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진심을 담아서(3)
긴가민가했던 세스티아는 확신을 가졌다. 몸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확인해봤더니 그녀의 아기는 남쪽으로 향할 때만 울었다. 아기는 대개 배고프거나 똥오줌을 지렸을 때 울지 않던가. 울음을 그치는 것도 그 원인이 해결될 때였지, 특정 방향을 바라볼 때만 울고 그 외엔 그친다는 건 상식적인 일이 아니었다.
“아가.”
코르디아는 이제 생후 보름 지난 아기였다. 의사소통이 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세스티아는 이 현상이 범상치 않음을 깨닫고 경시하지 않았다. 아기의 이상한 변덕이 아니라,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쪽이 좋은 거구나?”
“아브.”
“그래. 가자꾸나.”
세스티아는 끈을 고쳐 묶고는 남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코르디아는 어느새 다시 잠들어 있었다. 신기했다.
‘본능 때문인지, 아니면 신성력이 무언가 영향을 끼친 건지.’
어느 쪽이든 기꺼웠다. 만약 코르디아의 울음이 정말로 헨드릭을 향한 나침반이 되어준다면.
설령 한 달이 걸릴지라도, 일 년이 걸릴지라도.
세스티아는 결코 포기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
“유진.”
“어.”
“세일럼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까?”
“갑자기 세일럼? 왜?”
“세일럼에 비하면, 낙후한 지역이지 않습니까. 특히나 유진 당신 말에 따르면, 당신이 살던 곳에 비하면 이 세계 자체가 수백 년 정도는 뒤떨어졌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나마 세일럼이 사람 사는 도시라고….”
“그게 제일 그리웠으면 진즉 돌아가지 않았을까.”
헨드릭이 어깨를 으쓱였다.
“너희가 있는 곳이 내가 있을 곳이니까, 함께라면 어디든 좋아.”
“유진….”
“좋은 곳이면 좋은 대로, 안 좋은 곳이면 안 좋은 대로 함께 있을 수 있으니까. 카야 너야말로 불편한 건 없어?”
“그럴 리가 있습니까. 그 어느 때보다도 만족하고 있습니다.”
카야는 채소를 썰고 있었고 헨드릭은 반죽 같은 걸 치대고 있었다. 바깥에서 퍽퍽 장작 쪼개지는 소리와 닭들이 꼬꼬대는 소리가 들렸다.
속속속속-
가지런하게 썬 채소를 빈 그릇에 담은 카야가 새로운 재료를 꺼내며 말했다.
“게다가….”
“게다가?”
“남은 이들이 있지 않습니까.”
“으음.”
헨드릭은 묵묵히 반죽을 치댔다. 꽤나 즐거운 얼굴로 열심히 반죽을 주물럭대던 그의 말수가 급격히 줄어들다 이윽고 손이 멈췄다.
“세스티아랑 아르… 말하는 거지.”
“예.”
애써 묻어두었던 기억이 드러났다. 가장 기나긴 공포, 통칭 공포새끼를 조지고 보상을 고른 다음 던전이 붕괴되기 시작하자 우린 세일럼부터 빠져나가기로 의견을 모았다. 던전이 사라지면 세일럼이 혼란에 빠질 게 너무나 뻔한 데다가, 한 번 엮이기 시작하면 굉장히 곤란해질 것도 눈에 훤했다. 다들 몸과 마음이 걸레짝이고, 특히 카야는 정말로 죽다 살아난 상태였기에 우린 오로지 세일럼을 최대한 멀리 벗어나는 것만 집중했었다.
세일럼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는 것.
사람이 아예 없는 곳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람이 많은 곳도 아닌 곳을 찾는 것.
그리고 기존의 건물에 세를 드는 게 아닌, 그들만의 집을 마련하는 것.
이 세 가지 조건을 만족하는 장소를 마련하려다 보니 시간은 자연스럽게 흘러갔고, 특히나 세 번째 조건인 그들만의 집을 마련하는 게 생각보다 더 오래 걸리고 말았다.
시간이 흘러 심신을 어느 정도 회복했고 아늑한 집도 마련하는데 성공하자, 그동안 미처 생각하지 못한 요소들이 떠오른 것이다. 아니, 카야가 상기시켜주었다는 게 정확하겠지.
쓰레기 같이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헨드릭에게도 우선순위라는 게 있었다. 그 자신과 그의 연인들이 0순위였다. 세스티아와 아르가 헨드릭의 용사대에 공헌한 게 크긴 했지만, 그 상황에서 그녀들까지 챙길 상황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에게 그녀들을 데리고 있을 명분도, 권한도 없다고 생각했다. 세스티아는 메이저한 교단 내의 수녀장이고, 아르는 그가 회유한 것 때문에 트라우마에 가까운 본능을 일깨운 적이 있었다. 게다가 그녀들은 친구, 동료 내지는 은인에 가까운 이들이었지 함께 살 ‘가족’은 아니었다.
하지만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던전이 사라진다는 건 단순한 사건이 아닐 것이고, 그게 어떤 폭풍을 만들어 그녀들을 덮치게 될 것인지 신경이 쓰였다.
“신경 쓰이지 않습니까?”
“…아예 안 쓰인다고 말할 순 없겠네.”
“이제 안정적으로 자리 잡았다고 할 수 있으니, 점심 먹고 한 번 그분들의 소식을 알아보러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아무리 빨리 가도 왔다갔다 2주는 넘게 걸릴 텐데?”
“저는 강요한 적 없습니다.”
