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86화 〉24시간(4) (186/218)



〈 186화 〉24시간(4)

“레벨 갱신 오케이. 장비 업그레이드 긴급 의뢰도 오케이.”

[남은 시간 : 10시간 33분 24초]

“스킬 업그레이드 오케이.”

[남은 시간: 8시간 34분 51초]

“소비품 충원 오케이.”

[남은 시간 : 7시간 13분 44초]

“아티팩트 충원 오케이.”

[남은 시간 : 5시간 29분 12초]

“장비 업그레이드도… 오케이.”

[남은 시간 : 3시간44분 10초]

세스티아가 치유해줘서 몸이 멀쩡해진 이후 4구역 진입 준비를 위해 아주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멀쩡해졌다고 해도, 이게 뭐라고 해야 하나, 한 이틀  새고 각성제를 한 사발 드링킹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그게 대순가. 이렇게 멀쩡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고, 또 엄청난 대가를 지불했을 카야나 셰이에 비하면 배부른 소리였다.

3구역 클리어 보상으로 얻은 금화로는 이 모든 준비를 ‘최선’으로 하는  불가능했는데, 셰이가 상당한 금화를 가져왔고, 카야가 새로운 아티팩트를 얻어왔으며, 일루미나가 제 인맥을 통해 각종 소비품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오기도했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느 새 시간은 3시간이 채 남지 않았다.

‘이제 남은 건….’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최선, 만전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이 스펙으로, 이렇게 준비하고도 못 깬다?

‘바로 제어판 삭제 가야지.’

뭐, 나는 인생이 삭제되겠지만 어쨌든.

이제는 유형적인 것이 아닌, 무형적인 것. 즉 멘탈리티 관리만이 남았다.

[남은 시간 : 3시간 40분 45초]

“남은시간이 아니라 남은 수명처럼 보이는 건 기분 탓이겠지.”

정신적 피로감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컨디션을 체크했다. 일단 날 제외한 동료들의 체력은 풀이었다.  혼자만 현재 체력이 최대 체력의 9할 정도였는데, 현재 내 육체 성능의 전부를 끌어낼 수 없다는 세스티아의 말이 떠올랐다. 그녀는 자신의 치유술이 모자랐다고 자책했지만 말도  되는 소리였다. 세일럼 최고의 치유 수녀의 치유 능력이 있었기에 단기간에 이 정도로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멘탈리티]
카야 : -49
셰이 : -33
유진 : -75
일루미나 : -50

공포의 심장새끼를 잡고 나서 아직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후유증이 없는 게 이상했다. 나는 잠식에 빠졌었고, 일루미나는 각성했긴 했지만 멘탈리티 수치가 워낙 최악이었다. 그나마 내가 걸렸던 게 ‘죄책감’ 정도라서 다행이었다. 무력감이나 좌절, 착란 이딴 게 떴다면 분명 경과가 달라졌으리라.

‘카야랑 셰이도 그때 당시 몸상태에 비하면 아주 양호한 수준이지만….’

멘탈리티 케어는 둘째 치고서라도, 그냥 우리들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카야가  요리를먹고 싶다고 했었지.’

술을 먹는 건 안 되겠지만, 술 없이 안주 정도만 먹는 건 괜찮지 않을까.

나는 줄곧 만들어 먹어볼까 생각만 하고 한 번도 시도는 하지 않았던, 지구에 있을 때 가끔씩 캔맥주와 함께 먹곤 했던 이름 없는 셀프 메이드 안주를 만들기 위해 여관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되돌렸다.

‘비슷한 재료는 있으려나? 없으면 없는대로 해보지 뭐.’


**

“맛있습니다. 여기서 줄곧 먹었던 것들보다도 더.”

“음음!”

“막 엄청 맛있다 정도는 아니지만, 은근히 계속 먹게 되는 그런 맛?”

