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소풍(1)
소풍! 피크닉! 현장체험학습!
어떤 말을 사용하든 유진은 저 단어들을 보면 좋으면서도 안 좋은, 상반된 기억들이 떠올라 애매한 기분이 들었다.
소풍, 이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즐거움과 신나는 느낌이 좋았다. 친구들과 교실이 아닌 다른 곳에서 당일치기 내지는 1박 2일의 재밌는 시간을 보내며 학교 식당 밥이 아닌 제각기 준비한 맛있는 별식을 까먹는… 그런 즐거운 시간이었으니까.
동시에 유진은 그 대부분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했다. 생모는 소풍에 들어가는 ‘별도’의 비용을 지불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게 문제였다. 그런 여자가 도시락을 싸줄 리도 만무했다. 고딩만 됐어도 어떻게 알바라도 해서 비용을 충당했을 텐데, 초딩이 무슨 돈이 있겠나.
차라리 정말로 애미애비가 없었다면, 놀림받거나 멸시를 받았을지언정 보육원에 들어가서 최소한의 지원이라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없느니만도 못한 생모 때문에 유진은 초등학교 6년 중 5년을 모조리 불참해야만 했고, 6학년 때 마음씨 좋은 담임 선생님 덕에 딱 한 번 소풍에 참여할 수 있었지만… 그때도 사실 그닥 즐겁지는 않았다. 이미 소문이 쫙 퍼져있어서, 친구라고 할 놈도 없었으니까.
그래서 소풍이라는 단어에 아직도 미련이 남았는지도 모르겠다. 비록 친구들끼리 별것도 아닌 이야기에 낄낄대고 웃으면서 간식을 까먹거나 다양한 오락거리를 즐기진 못했지만, 지금은 백만 배 천만 배 소중하고 사랑하는 아내들과 딸들이 있었다.
소풍.
가족 소풍.
가족 여행은커녕 외식조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유진은, 이세계에 와서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며 던전을 깨부수고 그 와중에 아내 넷을 두고 딸 다섯을 몇 년 동안 키우고 나서야 소풍다운 소풍을 인생 최초로 경험하게 되는 것이었다.
즉, 유진은 지금 딸들만큼 설렌 상태였다는 말이다.
“위험 요소는 싹 제거해놓아야 돼.”
“그럼요.”
“먹을 거. 먹을 거가 중요하지. 평소에 잘 먹지 않는 메뉴들로다가 다양하고 양도 많게 세팅해야 되고.”
“그럼요.”
“놀거리랑 볼거리도 확실히 해야 돼. 놀거리는 내가 생각해놓은 게 있으니까 괜찮은데 볼거리가 문제네. 경치 기가 막히게 좋은 곳 없나? 바람 선선하게 불면서 막 구름도 뭉게뭉게 떠다니고 꽃도 흩날리고 밑에는 평야가 쫙 펼쳐져있는 그런 스팟….”
“진정해요 유진. 하나씩 차근차근 같이 준비하면 되잖아요? 언제 반드시 소풍을 가야하는 것도 아니고, 너무 서두를 것 없어요.”
“그, 그래. 그렇지. 크흠.”
세스티아가 유진을 진정시키자 그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헛기침을 했다. 나머지 아내들이 그런 그의 모습을 귀엽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아. 왜. 뭐.”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 왜 나만 신나? 나만 기분 좋은 거 아니잖아?”
“맞습니다. 저도 지금 무척 신나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애, 애들 보러 갈게.”
유진은 킥킥 웃는 아내들에게서 급히 도망쳤다.
“엄마가 어렸을 때, 아빠가 제일 큰아들이라고 푸념한 적이 있었는데 이제야 그 뜻을 알겠어. 물론 좋은 의미로!”
“유진같은 아들… 꼭 갖고 싶네요.”
“같이 힘내봐야지? 혹시 알아? 이 다음 자식들은 아들만 다섯 나올지?”
“큰 유진 작은 유진 합쳐서 여섯 유진…!”
“그건 그것대로 무섭습니다….”
**
부모가 소풍 준비에 한창일 무렵.
아이들 역시 옹기종기 모여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었다.
“아빠가 잔뜩 기대해도 좋다구 그랬는데에.”
“징짜? 나 못 들었는데!”
“엄마도 그랬어.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다 얘기하라구.”
“와아!”
“좁아….”
“말랑말랑~ 폭신폭신~”
“으으….”
“너무 비니 괴롭히지마.”
“괴롭히는 거 아닌데에….”
