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진심을 담아서(4)
“세스티아.”
“헨드릭님.”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제3자가 보면 고작 몇 달 못 본 거 가지고 잊네 마네 하는 게 웃기다고 할 수 있겠지만, 세스티아에게는 그 몇 달은 몇 년보다도 더 긴 시간이었다. 잊을 수는 없는데 체감 시간은 몇 배 길어졌고, 보고 싶은 마음이 풍화되기는커녕 더욱 농축됐었다.
세스티아는 헨드릭이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고 지금껏 애써 묻어두었던 각종 부정적인 감정들이 울컥 솟아올랐지만, 잉크가 물에 흩어지듯 응어리진 것이 삽시간에 흐물흐물 풀어지고 말았다.
찾았다.
그토록 찾고 싶었던, 보고 싶었던 얼굴이 진짜로 눈에 들어오자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졌다.
십 미터 넘게 떨어져 있던 그들의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다. 그렇게 분위기 상 서로를 격하게 끌어안아야 할 것 같은 상황에서, 헨드릭의 눈에 들어온 건 세스티아가 아니라 그녀가 안고 있던 아기였다.
“아기…?”
아기와 눈이 마주친 순간, 등골이 찌릿하고 울렸다.
“아브!”
아기가 옹알이를 하는 순간, 등골을 울렸던 찌릿함은 전신으로 퍼졌다.
아기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보는 순간, 헨드릭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자기 자식이라고.
“….”
“….”
헨드릭과 코르디아는 한동안 서로를 뚫어지게 쳐다봤고, 세스티아는 부녀의 첫 상봉을 조용히 지켜봤다.
헨드릭의 마음이 이상하게 들끓었다. 간지럽기도 하고 쓰라리기도 하고 부글부글 끓기도 했다. 입을 가만히 내버려둘 수 없었다.
“날, 찾아온 거야?”
“네.”
“…어떻게?”
“믿기 힘드실지 모르겠지만, 아기가 찾았어요. 세일럼 밖으로 나오자마자 쭉.”
“뭐? 그게 가능한….”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 잘 지냈냐, 몸은 괜찮냐 등을 물어보려던 속마음과는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헨드릭의 영혼, 그 근본에는 방구석 아싸 기질이 포함되어 있었다. 말하고자 하는 바를 처음부터 자신감 있게 내뱉기 쉽지 않았다.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라 한들, 던전 격파 직후 헨드릭은 세스티아를 고려하지 않았었다.
아니, 그런 것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게 있었다.
“그 아기….”
“네.”
“그….”
“귀엽죠?”
“어.”
“사랑스럽죠?”
“응.”
“예쁘죠?”
“예뻐.”
“누구를 닮아서 이렇게 귀엽고 예쁘고 사랑스러울까요?”
그리 묻는 세스티아의 표정엔 자기 덕이라고, 자기 이쁜 줄 알고 으스대는 티가 전혀 없었다. 그녀의 눈은 줄곧 한 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
“네?”
“…….”
“네?”
“……….”
“보세요. 아기도 대답을 기다리고 있어요, 헨드릭님.”
안 그래도 깜빡깜빡, 똘망이는 코르디아의 검은색 눈동자에 빨려들던 헨드릭.
“아기가, 코르디아가 기다리고 있어요.”
헨드릭이 말은 안 하고 있었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깨달은 상태다. 그가 깨달았다는 걸 세스티아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참을 수 없었다. 헨드릭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었다.
너와 내 아기야?
혹은 우리 아기야?
아니면, 내 아기야?
어느 것이든 좋았다. 어감 상으론 우리 아기라는 게 제일 좋았지만, 내 아기야라고 묻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일부러 헨드릭이 정해준 아기의 이름도 밝히며 재촉했다.
‘기억하고 있을까?’
그의 행실을 봤을 때 책임감 없는 무뢰배는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으나 혹시라도, 만에 하나라도 부정한다면….
‘아니야. 헨드릭은 그런 남자가 아냐. 믿지 못해서 어쩌자는 거야.’
“코르디아.”
“네?”
“세스티아 당신이 언젠가 물어봤던 두 이름 중 하나였지… 그때부터 이미 임신하고 있었던 거야?”
“헨드릭님…!”
역시 헨드릭님이라면 기억하고 있을 줄 알았어!
“그걸 내게 물어봤고, 그 이름을 가진 아기를 안은 채 세일럼을 빠져나와 날 찾아왔다는 건….”
날 찾아왔다는 건?
왜 거기서 뜸을 들여요?
알잖아요. 알고 있잖아. 왜 애를 태우는 거야? 한 문장이면 되는데, 그거 말하는 게 뭐가 그렇게 오래 걸린다고….
“미안.”
“……에?”
미안?
미안하다고?
설마, 만에 하나인 거야?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기를, 힘들게 낳아 여기까지 온 나를 두고 어떻게 그런 말을….
“힘들었지.”
“……네?”
“난 천하의 개쓰레기야.”
“네에?”
“몰랐다는 말은 필요없겠지.”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어떻게든 관리하려던 세스티아가 고개를 들었다. 표정이 꽤나 멍청했다.
“고마워.”
“아.”
“그리고… 고생 많았어.”
헨드릭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세스티아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내 자식을 낳아줘서. 건강해서. 날 찾아와줘서.”
“헨드릭님…!”
“아브!”
외로웠던 두 모녀가 세 가족이 되는 순간이었다.
**
“이해해요. 지금 세일럼도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 없는데, 그때 당시엔 어떻겠어요. 혼돈 그 자체죠. 제가 빠져나온 게 일주일 정도 전인데, 지금은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네요. 상황을 봐선 쉽게 개선될 것 같진 않지만요.”
