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85화 〉24시간(3) (185/218)



〈 185화 〉24시간(3)

“아… 이거요? 헤헤, 별 거 아니에요.”

“뭐? 어떻게 그게 별 게 아냐? 한순간에 그렇게 변해버렸는데, 이상이 있지 않고서야.”

“우리가 지금 처한 상황에 비하면 제 머리카락 색 같은 건 별 거 아닌 게 맞아요. 그렇잖아요?”

셰이의 금발은 반 이상이 하얗게 변해있었다. 염색한 정도가 아니었다. 원래 머리카락보다 윤기도 적고 가늘어진 것까지 생각해보면….

“셰이, 너, 설마.”

“여신님께 상황설명은 들었어요. 저는 대장님 말에 찬성이에요.”

“셰이!”

“별 거 아닌 이야기는 나중에. 지금은 카야 언니부터 깨울게요.”

셰이의 말투는 그대로였지만, 지금 보니 목소리도 조금 바뀐 것 같았다.

저렇게 멀쩡하게 일어난 이유가, 내가 생각하는 그 이유가 맞다면….

“카야 언니. 미안해요. 그래도 언니라면 이해해줄 거라 믿어요.”

[남은 시간 : 12시간 25분 32초]

셰이는 내게 얼굴을 비춰주고는 곧바로 침대를 삥 돌아 내 옆에 누워있는 카야의 손을 잡고는 눈을 감고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녀에게서 은색 광채가 발광하더니 서서히 카야에게로 이어졌다. 동시에 반절 조금  되게 남아있던 셰이의 금발이 다른 반절처럼 조금씩 하얗게 탈색되었다.

‘수명이다. 수명을 쓰는 거야.’

설마는 확신이 되었다. 하지만 셰이를 막을  없었다. 유스티티아님께서 셰이에게 어떤 말을 하셨는진 모르겠지만 어찌됐든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일어난 시점에서 셰이의뜻은 너무나 확고했기 때문이었다.

수명이나 그에 준하는 대가를 바치고  의견에 찬성을 표한 것, 이 사실만으로 셰이는 절대 뒤를 보지 않겠다는 입장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걸 나도 느꼈는데, 나보다  멀쩡한 일루미나도 느끼지 못했을까. 맨 처음 경악했던 일루미나는 셰이를 설득할 생각조차 못하는 듯했다.

“흐으….”

“언니. 카야 언니. 정신이 들어요?”

셰이의 몸에서 광채가 전부 사라지자 이윽고 카야가 신음 소릴 내며 깨어났다. 느릿느릿 눈을 끔뻑거리던카야는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같았지만, 셰이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카야의  뺨을 잡고는 빠른 속도로, 하지만 핵심만 간추려서 현 상황을 말하기 시작했다. 내가 말해주지 않았던 시간 제한 내용까지 정확히 알고 있는 걸 봐서는 정말로 유스티티아님께서 모든  설명해주신  같았다.

셰이의  때문에입이 금붕어 모양이 되어 눈만 깜빡거리던 카야의 눈이 빠른 속도로 총기를 되찾았다.

그야말로 기적, 이라는 단어만 떠올랐다.

“후우… 헨드릭님. 준비가 끝났으니 어느 정도 각오를… 에.”

카야가 상반신을 일으킨 직후 세스티아가 뭔가를 바리바리 싸들고 돌아왔다. 하지만 그녀는 멀쩡히 깨어 있는 카야와 셰이를 보고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들고 있던 걸 떨어뜨리지 않은 게 용했다.

“어, 어, 어떻게.”

“여신님의 은총 덕분이죠. 조금 대가가 있긴 했지만요. 세스티아님. 그 치유는 제가 아니라 대장님께 해주세요.”

“셰이 성전사님.”

“부탁드려요. 저흰 시간이 부족해요.”

“…그 말씀은.”

“저도 찬성입니다.”

이제 완전히 몸을 일으킨 카야가 끼어들었다.

“이건 앞으로 나아가도, 뒤로 물러나도 위험한 함정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나아가는 쪽을 택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세스티아님, 그리고 일루미나 언니. 우린 전진해야 해요.”

“…….”

셰이가 깨어나면서 상황은 급격히 진전됐다. 내심 이렇게 흘러가길 간절히 바랐던 나조차도 너무 놀라워서 흐름에 편승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흐름은 명백히 셰이가 주도하고 있었다.

