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평범한 가족(4)
‘올 것이 왔다.’
안방에 모인 모든 이가 공통적으로 하는 생각이었다. 보통은 한 명 내지는 두 명이 돌아가면서 유진과 함께 밤을 지내는 방에, 새근새근 꿈나라로 떠난 아이들을 제외한 전 가족이 모여서 심각한 표정으로 둘러앉아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왜 모였는지는 다들 알 거라고 생각하니 그 부분은 생략할게.”
소집을 요청한 일루미나가 침묵을 깨고 운을 뗐다.
“다들, 이대로 가만히 지켜만 볼 거야?”
“아니, 그건 절대 아니지.”
“근데 왜?”
유진은 즉답했으나 바로 말문이 막혔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걸 바로 내뱉는 건 다른 이야기였다.
‘뭐를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될지….’
다들 자기 자식이 연관된 이야기였다. 촉각을 평소보다 곤두세우고, 똑같은 사건이라도 더 예민하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영역이었다.
게다가 그녀들이 배 아파 낳은 딸은 한 명이지만, 유진에겐 넷 모두 친딸이었다. 누구 하나에게 섣불리 경중을 달리할 수 없었다. 만일 잘못한 이가 명확했다면야 이렇게까지 눈치를 볼 일도 없었다. 3살짜리 아기라도 혼낼 땐 혼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누구 하나 잘못한 행동을 한 아이가 보이지 않는 게 문제였다.
이 은밀한 따돌림을 누군가가 주도했나? 아니다.
누군가 비니아에게 못된 말을 했나? 아니다.
누군가 비니아에게 자신들 혹은 유진에게 접근하지 말라고 했나? 혹은 물리적인 행사를 했나? 아니다.
누군가 엄마에게 비니아를 대상으로 뒷담을 깠나? 그 또한 아니었다.
그냥… 어쩌다보니까 그렇게 흘러간 거였다. 사소한 다름은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고 그건 이상한 게 아니라는 걸 아이들은 몰랐고, 그건 주입식 교육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천만 다행히도 유진의 딸들이 하나같이 착해서 직접적으로 괴롭히는 일 없이 어색한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그쳤지만, 비니아의 소심한 성격과 맞물려 일이 심각해졌다는 게 공통된 시각이었다.
그런데 해결은 해야 했다. 이대로 냅뒀다간 비니아는 마음의 상처를 입고 삐뚤어질 수도 있고, 다른 딸들은 부모의 어떠한 제지도 없으니 지금의 흐름을 당연시할 가능성이 높았다.
“딸들이 우리 모두에게 소중하기 때문에, 그만큼 신중을 기하려는 것도 있었고… 또 이런 일은 처음이니까 혹여나 내가 내뱉은 한마디가 상황을 악화시킬 수도 있을까봐 더 그랬던 것 같아. 자칫 잘못하면 서로 감정이 크게 상할 수도 있으니까. 그래도 아예 방관하려는 생각은 전혀 없었어. 어쨌든 먼저 나서줘서 고마워.”
“맞습니다. 제 딸이 행복한 것만큼, 일루미나 당신의 딸도 행복해야 합니다. 우리의 보금자리에서 마음 아픈 사람이 나오는 건, 있어선 안 될 일입니다. 유진과 같은 이유로, 지금까지 지켜만 보고 있었던 점을 미리 사과하겠습니다.”
카야가 굳은 표정으로 유진의 말을 거들었다. 그녀 또한 유진의 첫 번째 동료이자 아내로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셰이와 세스티아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나 딸들이나 서로에게 악의가 없는 건 이미 알고 있으니, 그런건 일단 뒤로 다 넘기자구요. 중요한 건 해결방안이죠. 일단 비니아는 어때요?”
“가뜩이나 말도 적은 아인데, 그마저도 안 해. 밥도 잘 안 먹으려 하고, 하루종일 이이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 쓰거나 품이 넓은 옷을 걸친 다음 인형을 끌어안아. 그리고는 거실에서 웃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움찔거리지만, 곧 움츠러들기를 반복하고. 내가 안아주고 놀아주는 것도 잠시뿐이야. 내 딸도 나보단 아빠를 더 좋아하는 거 같으니까… 언니들도 마찬가지고.”
“…생각보다 더 심각한데요.”
