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화 〉24시간(2)
“…내 의견도 묻는 거지?”
“그럼.”
“내 의견이 어느 정도 지분이 있는진 모르겠지만, 난 반대야. 헨드릭, 네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는 하는데… 지금 당장도 너무 위험해. 설령 네 말이 다 맞아서 지금부터 던전행을 다시 준비한다 하더라도… 이 몸 상태로 어떻게 준비하려고? 아직까지 깨지도 못한 카야 언니는? 셰이는?”
“그거야 어떻게든 해야겠지. 지금까지 어떻게든 돌파했던 것처럼.”
“어떻게든, 한다고…?”
일루미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그 존재, 잠깐 마주쳤던 것만으로, 아으, 머리야… 어쨌든 그 터무니없는 거에 대한 대비는?”
“마주치자마자 정신을 잃었고, 정신 차린 지 30분도 안 지났고, 기억을 떠올리려는 것만으로 머리를 비롯해 온몸이 깨질 거 같은데 어떻게 있겠어. 지금부터라도 생각해봐야지.”
“열두 시간 안에?”
“별수 있어?”
“헨드릭 넌 사실상 가야한다는 쪽으로 굳어진 거 같네?”
“그럴지도.”
“하아………….”
일루미나가 깊은 한숨을 토했다. 그 한숨엔 꼭 그래야 하냐는 성토가 담겨있는 것 같았다.
“세스티아.”
“네, 헨드릭님.”
“카야랑 셰이, 이대로 내버려 두면 얼마나 걸릴까.”
“헨드릭님….”
“너도 들었으면 내가 무슨 의도로 묻는지 알 거잖아. 말해줘. 솔직하게.”
“…이대로 내버려둔다면, 적어도 하루 안에 일어나지 못 할 가능성이 높아요.”
“하루.”
“네… 셰이 성전사님은 육체에 받은 상처가 너무 위중해서 그렇고, 카야 자매님은 라엘라님의 힘을 휘두른 반동이 남아있어요. 어느 분이든 심각한 건 마찬가지라….”
“깨울 순 없어? 잠깐이면 되니까.”
“헨드릭!”
“헨드릭님….”
“나도 알아. 근데 네가 말했잖아. 이대로 두면 하루 안에는 못 일어난다고. 카야랑 셰이 의견도 물어봐야 할 거 아냐. 이건 우리 용사대의 존망을 결정지을 가장 중요한 문제인데, 이대로 그냥 넘어가자고?”
“그럼. 둘이 일어나서 가겠다고 그러면, 진짜로 가려고?”
“그래야지.”
“미쳤어 진짜로….”
“반대도 마찬가지야. 둘이 후일을 도모하자고 하면, 후일을 도모할 거고.”
“만약 반반이면?”
“글세… 전자든 후자든 반반이든 어느 쪽이든 되려면 일단은 깨워봐야겠지. 세스티아.”
셰이의 앞머리를 정돈해주던 세스티아의 얼굴이 잔뜩 굳어졌다.
“부탁해.”
“……알았어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세스티아는 셰이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는 방을 나갔다. 준비물이 필요한 것 같았다.
“….”
“….”
잠들어있는 두 동료들의 미약한 숨소리 위를 나와 일루미나의 숨소리가 덮어졌다. 오가는 말은 없었지만, 그녀의 말이랑 내 말이 들리는 듯 했다. 확실히 위험한 현재보단 불확실한 미래가 또 한 번의 기회라는 면에서 낫지 않냐고 날 설득하는 듯 했다. 그래서 나도 안다고, 몰라서 그러는 거 아니라고 했다. 숨소리로.
그러자 일루미나가 한숨을 쉬며 양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그녀의 귀와 꼬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미안했다. 일루미나 입장에선 나는 온몸에 기름칠하고는 화재현장에 뛰어드는 미친놈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노력과 의지를 절하하는 건 아니지만.
맨 처음부터 나와 함께했던 카야나 얼마 안 있다가 합류한 셰이에 비하면 겪었던 고통의 시간들이 짧긴 했다. 죽음을 경험할 뻔한 첫 인던, 처절했던 1구역, 그에 못지않았던 베스티아 타락 사건, 다른 의미에서 위험했던 축산장 해수 구제 인던까지.
그 모든 걸 안 겪고 2구역과 3구역, 그나마 3구역도 거의 프리패스 했던 걸 생각해보면 일루미나는 이 모든걸 반복하기가 두렵다는 내 말을 ‘전적으로’ 공감하기는 어려울 거라 생각했다.
[남은 시간 : 12시간 32분 11초]
동료들은 여전히 눈을 뜨지 못하고 있고, 내 몸은 무거웠다. 그럼에도 시간은 흘러갔다.