요리라고 말하기도 뭐한 이름 없는 무언가는 다행히 동료들에게서 호평을 받았다. 만든 사람이 나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내가 먹어봐도 썩 괜찮았다. 재현율은 좀 아쉬웠지만, 어쩌겠나. 재료가 많이 달랐다.

머리카락도, 분위기도, 얼굴도 달라졌지만 식성은 여전히 좋은 셰이가 한입 가득 담으며 씹고 있는  보며 입을 열었다.

“앞서 겪었던 놈보다 훨씬더 심한 놈이 나올 거라는 건 확정인데, 우리가아니면 누가 그놈을조질 수 있을까 생각하니까 어깨가 더 무겁긴 해.”

“그 존재가 던전 안에서만 영향을끼치고 있는  다행이긴 합니다. 여신님을 비롯한 여러 신들께서 노력하신 결과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세상은  더 절망적이었을 겁니다.”

“그래. 그놈이 던전 밖으로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다고 상상해봐. 뭐, 우리에게 세계를 지켜야 한다는 책임이 주어진 것도 아니고 애초에 나는 이 세계 출신도 아니라 너희를 제외하면 이 세계에 대한 애착은 없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살고 싶어서.

제대로 살고 싶어져서.


내가 생각해도 한국어 교과서에 실릴 법한 아주 제대로 된 역설적 표현이었다.

“제대로 살고 싶어져서…?”

고기를 한 점 집어넣던 일루미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카야랑 셰이는 씹던 걸 멈추었다. 집중해주는 건 좋았지만, 조금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아니, 그렇게까지 심각한 얘기는 아닌데… 그렇게 집중하지 않아도 돼. 먹으면서 가볍게 들어.”

얼마 안 남은 시간을 우중충하게 보낼 생각은 없었다. 물론 가벼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 얘기를 하는 건… 그녀들에게 내 전부를 털어놓고 싶어서였다.

이세계인 유진이라는 비밀 그 자체보다도  나아가, 나라는 인간 자체에 대해 전부를.

“나는 쓰레기였어.”

“대장?”
“대장님?”

“아니, 쓰레기는 버려야 한다, 재활용해야 한다는 존재감이라도 있지. 나는 그런 존재감이나 쓸모조차 없는… 그래. 먼지 같은 존재였어. 아니, 그런 표정 지을 거 없어! 여기 오기 전 과거에 그랬다는 거니까, 과거에!”

굳어있는 그녀들에게 고기를 떠먹여주었다. 그녀들은 마지못해 입을 벌리고 우물거렸다. 내가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 절실히 느꼈다.

“어떠한 희망도 없었어. 흔히 꿈이라고 말하는, 하고 싶은 것도 없었어. 친구? 나는 나쁜 놈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친해지고 싶은 유형도 결코 아니었어. 나부터가 사람을 꺼리기도 했고. 사랑? 친구조차 만들기 두려워하고 귀찮아했는데 어림도 없는 일이었어. 이 모든 걸 합친 게 나였어. 잘하는 것도 딱히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열정도 없고, 돈도 없고, 화목한 가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절친이나 애인도 없는… 언제 어디서 죽어도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을 존재였어.”

“대장.”

“죽을 용기는 또 없어서 죽지 못해 살았지만,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내가 ‘재미’를 느꼈던 건, 차원 너머로 마주한 이 세계를 즐기는 거였어.”

내가 직접 경험한 것만큼은 아니었지만  롱 테러 게임 자체도 처절했다. 수천 시간 하면서 모든 판을 기억할 수는 없지만, 첫 판 때와  처음 난이도를 클리어했을 때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입으로는 쉴 새 없이 운빨좆망겜, 쓰레기겜, 똥겜, 병신겜이라고 욕을 하면서도. 어처구니없게 전멸을 맞이하거나, 한 명 빼고  죽고 가까스로 클리어하거나, 운과 실력 모두 들어맞아 퍼펙트로 클리어하거나.

매번 다른 의미가 담긴 씨발, 이라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금 새로운 게임을 시작했었다.

