 돼지우리의 벌칙 기계, 혹은 남자들의 욕정을 풀기 위한 창녀 짓뿐일 것이다.
“해가 지는군. 내일도 이곳에서 훈련할 거야. 한 번 올라갔다 데려오는 시간이 줄어들면 그땐 두 번, 그리고 세 번으로 수를 올리어다. 왕복 열 번일 무리 없이 다녀올 수 있는 수준이 될 때까지 이 일을 반복할 거야.”
“네…. 으….”
후끈한 것이 내 인중을 타고 흐른다. 입에 느껴지는 이 비릿한 느낌 코피인가….
그 코피의 뜨거움을 느끼며 휘청하고 한번 흔들리는 것을 마지막으로 기억한다.
다음 순간 내 정신이 되돌아온 곳은 처음 보는 천장의 방이었다.
“…….”
“일어났어?”
카밀라의 목소리다. 뼈마디가 다 쑤셔서 그녀를 바라보지도 못하겠다.
시간은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는 내가 몸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듯 발소리를 내며 내 옆으로 다가와 천장을 가리며 고개를 내밀었다.
“저질 체력이라 절대 못 올라갈 거로 생각했어. 아니 올라가도 거기서 뻗으리라 생각했는데 왕복이라니 제법이잖아.”
“몰라요…. 저도 어떻게 한 것인지.”
“네 몸속 어딘가에 숨어있던 힘이겠지. 참고로 그 오르막은 우리 단원들도 치를 떨지만, 첫 단원이 된 놈들도 두 번은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코스야. 어려운 건 절대 아니지. 저쪽 세계 사람들이 약하다고 해서 반이라도 겨우 갈 수 있으면 다행이다 싶었는데, 네 끈기는 마음에 들었어.”
두 번…. 말이 두 번이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세계 사람들은 정말 괴물이 따로 없다. 어떻게 이런 차이가 생기는 걸까…?
역시 레벨이 있고 없고의 차이일까?
“레벨이…. 없어서일까요?”
“흥. 레벨이 강함의 척도이긴 해도 1, 2 차이로는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아. 레벨이 없다는 건 그냥 레벨이 0이란 거잖아? 6레벨이 된 네가 그리 힘들어할 정도면 그냥 그곳 사람들 자체가 약한 거야. 날 때부터 마수의 위협, 삶의 위협, 귀족들의 폭압 등등 이곳에서 사는 사람들은 모두 죽음에 직면해 있다고 해도 무방해. 그것이 이런 차이를 만들어냈을 태지.”
“……….”
“쉬어. 내일 또 열심히 훈련해야 하니까.”
꾹!!!
“아흑!!!”
아픔에 신음하며 고개를 내리니 카밀라가 내 팔목을 누르고 있었다.
엄지와 검지로 마치 지압을 해주는 듯했다. 역시나 그녀는 내 팔의 상태를 보며 혀를 찼다.
“완전히 조졌네. 참아봐. 처음에는 아파도 누르다 보면 좀 시원해질 거야.”
아프지만 그녀의 배려에 고통을 참으며 밤이 될 때까지 그녀의 손에몸을 관리받았다.
여자끼리라 그런지 몸을 만지는 데도 그리 큰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아니 거부감뿐만 아니라 그냥 머릿속에 새하얗다. 너무 큰 고생을 한 뒤라 그럴까?
내 몸을 적당히 풀어준 그녀는 허리를 쭉 펴고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는 내 몸을 칙칙해 보이는 수건으로 닦기 시작했다.
물이 묻어 있기에 더러움이 씻겨지는 기분이지만…. 솔직히 이건 좀 수치심이 들었다.
그렇게 풀코스의 관리를 받고 조금 몸에서 힘이 나는 기분을 느끼며누워 있으니 내 옆으로카밀라가 누웠다.
침대 옆의 빛나는 램프를 조절한 그녀는 완전히 불을 꺼 주변을 깜깜하게 만든 뒤 아직 어둠에 적응하지 못한 내 위에 이불을 덮어 주었다
조금 까슬까슬하지만, 못 잘 정도는 아니려나.
아니 몸이 고생한 뒤라 바위 위에 누워 있더라도 잘만 잘 수 있을 거 같았다.
피곤함에 서서히 눈이 감겨오는 와중에 카밀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자라….”
“네….”
몸에 감겨오는 카밀라의 부드러운손길을 느끼며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