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진심을 담아서(2)
‘조금만… 조금만 더…!’
세스티아는 이를 악물었다. 몸이 쪼개지고 살이 찢어지는 것 같은 이 고통은 견디기 힘들었다. 어렸을 때 첫째를 낳았을 때보다야 잘 견디기야 하겠지만, 심리적인 요인이 그녀를 조급하게 했다.
던전.
그리고 헨드릭의 용사대.
아기가 잘 나올 수 있을지 걱정되면서도, 하반신이 눈물나게 아프면서도 헨드릭이 신경 쓰여서 미칠 것 같았다. 게다가 수도원 내에서 압박붕대로 위장할 때나 배 밖으로 아기를 달래줄 때는 조심스레 사용했던 신성력조차, 지금은 혹여나 실수할까봐 사용하지도 못했다.
“아윽, 아, 아가….”
잠시간 잦아들었던 고통이 다시 심해졌다. 그건 마치 아기가 자기에게 집중하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후우, 후우, 후우.”
숨이 턱 막혔다. 세스티아는 아기에게 집중하기 위해 눈을 꽉 감았다.
‘헨드릭님… 아.’
하지만 역효과였다. 눈을 감자 헨드릭의 모습이 더 선명하게 떠오른 탓이었다. 산책할 때 그녀를 걱정하던 헨드릭, 던전 공략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하던 헨드릭, 위기상황에서 투지가 빛나던 헨드릭, 사랑을 육성으로 속삭…이지는 않았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충만한 사랑을 느끼게 해주었던 헨드릭의 모습들이 주르륵 스쳐지나갔다.
‘보고 싶어요.’
지우려 해도 지울 수 없었다. 세스티아에게 헨드릭은 그런 존재였다. 처음엔 그저 같은 교단 자매의 동료일 뿐이었지만, 어느샌가 그녀의 떼려야 뗄 수 없는 일부가 되었다. 보면 볼수록, 이야기할수록 그 일부는 견고해지고 커졌다. 명확한 이유는 지금도 콕 찝을 수 없었다. 이끌렸고, 운명이었다. 특히나 지금 그녀의 뱃속에서 고군분투 하고 있는 아기야말로 그 증거였다.
“아….”
본능적으로 하복부에 신성력을 쏟아내려던 세스티아가 화들짝 놀라 신성력을 거두었다. 산처럼 부풀어오른 배와 힘없이 벌어진 양 다리가 보였다. 순간 쓸쓸하고 울컥한 마음이 치솟았다. 이 험난한 세상에 홀로 버려진 기분이 든 것이다.
“아윽!”
몸 안에서는 아기가, 몸 밖에서는 던전 입구 쪽에서 발생한 정체불명의 기운이 그녀의 몸을 두드렸다. 지금 이 순간, 헨드릭이 옆에 있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지지대 삼아 잡고 있는 손잡이 대신, 그의 손을 잡고 싶었다. 괜찮다고, 잘 되고 있다고, 조금만 힘내주라고, 고맙다고… 그의 다정한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견디자.’
세스티아는 예전부터 그랬듯, 다시 한번 인내하기로 했다. 그 대신 헨드릭의 모습을 굳이 지워내지도 않았다. 이 자리에 없으니, 상상 속에서나마 그와 함께하고 싶었다. 상상 속에서나마 그의 응원을 받고 싶었다.
그러면 코르디아도 힘낼 수 있지 않을까.
세스티아는 계속 발생하고 있는 심상치않은 기운을 몸으로 받아내며 배에 힘을 주었다.
**
“아….”
8시간.
새로운 생명이 세상 밖으로 나오는데 걸린 시간이었다.
산고 때문에 기진맥진했지만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기에 뒤처리까지 혼자 해야 했던 세스티아는 당장 쓰러져도 이상할 게 없었지만, 쓰러질 수 없었다.
품안에서 울부짖으며 꼬물거리는 이 작은 생명체를 보고 어찌 그럴 수 있을까.
“코르디아. 내 딸.”
코르디아의 울음소리는 우렁찼다. 그동안 많이 답답했다고 투덜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아빠는 어디 있냐고 묻는 것 같기도 했다.
아무렴 어떠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신생아라서 얼굴도 빨갛고 쭈글쭈글하고 머리털도 별로 없었지만, 세스티아는 벌써부터 아기의 얼굴에서 헨드릭의 닮은 점을 찾고 있었다. 없던 기운도 났다.
“아가. 코르디아.”
코르디아가 오늘 태어난 것조차 운명처럼 느껴졌다. 마치 아빠의 귀환을 알아채고 딱 맞게 마중나오려던 게 아닐까 싶었다. 이제는 던전 입구 쪽에서 발하는 기운이 잦아들었지만, 코르디아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라엘라님.”
지금이라도 던전 입구로 달려가고 싶었다. 환속했지만 아직도 신성력을 다룰 수 있었고, 그럼 어떻게든 치유하면 이 몸뚱아리는 굴릴 수 있을 테니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코르디아는 이제 막 태어난 아기였다.
건강하게 태어났다지만 세상에서 가장 약한 존재였다. 상당한 거리를 움직이는 것 자체가, 바깥에서 숨을 쉬는 것 자체가 코르디아에게 해가 될 것 같았다.
‘만약 무사 귀환했다 해도 심적으로 엄청 지친 상태일 텐데, 오늘 막 태어난 아기를 데리고 가서 당신 딸이라고 말하면….’
연인을 사랑하고 아끼는 헨드릭은 많이 당황할 것이고, 그의 연인들은 굉장히 불쾌해할 수도 있었다. 역사적인 위업을 달성하고 귀환한 세일럼 최고의, 아니 세계 최고의 영웅들의 심기를 어지럽히고 싶지 않았다.
