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고난도 던전에 떨어졌다-208화 (208/218)

26. 평범한 가족(3)

셰이가 그녀의 첫째 딸이자 유진의 차녀, 루키디아를 난산 끝에 출산한 이후.

새 생명의 탄생을 직접 목도한 유진이 미처 감정을 추스르기도 전, 카야와 일루미나가 순차적으로 진통을 호소했다. 이걸 천운이라고 해야 할지, 불운이라고 해야 할지… 물론 제일 힘든 건 아기를 낳는 산모들이겠으나, 연속으로 세 번이나 출산을 돕고 지켜보고 간호해야 했던 것도 진이 빠지는 일이었다.

특히 일루미나는 경계심이 극에 달해, 진통에 허덕이면서도 난동을 피우는 바람에 팔다리를 쫙 펼친 다음 묶어야 했다. 가구가 부서지고 유진의 피부가 긁히고 파이기도 했지만….

나란히 누운, 작게 꼬물거리는 사랑의 결실들을 보고 있자니 아픔과 피로같은 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세스티아의 딸, 장녀 코르디아Cordia.

셰이의 딸, 차녀 루키디아Lucidia.

카야의 딸, 삼녀 피에타Pieta.

일루미나의 딸, 사녀 비니아Vinia.

참 신기하게도, 네 명 모두에게서 딸이 태어났다. 유진은 자길 닮은 아들이 태어나는 것보단, 예쁘고 착한 아내를 닮은 딸이 태어나길 바랐었다. 트라우마 탓도 있었지만, 그냥 지금 생각해보면 아기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딸바보 기질이 발동했을지도 몰랐다.

아빠랑 결혼할 거라면서 다리를 끌어안으며 엄마를 노려본다든가, 아빠가 세계에서 제일 최고! 따위의 말을 듣는 걸 상상하며 몸을 떨었다. 코르디아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이제 막 태어났는데, 참으로 중증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걸 지적할 사람도,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아내들도, 제 딸들이 자는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에 잠겨있었으니까.

“어쩜… 낳을 땐 그렇게 아팠는데, 이렇게 조그맣고 예쁠까요?”

“그러니까 말이야. 아우, 내 딸 귀랑 꼬리 앙증맞은 거 봐. 벌써부터 남자 여럿 홀리게 생기지 않았어?”

확실히.

네 딸 중 유일하게 비니아는 여우 수인인 일루미나의 피가 섞여서인지, 작디 작은 여우귀와 꼬리가 꼬물거렸는데… 작게 꼬물거릴 때마다 바운스바운스 두근대며 심장이 제멋대로 나댔다.

“큭!”

마침 타이밍 좋게 비니아가 몸을 꼬물거렸고, 유진은 가슴을 부여잡고 뒤로 물러났다.

‘위험하구만…!’

가장 기나긴 공포 앞에서도 끝내 정신을 놓지 않았던 유진이, 하마터면 자제심을 잃고 아기를 껴안고 볼을 부빌뻔 하지 않았나.

그런 유진을 네 여자가 뜨뜻미지근한 눈으로 쳐다봤다.

“으앙-!”

“아휴, 우리 아기. 배고팠어요?”

그러다 코르디아가 잠에서 깨자마자 울기 시작했고, 세스티아는 매우 자연스럽게 코르디아를 안아들더니 웅장한 가슴을 드러내며 젖을 물렸다.

응애-

응애-

응애-

코르디아의 울음소리에 나머지 세 딸들도 연쇄적으로 울음을 터뜨렸고… 곧 아기들의 방은 달콤한 모유 냄새와 아기들이 쫍쫍거리며 젖을 빠는 소리로 가득찼다.

보기만 해도 가슴이 웅장해지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모습이었다.

**

“아빠.”

“아이구 우리 코르디아 공주님.”

“압빠!”

“우리 루키디아 공주님도.”

“아빠아!”

“그래그래, 피에타 공주님도. 읏쌰!”

3년 정도가 흘렀다. 그동안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잘 모를 정도로 빠르게 흘러갔다. 아기들은 무서운 속도로 성장했고, 성장하면 할수록 제 어미를 닮아 각자의 개성을 뚜렷하게 드러내기 시작했다. 게다가 여기서도 유전빨은 확실히 유전빨인지, 업적으로 따지나 신체 조건으로 따지나 인간계 최강이라 할 수 있는 아내들의 피를 제대로 물려받은 덕분에… 딸들의 체력은 일반적인 아기의 힘과 체력이 아니었다.

딸들은 분명 인형이나 아기자기한 걸 좋아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이것도 지구인식 편견인가?

“압빠! 그거! 슈웅!”

“비행기?”

“웅!”

“그거 위험해서 안 되는데, 다른 거 하고 놀까?”

“슈웅! 슝!”

“슝!”

“슝!”

딸들이 아니라 아들들이랑 노는 것 같았다….

그래도 유진은 오늘도 어김없이 기쁜 마음으로 딸들의 놀이기구가 되어주었다.

‘비니아는… 오늘도 따로 있는 건가.’

세 딸들을 간지럼 태우고, 둥가둥가 해주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최근 들어, 막내딸 비니아가 외톨이처럼 따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루미나가 서툰 솜씨로 만들어준 인형을 품에 안고, 유진이 직접 집필한 동화책을 읽으며 혼자 방구석에 있는 걸 볼 때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참으로 난감했다.

