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고난도 던전에 떨어졌다-211화 (211/218)

26. 평범한 가족(6)

‘…이래서 말은 끝까지 다 들어봐야 하는 거고, 가능하면 양쪽 말을 다 들어봐야 하는 거라지.’

간식과 오락이라는 금단의 쌍검을 장착한 유진에게 비니아의 입을 열게 하는 건 더 이상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평소엔 먹고 싶어도 많이 못 먹었던 달콤한 과자와 빵을 가져다주자, 머뭇거리던 비니아도 곧 입을 오물거리며 맛있게 먹을 수밖에 없었다. 달콤한 게 들어가니 기분이 좀 나아지고, 기분이 좀 나아지니 아빠랑 같이 오락할 여유도 생기고, 맛있는 걸 먹으면서 사랑하는 아빠랑 재밌는 오락을 같이 즐기니 유진이 묻는 말에 술술 대답한 것이다.

하나만 더 먹으면 안 되냐는 비니아에게 더 먹으면 여우가 아니라 돼지가 되어서 못된 마녀에게 잡아먹힌다고 말하자 겁을 먹고 얌전히 양치질하고 잠들었다.

한동안 비니아의 배를 토닥여주던 유진은 딸이 완전히 꿈나라로 떠난 걸 확인하자 소리 안 나도록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나왔다.

“유진.”

“어떻게 됐어요?”

“어떻게 됐어! 응?”

아내들은 벌써 이야기들을 끝낸 것인지 거실에 모여있었다. 그중에 유일하게 딸과 이야기하지 않은 일루미나는 앉았다 일어섰다가 다리를 달달 떨었다 손톱을 물어뜯었다가 꼬리를 붕붕거렸다가 아주 정신이 없었다. 아내들 표정을 보니 다들 말을 아낀 것처럼 보였다.

“쉿. 왜 다들 나와있어. 안방에 들어가서 얘기하자.”

“아, 응. 그렇지. 맞아.”

불안해하는 일루미나를 토닥거리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다들 자리에 앉자마자 일루미나가 재촉했다.

“다들 어떻게 됐어? 응? 얘들이 뭐라그랬는데? 어?”

“음….”

유진은 카야, 셰이, 그리고 세스티아와 한 번씩 눈을 마주쳤다. 다들 표정이 뭔가 애매한 것이, 딸에게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들어서 어떻게 이야기를 하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 그녀들도 유진의 표정을 보고 그리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그… 일단 진정해. 그렇게 보채지 않아도 다 이야기 해줄 테니까.”

“진정이 안 돼.”

“세스티아.”

“네, 유진.”

세스티아가 손을 뻗어 일루미나를 가리키자 연녹색 빛이 그녀를 감쌌다. 그러자 일루미나가 약간이지만 안정을 되찾았다.

“고마워, 세스티아. 말하기 전에 일루미나. 미리 말하겠는데, 우리 말이 다 끝나기 전까지는 말을 끊지 말고 흥분하지도 말고 화내지도 않았으면 좋겠어.”

“그렇게까지 말할 정도야? 대체….”

유진의 말에서 안 좋은 낌새를 느낀 것일까. 일루미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는 유진의 마음도 좋지는 않았다.

“우선… 이번 사건은 뭔가 우리가 예상했던 일방적인 따돌림 같은 게 아니라는 거. 일단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다른 쪽은?”

“동의합니다.”

“동의해요.”

“…저 또한 동의해요.”

카야, 셰이, 세스티아가 전부 유진의 말에 동의하자 일루미나가 눈을 부릅뜨며 엉덩이를 들썩였으나 직전에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는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역시 다들 비슷한가보네. 그래도 똑같은 사건이라도 각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게 다를 수 있으니까… 일단 장녀인 코르디아의 얘기부터 들어볼까?”

“알겠어요. 그럼 저부터 얘기해볼게요. 코르디아는….”

세스티아가 차분한 어조로 코르디아의 이야기를 전달하기 시작했다. 비니아의 이중적인 태도와 그로 인해 빚어진 자매 사이의 사소한 갈등에서 빚어진 물리적 충돌. 충돌 이후 보인 비니아의 과민 반응 때문에 사이가 더 어색해진 것을 넘어 무서워하기까지 하는 자매들.

부모님이 사이좋게 지내라는 말을 어기는 것 또한 싫고 실망시키는 것은 무서워서, 서로 어색하지만 부모님께는 알리지는 않은 아이들.

