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평범한 가족(5)
“….”
비니아의 눈동자는 흔들렸지만, 입은 열리지 않았다. 오히려 입에 힘이 더 들어갔다. 그 와중에 볼이 말랑빵빵한 게 툭 건드리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지만, 인내심을 갖고 다시 차분하게, 재촉하는 걸로 느껴지지 않게끔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대답하기 싫으니?”
“….”
“아니면 대답하기 곤란한 거야?”
“….”
비니아는 묵묵부답이었다. 고개를 젓지도 끄덕이지도 않았다. 차라리 격렬하게 거부하거나 회피반응을 보였다면 어떻게 달래보기라도 했을 텐데, 가만히 꾹 버티고 침묵하고 있으니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반응 자체를 보아하니 이유가 있긴 있는 것 같은데, 3살짜리 딸에게 강압적으로 따질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머리를 쥐어짜고 쥐어짜다 직접 부딪치는 걸 택했지만, 첫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비니아는 아빠 좋아?”
“…응.”
“엄마는?”
끄덕-
정면돌파는 실패했으니, 조금은 우회해야 했다. 만에 하나, 억에 하나라도 그럴 린 없었지만 비니아가 제 아빠를 싫어해서 입을 닫는 건 아니었다.
“아빠랑 엄마도 비니아가 너~무 좋아.”
“…우웅.”
“너무 좋아서, 비니아가 항상 기분 좋았으면 좋겠는데.”
“….”
“비니아가 슬픈 것 같아서, 아빠랑 엄마도 슬퍼.”
도리도리-
비니아는 다시 유진의 품에 얼굴을 묻고 고개를 저었다. 자기는 슬프지 않다는 뜻일까, 아니면 유진이랑 일루미나가 별로 안 슬퍼보인다는 뜻일까. 그도 아니면, 자기 때문에 슬퍼하지 말라는 뜻일까. 비니아의 성정을 생각해보면, 세 번째 답이 정답에 가까울 것이다. 딱 봐도 슬프지 않은 건 아니었으니까.
“말하지 않으면 몰라요, 우리 딸.”
말하지 않아도 대부분은 알지만, 모든 걸 아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모든 게 해결되는 건 더더욱 아니었고.
“아빠는 비니아랑 같이 웃고 놀고 싶은데, 비니아는 울고 있잖아.”
“안 울었어….”
“엄마도 걱정하고 있고.”
“우응….”
“언니들도 걱정하고 있는데.”
“….”
유진은 여러 가지 말을 던져가며 비니아의 반응을 살펴봤다. 한 번은 우연이라 치부할 수 있었지만 다시 보니 확실했다. 비니아는 명백히 ‘언니’라는 단어에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어찌해야 좋을까.’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했다. 아무리 3살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언니라는 키워드에 입을 꾹 다무는 원인이.
까다롭게 파묻혀있는 화석을 아주 부드러운 붓으로 섬세하게 훑어내는 것처럼, 여리디여린 딸의 마음속에 박혀있는 가시를 무사히 빼내기 위해서는 상응하는 노력이 필요하리라.
“비니아, 우리 딸.”
“우웅?”
“아빠랑 재밌는 놀이 하나 할까?”
“재밌는, 놀이…?”
“그래. 재밌는 놀이.”
성벽이 너무 높고 견고하기까지 해서 접근 자체가 어렵다면, 성주를 밖으로 끌어내는 수밖에.
유진은 아내들과 오랜 논쟁을 벌인 끝에 겨우 정해졌던 ‘아이들 간식’과 ‘중독성 강한 지구식 오락’에 대한 제한을 한시적 해제하기로 마음먹었다.
**
유진이 비니아를 어화둥둥 어르고 달래던 시각.
다른 방에서는 유진이 있던 방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코르디아.”
“네, 엄마.”
“엄마가 여신의 말씀을 따르는 수녀라는 건 알고 있죠?”
“…네, 엄마.”
