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화 〉가장 기나긴 공포(7)
“셰이… 셰이…! 일어나! 일어나라고! 어? 뭐라고 말이라도 좀 해봐아!!”
“….”
“대장.”
“장난치지 말고… 어? 체력이랑 멘탈리티도 남았는데… 왜… 왜…!”
셰이는 미동도 없었다. 온몸에서 피를 흘렸던 일루미나와는 대조적으로 외상은 딱히 없었지만,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녀에게서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차갑진 않았다. 하지만 맥박이 뛰지도 않았다.
시야가 뿌예졌다.
아직 보스전 중인데, 공포새끼가 눈앞에 있는데.
주르륵 흘러나오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은데, 인정한 적도 없는 것 같은데.
셰이의 모습을 담은 눈이, 셰이의 얼굴을 만져본 손이, 셰이를 보고 찢어질 듯 아픈 내 심장이, 지금 흐르고 있는 눈물, 그 모든 게.
그 모든 게….
결코, 결코 상상하고 싶지도 않고 입에 담고 싶지도 않은 상황을 부정할 수 없게 했다.
메시지 상 셰이의 컨디션은 여전히 멀쩡한 편이었고, 그 어떠한 페널티 또한 뜨지 않았지만믿기지 않았다.
예전에도 체력과 멘탈리티는 남아있던 상황에서 일어서지 못할 때가 있었는데. 그래도 그땐 저렙이었으니까, 지금 컨디션보다도 수치상으로 더 안 좋았으니까, 완전히 100% 게임은 아니니까 그런가보다 했었는데.
“대장.”
“….”
“대장.”
“….”
“대장!”
우악스런 손길이 느껴졌다. 고개가 휙 돌아갔다. 카야가 날 바라보고 있었다.
“끝나지 않았습니다.”
“….”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끝났어.”
“대장!”
“설령 저놈을 조진다 하더라도… 방금 의미가 없어졌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윽….”
카야의 손이 내 볼을 더 세게 압박했다. 많이 지쳐있는 그녀의 악력은 여전히 강력했다. 내 얼굴이 찌그러드는 것 같았다.
“저희 같은 필멸자가 여신의 힘을 끌어다 쓰는 게 그렇게 만만한 일인 줄 알았습니까? 셰이가 이럴 줄도 몰랐을 것 같습니까? 그 정도 각오도 없었던 겁니까?”
“…!”
눈이 번쩍 뜨였다.
“수명이 대가라는 건 명확히 말하지 않았지만 대장이라면 눈치챘을 것 아닙니까. 저는 엘프 혼혈이기도 하고 셰이만큼 다쳤던 것도 아니고 라엘라님께서 제 안에 계시니 어느 정도 부담이 줄었지만, 셰이는 아닙니다. 인간의 몸으로 오롯이 다 치렀단 말입니다.”
“으읍!”
내가 지금 상황을 파악 못해서 그래?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나도 다 알아! 다 아는데… 어떻게 그렇게….
“그러니 유스티티아님의 힘이 다 떨어진 지금, 생명력을 한계에 한계까지 쥐어짜며 억지로 버티던 신체가 무너지는 것도, 그나마 남아있던 생명력도 마지막 공격에 쏟아부었기 때문에 이렇게 되는 건 필연이었던 겁니다.”
“으으읍!”
나도 안다고! 그렇지만 필연이라니! 반드시 이렇게 될 거라고 단정짓듯 말하는 게 어디있어? 그것도 네가?
그리고 카야 너도 들었잖아…
30년은 무리더라도 힘내본다고. 그건 지금 당장 죽, 이렇게 된다는 뜻은 아니지 않냐고!
“그래서 다 저버리고 포기할 겁니까?무엇 때문에 셰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셰이 뿐입니까? 일루미나도 마찬가집니다. 그녀의 베이파는수리한다 해도 절대 예전만큼의 음색은 나오지 못할 겁니다. 아예 뿌리까지 다 뜯어버렸으니.”
“….”
“이런 말까진 안 하려고했는데… 셰이가이렇게 된 건, 대장 탓입니다.”
“…!”
지금, 뭐라고…?
“제일 먼저 저 괴물의 술수에서 벗어난 셰이가, 대장을 구하기 위해 또 한 번 무리한 겁니다. 그나마 황금색이 조금 보이던머리카락도, 그나마 30대 정도로 보이던 얼굴에 더 노화가 찾아온 것도 그 때문입니다!”
어어… 어…?
“셰이가 왜 뒤돌아보지 않은 줄은 아십니까? 뻔합니다! 대장이 이럴까봐! 자책할까봐! 포기할까봐! 마음 아파할까봐!”
