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화 〉가장 기나긴 공포(5)
균열은 아주 미세했다. 하지만 그 미세한 균열은 아주 유의미한 변화를 가져왔다. 아마도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어두컴컴하고 좁아터진 이 방에서만있다 보니 바로 눈치챌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분명, 지금….’
[용사대의 의지는 가장 기나긴 공포에 꺾이고 말았습니다.]
[용사대가 전멸했습니다.]
“아 씨-발 똥겜 쓰레기겜 운빨좆망겜!”
[새로운 용사대를 창설하시겠습니까?]
“안 해 씨발!”
그 다음은 토씨 하나 변한 게 없었다. 그래서 내가 잘못 본 건가, 잘못 들은건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미세한 균열은지금도 존재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다음은? 그 다음은…?’
무심코 전 사이클 때의 기억과 지금을 비교하고 있다가 그 사실을 한 박자 뒤늦게 깨달았다.
기억이 리셋되지 않았다.
나는 헛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무심코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자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발견했다. 원래라면 리셋됐을 때 내 위치는 침대 앞, 컴퓨터 의자 뒤였다. 하지만 난 지금 침대 위에 앉은 자세 그대로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기회야.’
공포새끼가 힘이 다했다거나, 틈을 만들어줬거나 하지는 않을 터였다. 분명 나도 모르는 사이에 뭔가가 충족이 됐거나 외부에서 개입이 됐다고 보는 게 타당했다.
‘카야. 셰이. 일루미나.’
동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쩌면 나보다 먼저 자력으로 벗어난 그녀들 중 누군가가 애타게 날 찾고 있는 신호일 수도 있었다. 근데 그녀들의 얼굴이 가물가물하니 흐릿한 게 퍽 서글퍼졌다. 대체 이곳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썩어있던 것일까. 고갤 흔들었다. 다시 울렁거리는 문구와 쳐다보고 싶지 않은 용사들의 시체를 바라봤다.
‘이건 기회야.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유일한 기회.’
이곳에서 빠져나가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공포마저 점점 희미해지고, 무한히 반복하는 이 사이클이 매번 처음처럼 느껴지긴 하지만 뭔가 익숙하다는 느낌마저 드는 지금.
미세한 균열이 야기한 변화는 공포로 굳어져버린 내 관성에도 힘을 부여했다. 내가 아무리 쫄보 마인드라 해도, 여기까지 꽁으로 온 게 아니었다. 일생일대의 기회를 눈치채고도, 겁먹고 가만히 있을 정도로 구제 불능은 아니었다.
“…아,시간 좀 애매한데 한 판만 더 하고 잘까.”
[새로운 용사대를 창설하시겠습니까?]
‘아니. 새로운 용사대, 제2의 용사대는 없어. 게임에선 한 판만 더, 두 판만 더, 세 판만 더가되지만…난 아니야. 난 더 이상 저 때의 내가 아니야. 내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야. 내가 있는 곳도 여기가 아니야. 정신 차려. 난 더 이상 저 때의 한유진이 아니라고.’
이 특수한 공간에 오랫동안 머무르면서 과거의 나와게임 화면만을 반복적으로 들여다보니, 자연스럽게 거기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난 지금 게임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수틀리면리겜이 자유로운 플레이어가 아니라, 하나 뿐인 목숨을 걸고 공포를 무찔러야 하는 용사였다.
“쓰읍, 솔직히 이번 조합으로 3구역을 노데스로 깬 게 실력이긴 했지. 그래. 일단 한 판만 더 해보자. 첫트클은 실패했지만 어쨌든 깨긴 깨야하니까….”
‘이번 조합으로 3구역까지 노데스로 깬 게 실력? 아니다 아니야. 내가 잘한 건 하나도 없어. 다 용사들 노력 덕택이지.’
[난이도를 선택해주십시오.]
“당연히.”
[‘가장 기나긴 공포’ 난이도를 선택하셨습니다.]
‘씨발, 저땐 뭔 생각이었을까… 뭔 자신감이었을까….’
뭐, 별 생각 없이 골랐겠지만.
가장 기나긴 공포, 놈의 노림수도 이제는 끝이었다. 나는 매번 포기하고 돌아선 장면에서, 이번엔 눈을돌리지 않았다.
‘…………씨발.’