 번이나 죽을 뻔했던 그녀가 여신에게 힘을 받고 수명까지 끌어다 쓰면서 풍기는 기세는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세스티아는 순순히 날 치유해주었다. 급하게, 어거지로 치유한 거라 무리한 만큼 후유증이 생길 거고 몸 상태도 최상으로 끌어올릴 수는 없을 거라 얘기했다. 치유를 마친 그녀는 잠시 슬픈 눈으로 날 바라보다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나갔다. 그녀가 입은 수녀복의 품이 더 넓어진 게 기분탓이 아니라면, 분명 지금쯤….

“여기 수녀장을 과부로 만들 생각은 아니지?”

“…어?”

“말은 그렇게 막무가내식으로 해도, 뭔가 계책은 있을 거라고 믿어. 그렇잖아?응?”

뻐근한 어깨를 돌렸다. 참고로 카야랑 셰이는 각기 세스티아랑 전사장을 만나러 나갔다. 받아올 수 있는 건 받아오기 위해서라나.

일루미나의 얼굴을 보니  건들면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나도 4구역은 처음이라서 정말로 어떻게든 하는 수밖에 없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의 말이었다고, 지금까지 우리가 계책이라는 게 있었냐고 말해야 할까.

“마모될 거야.”

“응?”

“이미 우리들 육체는 물론이고 정신까지 상당히 마모됐다고 봐. 당장은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물속에 가라앉은 흙이나 바위처럼, 공포놈의 악의는 차곡차곡 쌓여 있을 거야. 내가 그랬던 것처럼, 틈이 보이면 언제든지 날 더럽히겠지.”

약점을 찌르기도 하지만, 이번에 3구역을 다녀오고 나서 뼈저리게 느꼈다.

마치 노트북이나 핸드폰 배터리도 시간이 지나면 아무리 충전해도 풀충전도 안 되고 더 빨리 방전되는 것처럼, 우리 몸과 마음이 그렇다고. 던전에 적응하는것보다 망가지는  훨씬 빠르겠다고, 저건 두 번, 세 번 도전할  있는  아니라고.

죽는 것에 초탈했다? 그건 절대 아니었다.

공포새끼를 조지는 것을 포기했다?

‘그건… 조금은 그럴지도 모르겠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아무리 우리가 두  세 번 여기까지 똑같이 도달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놈에게 맞서싸울 수 있는 건 기회는 딱 한번 뿐이라고.

그렇기에,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많이 망가져있다고 생각한 지금이야말로 최선일 수 있다.

카야랑 셰이도 나랑 똑같이 생각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니,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내게 찬성했으리라.

“이런 말 하면 네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는데.”

“모르겠으면  하는  좋지 않을까?”

“네 의사를 존중해서, 이번에 가지 않아도 괜찮아.”

“하.”

“마음 같아선 함께해줬으면 싶지만.”

“헨드릭 너….”

일루미나는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말하면, 설령 내가 가기 싫어도 어떻게  갈 수 있겠어? 응? 이 나쁜 놈아!”

“미안.”

“내 신세….”

“근데 네가 던전 안에서 나한테 그랬잖아.  벌써 이야기가 끝난 것처럼 얘기하냐고.”

“그땐…!”

“그때랑 지금이랑 경우가 다르다고? 그렇긴 해. 지금은 적어도 겉으로 볼 땐 양자택일이니까. 그래도… 나한텐, 처음부터 선택지가 하나밖에 없었어.”


[남은 시간 : 12시간 15분 9초]

최악, 좆망이라고 생각한 것을 돌파하고 나면 그 다음에 나타나는 더 심한 걸 돌파하고, 또 돌파한 우리 용사대.

좋든 안 좋든, 이 이야기의 결말을 결정지을 시간이 이제 남은 시간이 이제 한나절밖에 남지 않았다.

“모르겠다 나도… 원래 나였다면, 사랑도 우정도 다 포기했을 텐데.  목숨이 우선이었는데. 왜… 물들어버린 걸까?”

“일루미나.”

“솔직히 말해서 난 카야나 셰이가 아니라서, 대신 죽어준다거나 그런 짓까진 못할 거 같아.”

“그런 건 바라지도 않아.”

“그래도… 옆에는 있어야겠지. 어찌됐든 내가 선택한 용사대고, 내가 선택한 남자니까. 만약 내가 여기 남고 너희들만 던전에 갔다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평생 날 괴롭힐 것 같으니까.”

“일루미나!”

“그렇다고 은근슬쩍 꼬리 쓰다듬지 말아줄래?”

일루미나는 자기도 준비하러 가야겠다며 황급히 방을 나갔다. 그녀의 뒷모습이 사라지자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금 그놈을 떠올려봤다.