그 사건 이후 코르디아의 제안으로 네 자매는 하루에 한 번 무조건 코르디아의 방에 모이기로 했는데, 코르디아의 침대에 다 같이 누워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던 아이들은 저마다 먹고 싶은 음식들을 늘어놓기도 했다.
“나는 그게 제일 기대대!”
“뭐가?”
“집 밖은 어떨까!”
비니아를 뒤에서 껴안고 볼을 부비던 피에타가 그리 말하자 날숨 때문에 간지러웠는지 비니아가 목을 움츠렸다.
“집 밖은 위험한 게 많다구 아빠엄마가 그래짜나? 집이 좁은 건 아니지만, 그래두 하고 싶은 게 많았는데… 막 이것저것 못했던 거 할 수 있을 거 같아서 너무 신나!”
“에티 말이 맞아. 집 안에서 하는 술래잡기랑 숨바꼭질은 금방 끝나니까 금방 질렸지….”
“으응! 히히. 맛있는 것두 마아아니 먹어야지! 비니도 많이 먹어야대! 가치 마니 먹자!”
“으, 으응. 윽, 간지러워….”
“히히.”
동생들의 모습을 조금 떨어져서(그래봐야 30cm 미만이다) 바라보던 코르디아는 자기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에 뿌듯함을 느꼈다. 코르디아 또한 말은 안 하고 있지만 기대감을 잔뜩 품은 건 마찬가지였다. 어렸을 때의 유진이 그랬듯, 코르디아 또한 소풍이라는 것 자체에 가슴이 콩닥콩닥 반응하고 있는 것이었다.
동심.
아무리 정신적으로나 지능적으로나 지나치게 성숙한 유진의 딸들이었지만, 어린 마음 자체가 어디로 사라진 것은 아니었기에.
마냥 신나기만 한 동생들과는 달리, 코르디아는 나름대로 어떻게 놀지 계획을 짜고 있었지만… 코르디아는 알까. 그것 또한 소풍의 재미라는 것을.
소풍을 기다리는 아이들 입장에선 매우 느리게, 준비하는 부모들 입장에선 매우 빠르게 시간이 흘러 소풍 가는 날 새벽이 되었다.
본래 아이들은 아침잠이 많았으나, 꼭두새벽부터 부엌과 거실을 오가며 도시락을 비롯한 각종 소품들을 준비하던 유진과 아내들이 만든 소음 때문인지 코르디아가 눈을 비비며 방문을 열고 나왔다.
“안녕히 주무셔써요….”
“우리 딸, 벌써 일어났어?”
“네….”
“이런. 저희 때문에 시끄러워서 깼나봐요.”
“더 자 우리 딸. 아직 몇 시간 남았는데.”
“괜차나요….”
유진의 품에 안긴 코르디아가 고개를 저었다. 코르디아는 네 딸 중 가장 아침이 약했는데, 그만큼 잠에서 갓 깬 아침에 평상시의 모습과 가장 갭이 컸다. 코르디아의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유진의 얼굴이 바보같이 변했다. 특히 오늘은 소풍 가는 날. 딸들이 소풍 갈 생각에 잠을 설친 거라고 생각한 유진은 딸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볼을 깨물어주고 싶었다.
“유진. 코르디아는 그만 괴롭히고 소파나 침대에 눕혀놓고 오십시오. 일손이 모자랍니다.”
“알았어알았어. 뽀뽀 한번만 하고.”
유진은 떨어지기 싫어하는 코르디아의 엉덩이를 토닥이며 침대에 다시 눕혀주었다. 그리고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부엌에 발을 들였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세상에. 아직도 다섯 가지가 더 남은 건가?”
“여섯 가지지.”
“놀랄 시간도 없어. 어서 과일 껍질 깐 다음에 으깨서 즙 좀 짜내봐.”
“어, 저거? 얼마나?”
“반 컵 정도 나올 때까지.”
“남은 건?”
“일단 하고 나서. 아우 정신없어.”
놀거리 소품들을 준비하던 유진은 군말 없이 일루미나의 지시를 따랐다. 신나서 자기가 먹고 싶은 것들이랑 아이들이 좋아하는 메뉴를 닥치는 대로 말했더니 아내들이 전부 마음에 담아두었던 모양이었다.
“이거 즙 다 짰어!”
“여기다 놔줘!”
“다음엔? 다음에 또 뭐 도울 거 없어?”
“딱히 없, 아니다. 저기 야채들 담아놓은 바구니 있지.”
“어.”
“샐러드용인데, 먹기 좋게 다듬어봐. 씻은 거니까 또 씻을 필요는 없어.”