반사적으로 눈을 감고 외면하려다 이를 악물고 버텼다. 화면 속 처참한 시체는 바로 우리들이었다. 공포에 미쳐버린채 스스로의 눈알을 뽑아버리고, 손톱이 부러질 때까지 바닥을 긁다가 베이파를 박살내고, 철퇴와 대검과 도끼가 서로 부딪치고 얽히고설키다 가까스로 동료를 공격하려는 통제 불능의 무기를 스스로에게 겨누고, 그 모든 걸 허망하게 지켜보다가 자살하고….
1구역에서부터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었던 광경이었다. 우리가 굳건히 이겨냈기에, 잠식당한 와중에도 서로를 깊이 생각했기에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었다.
가장 기나긴 공포 이 새끼가 내게 경고, 아니 선언한 것이었다.
이게 공포에 맞서는 용사들의 최후라고. 맞서선 안 될 것에 맞선 용기가 아닌 만용, 맞서기 불가능한 것에 맞선 위대한 도전이 아닌 무용한 실패를 이야기했다.
계속 자기가 만든 공간 속에서 무한한 패배를 공포와함께 곱씹으며, 종래엔 왜 갇혔는지도 모르게 만들려 했던 놈의 계략은 실로 음험하고 치밀했다.
‘아파.’
애써 보고 싶지 않았던 걸 본 부작용은 상당했다. 저 장면이 사실이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쳐버릴 것 같았다. 무뎌졌던 공포가 첨예하게 되살아났다. 하지만 그만큼 내 의지도 강렬해졌다.
‘지금도 내 모습 보면서 속으로 쪼개고 있겠지, 공포포기무새관음증변태새끼?’
내 동료들이 저렇게미칠리가 없다. 난 우리 용사대의 최약체다. 그러니 네놈이 보여준 저 장면은 모조리 거짓이다.
거짓이다.
거짓이다.
거짓이다.
쩌저적-
그리고 설령, 내가 지금 겪고 있는 모든 일이 거짓.
아니.
더 롱 테러의 일부라 할지라도.
내가 느끼고 있는 감각, 감정.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
이모든 것들이 내겐 이 이상 진실될 수 없기에.
공포 네놈새끼를 무찌르고 그녀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다면 내게 있어 그게 가장 최선이기에.
쩌적- 쩌저적-
쩌저저적---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개의치 않겠다.
**
[공포 압제]
[용사대가 가장 기나긴 공포의 압제에 잠식됩니다.]
[용사대 전원이막대한 멘탈리티 데미지를 받습니다.]
[압제에 잠식된 정도에 비례해 추가 데미지를 받습니다.]
[셰이 멘탈리티 –44]
[가장 기나긴 공포가 셰이에게18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23/41]
[카야 멘탈리티 –40]
[가장 기나긴 공포가 카야에게 14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20/34]
[유진 멘탈리티 –51]
[가장 기나긴 공포가 유진에게 14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14/28]
[일루미나 멘탈리티 –44]
[가장 기나긴 공포가 일루미나에게 11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13/24]
[공포의 시간 6/12]
[모든 용사 멘탈리티 –5]
“대장님!!! 대장님대장님대장님대장님대장님대장님대장님대장님대장님…!”
“유진, 유진, 유진!”
“헨드릭… 왜 이렇게 늦게 깨어난 거야… 이 바보가…!”
‘셰이… 카야… 일루미나….’
“대장님!!! 말, 아무 말이나 해봐요! 네? 어서!!!”
“부, 분명 의식은차리셨는데 왜 아무 말도… 설마.”
“설마라니, 기, 기껏 제정신 차렸는데!”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머리카락이 뭉텅 잘려나간 산발에, 피골이 상접하고, 주름이 확 늘어난 걸 다행이라고 해야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화면 속 처참한 시체가 아닌 게 어딘가?
근데.
왜 몸이 안 움직여지고. 왜 입이 안 열리는 거야?
[유진의 멘탈리티가 -100을 초과했습니다.]
[공포가 유진을 잠식합니다.]
‘아.’
미친.
기껏 빠져나왔더니, 빠져나오자마자 멘탈리티가 맨틀로 파고들었구나?
하하.
[유진이 공포의 잠식에 저항합니다.]
어쩌면 모니터 속 장면은 내가 먼저 미쳐버려서 시작된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미치고, 내가 미친 것 때문에 미쳐버린 동료들이 또 미치고, 또 미치고 또 미치다가 자멸해버리는 그런 장면.
