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3화 〉24시간(1)
[경고]
[4구역은 24시간 안에 진입해야 합니다.]
[진입하지 않을 시 던전이 초기화됩니다.]
[남은 시간 : 12시간 58분 42초]
아니 이게 뭐야. 이게 무슨 소리야.
경고? 24시간 안에 진입? 근데 왜 남은 시간은 12시간 58분뿐인데?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눈알이 빠질 것 같았다.속이 너무 메스꺼웠다. 몸은 또 이 와중에 극도로 피곤했다. 총체적 난국이었다.
‘여긴… 아. 돌아온 건가…?’
우리가 묵었던여관은 아니었다. 하지만 익숙했다. 전체적으로 하얀색과 연녹색으로 구성된 아늑하고 포근한 분위기에 과하게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아름다운 가구들. 라엘라님을 모시는 수도원이었다.
고갤 돌렸다. 간단한 동작도 삐걱거리고 힘이 들었다. 아주 심하게 녹슨 기계를 억지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래도 해야 했다. 기억에 공백이 있는 것 같지만, 나만 무사히돌아왔다는, 그딴 쓰레기 엔딩이 아니라는 걸 당장 확인해야 했다.
“아아….”
카야와 셰이, 일루미나가 보이지 않았다. 불안감이 확 엄습했다. 이불을 걷고 침대를 벗어나려 했다. 그제서야 아까 목이 삐걱거린 건 지금에 비하면 약과라는 걸 깨달았다.
“씨발….”
내 몸이 내 몸 같지가 않았다. 조금 움직일 때마다 바늘로 찔리고 칼로 베이는 고통이 드는데, 즉 감각은 살아있는데 마비된 것마냥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럼 기어서라도.’
그나마 조금 움직일 수 있는 팔을 이용했다. 무게중심이 급격하게 앞으로 쏠려 철푸덕 엎어졌다. 바닥에 제대로 부딪친 몸이 고통을 호소했으나 이를 악물고 무시했다. 방이 큰 편도 아닌데 침대에서 문까지의 거리가 어찌나 이리 멀게 느껴지는지.
가까스로 문까지 기어간 나는 스스로의 멍청함에 탄식했다.
‘이럼 문고리를 못 잡잖아…….’
너무 허탈해서 욕도 안 나왔다. 무력감이 장난 아니었다. 뒤늦게 던전에서의 기억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 ### ##가 용#대를 #시#니다.]
[가# 어## #포# ##대를 주###다.]
[여##지 용# ## 왔#.]
[#기## ## 잘# #군.]
[그 ##, ## 훼### #았## 좋##.]
[##지, 부# #손#지 않았#면 #겠#.]
[.다니합 야해입진 에안 간시42 은역구4]
[합니다. 진입해야 안에 시간24 구역은4]
[.다니됩화기초 이전던 시 을않 지하입진]
[기초화니됩다 던이전시않을 진입하지]
“아, 아, 아아….”
그 기억들은 굉장히 폭력적이었다. 기억 속 메시지, 아니 지금 보는 메시지가 상당부분 깨져있었다. 심지어 막 일어났을 때 제대로 보였던 경고 메시지도 뒤죽박죽 엉망진창으로 섞여있었다.
단순히 메시지가 오류난 것이 아니라… 내 기억이, 정신이, 의지가 조각난 느낌이었다.
그동안 공포포기무새관음증변태 새끼라고 겁나게 씹어댔는데… 정말 자존심 상하게도 그놈의 ‘눈깔’이나 ‘목소리’를 떠올리려는 즉시 ‘조각나는’ 느낌이 재발했다.
‘직시하는 것도 아니고, 떠올리려는 것만으로… 하.’
누군 지금 벌레만도 못한 꼴로 이러고 있는데… 허탈감, 자괴감, 답답함, 막막함 등등 엄청난 현탐이 들이닥쳤다.
“하하… 이래서야, 전부 부질없는 거 아니냐… 생각하는 것만으로 온몸이 쪼개질 것 같은데… 그런 놈을 뭘 어떻게 상대한다는 거냐고… 그 새끼, 우리가 어떻게든 던전 돌파하는 거 보면서 존나 쪼갰겠네… 아등바등하는게 우스워서….”
자꾸 헛웃음이 나왔다. 너무 어처구니없으면 웃음이 나온다더니 딱 그짝이었다. 미친놈처럼 실실 쪼갰다. 사실 화내든 눈물 쥐어짜며 울든,아니면 지금처럼 웃든 뭐라도 해야만 했다.
안 그러면 미쳐버릴 것만 같아서.
벌컥-
“헨드릭님! 세상에!”
“누…아… 하하… 세스티아? 세스티아구나.”
“네, 헨드릭님. 저예요.”
“세스티아. 세스티아. 세스티아!세스티아!! 우리 애들, 애들 어딨어! 카야! 셰이! 일루미나! 어떻게 됐어!! 어디 있어!!! 어?”
“따로 안정을취하고 있어요. 진정하세요, 헨드릭님.”
“…………………아.”
정신이 살짝 돌아왔다. 아니, 돌아왔다는 표현은 그러니까… 언제 내가 홰까닥했던 거지?
포근하고, 또 아늑한 기분이 들었다. 다시 눈 떠보니 세스티아의 품속이었다. 쿵- 쿵- 뛰는 그녀의 심장 소리를 들으니 잠이 솔솔 오는 것 같다가… [남은 시간 : 12시간 52분 01초]에 눈이 갔다.
‘아니 뭘 했다고 그새 몇 분이나 지난 거야….’