“오케이.”
“세스티아 언니! 그쪽은 완성하려면 얼마나 남았어요?”
“10분!”
“바로 다음거 준비할게요 그럼!”
“네!”
딸들이 다 깨고 오늘을 위해 아내들이 성심성의껏 준비한 새 옷을 입고 신나서 꺄르륵 웃고 떠들 때, 모든 준비가 끝났다.
내 아이들에겐 기필코 즐거운 추억을 안겨주고 말리라! 엄마에게 도시락 한 번 못 받은 이 원한을 슈퍼도시락 세트로 되갚아주마!
딸들아.
너희들의 위장은 충분히 비워졌니?
너희들의 에너지는 충분히 채워졌니?
“가자!!!”
“와아아아!!!”
유진과 아내들이 세일럼을 빠져나온 지 약 4년 반.
유진과 그의 가족은 처음으로 집 밖을 나섰다.
**
사실, 소풍에서 제일 중요한 건 뭐니 뭐니 해도 소풍 장소 아니겠나. 유진이 아내들이랑 제일 고민했던 게 바로 소풍 장소를 어디로 할 것인가였다. 유진의 집은 반경 1km 안에 다른 민가도 없는 외딴곳에 있었고, 애초에 평야에 있지도 않았다. 여기가 개같은 경쟁사회의 대한민국도 아니라 애들 교육 문제도 신경 안 써도 됐고, 편의시설 같은 건 어차피 지구에 비하면 다 똥이었으니 차라리 남들 시선 없는 곳에서 안전하고 편안하게 살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별 불만 없이 행복 라이프를 살고 있었는데, 소풍 장소를 정하는 건 난관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산이라고 하기엔 애매한 크기의 언덕과 얕은 개울, 그리고 적당히 보기 좋게 심어진 나무들과 꽃들. 절로 마음이 평안해지는 풍경이었지만, 다소 심심한 것 또한 부정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며칠씩 걸리는 도시로 가는 것도 별로였다. 도시는 생각 이상으로 시끄럽고 더럽고 위험한 곳이었다. 딱히 아름다운 것도 없었고 배울 것도 없었다. 그래서….
‘없으면 만들면 되지.’
우리 집이 있는 언덕은 우리 사유지였다. 정확히는 라엘라님 빽으로 카야의 이름 앞에 달린 땅이었기에, 여기에 뭘 하든 우리 가족 마음이었다.
나랑 아내들은 미리 적당한 장소를 물색했고, 그곳으로 가서 아이들과 함께 우리들만의 캠핑장을 꾸밀 생각이었다.
“짜자안~!”
“우와아….”
“헤에….”
“이쁘다…….”
약 100평 남짓한 공간이었다. 초미니 분지같은 느낌인 장소였는데, 그늘도 적절하게 있고 앞은 탁 트여서 전경도 좋았다. 그러면서도 뭔가 아늑한 느낌이 들어서, 아이들이 벌써부터 자연 잔디를 밟으며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포근해졌다.
“고생한 보람이 있다. 그치?”
“그러네요. 여기 찾는다고 고생하고, 찾고 나서 잔가지랑 잡초들 정리한다고 고생하고, 툭 튀어나온 바위랑 나무뿌리 좀 어떻게 한다고 고생하고.”
아이들의 웃음으로 전부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이름을 굳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저주받을 생모야. 당신은 이런 기쁨, 이런 종류의 행복이 있다는 게 평생 몰랐겠지. 평생 모를 거고.
“잡았다!”
“꺄하하! 간지러~”
아이들 옷이 금세 잔디투성이가 되었다. 애들은 뭐라고 말하지 않아도, 그저 뛰어놀 공간만 있어도 알아서 잘 놀고 웃었다. 그래도 준비한 걸 안 써먹기는 서운하지 않은가.
우리는 이 장소를 꾸밀 준비물, 심기용 꽃들과 애들이 노는데 사용할 간단한 놀이기구나 조리 기구, 휴식 기구 등을 꺼냈다.
우리가 하나씩 바닥에 늘어놓자 바닥에 누워서 숨을 몰아쉬던 딸들의 고개가 휙휙 이쪽을 향했다. 그러더니 슬금슬금 다가와서 저마다 관심 있는 것들을 쥐었다.
코르디아는 꽃.
루디키아는 미니 그네.
피에타는 미니 미끄럼틀.
비니아는 미니 망루.
마치 돌잡이하는 느낌이라 흥미진진했다.
“자아~ 우리 같이 조립해볼까?”
“네에!”
소풍은 이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