‘아니. 아니아니아니아니. 빠져나왔는데. 공포새끼 좆까라고, 다 구라라고 했는데 긍정해버리면 어쩌자는 거야.’
날 붙잡고 오열하는 동료들의 얼굴이 그리웠다. 얼굴을 보니 알겠다. 정신력 굳건한 그녀들의 염원이 그 무한의 늪에 균열을 내서 날 건져준 것이리라.
‘아파.’
몸은 아무것도 하기 싫고 지금처럼 계속 드러누워 포기하고 싶었지만.
그녀들이 굳게 처박혀있던 날 끄집어내 줬는데, 이번에도 내가 걸림돌이 된다면… 정말 면목이 없지 않을까.
셰이와 카야가 이번 싸움을 위해 제 수명을 태워 일어났듯.
나도 내 모든 걸 태운다는 각오로 다시 일어서겠어.
라엘라님. 유스티티아님.
그리고 카야, 셰이, 일루미나.
내게 힘을.
“좆까 씨발 공포새끼.”
[적에 대한 강한 적개심과 동료에 대한 책임감이 승화하여 ‘응징의 분노’ 상태가 되었습니다.]
[지속하는 동안 멘탈리티가 변동되지 않습니다.]
[매 라운드 체력이 전체 체력의 20%만큼 감소합니다.]
[걸려있던 모든 디버프가 해제됩니다.]
[속도가 1 증가합니다.]
[공격력이 3 증가합니다.]
[데미지의 10%만큼의 고정 데미지가 추가됩니다.]
[치명타율이 증가합니다.]
[아군 피격시 일정 확률로 반격합니다.]
[사경에 들어서거나 구역 보스를 죽이면 해제됩니다.]
“대장님!!!”
“유진!!!”
“헨드릭!!!”
[놀랍군. 솔직히이번에 끝날 걸로 예상했건만.]
검붉은 기운에 둘러싸인 채 분연히 일어선 내게 안겨든 동료들의 환호성과 정말 의외라는 듯 지껄이는 공포새끼의 좆같은 목소리가 교차했다.
“대가리 딱대.”
움직일 수 없는 몸을 억지로 움직인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실시간으로 생명력이, 수명을 태우는 게 느껴졌다. 1분 1초가 아까웠다. 누구보다도 빠르게 달려가 이글거리는 손도끼를 힘껏 휘둘렀다.
[대가리 분쇄]
[치명적인 일격!]
[유진이 가장 기나긴공포에게 90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공포의 갑주의 효과로 인해 50의 데미지만 입힐 수 있습니다.]
[남은 체력 158/300]
[‘응징의 분노’의 효과로 데미지의 10%만큼 고정 데미지가 추가됩니다.]
[유진이 가장기나긴 공포에게 9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149/300]
[‘공포의 갑주’의 효과로 유진에게 최대 체력의 15%만큼의 데미지를 반사시킵니다.]
[유진이 4의 데미지를 받았습니다.]
[남은 체력 10/28]
[‘응징의 분노’의 효과로 최대 체력의 20%를 잃습니다.]
[남은 체력 5/28]
[‘활력의 선율’의 효과로 유진의 체력이 4 회복됩니다.]
[남은 체력 9/28]
[공포의 시간 7/12]
[모든 용사 멘탈리티 –5]
“으아아아아아아---------!!!”
----------------!
생명력을 태우는 값을 했다. 비록 데미지 제한 때문에 원래 데미지의 반절 정도밖에 안 박혔지만, 뭐 이런저런 효과 때문에 내 체력도 너덜너덜해졌지만… 그래도 이렇게 세 번만 더 때리면 저놈도 뒤질 수 있다는 거 아닌가?
데미지 제한에 반사 갑옷이나 쳐입고 말이야.
“졸렬한 새끼….”
[…….]
기세가 살아났다. 저놈도 반피가 빠졌다. 새로운 페이즈로 또 무슨 지랄을 하기 전에 최대한 체력을 빼야 했다.
‘다음은 일루미나 턴이지… 공격할수록 우리 체력도 빠지니 이렇게 된 거 활력의 선율을 중첩하라고 해야겠네.’
[멘탈리티]
셰이 : -76
카야 : -86
유진 :-112(응징의 분노)
일루미나 : -98
“…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