세스티아는 코르디아와 침대에 마주 앉아있었다. 코르디아는 다른 딸들보다 한 살 많은 덕에 성장도 나머지 딸들과 비교할 수 없었다. 3살과 4살 때의 한 살 차이는 천지차이였다. 코르디아는 첫째 딸이자, 문자 그대로 딸들의 ‘큰언니’였다. 셋이 거의 동시에 태어난 다른 딸들과는 다르게 부모들의 관심을 1년 동안 독차지했다. 코르디아야 당연히 기억은 못하겠지만, 잠든 사이 여신들과 최고위 수녀의 축복을 쉴 새 없이 받았다. 지금이야 여신님들이 깨어있는 시간보다 잠들어계신 시간이 훨씬 많아서 아이들이 여신님을 뵐 기회는 없었지만… 어쨌든 코르디아는 다른 딸들보다도 더 말귀를 잘 이해하고 말도 잘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제 엄마를 많이 닮은 코르디아는 벌써부터 동생들을 이끌 줄 알았고, 먹을 거나 장난감 등을 양보할 줄도 아는 마음 넓은 큰언니이었지만… 진지한 표정을 한 엄마 앞에서는 그저 엄마가 무서운 아기였다.
“평소에도 당연히 거짓말을 하는 건 안 좋은 행동이지만, 지금은 더더욱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언제나 조곤조곤 차분하게, 버럭 화를 내지도 않고 짜증내지도 않는 세스티아의 말은 다른 의미에서 압박이 거셌다. 수많은 자들을 직접 회개시키고, 수많은 고해를 받아본 최고수녀 출신의 진지한 말이었다.
코르디아는 거의 처음 보는 엄마의 이런 모습에 겁을 먹으면서도,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제대로 못 들어서 이해를 못 하거나 어물쩡거리면 엄마의 표정이 더 심각해질 수 있다는 걸 직감한 것이다.
“네, 엄마.”
코르디아의 대답에 세스티아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소는 금세 사라졌다.
“동생들하고는 잘 지내죠?”
“네!”
“큰언니로서 동생들은 어떤가요?”
자기가 뭔가 큰 잘못을 한 걸까, 엄마가 화나면 엄청 무서울 거 같은데…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코르디아는 예상외로 평범한 질문에 얼떨떨해하면서도 재잘재잘 잘 대답했다. 둘째는 어쩌고, 셋째는 어쩌고….
세스티아는 고개를 끄덕이기만 할 뿐, 어떠한 추임새도 제지도 없이 코르디아의 말을 가만히 들어주기만 했다. 그러다 셋째의 이야기까지 끝나고, 넷째인 비니아의 이야기가 시작됐을 때.
“비니아는….”
“비니아는?”
코르디아는 처음으로 말을 흐렸고, 세스티아는 처음으로 되물었다. 코르디아는 이 자리의 의미와 엄마가 왜 이렇게 무서운지, 그제서야 깨달았다.
이유를 알게 되니 무서움이 두 배가 되었다. 4살 아이 기준으로 굉장히 높은 코르디아의 집중력과 평정심이 깨졌다.
“죄송해요.”
그리고 부모에게 크게 혼날 것 같다는 중대한 위기에 몰린 아이는, 최대한 덜 혼나기 위해 아이가 생각할 수 있는 최대최선의 방패인 ‘무조건적인 선 사과’를 내밀었다. 제아무리 똑똑하고 생각 깊은 코르디아라도, 어쩔 수 없는 조건반사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건 섣부른 행동이었다.
“뭐가 죄송하죠?”
“네…?”
“엄마는 그저 비니아는 어떠냐고 물었을 뿐인데?”
“아.”
코르디아는 낭패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미 내뱉은 말을 주워담을 순 없었다.
“코르디아?”
“…네, 엄마.”
“고개 숙이지 말고 엄마를 보세요.”
고개를 든 코르디아의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두 손은 꽉 맞잡고 있었고, 안 그래도 가지런히 모아져 있던 두 무릎이 빈틈 하나 없이 꽉 다물려 있었다. 그런 딸을 보는 세스티아의 눈이 좁아졌다.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엄마한테 대답했죠?”
“…네.”
“비니아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보세요. 천천히, 빼먹지 말고.”
“….”
“….”
“그… 엄마아…?”
코르디아의 태도를 보고 세스티아의 표정과 말투가 더 엄정해졌다. 세스티아는 지금껏 코르디아에게 화를 낸 적이 없었고, 코르디아도 딱히 혼날짓을 하는 아이는 아니었지만… 세스티아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기 딸이라 해도 봐줄 생각이 없었다.
특히나 자기는 제일 늦게 굴러온 돌이지 않은가. 가족의 일원이 된 지 몇 년이 지났어도, 아무리 제 딸이 장녀라 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만일 코르디아가 가정의 평화에 금이 가게 하는데 일조했다면….