“압빠!”

“아빠아!”

“그래그래.”

생각하느라 아주 잠깐 손이 멈췄다고 그새 성화를 부리는 딸들의 맹렬한 공세를 버텨야했다.

한편, 유진의 방.

언니들이 유진과 신나게 놀고 있을 때, 비니아는 인형을 껴안고 아빠 침대에 웅크리고 누워있었다. 그 모습을 발견한 일루미나가 입술을 깨물며 제 딸에게 다가갔다.

“우리 딸.”

“….”

“여기서 혼자 뭐하고 있어?”

유진이 파악한 걸, 아내들이라고 파악하지 못했을까. 그녀들도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안 와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녀들은 초보 엄마였다. 세스티아가 출산을 두 번 했다 해도, 첫 번째 딸은 딸로 키우지 못했고 두 번째 딸인 코르디아도 동생들보다 겨우 1년 정도 앞설 뿐이었다. 다른 아내들과 별로 다를 바 없다는 말이었다.

게다가 상황도 특수하지 않은가.

아무리 이 세계가 중혼이 가능하다고 해도, 네 아내가 거의 동시에 아이를 낳는 건 드문 일이고 그 아이들의 부모가 종족이 다르다는 건 더 드문 일이고… 심지어 세 명은 출산 당시 여신이 강림한 상태였기 때문에….

아무튼 경험도 없고 선례도 없는 이 문제에 섣불리 다가서는 걸 모두가 두려워했다. 아무리 범상치 않은 자식들이라지만, 이제 겨우 3살이었다. 자칫 잘못 접근했다가, 자식들이 아예 잘못된 걸 인식하게 될까 두려웠다. 너무나 소중한 자식들이어서 오히려 뭔가 개입하는 게 망설여지는 것이다.

‘그래도… 이대로 계속 두고 보는 건 말이 안 돼.’

일루미나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그녀가 당장 생각하고 있는 이 따돌림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비니아의 외모 때문이어서 그랬다.

비니아를 제외한 셋은 인간에 가까웠다. 세스티아와 셰이는 인간이었으니 당연한 얘기였고, 카야는 하프엘프였지만 그녀의 딸 피에타는 쿼터가 되면서 인간의 형질이 더 강해졌다. 성장하면 어떨진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은 그래보였다.

일루미나는 비니아의 입장이 되어 상상해봤다.

또래에 가까운 언니들.

아빠는 같지만 엄마는 다른, 그렇지만 화목한 가족.

그렇지만, 자기와 자기 엄마만 확연하게 다른 외모.

‘엄마! 왜 비니아만 귀랑 꼬리가 달려있어?’

‘이상한 거야?’

‘우응, 우린 안 달려있는데.’

악의 없이, 순수한 궁금증으로 내뱉었을 자매들의 질문들.

‘얍!’

‘아얏! 아, 아파…!’

자매들이 호기심에 비니아의 귀와 꼬리를 만졌다가, 고통에 화들짝 놀란 비니아가 엉엉 울어서 난리가 났었던 일들.

그런 일들이 반복되다보니, 자연스럽게 떨어지게된 셋과 하나.

유진과 아내들이야 종족과 생김새보다는 사람 그 자체가 제일 중요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아이들이 그걸 알겠나. 어렸을 땐 사소한 것도 크게 다가오는 법이고, 별의 별거를 포착해 말도 안 되는 별명을 만들어서 낄낄거리고 노는 게 정상인데 하물며 동물귀와 꼬리다. 이질감이 커도 너무나 큰 것이다.

“비니아는 아빠랑 안 놀아?”

“…몰라.”

누가 봐도 모르지 않았다. 비니아도 아빠가 너무 좋아 어쩔 수 없는 딸이었다. 유진과 나란히 앉아있으면 별 고민도 없이 유진에게 쪼르르 달려가 안기던 딸이었다. 그런 아빠바라기 딸이 아빠랑 놀고 싶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이럴 때 ‘그럼 엄마랑 놀까?’같은 말은 역효과였다. 고사리 같던 손에 가슴을 밀쳐졌을 때, 얼마나 충격을 먹었던가.

일루미나는 턱끝까지 올라오는 한숨을 삼키고는, 옆에 누워 딸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비니아는 꼼지락거렸지만 이내 얌전히 안겼다. 일루미나는 비니아의 작은 배를 토닥이며 물었다.

“우리 딸, 좀이따가 아빠한테 같이 갈까?”

“….”

“정말 안 놀 거야?”

“…으응.”

“좀 이따가 저녁 먹고, 저녁 먹고 좀 지나면 자야 하면… 시간이 없을 텐데. 그래도 정말 안 놀 거야?”

비니아의 귀가 움찔거렸다.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몸은 솔직했다. 귀만 움찔거리는 게 아니었다. 떨림을 보아하니 울음을 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왈가닥이었던 자신과는 다르게, 여리고 소심한 딸이… 겨우 3살짜리가 울음을 참고 있는 걸 보니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는 결심이 더욱 확고해졌다.

‘어떤 마찰이 일어나더라도….’

오늘 밤엔 반드시, 그동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며 서로의 눈치를 보던 유진과 다른 아내들에게 이 이야기를 꺼낼 것이다.

딸을 위해서.

그리고 가족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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