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진심을 담아서(5)
“하….”
일루미나(전 세계에 단 4명뿐인 던전 브레이커, 베테랑 음유시인, 성인, 수인)와 코르디아(태어난 지 15일, 왠지 모르지만 비범함, 벌써부터 귀여움)의 숨이 턱 막히는 눈싸움 및 기세 싸움에서 먼저 탄식을 내뱉은 건 다름 아닌 일루미나였다. 그 타이밍을 틈타 헨드릭은 잽싸게 코르디아를 비스듬히 가리는 위치에 섰다.
“아기가 보통이 아니네? 난리 나겠다 난리 나겠어.”
“그…렇지?”
일루미나는 툭 하면 한 번에 죽을 아기를 노려보는 자신의 처지가 우스워져서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헨드릭이 말은 안 했지만 때아닌 이른 귀환과 현재 구도를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이 잡혔다. 보나마나 예상 외, 불가항력, 나도 몰랐던 일 등등의 수식어가 잔뜩 들어갈 것이다.
사랑하는 남자가 동료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확인하러 간다며 떠났다가 영문에도 없던 아기를 데리고 온 건, 던전 격파 이후 몸이 바쁜 것 말고 잔잔하기 그지없었던 그녀의 이야기에 큰 파문이 되리라 확신했다.
화가 난다. 어처구니가 없다. 저 미안함과 당황스러움이 섞인 헨드릭의 얼굴을 한 대 치고 싶다. 동료고 뭐고 저 수녀의 머리채를 잡아다 마구 흔들고 할퀴고 싶었다. 헨드릭의 거기를 붙잡고 식은땀을 마구 흘리게 하고 싶었다.
‘헨드릭 성격상 지 아기를 품은 여자를 절대 내버리지 않겠지… 사실상 저 여자는 네 번째가 될 가능성이 백에 구십구야.’
발정기에 허덕이며 애걸복걸했던 자신도 받아들여졌는데, 헨드릭의 아기를 밴 여자를 제외한다? 상상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일루미나는 일단은 인내심을 발휘했다.
“조금만 있다가 들어와.”
“어?”
“이대로 갑자기 들어가면 많이 놀랄 거 아냐. 내가 미리 돌아가서 마음의 준비를 조금이라도 시켜놓을 테니까, 헨드릭 너도 마음의 준비를 좀 하고 있어. 그쪽도요.”
그 모든 걸 떠나서, 일루미나는 과연 자기가 저 수녀에게 대놓고 화낼 수 있는 입장인가에 대해 망설임이 있었다.
‘아기….’
거기에, 정말 분하게도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았던 아기의 얼굴에 헨드릭의 모습이 담겨있어서,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마음이 답답하고 화가 나고 억울하고 짜증나는 일인데, 아기 앞에서 화를 내는 게 비정상처럼 느껴졌다.
‘짜증나.’
일루미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집으로 뛰쳐갔다.
“미나 언니?”
“아 셰이! 지금 한가롭게 밥 하고 있을 때가 아냐. 아니, 밥 할 때가 맞긴 한데.”
“뭐라는 거예요?”
“카야 언니는?”
“부엌에서 밥 하고 있죠. 근데 왜 이렇게 호들갑이에요?”
“급한 거 아니면 카야 언니 좀 불러봐. 엄청 급한 일이 생겼으니까. 아니, 그럴 시간도 없네. 그냥 부엌으로 가자.”
“대체 뭐 때문에….”
일루미나는 셰이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부엌으로 향했다. 보글보글 끓는 소리와 고소한 냄새가 부엌에 가득 차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옆에 다가가 간을 봐주겠다는 명목으로 잽싸게 숟가락을 놀리다 카야에게 핀잔을 들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일루미나는 내심 카야가 식칼을 쥐고 있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카야 언니.”
“으응?”
“불 잠시 꺼봐. 중대사항이야.”
“아직 더 끓여야 하는데, 왜?”
‘불 가까이 있다가 뒤엎어버리면 대참사니까 일단 좀 떨어뜨려야지 않겠어?’
차마 속마음을 곧이곧대로 내뱉지 못한 일루미나가 어떻게든 카야를 불 근처에서 끌어냈다.
