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진심을 담아서(9)*
카야의 손에 들린 묵주가 연녹색 빛으로 발광하기를 약 10여 초. 유진에게는 10여 초였지만 카야는 아니었다. 10분? 100분? 어마어마한 체감시간의 차이가 있었다. 무려 여신이 강림하는 것이다. 여기가 수도원도 아니고, 제대로 된 의식을 거치는 것도 아니고, 여신의 석상이 있는 것도 아니다. 카야의 신성력이 미약하게 담겨있는 묵주를 매개로 연결되어 있던 것에 불과했기 때문에, 강림 의식은 필연적으로 정석적인 절차보다 더 많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 대가의 대부분을 라엘라 쪽에서 짊어졌는데도 불구하고, 카야가 받고 있는 심신 양쪽의 압박은 단순히 힘들다 버겁다 수준이 아니었다. 특히 이번엔 카야의 몸으로 강림하는 라엘라는 분신이 아니라 본신에 가까웠기에, 무사히 강림하면서 동시에 카야의 인격이 소멸하지 않도록 애써야 했다. 그래서야 본말전도가 아닌가. 강림체의 인격이 소멸하면, 강림한 라엘라 그녀에게도 악영향이 미치는 건 둘째치더라도.
그랬기에 라엘라는 한계의 한계까지 신성력과 영성을 쥐어짰다. 무사히 안착하기 위해 그 이전부터 꾸준히 카야를 관찰했고, 이해하려 노력했다. 유스티티아가 언제까지 누워서 아이들 관찰만 하고 있을 거냐는 핀잔도 웃어넘겼다. 그녀는 회복을 위한 긴 잠에 빠졌을 때부터, 이 계획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아으, 아흐으….”
‘견뎌내야 해. 여기서 정신을 잃으면 우리 둘 다 위험해진단다.’
하나의 몸에 필멸자의 혼과 신격의 혼이 공존하는 것. 백 명에게 물어보면 백 명 다 불가능하다고 대답할, 역사상 전례가 없던 일은 두 여자의 무시무시한 집념으로 인해 성공 직전까지 도달했다.
‘아이야! 거의, 거의 다 왔단다.’
“….”
‘아이야!’
하지만 강한 정신력의 카야조차, 격의 괴리는 너무나도 컸던 것일까. 성공 직전, 그 문턱에서 카야는 의식을 잃고 말았다.
‘이런… 이렇게 가다간.’
카야의 잘못이 아니었다. 여기까지 버틴 것만 해도 대단한 것이었지만, 성공하지 못한다면 과정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쩔 수 없겠구나.’
기왕이면 의식이 있는 채로 강림을 끝마쳐 아이에게 기쁨을 안겨주고 싶었지만… 카야, 아니 라엘라는 묵주를 쥔 손을 앞으로 뻗었다.
**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카야가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절대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았기에 유진이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는데, 잠시 후 카야가 한손을 그를 향해 뻗고 있었다. 그 몸짓이 너무나도 위태로워보였기에, 유진도 조심스럽게 손을 가져다 댔다.
“카야! 괜찮…!”
손가락끼리 맞닿을 때, 꺼져가던 연녹색 빛이 최초보다 더 강하게 발광했다. 유진은 반사적으로 카야를 확 끌어안았고… 카야의 온몸이 땀으로 젖은 것도 모자라 불덩이같이 뜨겁다는 걸 깨달았다.
“이, 이럴 때가 아니지. 셰이라도 불러와야… 아니, 지금 세스티아가 있으니까.”
“괜찮아.”
“괜찮긴 뭐가 괜찮아! 곧장 죽을 것처럼 생겼는….”
“당황하지 않아도 괜찮단다. 네가 내 손을 시기적절하게 잡아준 덕분에, 잘 끝마쳤으니.”
“……라엘라님?”
“그래. 안심해도 좋단다. 내 아이는 무사해.”
“아… 세상에 라엘라시여… 다행, 정말 다행입니다.”
“후후. 그래. 정말 다행인 일이지. 그나저나, 내 이름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부르는구나.”
“예?”
“예전엔 하느님 부처님 예수님 등 이상한 소릴 하면서 기도했었잖니. 후후. 그만큼 네가 이곳에 적응했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만큼 네가 날 의지하고 믿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틀리니?”
“마, 맞습니다… 하하.”
유진은 멋쩍게 맞장구치다가 이내 경악했다. 품에 안은 카야가, 카야가 아니었으니까.
무슨 말이냐고?
