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평범한 가족(10)
“아빠, 엄마.”
“응, 코르디아?”
이 정도 시간이 흘렀으면 적당하지 않을까 싶어서 슬슬 나가려던 차에 오히려 코르디아가 안방 문을 열고 들어왔다.
조금 전까지 몰래 관찰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상당히 어색하게 대답한 것 같지만, 코르디아가 눈치채진 못한 것 같았다. 아니, 정확히는 눈치챌 상태가 못된다고 하는 게 맞겠지.
코르디아는 지금 안 그런 척 하고 있지만 온몸을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딸바보 아빠인 유진이 아니었으면 못 알아차리지 않았을까. 4살 짜리 아이가 그렇게까지 자기 상태를 숨길 수 있다는 것도 놀랍지만.
‘그거 때문에 긴장한 거겠지?’
‘그러겠지요.’
세스티아와 잠깐 눈으로 이야기가 통했다. 코르디아는 긴장하고 있는 것이었다.
자기가 싸운 건 아니지만, 큰언니로서 동생들의 싸움을 말리지 못 해서 죄송하다는 마음을 품고 있겠지. 안 그래도 코르디아의 성정을 알고 있었지만, CCTV로 보고 난 이후여서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코르디아. 아빠한테 할 말 있니?”
“…네.”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자상하게 대하자.
들어와서 우물쭈물하고 있는 코르디아에게 먼저 물어보자 그제서야 딸이 용건을 꺼냈다. 보여드릴 것도 있고 말씀드릴 것도 있으니 제 방이 와달라고.
기꺼이 그러겠다고 말했다.
다른 엄마들도 같이 와줬으면 좋겠다 덧붙였다. 그래서 그러겠다고 말했다.
각자 방으로 흩어졌던 아내들을 자연스럽게 불러모아 코르디아의 방 앞으로 모이니, 코르디아가 말했다.
“아빠 엄마.”
“응?”
“…아니에요. 열게요.”
코르디아가 문을 열었다. 그러자….
“아빠, 엄마… 죄송해요….”
“다신 안 싸울게요!”
“이기적으로 굴지 않을게요….”
“어, 어어…?”
루디키아, 피에타, 그리고 비니아.
코르디아를 제외한 세 딸, 즉 싸움의 당사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그들이 고개를 숙이고 울먹이는 말투로 제 부모에게 일제히 사죄를 청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딸들이 잘못했다고 해도, 이런 모습은 유진에게 적잖은 충격이었다. 무슨 엄청난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니지 않은가.
유진은 딸들의 모습에서 아주 순간이지만, 어렸을 때의 자신이 보였다. 그래서 기겁했고 씁쓸하고 당혹스러웠다. 딸들이 사과할 거라는 건 예상한 바였지만, 이런 형식은 아니었다.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우물쭈물, 사과는 하고 싶은데 입은 잘 떨어지지 않고… 그렇다고 사과를 안 하고 싶은 건 아니라 더 답답하면서도 눈치를 보다가 개미 기어가는 목소리로 죄송합니다… 라고 말하는 모습을 상상했었다. 특히 이번에 애들이 여러 가지 준비한 거, 예를 들어 반성문이라든지 편지라든지 그런 걸 먼저 내밀면서 작게 웅얼거리면 자연스럽게 안아주면서 등을 토닥여주면서 반성할 줄 아니 장하다고 다음부터 그러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고, 대화를 우선적으로 더 시도해보라고 타이르는 그림을 그렸었는데.
유진이 그렇게 제 나름의 이유로 충격을 먹어 굳어버린 사이, 그의 아내들은 달랐다. 그녀들 역시 유진과 마찬가지로 아연해진 건 마찬가지였지만 그처럼 굳어버리진 않았다. 함께 살면서 그의 옛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그의 사고방식도 어느 정도 이해했다지만, 기본적으로 그녀들은 현대 지구에 비하면 혹독하기 짝이 없는 이 세계에서 최소 20년 이상 살아온 자들이었다.
잘못을 했으면 고개를 숙인다. 그 정도가 심하면 무릎을 꿇는다. 거기에 물질적인 것이든 상징적인 것이든 다른 무언가를 추가적인 대가로 제시한다.
이건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언제 어디서 원한에 의해 목이 날아가거나 뒤를 찔리거나 쥐도 새도 모르게 실종되어도 할 말이 없었으니까. 물론 딸들의 잘못이 그 정도 험한 일을 당할 정도는 결단코 아니었지만.
그러니 딸들의 사과는, 그걸 직접 목격한 게 상당히 충격이긴 하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다들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까.”
첫 번째 부인인 카야가 총대를 멨다. 그녀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서 묻자 첫 번째 딸인 코르디아가 두 손을 기도하듯 꼭 모은 자세를 취하며 답했다.
“네. 카야 엄마. 저희 모두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어요. 이것들 봐주세요.”
코르디아가 가리킨 곳엔 CCTV로 제작과정을 봤던 찰흙 인형들이 있었다. 똑같진 않지만 누가 누군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특징을 잘 잡은 인형들이 오순도순 사이좋게 모여있었다. 인형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밝았다. 비니아의 뒤를 피에타가 껴안고, 피에타의 뒤를 루디키아가 껴안고, 그 모두를 코르디아가 껴안은 모습의 인형도 있었다.
“이것도요.”
화면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귀엽고 생각 이상으로 정교한 찰흙 인형에 엄마들이 넋을 잃고 구경하던 사이, 코르디아는 살짝 웃음을 되찾으며 또 다른 걸 내밀었다.
그림이 그려진 반성문이었다.