“일루미나, 네가 그토록 좋아하는 밥 만드는 걸 중단시킬 중대사항이 대체 뭔데 이러는 거야?”
“일단 앉아. 셰이 너도.”
일루미나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팔짱을 낀 카야와 셰이에게 몇 분 전에 본 광경을 그대로 전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귀와 꼬리가 떨렸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왜?’
잘못을 저지른 건 헨드릭인데, 왜 내가 중간에서 떨고 있는 거지?
서로를 위해 전령을 자처한 일루미나는 깨달음을 얻었다.
앞으로 할 설명에 절대 사적인 의견이나 감정을 싣지 말고 최대한 건조하게 사실만 이야기 하자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던 이야기꾼이기도 한 일루미나에게 그건 상당히 고역이었으나, 카야와 셰이의 분노를 먼저 맞고 싶지 않다는 명분이 너무나 강력했다.
“무슨 일이냐면….”
최대한 드라이했던 일루미나의 설명이 끝난 후.
“….”
“….”
일루미나는 표정 변화도 없고 말도 없이 팔짱 낀 자세 그대로 있는 카야와 셰이에게서 물러났다.
‘위험해!’
수인인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지금 저 둘은 극한의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다고. 여기서 어떤 말이든 꺼내는 순간, 바늘로 피고름을 터뜨리는 격이요 모닥불에 기름을 퍼붓는 꼴이 될 거라고.
일루미나는 발소리를 죽여가며 문까지 물러났다.
“그럼 조금 있다가 데려올게.”
“….”
“….”
끼이익-
문이 닫히고, 줄곧 닫혀있던 누군가의 입이 열렸다.
“아기.”
“….”
“아기라니.”
“….”
“언니.”
“….”
“뭐라고 말 좀 해봐요. 네?”
셰이의 손등에 핏줄이 튀어나와 있었다. 그걸 본 카야는 한숨을 폭 내쉬더니 일루미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무척 차분한 어조로 답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하고 무슨 행동을 해야 할까. 이미 태어난 아기고, 이미 데리고 온 아기인데.”
“뭐라, 고요?”
“유진 성격을 아직도 모르니. 유진이 행동에 옮겼으면, 그건 이미 판단이 다 끝났다는 얘기잖아. 각오도 다 끝났을 거고. 유진은 세스티아님과 아기를 품을 생각으로 데려온 거야. 그이가 자기 아기를 버릴 거 같아? 그렇다고 자기 아기를 낳아준 어미도 버릴 거 같아? 아니야.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지겠다고 하겠지.”
“책임을 지겠다는 말이 그 어느 때보다도 무책임하게 들리는 건 제 기분 탓이에요? 어떻게, 아니, 아무리 세스티아님이라고는 하지만 언니는 화도 안 나는….”
“나. 많이. 아주 많이. 울고 싶을 정도로 많이.”
“근데 왜 그렇게 침착한 건데요? 내가 이상한 거예요? 내가 나쁜 여자예요?”
“아니야.”
“그럼 왜!”
“제3자가 들으면 정말 불합리하고 말도 안 되는 관계라고 생각하겠지만….”
난 유진이 없으면 안 되니까.
유진의 운명은 내 운명이라 맹세했으니까.
이어지는 카야의 말에 셰이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세일럼으로 가보는 게 어떻냐고 말한 것도 언니였잖아요. 그럼 그때부터…?”
“맞아. 유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머지않아 떠올렸을 거야. 그리고 결과는 같겠지. 나도 화가 나.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단번에 해내는 것도 모자라 우리의 소중한 보금자리까지 찾아온 그분에게 화가 나고, 내 아기나 너희 아기가 아닌 여자의 아기 그 존재 자체에 질투가 날 것 같아 화가 나고, 아직 얼굴도 못 본 그 아기의 반은 유진의 피가 이어져있다고 생각하니 어딜 어떻게 닮았을까 궁금하기도 한 스스로가 화가 나고, 내가 엘프 혼혈인 것에 화가 나.”
그렇게 말하는 카야의 얼굴은 화가 난다는 것 치고는 굉장히 평온했다.