세스티아가 정한 그녀의 행복은, 첫째 딸을 임신했을 때부터 쭉 후순위였다.
‘괜찮아.’
참는 것도 도가 텄고, 정신력도 단단했다.
비록, 그 단단함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게 아니라 상처 입고 아물고를 너무나 반복한 나머지 굳은살처럼 변한 것이었지만.
‘이번엔… 후회하지 않아.’
애달픈 이 마음을 힘겹게 억누르는 이 인내가, 인생에서 겪는 마지막 인내가 될 거라고.
이번 인내만큼은 마냥 속을 썩이고 발을 동동 구르는 게 아니라, 달콤한 과실을 마침내 따먹을 것이라고.
자칫 으스러질까봐 꽉 끌어안지도 못하는 코르디아를 달래며, 세스티아는 눈을 감고 기도했다.
**
코르디아의 탄생일로부터 보름이 지났다. 그동안 세스티아는 제 컨디션을 거의 되찾았다. 뿐만 아니라 코르디아에게 그녀가 할 수 있는 모든 축복을 쏟아부었다. 다른 누군가가 봤다면 극성이다고 말할 정도로 세스티아는 코르디아에게 집중을 쏟았다.
“아브!”
“우리 딸, 아빠가 보고 싶어요?”
“아부!”
안 그래도 건강하게 태어난 코르디아는 15일간 신성력에 절여지면서 완전히 혈기왕성한 아기가 되었고, 6개월 정도 지나야 말문이 트이는 대부분의 아기와는 다르게 벌써부터 옹알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브브브!”
세스티아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허공에 쫍쫍대는 코르디아에게 젖을 물려주었다. 어찌나 기운찬지 젖꼭지가 아팠지만, 더 선명해진 아기의 이목구비를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신성력이 줄어들었어.’
하지만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라엘라님이 카야 자매에게 강림하신 이후에도 그렇게까지 티가 나지 않던 세스티아의 신성력이, 코르디아 출산 후에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했고 그 속도는 날이 갈수록 더 빨라졌다. 그랬기에 세스티아의 마음은 더 급해져서 코르디아에게 신성력을 더 쏟아부었고, 그럴수록 감소 속도는 더 빨라졌다.
‘이 정도면 거의 반절보다 조금 높은 수준인데….’
여신을 향한 믿음 자체를 저버리진 않았지만 그녀는 수녀직을 포기했다. 지금까지 신성력이 유지된 것도 사실 운이 좋은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나 아쉬웠다. 아기에게 더 좋은 걸 오랫동안 해주고 싶었고, 혹여나 헨드릭을 만날 때 그의 대단한 연인들에게 밀리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던전이 갑자기 사라져서 세일럼 내에 엄청난 혼란이 발생했고, 그 와중에 헨드릭과 용사대에 대한 소문은 찾아볼 수 없었으니 계속 여기서 머무를 수 없었다.
아무리 코르디아가 건강하다 하더라도 아기는 아기. 바깥을 돌아다니는 건 시기상조였지만, 신성력이 남아있을 때 헨드릭을 찾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신성력이 없는 그녀는 그냥 평범한 아기 엄마일 뿐.
‘라엘라님. 어리석은 딸을 용서해주세요.’
세스티아는 한쪽에 고이 보관해둔 수녀복을 꺼냈다. 교단의 수녀인 척 한다면, 아무래도 조금은 안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코르디아. 이제부터 아빠를 만나러 갈 거예요.”
끅-
세스티아는 코르디아의 등을 토닥여 트림을 유도했다. 코르디아는 입을 몇 번 오물거리더니 스르르 눈을 감았다.
“옳지. 잘 자고 있어요. 엄마만 믿어요.”
보자기 끈을 꽉 묶으며, 세스티아는 집을 나섰다.
‘무사 귀환했다면, 더 이상 세일럼에 머물러 있을 것 같진 않아.’
세스티아는 무작정 발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아기가 있었으니 시간을 허비할 수 없었다. 헨드릭을 완전히 이해한다고 자신할 수 없었지만, 그의 입장이 되어서 그의 생각을 상상해보았다.
‘헨드릭님은 명예나 재물에 딱히 관심이 없으셨어.’
헨드릭이 했던 말과 행동은 거의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그녀였다. 어느 정도 확신을 가졌다. 모녀의 발걸음은 세일럼 밖으로 향했다. 세일럼 경계에서 상당히 엄한 검문을 받긴 했지만 수녀복 덕분인지 비교적 쉽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헨드릭 일행이 세일럼을 빠져나갔다는 것에는 확신이 있었지만, 어디로 향했을지는 알 수가 없었다.
‘카야 자매님의 고향? 아니야. 셰이 성전사님의 고향…도 아니고. 일루미나님의 고향도 아니겠지.’
세스티아가 알기로 그들의 고향은 갈 사정이 안 되거나 이미 없어져버렸다. 막막함이 확 다가왔다. 곧 서운함이 밀려왔다. 자기는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나 싶었다. 어디로 갔는지 단 한마디라도, 직접이 아니라 간접적으로라도 이야기 해줬다면 좋았을 텐데.
정식적으로 헨드릭의 연인이 아니었고, 그를 유혹한 것도 세스티아였기에 엄밀히 말해서 그에게 뭐라 따질 자격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런 감정이 울컥 치솟는 건 그녀로서도 어떻게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울컥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멍하니 서서 하늘을 바라보던 그때, 잠들어있던 코르디아가 몸을 뒤척였다.
“아가?”
“응애!”
코르디아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아기의 등을 토닥이며 어화둥둥 잠을 다시 재우려던 세스티아의 눈이 커졌다.
코르디아는 남쪽을 바라볼 때만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