“우으읍!”
놔. 이거 놓으라고!
“셰이도 전사입니다. 여자이기 전에. 각오한 바일 겁니다. 그러니 그녀를 존중하고 싶다면, 여기서 그녀의 노력을 헛되이 하게 하지 말고 일어서십시오.”
“윽!”
카야가 날 거칠게 내팽개쳤다. 부딪친 꼬리뼈가, 붙잡혔던 양 볼이 얼얼했다. 울컥했다. 나라고 그걸 모르나. 여기까지 아득바득 기어 온 최종 목표가 개박살났으니 그런 거 아닌가. 로봇도 아니고 철인도 아닌데. 냉정하고 싶어도, 이성적으로 행동하고 싶어도 그건 결국 우리가 무사하다는 전제가 있어야 했다.
“카야, 너….”
뭐라 말하려던 나는 그녀의 분위기가 너무나도 살벌해서 입을 다물었다.
“대장은 거기 그냥 주저앉아 계십시오. 대장이 좌절해도, 대장이 대장의 운명을포기해도 제가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
카야는 연녹색 빛덩어리처럼 보이는 철퇴를 치켜들었다. 빛은 공포새끼를 가리키고 있었다. 셰이의 최후의 돌격은 놈에게도 상당히 데미지가 컸는지, 우리가 이러고 있을 때 한마디 좆같은 소리를 끼얹을 법도 한 놈인데 그럴 여유가 없는 것 같았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말, 기억하고 있으십시오.”
“카야…?”
카야가 앞으로 튀어나갔다. 철퇴뿐만 아니라 그녀의 전신이 녹색 빛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한 번 찾아왔던 연녹색 혜성이 다시 한 번 강림했다. 혜성은 저번보다 더 밝게 빛나고 있었다.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콰아아앙--!
[압도적인 일격!]
[카야가 가장 기나긴 공포에게 82의 데미지를입혔습니다.]
[‘공포의 갑주’의 효과로 인해 50을 초과하는 데미지를 입힐 수 없습니다.]
[일루미나가 가장 기나긴 공포에게 49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0/300]
정말 믿을 수 없게도, 카야는 다시 한 번 치명타를 띄웠다. 내가 띄운 것,일루미나가 띄운 것, 셰이가 띄운 것에 이어 다시 카야가 띄우기까지….
만약 공포의 갑주가 없었다면 진즉 개박살 냈을 정도의 강운이었다. 없었다면,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치명타가 단 한 번도 안 떴을지도 모르지만….
‘아니, 셰이가 저렇게 된 시점에서 이딴 건 다 필요없어….’
그래도.
그래도 잡은 건가.
체감상 좆같았던 것, 오래 걸렸던 것 이런 거 다 제외하고 단순히 전투 과정만 보면 당연히 일부 위기가 있었지만 다른 보스들보다도 쉬운 편에 속했다.
근데 왜.
어째서 또 메시지가 안 뜨는 거야. 어?
[직접 겪고도 믿기 힘들군.]
그때 공포새끼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단하다 하나 필멸자들인 것을. 거짓되었다 하나 신이라 일컫는 놈들조차 날 여기로 내모는 것밖에 하지 못했던 것을.]
뒤졌으면 곱게 뒤질 것이지 뭔 말을 지껄이고 있어? 어? 왜 안 뒤지는 거야?
[가장 기나긴 공포가 남은 기운을 해방합니다.]
“씨발……?”
“대장!”
“헨, 드릭…!”
카야가 셰이 대신 우리 앞을 가로막았고, 나는 엉거주춤 그녈 따라 셰이와 일루미나 앞을 가로막았다. 볼품없었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카야마저….’
카야 또한 방금의 일격으로 많은 힘을 소모했는지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아보였다.
[공포의 시간이 강제로 발동됩니다.]
[저항 굴림]
셰이 : -
카야 : 3
유진 : 4
일루미나 : 3
가장 기나긴 공포 : 6
[저항에 실패했습니다.]
[용사대 전원이 상태이상 ‘공포’에 걸립니다.]
“전투 끝났어 이 병신새끼야! 곱게 뒤지라고!”
그런 상황에서 저딴 더러운 짓거리를….
[네놈들의 목적은 이루어진 것처럼 보일 것이나, 곧 무용하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네놈들이 말하길, 개미는 인간을 못 보는 것처럼.]
[네놈들의 분투는 결국 헛된 순환의 일부가 될 것이다.]
[가장 기나긴 공포가 더 농밀한 기운을 해방합니다.]
[저항 굴림]
셰이 : -
카야 : 2
유진 : 3
일루미나 : 4
가장 기나긴공포 : 6
[저항에 실패했습니다.]
