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고난도 던전에 떨어졌다-218화 (218/218)

27. 소풍(3)

“와! 와아!”

“불에 너무 가까이 가지 마. 위험해.”

“네에!”

코르디아가 꾸민 미니 꽃밭에 아이들을 가리키는 별들을 꾸며주고, 다른 딸이 원했던 장난감을 제대로 조립해주고 그걸로 놀고 지켜보고 웃고 뒹굴며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배불리 먹고는 식곤증에 새액새액 귀여운 숨소리를 내며 잠드는 아이들을 보며 선선한 바람을 만끽했다. 나 또한 네 아내들에게 둘러싸여 그녀들의 체향을 맡으며 누군가의 허벅지를 베고서 꿀맛 같은 낮잠을 즐겼다.

그리고 태양이 저물고 달이 열심히 정상을 향해 등반하고 있는 지금, 우리는 저녁 식사와 캠프파이어를 겸하고 있었다.

“지글지글~”

“지글지글이야?”

“응! 지글지글~”

고기는 역시 직화구이가 짱 아니겠나.

지구에 있을 때는 단 한 번도 맛보지 못했던 직화구이. 던전을 격파하고 이곳에 와서 딸들이 생기기 전에는 아내들이랑 몇 번 해먹은 적은 있었지만, 딸들이 생기고 나서는 처음이었다. 즉, 딸들은 이게 첫 직화구이인 셈이었고, 한 명도 빠짐없이 고기를 좋아하는 딸들은 침을 꼴깍 삼키며 육즙을 흘리는 고기의 자태에서 빠져나오질 못하고 있었다.

“으쌰. 이제 적당히 익은 거 같은데, 슬슬 먹어볼까?”

“네에!”

두꺼운 장갑을 끼고 고기를 끼웠던 막대기를 내렸다. 칼로 살짝 가르자 먹음직스럽게 생긴 속살이 보였고, 뜨거운 김이 폭폭 나오고 윤기 나는 육즙이 좔좔 흘렀다.

딱 적절하게 익었다.

“딱 맞게 익었네. 이제 썰면 되겠다. 칼 좀 줄래?”

“여기 있습니다.”

“고마워.”

카야가 건네준 식칼로 고기를 썰기 시작했다. 칼질을 한 번 할 때마다 여기저기서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슬쩍 눈을 들어보니 딸들의 시선이 전부 내 칼과 고기에 쏠려있었다.

‘이런 귀요미들.’

자식이 복스럽게 먹는 것만 봐도 부모는 배가 부르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었다. 비록 나는 자식일 때 배부르게 먹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지만, 그래도 부모된 입장에서 그 말을 직접 경험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보기만 해도 손가락으로 푹 찌르고 싶게 생긴 볼따구 네 쌍을 본 나는 괜스레 장난을 쳐보고 싶어졌다.

“생각해보니까 좀 덜 익은 거 같기도 한데… 조금만 더 익혀야겠다.”

“아아….”

“으….”

슬쩍 중얼거린 말에 딸들이 탄식했다. 그 와중에도 보채지 않고 얌전히 기다리는 모습들이 너무 기특하고 귀여웠다.

‘장난은 한 번만.’

어차피 이미 반쯤 잘라놔서 다시 불 위에 걸 수도 없었다. 나는 대충 다시 굽는 척하다가 고기를 다시 자르기 시작했다. 딸들은 이제 고기를 통째로 꿀꺽 잡아먹을 태세였다.

“자! 먹자!”

“잘 먹겠습니다아!”

“많이 먹어.”

“네에!”

딸들은 애기용 젓가락과 포크를 쥐고 전투적으로 고기에 달려들었다. 젓가락과 포크를 쥔 손이 너무 앙증맞아서 귀여웠고.

“마, 마이써!”

“마시써어!”

고기를 집어먹고 맛있다며 눈을 똥그랗게 뜨는 표정도 귀여웠고.

“아빠.”

“응?”

“아아~”

“세상에. 아빠 주는 거야?”

“네!”

“큭.”

“아, 아빠?”

“너무 맛있어서 그랬어.”

“헤헤.”

코르디아가 나한테 고기 한 점을 입에 가져다줬을 때는 심장을 부여잡고 쓰러질 뻔했다. 그러자 루디키아랑 피에타랑 비니아도 경쟁이라도 하듯 나한테 고기를 내밀어서 곤란했지만, 정말 행복한 곤란함이었다.

“배, 배불러어.”

“많이 먹었어?”

“네! 배 빵빵해요!”

“빠앙빠앙~”

“엄~청 마시써써요.”

“집에서 먹는 거랑은 다르지?”

“네에!”

굽는 사람도 행복하고 먹는 사람도 행복한 고기 타임이 끝나고, 해는 완전히 저물어 깜깜한 밤이 되었다. 딸들은 어린아이 특유의 빵빵한 배를 자랑하며 각자 엄마한테 안겨 모닥불을 멍하니 보거나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여기도 별자리 개념이 있긴 한데, 하나도 모르겠네.’