반성문에는 왜 싸웠고 싸울 때 어떤 감정이 들었고 무슨 생각을 했고 얼마나 아팠고, 싸우고 나서 얼마나 어색했고 얼마나 눈치가 보였고 얼마나 우울했는지, 앞으로는 이런 걸로 절대 싸우지 않겠다는 구구절절한 내용이 쓰여있었다. 딸마다 필체나 문장력이 달랐을 뿐 내용은 대동소이했다.
유진과 아내들이 말없이 반성문을 내려놓자마자 딸들은 각자 만든 종이꽃을 제 엄마에게 건네줬는데, 종이꽃을 받아든 그녀들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목이 꿀렁이고 눈가가 바르르 떨리고 턱에 힘이 빡 들어간 걸 보니….
“그리고….”
“아직, 남은 겁니까?”
“네, 네.”
피에타가 접은 은방울꽃을 가슴에 매단 카야가 감정을 추스리고 묻자 코르디아가 제 동생들의 손을 잡았다.
“루디, 에티, 비니.”
“으응.”
코르디아가 동생들을 부르고 손을 놓자….
“비니, 사랑해.”
“루디 언니, 비니 사랑해!”
“언니….”
쪽- 쪽-
제일 먼저 선보였던 찰흙 인형의 포즈를 그대로 따라하고 있었다. 가만히 있는 비니아를 루디키아가 백허그하며 볼에 뽀뽀하고, 그런 루디키아를 피에타가 비스듬히 뒤에서 허그하며 마찬가지로 볼에 뽀뽀하고. 슬그머니 다가간 코르디아가 앙증맞게 양 팔을 옆으로 쫙 뻗어 동생들을 꽉 끌어안으며 머리에 뽀뽀하고.
귀엽다. 너무 귀여웠다.
안 그래도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귀엽고 예쁜 딸들이 단체로 귀여운 행동을 하니 귀여움이 두 배가 아니라 제곱으로 불어났다.
하지만 유진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들 중 그 누구도 딸들의 귀여움에 얼굴 근육이 느슨해진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자 준비한 걸 모두 소진한 딸들이 침묵한 채 자신들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부모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부족한 건가?
딸들의 눈에 낭패감과 초조함이 드러났다.
지금껏 한마디도 하지 않고 지켜만 보고 있던 유진이 그때서야 입을 열었다.
“코르디아. 루디키아. 피에타. 비니아.”
“아, 아빠. 죄….”
“아빠가 미안해.”
“……네?”
갑작스런 유진의 사과에 코르디아가 멍하니 있을 때, 유진이 다가가서 딸을 끌어안았다.
토닥토닥.
말없이 등을 토닥이고는 나머지 딸들도 차례차례 똑같이 하자….
“우으….”
가장 활달하고 정이 많은 셋째, 피에타가 울먹이기 시작했고.
“히끅.”
“훌쩍.”
그러자 순식간에 감정이 증폭되고 전염되어 루디키아와 비니아까지 울게 되자.
“우, 으, 우.”
제일 먼저 유진에게 안겨있던 코르디아마저 눈물을 흘리며 아빠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유진은 딸들 모두가 동시에 우는 모습을 처음 보면서도, 그 와중에 일반적인 아이들처럼 시끄러울 정도로 우는 아이가 한 명도 없다는 것에 또 한 번 놀랐다.
울 때는 이렇게 울어라, 라는 교육을 한 적은 없으니 이것 또한 비정상적 조숙함에 포함된 것일까.
과유불급.
동심, 그리고 애늙은이라는 단어의 뜻이 이토록 뼈저리게 다가왔던 적이 없었다.
“우리 공주님들. 울어. 실컷 울어. 아빠가 다 잘못했으니까.”
“흐어엉….”
유진이 다시 한 번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딸들의 울음소리가 조금은 제 나이를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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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울었어 우리 울보 공주님들?”
“몰라요….”
루디키아-비니아 싸움 사건은 딸들의 대울음파티로 끝을 맺었다. 사건의 전말이야 어찌됐든 실컷 울고 나니 해묵은 감정이 해소되며 분위기가 정화되는 효과가 있었다. 다만 거하게 울고 나서 딸들, 특히 언제나 의젓한 모습을 보여줬던 코르디아가 심하게 부끄러워하며 대화를 거부한다는 귀여운 부작용이 존재했다.
하지만 코르디아가 누군가.
표현만 안 할 뿐이지, 비니아 못지 않은 아빠바보다.
유진이 볼을 부비며 꼭 끌어안자 코르디아도 안 그런 척 마주 볼을 부비며 마주 끌어안았다. 그러자 친모한테 각자 안겨있던 나머지 딸들도 빠져나와 유진에게 매미처럼 달라붙었다.
“아빠! 나도!”
“저도….”
“….”
“그래그래. 우리 공주님들.”
역시 이러는 게 전보다 훨씬 낫다, 유진은 생각했다.
“우리 공주님들?”
“우웅.”
아빠가 이제 그만 떨어지라고 말할 줄 알았는지 고개를 일제히 도리도리 젓던 유진의 딸들. 그러나 유진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게 아니었다.
“우리 다 같이, 소풍 갈까?”
“소풍…?”
“그래, 소풍. 평범한 가족이라면, 누구나 하는 재밌는 거지.”
“좋아요…!”
가족여행이라는 단어보다는 소풍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
평범하고 행복한 가족 생활을 추구한다면서, 여태껏 딸들이 너무 어리고 또 그들을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단 한 번도 집 이외의 장소를 데려간 적이 없었지만….
소풍을 시작으로, 지금부터라도 평범함을 되찾고 꾸려나가면 되지 않을까?
딸들은 이제 3,4살이고, 앞으로 더 행복할 시간이 많을 테니까.
“소풍, 소풍, 소풍~”
소풍으로 노래를 흥얼거리는 딸들의 얼굴에 동심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