세스티아의 말이 끝나자 카야와 셰이는 침통한 표정을 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일루미나는….

“말도 안 돼….”

“일루미나.”

“내 딸이 그럴 리가 없어, 라는 말을 하려는 건 아냐… 물론 그렇게 믿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한 명도 아니고 나 빼고 다 똑같은 말을 하는데, 그게 맞는 거겠지… 근데 내가 지금껏 눈치채지 못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 나뿐만이 아냐. 당신도, 언니들도, 셰이도 그렇잖아. 그치?”

“그건, 그렇지.”

“딸들 사이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 자체도 충격이지만, 그걸 숨겼다는 것도 충격이고, 그걸 알아차리지 못한 것도 충격이고, 딸들이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는 것도 충격이야. 믿겨져? 우리 애들 고작 3살인데?”

유진은 한숨을 쉬었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믿기 힘들다고 해서 이미 일어난 사실이 사실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일루미나.”

“애들이 아빠를 좋아하는 건 당연한 거고 보기 흐뭇한 거라 생각했어. 근데… 내 딸은 그 정도가 지나치다는 거였네?”

“….”

“거기다, 내 딸은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기도 하고… 우리가 뒤늦게라도 애들 사이를 중재한다고 해서 이게 근본적으로 해결이 될까?”

“그러기 위해서 모인 거잖아. 던전도 깨부쉈는데, 우리가 해결하지 못할 건 없어.”

“애한테 너무 아빠만 좋아하지 말라고 말해야 할까? 언니한테도 웃어주고, 엄마한테도 웃어주고, 너무 아빠한테만 달라붙지 말고, 귀나 꼬리를 만져도 좀 덜 화내라고 말해야 할까? 방에 박혀있지 말고 언니들한테 먼저 다가가라고 말해야 할까?”

“그 중의 일부는 정말 말해야 할 수도 있겠지. 일단 셰이나 카야의 얘기도 들어보자.”

셰이의 딸, 차녀 루디키아와 카야의 딸, 삼녀 피에타의 이야기도 대동소이했다. 하지만 비니아와 직접적으로 싸웠던 루디키아의 말은 약간의 차이점이 있었다.

“다들 아시다시피 루디키아는 엄마아빠 못지않게 코르디아도 좋아해요.”

“그렇지. 다 그렇긴 하지만.”

“코르디아에게 함부로 한 것을 따지다가 비니아와 싸우던 도중, 화가 난 루디키아가 ‘너 이러는 거 아빠한테 다 이른다.’고 말했다고 해요. 그때 비니아의 반응이… 많이 무서웠다네요.”

“그건 세스티아도 말했던 거 아니었어?”

“코르디아는 뒤늦게 목격했다고 하지 않았어요? 루디키아도 모든 걸 코르디아에게 말한 건 아니었대요.”

“그래?”

“그래도 자기가 비니아보다 언닌데, 비니아에게 겁을 먹은 게 자존심이 상했다고….”

코르디아를 제외한 자매들의 생일이 24시간도 차이가 안 나지만, 언니는 언니. 몇 분 차이로 언니동생이 갈리는 쌍둥이도 있는데, 루키디아의 말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근데 무서워했다는 얘기도 했던 거 같은데?”

“그냥 무서운 게 아니라, 비니아의 눈동자가… 유진의 표현대로라면 텅 빈 눈? 죽은 눈? 그런 눈을 하고 있었다고 해요.”

“….”

“직전까지 서로 싸우다가, 갑자기 정색하며 그런 표정을 지으니… 루디키아는 처음 보는 동생의 표정이 무서워서 울고 싶었지만 겨우 참았대요. 코르디아랑 피에타가 달래줬고요.”

3살짜리가, 그것도 나름 행복하다고 자신하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가 죽은 눈?

그걸 목격한 루디키아가 실제보다 더 무섭게 인식했을 가능성과 셰이에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과장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셰이가 한 말도 결국은 루디키아에게서 전해들은 거니까.

그래도, 그걸 감안해도 충격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우리가 잘못 교육한 걸까? 아니면 태교할 때 뭔가를 잘못한 걸까? 아니면 인간과 수인의 혼혈 자체가 문제일까? 그도 아니면….”

“일루미나.”