카야가 어깨를 으쓱이며 완성된 샐러드를 식탁에 올려놓았다.
“지금 당장 가보라는 것도 아니고, 생각을 충분히 하면 됩니다. 생각이 있으면 가보면 되는 것이고, 없으면 안 가면 그만입니다.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됩니다.”
“그런가.”
“예. 아. 반죽은 제가 마무리할 테니 셰이랑 일루미나 좀 불러주십시오. 아마 지금쯤이면 일이 마무리 됐을 겁니다.”
셰이와 일루미나와도 이야기를 나눠보라는 카야의 배려임을 모르지 않았다. 헨드릭은 자신의 무심함에 한탄했지만 동시에 카야의 세심함에 감사했다. 그가 집 밖으로 나가자 도끼를 손질하고 있던 셰이와 달걀을 든 바구니를 들고 있는 일루미나와 마주쳤다.
“응?”
“헨드릭?”
“점심 먹고 세일럼에 한 번 들러볼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그녀들은 잠시 서로를 보며 눈을 깜빡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슬슬 그럴 때가 되긴 했죠.”
“응. 그럴 때가 되긴 했지.”
“…?”
**
“하아….”
세스티아가 세일럼을 나선 지 약 일주일이 지났다. 그녀는 극도로 지쳐있었다. 그녀의 체력과 무력이 일반인보다는 뛰어나고 어느 정도 재산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강행군을 지속했다.
이유는 단 하나.
최대한 빨리 찾아서 코르디아를 안전한 곳에서 재우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아가. 이쪽이 맞는 거 같아요?”
코르디아 때문에 무리하고 있는 세스티아가 버틸 수 있는 건, 역설적으로 코르디아 덕분이었다. 제 자식이라는 걸 제외하고서라도 코르디아는 정말 사랑스럽게 생긴 아기였다. 뭣도 모르고 빵긋 웃을 때면 얼굴을 마구 부비고 뽀뽀하고 싶은 욕망을 참느라 곤욕이었다.
“아아브브.”
“우리 아가, 똑똑하네?”
“아부.”
한동안 간헐적으로 울음을 터뜨려 사실상 방향을 강제하던 코르디아는 거의 하루 넘게 잠잠했다. 정말 신기한 일이었지만 세스티아는 별다른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애초에 의문을 가지거나 믿지 못했으면 지금까지 울음소리 하나만으로 움직이지도 않았으리라.
오히려 지금 가고 있는 길이 헨드릭을 볼 수 있는 곧은 길인 것 같아서, 이대로 간다면 머지않아 헨드릭을 볼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설레는 마음마저 들었다.
‘조금만 쉬고 움직이자.’
코르디아가 슬슬 젖을 보챌 기미가 보였다. 마침 주변에 키가 꽤 큰 나무가 많이 있었고, 몸을 가리기에는 충분했다. 적당히 안쪽에 들어가서 가슴께를 풀어헤치고 젖을 물리려는 그때, 돌연 코르디아가 울기 시작했다.
“아, 아가. 이 안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야.”
세스티아는 옷을 추스를 생각도 못 하고 황급히 원래 방향으로 몸을 돌리며 코르디아를 달랬으나 울음이 그치기는커녕 더 거세졌다.
“이, 이런 적이 없었는데 대체 왜….”
세스티아는 어떻게든 코르디아를 어르고 달래보려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좋지 않았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몬스터나 야생 동물이 출몰할 수 있었다. 이제는 아예 자지러지게 우는 수준까지 가자 세스티아는 일단 자리를 피하기로 했다.
“아가. 아가. 왜 그렇게 서럽게 울어요? 응?”
저벅-
그 탓에 세스티아는 평소라면 진즉 눈치챘을 소리를 알아차리지 못했고, 코르디아의 울음소리는 더 커졌다. 세스티아는 코르디아의 몸에 갑자기 이상이 생겼나 싶어 덜컥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어, 어쩌지? 대체 왜 이러는 거지?’
세스티아는 초보 엄마였다. 두 번째 출산이긴 하지만 첫째는 그녀가 기르지 못했다. 사실상 처음으로 기르는 것이었고, 심리적으로 다급한 상태라는 것도 영향이 있었다.
코르디아는 사실상 세스티아의 제일가는 보물이었고, 그 보물에 이상이 생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굳건한 멘탈리티에 금이 쩌저적 가기 시작했다.
‘내가 줄곧 안고 있었다고 해도 여행 자체가 무리였던 건가? 아니면 신성력을 쐰 게 이상이 있었나? 아니면 출산 때 뭔가 실수라도 한 건가?’
한 번 든 생각은 급격하게 뿌리를 뻗었다. 몸은 기계적으로 코르디아를 달래고 있었지만, 세스티아의 멘탈은 코르디아의 울음소리에 맞춰 급속도로 깎이고 있었다.
저벅- 저벅-
저벅저벅저벅저벅-
“누구!”
코르디아의 울음소리 때문에 가려졌던 기척이 지근거리에서 느껴졌다. 아기를 품은 여자는 원래 경계심이 강한 법이었고, 세스티아는 여태껏 눈치채지 못한 자신을 또 채찍질했다.
“아기가 자지러지게 우는 소리가 들려서, 뭔가 싶어서 와봤는데….”
“……….”
“세상에…….”
“…………………….”
“세스티아.”
“헨드릭님.”
“오랜만…이야.”
“오랜만…이에요.”
언제 울었냐는 듯 얌전해진 코르디아와 헨드릭의 눈이 마주쳤다.
“아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