“우리 집이 평범한 집보단 훨씬 넓다 해도, 결국은 폐쇄적 공간이잖아. 아이들 하는 게 눈에 뻔히 보인다는 말이지. 그런 의미에서 내가 봐도 내 딸은 엄청 작은 것에 큰 상처를 입고 있는 게 맞아. 그렇지만… 아주 작은 가시라도 박히게 하고 싶지 않은 게 엄마의 심정인가 싶더라. 하물며 손바닥도 아니고, 마음에 말이야.”
일루미나의 하소연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의 마음은 부모가 되고 나서야 진정으로 깨닫게 된다고, 이번 사건으로 더 절실히 깨닫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 딸들이라서 하는 말은 아니지만, 성장속도나 오성이나 3살 아이의 수준은 다 뛰어넘지 않았습니까? 한 자리에 모아놓고 차분하게 이야기를 해보는 건 어떻습니까.”
“비니아도 같이?”
“예.”
“동석한 상태에서 그 얘기를 꺼내는 건, 음….”
카야는 카야답게 정면돌파를 제시했다.
“딸들에게 이해시키기 어려울 수 있고, 그 과정에서 비니아가 더 마음 아파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 그 때문에 지금까지 지켜보던 것 아니었어?”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방법이 가장 후환이 적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왕 하려면… 처음에 확실히 하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맞는 말이긴 한데….”
일루미나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쉽사리 반론하지 못했다. 정론이었던 만큼 반론할 거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카야님의 말은 일리가 있지만, 전 반대예요.”
“세스티아?”
“이 문제가 심각해진 이유 중 가장 큰 원인이 비니아의 상태라는 걸 생각하면, 비니아가 추가적인 상처를 입을 상황 자체를 최소화하는 게 제일 우선이라고 생각해요. 이야기는 나눠야하겠지만, 비니아까지 모인 상태에서 하는 건 반대예요. 차라리 따로 이야기를 해서 먼저 이 사안을 이해시키고 반성하게 한 다음, 서로에 대한 오해를 푸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세스티아의 반론에 일루미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연륜과 경험은 무시할 수 없구나라고 중얼거렸고, 세스티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 또한 생각은 있었지만 실천하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찌됐든 목소리를 낸 이들이 지금껏 침묵하고 있던 셰이와 유진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셰이가 유진을 한번 힐끗 보다가 입을 열었다.
“전 일루미나 언니의 의견에 따를게요.”
“셰이.”
“그냥, 그게 더 맞다고 생각해요.”
“유진, 너는?”
3:1.
아내가 넷이라서 혹시나 의견이 2:2로 갈려 자기가 캐스팅 보트를 쥐게 되면 어쩌나 싶던 유진이 엄숙한 표정으로 일루미나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아이들에게 어떻게 말할지가 관건이겠네.”
회의는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
‘육아라는 건, 일생일대의 초고난도 퀘스트임에 틀림없다.’
(육아를 제대로 한)모든 부모는 위대하다는 건 진리였음을 밤샘 회의 끝에 다시 한번 깨달았다. 물론 유진의 가정 구성이 현대 지구인들의 가정과 비교했을 때 몇 광년 정도는 떨어져 있긴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마찬가지였다.
일루미나를 제외한 아내들이 제 딸들에게 향했을 때, 유진은 비니아에게 어떤 말을 해야 좋을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
아이를 잘 키워야겠다는 마음가짐에서 나온 신중함이, 아이에겐 방치로 느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왜 몰랐을까.
어린 시절이 생모의 학대와 방치로 얼룩진 유진이었기에, 제 자식들에겐 절대로 그런 아픔을 안기지 않겠다 다짐했었는데….
물론 정말로 제 아들의 존재 자체가 밉고 원망스러워서 그 지랄을 해댔던 유진의 생모와, 딸들을 너무 사랑해서 이런 고민을 하는 유진과 동일 비교 선상에 놓는 것 자체가 그와 그의 아내들에게 크나큰 모욕이겠지만.
‘적당히라는 게, 정말 어려운 말이었어.’
유진은 방문 앞에서 서성거렸다. 만일 비니아의 상심이 예상 이상이면 어떡하지? 그들이 알지 못했던 무언가가 더 있었다면?