방구석 아싸라 밤하늘을 본 적은 가끔 밤에 야식이나 캔맥주 사러 편의점 갈 때 빼고는 없었지만, 별은 확실히 한국에 있을 적이랑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많았다. 제법 예뻤지만 관심은 딱히 없어서 별자리는 하나도 몰랐다. 던전 돌 때는 별자리 같은 거 관심 가질 여유는 없었고 세일럼을 빠져나와서는….

‘뭐, 다 변명이지.’

지구에서나 여기서나 별자리 모른다고 사는데 지장 있는 건 아니었다. 심지어 폴라리스처럼 일정한 방향을 가리키는 별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같은 국가 내에서도 지역에 따라 같은 하늘에 다른 별자리를 그리기도 하니 더욱 그러했다. 그래도 이런 좋은 날과 분위기 있는 밤에, 아빠가 딸들에게 별자리 한두 개 정도는 알려 주는 그림… 얼마나 기분 좋은 그림이란 말인가.

“우리 귀여운 공주님들.”

“네?”

네 딸들이 히히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별 엄~청 많지?”

“네!”

“우리, 하늘에 그림 그려볼까?”

“하늘에, 그림이요?”

“그래. 지금부터 저 하늘이 엄~청 큰 그림 종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별자리가 별건가.

별들의 무리를 그럴싸한 이미지로 한데 묶어 정의한 것이지 않은가.

우리 가족들이 발굴하고 꾸민 우리 가족 전용 캠핑 장소에 누워서 우리 가족들만의 별자리를 정의 내려도 어느 누가 잘못된 거라고 지적하고 지랄할 사람 같은 건 없었다.

“저~기 엄청 밝은 별 있지? 유달리 크고 밝은 별 하나.”

“오디요?”

“저기, 아빠 손가락 가리키는 방향 따라서 잘 봐봐.”

“아! 조고?”

“그래그래. 저거. 저걸 제일 먼저 발견한 게 에티니까, 저 별을 에티별이라고 할까?”

“우와! 네에!”

“나도 발견 했는데….”

“저, 저도….”

“으으.”

셋째 피에타가 제일 먼저 내가 말한 별을 찾아내서 그 별에 피에타의 애칭을 가져다 붙이니 나머지 딸들이 볼을 부풀리며 의욕을 드러냈다.

“에티별에서 오른쪽으로 좀 가면 에티별만큼은 아니지만 엄청 밝은 별 있지?”

“…네!”

“오. 어딘데? 아빠 손가락 움직여볼래?”

“…저어기에요.”

“딩동댕! 두 번째 별은 비니별로 하자.”

“…….”

두 번째로 맞춘 딸은 의외로 막내 비니아였다. 비니아는 피에타만큼 대놓고 표현하진 않았지만, 귀가 계속 잔망스럽게 쫑긋거리는 걸 보니 엄청 좋아하는 건 분명해 보였다. 누가 일루미나 딸 아니랄까봐, 제 엄마의 몸짓을 그대로 빼다 박아서 알아보기 쉬웠다. 귀여운 막내딸의 머리랑 귀를 동시에 쓰다듬자 짧고 통통한 꼬리가 붕붕 흔들렸다.

두 번째도 놓친 코르디아와 루디키아가 주먹을 불끈 쥐는 게 보였다. 어휴 저 앙증맞은 주먹들 좀 봐. 꽉 깨물어버리고 싶어.

“에티별이랑 비니별을 쭉 이어보자. 다들 이었니?”

“네!”

“잇다 보면 가운데쯤에 밝은 별 두 개 보이지?”

“가운데요?”

“그래. 조금 밑에.”

“아, 찾았다! 저기, 저기죠?”

“저도 찾았어요.”

“맞아. 그 별은 이제 코디별이랑 루디별이야.”

그제서야 코르디아와 루디키아도 자기 이름이 붙은 별을 바라보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아빠는 저 빛나는 네 개 별을 이어봤는데, 글쎄. 멋있는 배가 한 척 딱! 나타나는 거 있지?”

“배…요?”

“아빠랑 같이 그어볼까?”

딸들의 손을 잡고 손가락으로 하늘을 같이 가로질렀다. 하늘에서 보면 하나의 티끌만도 못한 존재의 손짓은 거대한 하늘을 도화지 삼아 인생을 항해하는 배를 그려냈다. 내가 상상한 별자리를 공유한 딸들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딸들도 내 상상 속의 배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별들을 저렇게 묶어놓은 걸 별자리라고 하는데, 배를 닮았으니 배자리라고 불러볼까?”

내 상상력으로는 별 네 개짜리의 아주 간단한 별자리를 그리는 것까지가 한계였다. 이름을 짓는 건 내겐 늘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심지어 딸들 이름도 전부 아내들이 지은 것이고 나는 후보들 중에서 어감이랑 뜻이 제일 마음에 들고 어울리는 이름을 픽한 걸 생각하면….

“우리 귀여운 공주님들도 어디, 별자리 하나씩 만들어볼래?”

“네에!!”