“우리들 몸에 여신님들이 세 분이나 임하셨어! 거기에 나 빼고 둘은 끝내주는 수녀님들이고 다른 하나도 그에 못지않은 성전사고! 축복이란 축복은 다 받고 태어났고 온갖 사랑으로 키웠는데, 심지어 요 몇 년 동안 불행한 사고나 악질적인 사건 같은 것도 없었는데! 타고난 천성이 악하거나 무언가에 씌지 않은 이상, 그러기가 힘들잖아?! 응?”

“진정해.”

“안 되겠어. 비니아한테 가서….”

“일루미나! 진정해!”

당장이라도 안방을 뛰쳐나가려던 일루미나를 유진이 겨우 붙잡았다. 카야를 비롯한 성직자 출신 아내들이 황급히 일루미나를 달랬다.

“저희 또한 눈치채지 못했으니 무언가에 씌인 건 아닐 겁니다.”

“물론 그렇다고 비니아가 천성이 악하다는 것도 아니고!”

“여신께 기도를 올려보겠어요. 저희가 모르는 건 여신님께서는 아실 수 있을 테니.”

자매들이 싸운다. 이건 어느 가정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하고 평범한 일이리라.

하지만 그런 평범한 일조차 어떻게 해결해야 최선일지 신중에 신중을 기했던 그들이었다. 어쩌면 남들이 보면 별것도 아닌 거에 야단법석이다, 너무 심각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다면, 말이지.’

유진이 어렸을 땐 지금의 유진같은 아빠는 없었다. 아예 존재 자체가 없었다. 하나뿐인 엄마는 엄마라 불릴 자격도 없는 개쓰레기였다. 남들이 평범하게 누리는 게 일생의 꿈이었을 정도로 시궁창에 살았던 그였기에, 평범한 가정이 어떤 건지 사실은 몰랐다. 그래서 힘겹게 가정을 일구고 난 이후, 자기 자식에게만큼은 어떠한 불행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인데….

‘알아. 나도 그게 터무니없는 욕심이라는 걸.’

그래도 목표를 높게 잡고, 거기에 닿으려 노력하다 보면 그 과정 자체가 보통보단 높은 곳에 있지 않을까.

이는 유진만의 다짐이 아니라, 제각기 불우한 과거가 있는 아내들과도 공유한 다짐이었다. 그랬기에 아이들을 키우는 모든 것에 최선의 최선을 다했던 것이고.

“조금은, 내려놔야할 때가 왔는지도 모르겠네.”

“응…? 내려놔야한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지금까지 우리가 너무 무거웠다는 뜻이야.”

자식에게 닥치는 조금의 불행도, 조금의 불운도 용납하지 못하는 부모….

너무 목표 그 자체에 몰두한 나머지, 진짜 바라던 ‘평범함’이라는 것에서 벗어난 게 아닐까?

어쩌면 이 사건은 자칫 잘못하면 ‘극성’의 길로 빠질 수 있었던 우리를 바로잡아주는 계기가 되어주는 게 아닐까?

“어쩌면, 비니아는 그저 눈을 평소보다 많이 사납게 떴을 뿐일 수도 있어. 아빠를 좋아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언니들이 어색한 이유도 있을 수 있고. 비니아랑 얘기를 나눠보니 비니아도 언니들을 싫어하지 않았어. 미안해하는 감정도 있었고. 어쩌면 우리가 개입하지 않아도 알아서 화해했을 가능성도 있고.”

조금은 내려놓으니, 걱정 또한 가벼워졌다.

“완벽을 기하는 건 좋지만, 우리가 정한 기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 일이 생길 때마다 이렇게 심각해지면… 애들보다 우리가 먼저 지치고, 그게 아이들에게도 영향이 갈 거야. 딸들에게 따로 이야기를 들었을 땐 정말 충격을 받았지만, 막상 모여서 같이 이야기해 보면 또 다를 수 있겠지.”

“그건….”

“이미 딸들도 우리가 다 알았다는 것을 알겠지. 우리가 뭘 안 해도 자고 일어나면 아마 딸들 사이에서 무언가 액션이 나올 거야.”

“안 나오면? 상황이 더 심각해지면?”

“그러면 뭐….”

서로 사랑하는 가족이니까, 잘 대화해서 오해를 풀고 화해 기념 파티라도 하면 되는 거 아닐까. 거 왜, 아예 싸우지 않는 것보다 싸우고 잘 화해하는 게 더 중요하다지 않은가. 우리 아이들이 아예 싸울 줄 모르는 바보가 되는 것도, 싸우고 나서 화해하는 방법도 모르는 바보가 되는 건 바라는 바가 아니니….

평범한 가족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유진은 또다른 깨달음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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