‘씨발.’

여전했다. 세스티아가 치유해준 몸이 다시 조각나는 느낌이 들었다. 이번엔 눈깔이 아니라 목소리를 떠올려봤다. 눈깔 때보단 조금은 더 오래버텼다. 그래봤자   차이였다. 이럴진대 일루미나에게 어떻게든 해봐야지, 라는말을 한 건 정말 무책임의 극치였다.

‘레벨을 갱신하면 좀 나아질까?’

현재 우리들 레벨은 7/7/7/6. 3구역 클리어 경험치를 더하면 못해도 한 레벨, 잘하면 레벨 업이 가능할 것이다.

‘불가능범죄처럼, 클리어가 불가능하진 않겠지?’

dlc를 플레이해보기도 전에 이곳으로 떨어졌지만, 지금 이 순간, 용사가 아니라 오랜만에 이 운빨좆망겜에 수천 시간을 태운 플레이어로서의 관점을 되살렸다.

과연, 4구역은 어떤 식으로 공략에 들어가야 할 것인가. 4구역은 기존의 3구역까지와는 어떤 차별점이 있을 것인가.

‘설정상 3구역까지 보스는 4구역에 나올 그놈에 비하면진짜 보스가 아닌 느낌이지. 그렇다고 그놈들이 약하다는  아니지만….’

공포의 손, 공포의 눈, 공포의 심장.

죄다 보스놈들의 이름들이 공포의 뭐뭐에 신체부위였다. 그게 놈들이 공포새끼에게서 받음 힘의 성질과 신체적 특징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그놈들이 사용하는 스킬들과 강함은 모두 공포새끼의 ‘일부분’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모든 스킬들? 거기에 진입 조건이 있을 수도… 진입 조건이 맞지 않으면 페널티를 받는다든가.’

당장 떠오르는 것만 해도 용사들의 데미지가 제대로 박히지 않는다든가, 멘탈리티 저항이 대폭 까인다든가, 지한테 유리한 버프 떡칠하고 우리한테 디버프를 끼얹는다든가, 기믹을 좆같은 걸 추가한다든가….

‘아. 어쩌면, 직시하지 못하고 온몸이쪼개지는  느낌이 그 자체로 경고인 건가? 입장 조건 미달이라서?’

관점을 달리하니 새롭게 보였다. 마주치자마자 정신이 나가버려서 잊어먹었는데, 압도적이면서도 절대적인 존재감을 뿜어냈던 그새끼 또한 ‘턴제’라는 전투 시스템에 속해있을 거라 생각하니… 마냥  없어 보이고 절망적이었는데 뭔가 가능성이 보이는 것 같았다.

‘아니면 다른 추가 조건이 필요할 수 있겠지만, 어쨌든 지금 생각할 수 있는 건 레벨 갱신.’

그 외에도 스킬 업그레이드, 무기랑 방어구 업그레이드에 최대한 멘탈리티 회복하는 것까지.

압도적 존재감 때문에 어찌할 수 없을 것 같은 자연재해처럼 느껴졌던 그놈도 플레이어의 관점에선 ‘좆같겠지만 클리어는 가능한’ 최종 보스인 것이다. 그리고 최종 보스는 결국 주인공에게 쓰러지는 역할이고. 아무리 똥겜이라도 그건 불변의 진리였다.

‘이번엔 정말 뒤가 없으니까, 없는 돈까지 다 끌어서 때려박아야지.’

따서 갚든가, 아니면 죽든가.

[남은 시간 :12시간 0분 3초]

나도 움직일 시간이었다.


**


“여신님께서 응답이 없으시더니, 그런 이유가 있었나.”

“네, 스승님.”

“…괜찮냐고 묻진 않겠다.”

유스티티아 수도원의 전사장은 급작스레 변한 수제자의 모습에 말을 아꼈다. 원래도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긴 했지만, 수제자에게서 그 어느 때보다도 여신의 힘이 강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녀석의 의지와 행동에 여신님의 뜻이 깃들어 있다는 것….’

아직도 한참 젊은 수제자가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받아들였다는 것이 매우 안타까우면서도, 어렸던 그녀를 이단으로부터 구했던 게 이렇게 이어지는가 싶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봐라. 내줄 수 있는  모든  내줄 테니.”

“역시 스승님이라면 그리 말씀해주실 줄 알았어요.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스승님께서 마련해주실  있는 최대한의 금화를 주셨으면 좋겠어요. 가급적이면 빨리요.”

셰이의 미소는  이상 헤프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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