입이, 곧 온몸이 바짝 굳는다. 강력접착제라도 바른 것마냥 떨어질 생각을 않는다. 고개도 돌아가지 않는다. 눈조차 함부로 깜빡일 수 없고 숨도 어떻게 쉬는지 모르겠다. 심장 뛰는 것조차 망설여졌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두려워졌고, 곧 이곳에 내가 존재하는 것 자체가 의문이 들었다.
무섭다.
모든 게 텅 날아가고 무섭다라는 감정이 가득했다. 태초부터 이어져온 것 같았다. 나, 뭐하고 있었던 거지? 나, 왜 이러고 있는 거지?
분명 저새끼 체력 0 되는 거 봤는데, 왜 이렇게 된 거지?
셰이가 저렇게 됐는데, 나는, 왜 살아있는 거지? 이유가 있나?
셰이?
셰이……?
그게 누구더라?
아.
싫어. 너무 싫어.
벗어나고 싶어. 어떻게?
죽는다?
죽으면 끝 아니야?
그래, 죽을까.
죽는 것도 무서운데.
아냐. 지금이 더 무서워. 이렇게 살아있는 게 더 무서워.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게 무서워서 더 무서워.그러니 그냥 죽어버리면 되겠다.
하하.
히히.
…께 바칩니다.
아파.무서워. 구해줘. 누가?
…감히 바라옵건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힘을 불려주십시오.
아파. 무서워. 구해줘. 누가?
…이 순간 이후로 더 이상 빛을 보지 못하더라도, 당신의 딸이 되지 못하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저희의 노력과 업적이 의미가 있다면.
아파 무서워 아파 무서워 아파 무서워 아파 무서워 아파 무서워 아파 무서워……….
…부디 이 어리석은 딸의 희생을 가여히 여기소서.
Clemens benignitas et inexorabilis gratia
따스한 자애와 냉철한 관용을
[카야가 특징 ‘라엘라의 화신’의 숨겨진 스킬을 발동합니다.]
아파 이제 그만 죽고 싶어 제발 죽고 싶어 왜 이렇게 끈질긴 거…………?
[거룩한 희생]
[시전자의 체력과 멘탈리티를 한계까지 희생합니다.]
[카야의 체력이 33 감소합니다.]
[남은 체력 –13/34]
[거룩한 희생의 영향으로잠시 사경 및 사망 상태가유보됩니다.]
[카야 멘탈리티 – 99]
[거룩한 희생의 영향으로 잠시 잠식 상태가 유보됩니다.]
“누가 멋대로 죽고, 누가 멋대로 희생하는 거예요! 언니! 대장님! 언니 좀!”
“언니! 카야 언니!!!”
[시전자를 제외한 모두의 체력과 멘탈리티를 33% 회복합니다.]
[셰이의 체력이 14 회복됩니다.]
[유진의 체력이 9 회복됩니다.]
[일루미나의 체력이 8 회복됩니다.]
[모든 용사 멘탈리티 +33]
[시전자를 제외한 모두에게 걸린 상태이상을 제거합니다.]
[상태이상 ‘가장 기나긴 공포’가 제거됩니다.]
[라엘라, 그년의 힘이 어째서 지금까지!]
눈을 떠보니 시체처럼 쓰러져있던, 아니 시체였던 셰이와 시체나 다름없었던일루미나가 무릎을 꿇고 기도한 자세 그대로 굳어버린 카야를 붙잡고 오열하고 있었고….
공포새끼는 최후의 추한 발악이 이런식으로 막힌 것까지는 정말 예상 못했는 듯, 어째서라는 말을 내뱉으며 급격히 존재감이 옅어지는 중이었다.
[나는 불멸하니, 네놈들의 시간은 무용하게 될 것이다.]
“닥쳐!”
나는 그제서야 냉정했던, 아니 냉정한 것처럼 들렸던 카야의 말을 이해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말. 그녀는 셰이가 쓰러졌을 때부터 이걸 각오했던 것이리라. 나한테 말하지 않았던 건… 만약 말했으면 내가 갈팡질팡했을 테니까.
씨발, 씨발, 씨발….
“언니… 언니…! 내가 각오한 건데… 나 하나 죽으면 되는 일이었는데… 왜… 왜 내가 짊어진 대가까지 언니가 왜…!”
“언니! 카야 언니!!”
이해했어.
이해했는데.
왜, 그 끝나지 않음엔 네가 포함되지 않은 건데.
[더롱 테러 최고난도 ‘가장 기나긴 공포’의 던전 제 4구역을 클리어했습니다.]
지하 깊숙한 던전에,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