“내가 아는 유진이라면, 우리가 겪어본 유진이라면. 절대 그이는 이 상황을 의도하지 않았을 거야. 그래도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을 거고. 요컨대 세스티아님과 아기를 품겠다는 책임감과 우리들 사이에서 힘겹게 저울질했을 거야.”
“….”
“그러는 셰이, 너도 화가 많이 날지언정 당장 유진이나 아기를 어떻게 해야 한다든가 그럴 계획은 없었잖니.”
“…어떤 성전사 동료가 자기 얘기를 하며 그랬었어요. 많이 반하는 쪽이 결국 지게 되어 있다고.”
“그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난 모든 걸 이겨내고 유진과 함께 무사히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른 건 뭐라고 해야 하나… 사소하게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언니.”
“감정과는 별개로, 죽을 위기도 아니고 이겨내지 못할 일도 아니고 그렇다고 없던 일로 하거나 피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니….”
그 말을 끝으로 카야는 눈을 감으며 입을 닫았다. 셰이는 그런 카야가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물론 그녀도 헨드릭을 너무나 사랑하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이 문제를 이렇게 반응하는 게 맞나 싶었다. 카야가 너무 평온해보여서 자기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건가, 혼자 괜한 열을 내고 있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아.’
셰이가 그렇게 갈 곳 잃은 짜증과 분노와 억울함 등등 온갖 부정적 감정을 꾹꾹 눌러대다, 문득 어떤 깨달음이 왔다.
‘해탈…?’
셰이 그녀가 헨드릭의 두 번째 연인이 되었을 때.
헨드릭이 그녀들 몰래 세스티아와 관계를 맺었을 때.
늑대인간 혼혈인 아르를 일행으로 받아들였을 때.
발정기가 찾아온 일루미나가 애걸복걸해 결국 헨드릭의 세 번째 연인이 되었을 때.
던전을 깨는 것 외적으로도, 카야는 이미 여러 차례 마음고생을 했기 때문에 익숙해져버린 게 아닐까.
이미 저 모든 것들을 용서하고 이해하고 포용했는데.
이번 일도 그러지 못할 게 뭔가.
어차피 제일 중요한 것은 헨드릭과 가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고, 헨드릭이 제일 소중히, 우선시 대하는 건 자신이라는 것.
카야의 생각을 어느 정도 깨닫게 되자 그녀의 언행에서 느껴졌던 거리감이 확 좁혀졌다.
물론, 이해가 어느 정도 됐다뿐이지 셰이 그녀까지 해탈하게 된 건 아니었다.
**
“오랜만이에요. 카야 자매님, 셰이 성전사님, 그리고 일루미나님도 반갑습니다.”
“….”
“….”
잠시 후, 5자 회담, 아니 6자 회담이 성사되었다. 말 한마디 못하는 코르디아를 회담의 참가자로 봐야 할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존재감 하나만큼은 다른 5명보다 월등히 컸기에 무시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얼핏 초연해보였던 카야도, 감정이 폭발하기 직전이었던 셰이도, 셰이만큼은 아니었지만 나름 할 말이 꽤 많았던 일루미나도.
세스티아의 품에 안겨있는 코르디아를 본 순간, 그들의 세계는 잠시나마 고정되었다. 애써 웃으며 인사하는 세스티아도, 그 옆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헨드릭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그토록 원했던 아기가, 그들이 아닌 다른 여자의 몸에서 나온 아기일진대. 원래라면 환영받지 못할 아기일 터인데.
‘어째서.’
‘이리도.’
‘눈을 뗄 수가 없단 말이야.’
심지어 조금 전에 한 번 본 적 있는 일루미나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유진과 세스티아에 대한 감정을 내려놓고 순수하게 아기만 바라보니 또 달랐다.
작고 동그란 얼굴, 똘망똘망한 눈, 빵빵한 볼과 귀여운 코와 오물거리는 입술.
몇 배는 큰 어른들에게 시선이 집중돼도 전혀 움츠러들지 않는 저 범상치 않은 대담함.
세스티아의 딸이 아니라, 헨드릭의 딸이라는 것에 초점이 맞춰지니 아기의 순수함과 귀여움과 사랑스러움이 전면에 드러났다.
“아우?”
“읏!”
그때, 코르디아의 옹알이가 여인들의 마음에 치명타를 입혔다.
실로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