그가 품에 안을 때까지만 해도 그가 알던 잿빛 머리의 하프엘프의 카야가, 어느새 처음 보는, 하지만 낯설지는 않은 은발의 엘프로 변해있었으니까.
그제서야 유진은 라엘라의 강림을, 라엘라 여신 본신을 영접하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인지했다. 그것도 온몸을 꽉 껴안은 상태로.
“라, 라, 라, 라.”
“쉬잇. 말하지 않았니. 당황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유진은 황급히 몸을 떼어내려 했으나, 오히려 붙잡혔다. 가냘픈 손이 그의 팔뚝을 움켜쥐었을 뿐이었는데, 항거할 수 없는 힘이었다.
“하지만 일시적인 조치에 불과하단다. 카야, 내 아이는 강림 직전에 의식을 잃고 말았어.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주도권이 내게 뺏기거나 내 격에 파묻혀 영영 깨어나지 못하거나… 최악의 경우 영혼이 버티지 못하고 소멸할 수도 있겠지.”
“…!”
“걱정하지 마렴. 이제부터 적절한 조치를 취하면 될 테니.”
“그, 그 조치라는 게 무엇입니까? 뭐든지, 뭐든지 말씀만 해주십시오.”
“간단해.”
라엘라는 검지로 유진의 가슴팍을 콕 찌르며 말했다.
“그 아이를 깨우면 된단다.”
“예?”
“아주, 강렬하게. 깨지 못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간절하게. 네 진심을 담아서.”
“예?”
“그리고 그 아이는 내 안에 있으니… 이 이상 이야기해야 하니?”
유진의 사고회로가 정지했다. 그의 지능이 처참해서? 눈치가 없어서?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잘 알아들어서였다.
“어, 그, 그러니까.”
라엘라 강림 전, 그녀의 계획을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저번 강림 때처럼 카야가 베이스에 라엘라가 살짝 깃들어 불임 부분만 어떻게 해주는 줄 알았다. 그랬는데, 잘못 이해할 리도 없는 간단명료한 계획이었을 텐데.
지금 겉모습에선, 카야의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누가 봐도 세일럼 수도원에 있던 석상을 그대로 갈라테아화한 것 같은 여신님을 안아야 한다고?
당혹감. 황망함.
머리로는 가까스로 이해했으나… 선뜻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런 유진의 혼란과 망설임을 포착한 라엘라가 차분하게 재촉했다.
“지금 이러는 순간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단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아이는 점점 더 매몰되겠지.”
“하지만.”
“뭐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라고 말하는 건 너 아니었니? 그리고 내 아이를 살리고 싶은 건, 너뿐만이 아니란다. 애초에 난 너희들을 돕기 위해 내려온 것이란다.”
라엘라의 손이 유진의 뺨을 쓰다듬었다.
“어서.”
“….”
“내 아이를 닮은 아이… 나도 보고 싶구나. 내 아이와 함께, 무사히.”
유진은 망설임을 떨쳐냈다. 불경을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애초에 여신님이 허락했다. 2세를 위해 이렇게까지 해주시는 여신님께 몸둘 바를 모르겠으나… 여기서 그가 쭈뼛거린다면 두 여자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것이었다.
그는 라엘라의 손을 잡아뗀 다음, 그녀를 안아들고 침대로 향했다. 시간이 상당히 흘렀지만 체온은 여전히 높았다. 땀에 젖은 그녀가 너무나 힘들고 답답해보였다. 여신은 다르려나 싶었지만, 침대에 눕히기 전 땀에 흠뻑 젖은 원피스를 벗겨냈다.
“…!”
“그렇게 빤히 쳐다보니 부, 부끄럽구나.”
“죄, 죄송합니다!”
“으응, 괜찮다 괜찮아.”
속옷이 터질 듯 부풀어있었다. 가슴은 속옷 옆으로 비죽 튀어나와 있었고, 팬티는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카야보다도 더 하얀 피부, 쭉 뻗은 팔다리, 확 넓어진 골반… 예술품 그 자체인 여신의 몸매는 땀으로 번들거려 아찔한 후각을 동반했고, 보지와 엉덩이에 꽉 껴버린 팬티의 음란함은 화룡점정이었다.
유진은 라엘라의 속옷을 해방하는 사이, 라엘라 또한 유진의 옷을 벗겼다.