‘자유로웠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베스티아를 교육했을 때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교육에 임해야겠지.’
코르디아가 비니아에게, 혹은 다른 동생들에게 부모 몰래 어떤 잘못을 행했는지… 일말의 가능성도 부정하고 싶었고 딸을 이렇게 추궁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마음을 굳게 먹었다.
“비니아는….”
우물쭈물하던 코르디아가 숨 막히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다시 입을 열기 시작했다.
“다 같이 있을 때랑, 아빠랑 있을 때랑, 우리끼리 있을 때랑… 다 달라요.”
“뭐…? 그게 무슨 말이죠?”
“우리랑 있을 때 비니아는… 안 웃어요. 아빠랑 있을 때만 웃어요. 다 같이 있을 때는 안 웃다가, 아빠랑 붙어있으면 웃어요.”
예상치 못한 대답에 세스티아가 잠시 멈칫한 사이, 한 번 시동이 걸린 코르디아가 말을 계속했다.
“한번은 같이 놀고 싶어서, 손을 잡았는데, 비니아가 밀었어요. 그래도, 혼자는 안 된다고 해서, 다시 같이 가자고 하다가, 모르고 꼬리에 살짝 손이 닿았는데… 비니아가 무서웠어요.”
“무서웠다?”
“네… 미안하다고 했는데, 막, 눈도 무섭고, 소리 내는 것도 무섭고, 이빨도 드러내고, 말도 안 하고….”
수인족에게 귀와 꼬리, 특히 꼬리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대단히 민감한 신체부위였다. 격하게 반응하는 게 비정상적인 건 아니었다. 하지만 비니아가 이제 막 3살이라는 것과, 태어난 이후 쭉 같이 지냈던 언니들에게까지 그렇게 반응한다는 건… 확실히 과했다. 사이가 나빴던 것도 아니었는데.
특히 세스티아는 코르디아가 지금 말하고 있는 걸 부모들 중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에 더 충격을 받고 있었다.
“전, 그래도 같이 놀고 싶었는데, 동생들이 더 무서워해서….”
“그래서요?”
“그 다음부터, 비니아한테 말하기가 더 어려워졌어요….”
“엄마나 아빠한테 말해볼 생각은 없었나요?”
“비니아를, 나쁜 아이처럼 말하게 될까봐요… 사이좋게 지내라고 했는데….”
이 사건의 원인이 코르디아를 비롯한 세 자매가 아니라, 막내인 비니아에게 있었단 말인가?
‘아직은 아니야.’
이 순간에도 부모의 말을 새겨듣고 실천하려는 딸이 기특하고 대견했지만,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코르디아가 죄송해할 만한 건 없었는데….”
“그건….”
코르디아가 입을 앙다물었다. 세스티아는 딸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그러자 붉어진 코르디아의 눈가에서 눈물방울이 뚝 떨어졌다.
“얼마 전에, 루디키아랑, 비니아랑 싸웠어요….”
“!!”
“전 늦게 알아서, 말리지 못했어요… 죄송해요….”
물리적인 싸움이 있었단 말인가?
“둘은 왜, 왜 싸웠나요?”
“이건 루디키아가 말한 거지만… 저랑, 비니아랑 있었던 일을, 루디키아가 따졌나봐요… 비니아는 무시했고, 루디키아는 화가 나서 더 따지다가… 싸웠는데… 그러다가 귀랑 꼬리랑 또 만져가지고… 비니아도 화내면서 루디키아를 밀고 때리고….”
“왜, 왜 이것도 말하지 않았나요. 설마.”
“죄송해요… 제가, 말하지 말라고 했어요… 훌쩍, 아빠엄마가 싫어할까봐….”
세스티아는 이마를 짚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인지… 자신의 교육이 아이에게 족쇄가 됐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그녀였다.
‘만약 아이들 중에서 누구라도 좋으니 이 상황을 조금이라도 빨리 알렸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흘러가지는 않았을 텐데.’
이미 지나간 이상 그건 모르는 일이었지만 세스티아의 마음은 굉장히 착잡해졌다.
‘딸의 말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다른 아이들의 말도 들어봐야 해.’
세스티아는 울고 있는 코르디아를 토닥여주며 지금 한창 딸들의 말을 듣고 있을 카야와 셰이, 유진을 떠올렸다.
머리가 지끈 아파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