곧 네 딸들의 별의별 별자리들이 즉석에서 탄생했다. 네모자리 모자자리 같은 단순한 별자리에서부터, 초승달자리 우리집자리 개자리 꽃자리 등 비교적 복잡하고 규모가 큰 별자리들을 보면서 서로 자랑하고 웃고 감탄했다. 도중엔 아내들까지 합세해서 서로 만든 걸 비교하기도 하고, 별자리에 포함된 별이나 영역이 겹치기도 해서 어떤 별을 누구 별자리에 포함시킬 것인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렇게 23개의 별자리가 탄생했고, 전부 기록해놓았다.

딸들은 별자리 창조에 제법 지친 것인지 나나 엄마 품에 쏙 기대어 있었다.

나는 다시 한번 수많은 별자리로 정의되어 새롭게 보이는 밤하늘을 바라봤다. 약간 감성에 젖어들었다.

“하늘에 별은 많아. 너무 많아서 아빠랑 엄마가 가르쳐준 숫자로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지.”

“만 개보다도요?”

“그럼. 만 개를 만 번 세어도 한참 모자랄 정도지.”

“만 개를 만 번….”

벌써부터 딸들에게 천문학적인 스케일을 알려주려는 건 아니었다. 서너 살 아이에겐 만이라는 숫자도 충분히 세상에서 제일 큰 숫자였으니.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우주의 무한함이 아니었다.

“그 수많은 별들은 다 빛이 나. 근데 다 똑같이 빛나는 건 아니지? 어떤 건 엄청 밝게 빛나고, 어떤 건 약하게 빛나고, 어떤 건 밝은 별들에 가려 아예 우리 눈에 안 보이는 별들도 있을 거야.”

“네에.”

“태어날 때부터 키가 큰 사람과 작은 사람, 힘이 센 사람과 작은 사람, 머리가 똑똑한 사람과 덜 똑똑한 사람이 있듯이 별들도 그런 거야. 큰 별과 작은 별, 뜨거운 별과 덜 뜨거운 별, 밝은 별과 덜 밝은 별. 이렇게 말이야.”

나는 내 품에 안긴 코르디아를 꼭 안았다. 내 소중한 별들 중 가장 먼저 태어난, 반짝반짝 빛나는 별.

코르디아가 고갤 들어 날 바라보자, 귀여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목을 살짝 움츠리며 헤헤 웃었다. 귀여운 녀석.

“코디를 포함해서 우리 딸 모두는 태어날 때부터 아주 밝고 아름답고 환하게 빛나는 별이야. 근데 아빠는… 태어날 땐 아주 어둡고 작고 빛나지도 못하는, 그런 차갑고 왜소하고 외로운 별이었어.”

“아빠가요?”

“왜요?”

딸들에게 내 과거를 들려준 적은 없었다. 애들이 어리기도 했지만 굳이 알려줄 필요성도 못 느꼈으니까. 지금도 다 말하려는 건 아니었다.

“아빠한텐 든든한 아빠도 없었고 다정한 엄마도 없었거든. 형이나 동생도 없었고 친구도 없었어. 맛있는 걸 먹어본 적도 없고 재밌는 장난감을 가져본 적도 없고 그렇다고 내가 엄청 똑똑하거나 특별한 재능을 가진 것도 아니었어.”

“말도 안 돼요.”

“아빠 거짓말!”

“거짓말은 안 좋은 거랬잖아요.”

“거짓말이 아니야. 아빠는 정말로…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었어. 너희 엄마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야.”

한 치의 가감 없는 사실이었다. 게임 속에 떨어졌을 땐 불운이 극에 달했다 생각했지만, 그 뒤 첫 동료 영입 때 카야를 고른 건 내 인생의 모든 행운을 끌어다 쓴 판단이라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비록 수많은 고비가 있었지만, 그 뒤로도 셰이를 비롯해 강하고 아름답고 착하고 사려 깊은 다른 아내들까지 만나고… 나는 그녀들이 있어서 제 몫을 하는 한 사람으로서 살아있었고, 과분하게도 그녀들 이끄는 대장으로서 던전 격파라는 인생 과업까지 이룰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품에 안고 있는 코르디아부터 루디키아, 피에타, 비니아까지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딸들의 아빠가 된 지금은… 딸들만큼은 아니더라도 적당히 빛나는 별쯤은 되지 않을까?

“앞으로 언제나 기쁜 일, 재밌는 일만 있진 않을 거야. 물론 아빠 마음 같아선 그런 일만 가득했으면 하지만… 어떻게 이겨내느냐에 따라서 아빠 같이 작고 왜소하고 외로웠던 별도 나름 빛날 수 있게 된 것처럼, 우리 딸들은 아빠보다도 훨씬 착하고 재능도 뛰어나고 똑똑하니까 더 밝게 빛날 수 있을 거야.”

“아빠….”

“게다가 아빠랑 엄마가 옆에 있으니까. 힘든 거 있으면 언제든지 이야기 해야 된다?”

“네!”

“옳지.”

“헤헤.”

부끄러우니 감성에 취해 주절거리는건 여기까지만 하고 따뜻하고 말랑하고 귀여운 코르디아나 꼭 껴안자.

인생 별거 있나.

이게 인생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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