‘라엘라님. 유스티티아님. 어찌 해야 좋을까요.’
세스티아가 1분이라도 빨리 오길.
깨어난 그녀들이 어떤 의견을 내든, 차라리 빨리 결론내릴 수 있기를.
옆에 누운 카야의 손을 잡고 대답 없을 기도를 올렸다.
**
“야단 났네.”
유스티티아는 한숨을 쉬었다.
“야단 났어.”
그녀는 라엘라가 제 신성을 분리해 분신을 만들어 강림시킨다는 초유의 사태를 벌인 이후, 라엘라의 영역에 머무르는 시간이 부쩍 많아졌다. 강림 이후 라엘라의 힘이 약해지면서 그녀가 신력의 보충을 위해 잠들 때가 많아지자, 유스티티아가 헨드릭의 용사대를 신경 써서 관찰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
던전 안은 공포의 영역이라, 지상처럼 그냥 내려다보지 못하고 신도를 통해야 볼 수 있었는데, 그녀와 그녀의 딸보단 라엘라와 라엘라의 딸이 훨씬 더 사이가 깊어서 그런지 용사대가 던전 안에 있었을 때의 관찰은 라엘라가 주로 맡았었다. 그래도 용사대가 던전에 들어갈 때만큼은 다시 눈을 뜨고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보던 라엘라는 제 딸이 힘을 끌어내자 다시 잠들고 말았고, 그 이후, 유스티티아는 혼자서 공포와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던전과 지상이라는 경계를 넘어, 지상과 천상이라는 경계를 넘어, 매개를 통해서.
그때 들었던 오싹하면서도 혐오스러운 기분은, 용사대의 현 상황을 보면서 끝없는 걱정으로 변하고 말았다.
“빌어먹을 놈들… 고개까지 숙였건만….”
헨드릭이 처한 상황을 유스티티아도 알아챘다. 그래서 그 즉시 방관하고 있지만 나름 나쁘지 않은 관계를 구축하고 있던 다른 신들에게 찾아가서 지원을 부탁했다.
하지만.
결론만 말하자면 전부 거절당했다.
그들은 제각기 이유를 댔지만, 유스티티아가 듣기엔 다 그럴싸하게 포장한 쓰레기에 불과했다.
그들이 진심으로 이 세상을 아꼈다면.
그들이 진심으로 공포를 없애기를 원했다면.
그들이 조금이라도 책임감이라는 게 있었다면.
라엘라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녀만큼은 아니더라도 어떤 형태로라든 도와줄 수 있을 터인데.
이 절호의 기회를, 대체….
‘…애초에 도와줄 거였으면 진즉 도와줬겠지만.’
기대가 크지 않았던만큼 실망도 그리 크지 않았다. 원래 종잡을 수 없고 제멋대로인 놈들이었다. 그놈들도 유스티티아를 그렇게 보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지금 이렇게 노력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중요한 시기에 속 편하게 누워 있어서 좋겠다. 어?”
대답은 없었다.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고, 진심도 아니었다. 하지만 라엘라가 현 상황에서 도움이 안 되리라는 건 사실이었다. 이 이상으로 힘을 더 쏟는 건 정말로 위험했다. 이미 라엘라는 그녀가 안배한 힘으로 세 번째 구역을 돌파하게 한 것만으로 제 역할을 충분히 해주었다.
“…사위. 무력감을 들게 해서 미안. 근데 나도 무력하네.”
헨드릭과 그의 동료가 나누는 대화를 지켜보며, 유스티티아는 더 늦기 전에 결단을 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시작한다고 해도, 이번에 소모한 라엘라랑 내 신력은 돌아오지 못하겠지.’
결단을 내린 유스티티아는 눈을 감았다.
**
[딸아.]
‘….’
[내 말이 안 들릴 리는 없을 텐데… 정말 안 들리나?]
‘….’
[딸아. 네가 많이 아프다는 건 알고 있지만, 바깥 상황은 더 좋지가 않아. 지금 이렇게 말 거는 것도 상당히 많은 힘을 쓰고 있으니, 어떻게든 힘내보지 않겠어?]
‘……여신님…?’
[그래, 딸아. 제대로 듣고 있다는 걸 알게 됐으니, 곧바로 핵심만 말하도록 할게.]
갑작스런 유스티티아의 접촉에 당황했던 셰이는 용사대가 크나큰 위기에 처해있다는 말에 정신을 바짝 차렸다. 유스티티아는 최대한 핵심을 간추려서 설명했고, 설명이 이어질수록 셰이의 마음은 조급해졌다.