안 좋은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던전에서 상실했던 겁대가리가 여기서 포텐이 터진 것 같았다. 차라리 던전 때처럼, 딸들의 상태창이랑 멘탈리티 수치가 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미친놈아.”
한심했다. 이러나저러나 딸과의 대화를 피할 수는 없었다. 딸의 진심을 알아야하고 달래줘야 했다.
“…안 먹어요.”
“아기가 벌써부터 밥을 거르면 안 되는데.”
“…!”
방에 들어온 게 일루미나인줄 알았는지 등을 돌린 채로 단식을 선언하던 비니아의 귀와 꼬리가 바짝 섰다. 자기가 들은 목소리가 믿기지 않는 듯, 비니아의 작은 머리와 몸이 슬그머니 뒤돌았고 유진과 눈이 마주치자 흠칫 떨더니 꼬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 엉거주춤 앉은 상태로 유진을 올려다보는 비니아의 얼굴에 기쁨과 의문이 8:2 정도로 섞여있는 걸 보고, 유진은 씁쓸함을 감춰야했다.
‘관심을 많이, 골고루 가졌다고 생각했는데… 비니아에겐 여전히 부족했던 모양이네.’
아빠를 보기만 해도 딸이 기뻐한다? 아빠로서 당연히 기분 좋은 일이었지만, 거기에 의문이 섞여 있다는 건… 아빠가 날 보러 온 건 좋지만, 이 시간에 다른 사람이 아니라 왜 날 찾아온 걸까 그런 의미도 섞여있었을 테니까.
‘아빠가 하나라서 미안해.’
하렘 소설 같은데 보면 주인공은 이야기 내내 수많은 여자들을 어떻게든 감당하다가 모든 일을 끝내고 난 후, 무더기로 태어난 아이들을 감당하지 못하고 분신술이나 시간 역행 같은 개사기 기술을 익히는 걸로 가정의 평화를 지키던데….
아내들이 대단한 거지 본인은 대단한 게 없는 약하고 평범한 유진에겐 그림의 떡인 것이었다.
“비니아.”
그래도 노력과 끈기 정도는 남들보단 봐줄 만하니, 어떻게든 손에 넣은 이 평범한 행복을 이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
짧은 눈맞춤을 끝낸 유진은 침대로 다가가 비니아를 꼭 끌어안았다. 품에 쏙 들어와도 남을 정도로 작고 사랑스러운 아이는, 말없이 짧은 팔다리를 움직여 그를 마주 안았다.
쫑긋거리는 귀. 살랑거리는 꼬리. 콩콩거리는 심장. 색색거리는 숨소리.
부녀 사이의 감정의 교류는, 그저 말없이 끌어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빠.”
“딸.”
“아빠.”
“우리 딸.”
“우응….”
유진이 머리를 쓰다듬자 비니아가 제 얼굴을 부비부비 문댔다. 누가 봐도 기분이 좋을 때 저절로 나오는 애교였다. 유진은 심쿵을 유발하는 딸의 애교를 이대로 만끽하고 싶었지만….
“비니아.”
“우웅.”
“비니아.”
“우으응.”
비니아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귀를 앞으로 팍 접고 유진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마치 유진이 무슨 말을 꺼낼 줄 아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무리 아이라도 감이 좋은 수인족의 피를 이어받아서 그런 것일까.
유진은 비니아의 기분이 나쁘지 않게, 귀 뒤쪽을 살살 어루만졌다. 귀를 그렇게 접는다 해서 유진의 말이 안 들릴 리는 없을 거고, 이 상태에서 해야 할 말을 해도 되겠지만… 그렇게 ‘강제적’인 태도를 취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말랑말랑하고 부드럽고 귀여운 귀를 얼마나 조심스럽게, 사랑스럽게 어루만졌을까.
비니아가 바짝 접었던 귀를 열고 고갤 들어 유진을 올려다봤다. 입술이 일자로 꾹 다물려있고 눈가에 힘이 빡 들어가있는게, 유진의 말을 듣고 싶지 않다는 의지는 여전해보였지만.
적어도 그의 말을 들을 준비는 됐다는 건 확실해보였다.
“비니아.”
“우웅.”
“아빠한테 솔직하게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웅.”
“혹시 언니들이랑, 기분 안 좋은 일 있었어?”
비니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