극적인 해후를 만끽한 둘, 아니 셋.
그들은 헨드릭이 지나왔던 길을 함께 걸어가며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난 바보라서… 빨리 알아차리지 못해서 미안.”
“알아채는 게 더 이상한 거예요. 이렇게 반응하실까봐 일부러 말 안 했으니까요. 그땐 아주 중요한 일이 있었지만 지금은 다 끝났으니 조금 욕심내봤….”
“욕심이라니.”
“아브브!”
세스티아가 헨드릭의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 말을 계속할수록 역설적으로 헨드릭의 죄책감은 수직상승했다. 세스티아가 그걸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었고, 그녀는 화제를 돌렸다.
“다들, 무사하시죠?”
“어? 어. 무사하지. 굳건한 의지 덕분에, 그리고 여신님 덕분에.”
“다행…이네요.”
“아브?”
하지만 그 화제는 지뢰였다. 천진난만하게 옹알이하는 작은 존재 때문이었다.
아기.
헨드릭의 2세.
선천적 불임의 하프엘프와 이단의 고문 때문에 후천적 불임이 온 인간과 이종간 임신 확률이 극히 낮은 수인.
그의 아기를 염원하는 연인들을 제치고, 단 한 번 만에 임신해서 오랜만의 재회 때 다짜고짜 아기와 함께한다?
헨드릭의 연인들이 아무리 마음이 넓은 편이라 하더라도, 이건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세스티아는 헨드릭을 보고 싶다는 강한 열망이 이루어지자 애써 외면했던 뒷일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건 헨드릭도 마찬가지였다.
‘생각지도 못한 딸, 근데도 너무 예쁜 딸… 물론 좋은데. 너무 좋은데. 하, 씨발, 집에 들어가서 말을 어떻게 꺼내야 좋지? 카야랑 셰이랑 일루미나 얼굴을 어떻게 보지?’
세스티아와 예상치 못했던 뜨거운 밤을 치르고 그다음 날, 카야와 셰이에게서 합동공격을 받던 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섹스가 그 정도였는데, 아기는? 그것도 첫째 아기….’
“흐읍!”
“헨드릭님?”
“아, 아니. 아무것도 아냐.”
‘정신 차리자. 책임지겠다고 마음먹은 지 얼마나 지났다고 추태냐. 이럴수록 세스티아만 불안해지는 거다. 근데 생각해보면 그때 충분히 용서를 빌긴 했어? 임신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이벤트에 가깝지.’
헨드릭은 애써 연인들의 싸늘한 표정을 지워내며, 세스티아에게 웃어보였다.
“코르디아, 내가 안아봐도 될까?”
“…그럼요! 자, 아가. 아가가 그토록 보고싶어하던 아빠 품이에요?”
“아부!”
코르디아는 아무 저항 없이 헨드릭의 품에 안겼고, 그는 작은 체온과 고동에 전율했다.
‘내 딸… 내 딸이란 말이지….’
헨드릭의 눈이 반짝였다.
**
“저긴가요?”
“어. 어때?”
“좋아요. 주변 경치도 좋고, 조용하고, 아늑해 보여요. 집도 너무 크지도 않고 좁지도 않고, 어머나. 텃밭도 있고 나무도 있네요?”
“흐흠.”
세스티아의 칭찬에 헨드릭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동안 연인들에게 해준 것도 거의 없이 받은 게 너무 많은데, 집만큼은 그가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발버둥치고 뼈 빠지게 노력한 결과였기 때문이었다. 힘 좋고 능력도 좋은 연인들이 많이 도와주긴 했지만.
‘해질녘… 평소대로라면 저녁 준비할 시간일 텐데.’
태양의 고도로 시간을 가늠한 헨드릭은 코르디아를 세스티아에게 돌려주었다. 코르디아가 잠시 발버둥쳤고, 세스티아는 그 모습을 보며 당황하면서도 기쁘게 웃었다.
‘던전 격파 후에도 정신없이 지내다가 마침내 찾아온 행복한 평화기… 며칠 가지도 못했는데 내가 박살 내는구나.’
집으로 향하는 얕은 오르막길이 3-9에서 3-10으로 가는 길보다 더 험난하게 느껴지는 건 과장일까. 혼자 떠나서 셋이 돌아오는 걸 예상했겠지만, 그 셋이 이 셋은 아니었으니.
“후우.”
헨드릭은 가슴을 쫙 펴고 배에 힘 꽉 주었다. 그리고 친애하는 동료를 다시 볼 수 있게 돼서 정말로 기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감 있는 워킹으로 세스티아를 이끌던 그때, 집 쪽에서 자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씨, 씨발?’
그는 어깨와 가슴이 확 쪼그라들려는 걸 가까스로 티 내지 않고 눈동자만 도로록 굴렸다.
“헨드릭? 왜 이렇게 빨리 왔.”
“어, 어어. 그러니까.”
큰 키에 뾰족 솟은 귀와 꼬리.
“다른 기척이랑 냄새가 나서 동료 둘을 데리고 오나 했는데….”
일행 중 감이 가장 좋은 일루미나가, 헨드릭의 예상 밖의 빠른 귀환을 눈치채고 마중 나와 있었다. 각오는 했지만 한 발짝 빠르게 급습당한 기분이었다.
“일루미나. 집에 들어가서 다 설명할 테니까 일단 들어가서.”
“놔봐.”
일루미나의 눈은 이미 코르디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아므!”
코르디아는 피하지 않았다.
……확실히, 누구 자식인지 범상치 않은 아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