‘여신님! 이럴 때가 아니라, 지금이라도 일어나서 준비를 해야….’
[그래. 네 마음 잘 알아. 이렇게라도 나와 이야기가 통한다는 것부터가, 그만큼 네 정신력이 대단하다는 증거지. 하지만 네 육체의 상태는… 내가 굳이 지적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겠지.]
‘하지만!’
[내가 굳이 신력을 낭비하면서까지 그걸 지적한 건… 방법이 있긴 한데, 조건이 있어서야.]
‘할게요. 무조건 할게요.’
[일단 들어. 그리고 너 혼자만 멀쩡해진다고 될 일이 아니잖아. 라엘라의 딸도 생각해야지.]
‘아….’
셰이는 암담함을 느꼈다.
그녀의 몸이 망가진 것 때문이 아니었다.
헨드릭과 그녀의 목표가 코앞에서 멀어지는 것, 그가 겪어야 할 고통이 늘어났다는 게 암담했다. 그리고 그녀 스스로 뭘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게 더 암담했고.
[딸아.]
‘…네. 여신님.’
[너랑 내가 힘을 좀 많이 쓰면, 어떻게든 될 것도 같은데. 일단 들어봐?]
셰이는 집중했다. 암담하긴 해도 여신님께서 방법이 있다고 하지 않은가. 어떤 조건을 제시하셔도 당장 죽는 것만 아니면 기꺼이 따르리라.
[네가 동의한다면… 네 남은 수명, 네 남은 신성력과수준에 대한 잠재력. 그걸 잔뜩 끌어모아 내 신력으로 한데 뭉쳐 널 일으켜세울 거야. 네 몸상태를 생각해보면, 좀 과격하게 말해 시체를 일으켜세우는 강령술이나 다름없는 짓이지.]
‘…그런 게 가능한 거예요?’
[그만큼 많은 대가가 필요한 일이야. 그리고 네가 깨어나면, 내가 담은 신력으로 라엘라의 딸을 또 강제로 깨울 거고. 그리고 사위 쪽은 깨어난 라엘라의 딸이 또 어떻게 해주겠지. 대가가 어느 정도 들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네 남은….]
‘할게요.’
셰이는 유스티티아의 말을 끊고 즉답했다. 평소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불경한 짓이었으나 그만큼 의지가 확고했다.
당장 죽는 게 아니라면 어떤 조건이든 받아들이겠다.
그건 빈말이 아니었다.
셰이의 정신과 연결된 유스티티아는 셰이의 의지를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최대한… 최대한 내가 더 힘을 써봐야겠네.’
원래 특정 신도에게 이렇게까지 정을 준 일은 손에 꼽을 정도로 없었건만. 유스티티아는 이래서 정을 주면 안 된다고 피식 웃었다.
[이 이후론 나한테 기도해봐야 내가 못 들어줄 거야. 나도 힘 꽤나 써야 하니까.]
‘…죄송해요.’
[죄송하긴. 나야말로 직접 해결하지 못하고 이런 식으로밖에 못하는 게 답답하고 미안하지. 그냥… 서로에게 고맙다고 하자꾸나.]
‘…네, 여신님. 감사해요. 여신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된 건 제 인생의크나큰 행운이었어요.’
[나도 너 같은 딸이 있어서 다행이었어. 준비됐으면 말해.]
‘준비됐어요, 여신님.’
[그래.]
유스티티아는 어쩌면 이게 마지막 대화가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지만… 굳이 표현하진 않았다.
사위 말로는, 플래그를 꼽을 수 없었으니까.
[시작한다.]
유스티티아는 신력을 해방했다.
**
“어… 어어…? 셰이! 어, 어떻게…?”
“뭐라고? 셰이? 깬 거야? 일어난 거야? 어? 말해봐! 빨리!”
“이, 일어났어! 어, 엄청 멀쩡하게!”
초조하게 기도를 하고 있던 도중, 일루미나가 화들짝 놀라는 소리에 눈을 떴다. 하지만 누워있던 탓에 소파 쪽이 보이지 않았다.
“일루미나! 나 좀 일으켜줘!”
“아, 알았어!”
“그럴 필요 없어요. 누워 있어요, 대장님. 제가 갈게요.”
곧 침대 곁으로 셰이가 다가왔다. 일루미나 말대로 정말 멀쩡한 모습이었다.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간절히 기도해서 기적이 일어난 건가?
‘세스티아가 거짓말을 말했을 리는 없는데….’
“늦게 일어나서 미안해요.”
셰이는 환하게 웃었다. 반가웠다. 안심했다. 하지만, 나는 곧 이상함을 느꼈다.
셰이 너………….
네 찬란했던 금발은, 어디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