유진은 꿀꺽 침을 삼켰다. 완전히 해방된 여신의 나신은… 왜 그녀가 자애와 관용의 여신인지 단박에 알게 해주었다. 타 교도인들도, 이교도들도, 심지어 저 멀리 야만인이라 할지라도 이 성스러운 몸을 아주 잠깐이라도 보게 된다면. 장황한 교리나 귀찮은 전도 따윈 필요 없이 온 세상이 위 아 더 라엘라 월드가 되어버릴지도 몰랐다.
말 그대로 여신이었다. 아. 진짜 여신이었지.
“위에서 몇 번 본 적은 있지만, 실제로 보는 건… 또 다르구나.”
“예?”
“아, 아무것도 아니란다.”
라엘라가 뭐라 말한 것 같았지만 유진의 온 신경은 그녀의 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살다살다 여신을 안게 되다니….’
아마 다른 게임이었으면, ‘여신을 안아본’ 타이틀 같은 게 생기지 않을까.
전심전력으로 자애를 뽐내는 저 거대한 가슴과 떡 벌어진 골반, 그 가운데 위치한 비원.
‘여신님의 보지는… 백….’
유진이 그곳을 뚫어지게 쳐다보자 라엘라의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절 잡아먹을 듯 쳐다보시면, 부끄럽습니다.
그 모습에 언젠가 카야가 했던 말이 오버랩되면서, 유진의 이성이 툭 끊겼다.
“아앗.”
“지금부터는, 다소 무례할지도 모릅니다.”
카야를 구출해야 한다는 초조함과 압박감.
라엘라가 온몸으로 하는 유혹에 가까운 제안.
라엘라를 침대에 조심스럽게 눕힌 것. 거기까지가 이성의 한계였다.
“몇 번이나 말했지만, 난 괜찮단………!!”
쪽, 쪽, 쪼옥.
유진이 라엘라의 입술을 입술로 짓눌렀다. 동시에 그 자애로운 가슴을 주물렀다. 촉감, 탄력, 크기, 모양 그 모두가 극상인 가슴이었다. 라엘라의 동공이 잘게 떨렸다. 벌써부터 머릿속에서 파지직 작은 번개가 튀는 것 같았다.
이게, 말로만 듣고 보기만 했던… 사랑?
“아, 아….”
이리저리 망설이던 유진의 모습은 없었다. 여신이기에, 처음이기에 다소 약하기 시작했던 애무의 강도가 가파르게 강해졌다.
“아, 아, 아흐.”
귀를 핥고, 가슴을 주무르고, 꼭지를 비틀고, 핥고 빨았다. 온몸의 땀은 개의치 않았다. 전혀 비리지 않고 오히려 좋은, 흥분제였다. 여신의 땀을 감로수라도 되는 것 마냥 게걸스럽게 핥고 지나간 자리엔 유진의 침이 번들거렸다.
묵직한 자애는 이미 빨갛게 번들거리고 있었고, 하얀 도자기 같았던 온몸엔 울긋불긋 붉은 꽃이 피어있었다. 유진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본 순간, 라엘라의 항거할 수 없는 괴력은 사라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거센 번개처럼 휘몰아치는 낯설면서도 싫지 않은 감각에,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
“라엘라님.”
“하아, 하, 하으으.”
“혹시나 해서, 그리고 중요한 거니 묻습니다만….”
“하으, 흐으, 흐응, 으응. 뭐, 뭐니?”
“처음, 이십니까?”
별 것 아닌 애무에 화들짝 놀라는 점.
순순히 허락한 것 치고는 너무나도 수동적인 점.
지나치게 부끄러워하고 경직되어 있는 점.
그리고, 열릴 줄 모르는 일자 보지까지.
공교롭게도 유진의 세 여자 모두 처녀를 그에게 바쳤고, 처녀만 셋을 취한 그의 감이 경종을 울린 것이었다.
아무리 카야를 구하고, 그녀를 임신시키는 게 목적이라지만… 여신의 처녀를 취하면 그 후환은…?
끊어졌던 이성의 끈이 접착되려는 그 순간이었다.
“지, 지금 그게 정말 중요한 거니?”
라엘라의 얼굴이 토마토가 되었다. 그래도 폭풍 같았던 애무가 끊어진 덕에 잠깐의 여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난 자애와 관용의 여신이란다. 날 믿고 따르는 수많은 이들에게 어머니라 불리기도 하고.”
“그….”
“하지만 육체적인 의미에서라면….”
동시에 살짝 멀어졌던 유진의 몸을 사지로 끌어당기며 그의 귀에 속삭였다.
“처음이 맞단다.”
유진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