“저마다 사연 있는 용사들에게 몰입했어. 물론 용사들이랑 내가 겪는 고통은 하늘과  차이였겠지만, 나름 동질감을 느꼈었나봐.지금 생각하면 되도 않는 감정이었지만… 어쨌든 그런 내가 이곳에 와서 진짜 용사가 되고, 그들과 같은 과정을 겪었어.”

아팠다.

어렸을  맞았던 고통은  수 아래로 둘 정도로 좆같았다.

아픔  이상의 아픔이 있다는  체험했고, 적응되지 않는 공포라는 것도, 삶과 죽음의 경계를 생생하게 경험해보기도 했다.

그 모든 것들은.

예전같았으면 진즉 견디지 못하고 포기해버려서 죽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나약했던 내가 전부 버텨냈다.

살고 싶어서.

정확히는 ‘같이 미래를 함께하고 싶은’ 이들이 생겨서였다.

“너희를 만나 겨우 인간관계라는 걸, 사랑이라는 걸, 행복이라는 걸 알게 됐어. 근데 우리가 나아가야 하는 길은 점점 험난해졌고, 이 앞은 얼마나 큰 고통이 도사리고 있을지 짐작조차 되질 않지. 하지만 우린 견뎌냈고, 강해졌고, 끈끈해졌어.  너희들 없는 인생은 상상할 수 없어. 용사가 되기 전의 삶은 암울했고 용사가 되고 나서는 끊임없이 고통받았어. 난  모든  종결짓고 너희들과함께 행복이라는 걸 더 누리고 싶었어.”

그래서 후일을 도모한다는 선택지를 고르지 않았다. 우린충분히 힘들었다고 생각했으니까.

“할 수 있어. 우리라면  수 있어. 너희들이 있기에 견뎌냈고, 너희들이 있기에 나아갈 수 있어.”

냠.

“거만하게 기다리고 있을 놈에게 보여주자. 비록 잠시 휘어지고 굽어질지라도, 결코 부러지지는 않는다고.”

 맛있는 고기를, 너희들과 앞으로도 계속 먹기 위해.

“…옳은 말씀입니다. 우린 결국 이겨내고, 미래를 맞이할 겁니다.”
“매일 대장님이 요리해줬으면 좋겠어요. 매일…….”
“완성되지 않은 이야기만큼 찝찝하고 짜증나는 게 어디있겠어?”

[남은 시간 : 1시간 30분 55초]

**

[곧장 4구역에 입장할  있습니다.]

저마다 결의를 다진 우리는 던전 입구 앞에 도착했다.그러자 곧바로 메시지가 떴다.

[경고]
[입장 후, 귀환할  있는 수단은 없습니다.]
[입장 후에마지막 휴식처가 있습니다.]
[마지막 휴식처에서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30분입니다.]
[마지막 휴식처에서는 체력과 멘탈리티가 회복되지 않습니다.]

1구역 때나 지금이나 입구의 모습은 한결같았지만, 메시지는 완전히 달랐다. 아주 대놓고 너 들어오면 좆된다고 경고를 뿌리고 있었다.

‘겁 주기는.’

마치 dlc 최고난도 실행할 때 떴던 난이도 경고문을 봤을 때의 기분이었다.

웃기지도 않은 소리였다. 입장  하면 던전을 초기화하겠다고 제한까지 둔 주제에, 막상 들어가려니까 이딴 경고를 내뱉기나 하고 말이야.

“가자.”

“예. 대장.”
“네. 대장님.”
“응. 가자.”


[입장하면 돌아갈 수 없습니다.]
[입장하시겠습니까?]


“드간다고.”


꼴에 마지막이라고 존댓말?

중지를 치켜들었다.

곧 시야가 암전됐다.



[더 롱 테러, ‘가장 기나긴 공포’의 4구역에 입장했습니다.]




[기다리고 있었다. 발버둥치는 필멸자들이여.]


[그리고 666번의 승리자와 6003번의 패배자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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