“마음 같아선 용사대 분들을 전부 같은 방에 모시고 싶었지만, 여건상 힘들었어요. 그만큼 넓은 방이 없기도 했고, 또 저마다 상태가 안 좋으셔서 돌봐드리려면 아무래도 각방인 편이 나았으니까요. 모두 생명에지장은 없으니 안심하시고 다시 휴식을 취하시는 게….”
“시간 없어….”
“네?”
“그럴 시간 없어… 다들 여기로 불러줘… 아니, 내가 움직일 게….”
“헤, 헨드릭님.”
여전히 힘이 들어가진 않았다. 얼굴로 세스티아의 가슴을 밀어냈다. 그녀는 당황하며 날 더 세게 껴안았다. 떨쳐낼 수 없었다.
“제발… 이럴 시간 없다니까…!”
“헨드릭님! 지, 진정하세요!”
세스티아의 가슴 때문에 말이 심히 뭉개졌다. 그녀가 내 말을 알아들어서 다행이었다.
“움직, 여야해… 제발…!”
“지금 헨드릭님 몸 상태가 최악이에요. 어디로, 왜 움직인다는 건가요? 이제 막 던전에서 돌아오셨잖아요?”
답답했다. 소리치고 싶었다. 세스티아는 비밀을 공유한 사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 아이를 밴 여자였다. 그녀도 내 비밀을 알 자격이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럴 정신적 여유도,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어서…! 다 모이면, 그때 설명해줄 테니까… 제발….”
“……알았어요. 헨드릭님은 여기 계세요. 금방 모시고 올게요.”
세스티아가 날 번쩍 안아들더니 침대에 눕히고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안 있다가 비교적 멀쩡히 걸어오는 일루미나와 함께 돌아왔다. 둘 다 한 명씩 업고 있었다.
“일루미나!”
“헨드릭.”
카야를 업고온 일루미나가 카야를 내 옆에 조심스레 눕혔다. 세스티아는 소파에 셰이를 눕히고는 무릎베개를 해주었다.
몇 분 사이, 고통이 조금가라앉았다. 말하는 것도 조금 편해졌다. 자세는 좀 그랬지만, 이것만으로 감지덕지했다.
“얘기할 게 있어. 급하고 중요한 거야.”
“그치만 카야랑 셰이는….”
“세스티아. 어떻게 안 될까? 방법 없어?”
“억지로 깨우는 건 가능은 하지만, 몸에 무리가 많이 가요. 지금 상태에서는 더하겠죠.”
“뭔데 그래? 차라리 나한테라도 먼저 말해봐.”
멘탈리티수치 자체는 안 좋았지만 각성하기도 했고 육체적인 부상은 적었던 것 덕분인지 일루미나의 안색은 우리 네 명 중에선 가장 정상적이었다. 나는 불안정한 내 정신 상태를 인지했고, 가장 정상적인 것 같은 일루미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기왕이면 전부 동시에 듣고 결정했으면 했지만, 상황이 이러니 어쩔 수 없지. 거두절미하고, 약 12시간 50분 안에 다시 던전에 들어갈지 말지 결정해야 돼.”
“12시간 50분? 아니 그전에 왜?”
“안 들어가면,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막힐뿐더러… 지금까지 돌파한 곳이 모조리 초기화될 수 있어서.”
“뭐? 아니 그런 게 어딨어?”
“아… 그래서 그렇게….”
“나한테 따져봐야 해줄 말은 없어. 던전에선 그놈 집이나 마찬가지고, 그놈 입장에서 우리들은 집에 출몰한 벌레 같겠지. 왜 그러냐, 그런 게 어딨냐 따질 시간에 우린 결정해야 해. 12시간 50분 안에 준비를 끝마치고 그놈을 조지러 가느냐, 아니면 후일을 도모하느냐.”
“미쳤어? 사기를 북돋아야 할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할 말은 해야지. 지금 몸상태로는 12시간이 아니라 최소 사흘은 있어야 돼! 그것도 너희들의 괴물 같은 회복력을 감안해서! 무조건 후일을 도모해야지!”
“그렇긴 해.”
“저 둘 깨워서 물을 필요도 없는 이야기야. 아니, 안 깨워서 다행이지. 카야 언니랑 셰이라면, 네 말 들은 순간 대장의 운명이나 목표 언급하면서 기어서라도 던전에 간다고 할 걸?”
“….”
“맞잖아. 굳이 전원의 동의까지 필요한 이야기야 이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바로 답이 나오는 거잖아. 너도 지금 못 움직여서 누워있는 주제에 무슨 던전을 또 가겠다는 선택지를 고려하고 있는 거야?”
일루미나의 말은 구구절절 옳았다. 세스티아는 자기가 끼어들 입장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가만히 듣고만 있었으나 표정을 보아하니 일루미나의 말에 적극 동의하는 것 같았다. 심지어 나도 동의했다.
“왜? 왜 대답 안 하는 거야… 불안하게….”
“불확실해서 그래.”
“뭐가!”
“이번에 들어가지 않아서 4구역으로 가는 길이 막힌다면, 던전이 초기화된다면….”
과연, 던전만 초기화될까?
1구역, 2구역, 3구역은 초기화되는데.
마침 3구역까지 노 데스로 돌파해서 레벨도 또 오를 텐데.
최소 8레벨, 어쩌면 9레벨에 도달한 우리가 초기화된 1구역부터 다시 돌게 할까?
3구역 돌파하고 걸레짝이 된 우리에게 24시간이라는 굉장히 촉박한 제한을 둔 놈이.
과연.
그렇게 내버려둘까?
“던전의 근원, 그러니까 ‘가장 기나긴 공포’를 놓칠 수도 있다는 것도 그렇지만… 거기에 우리가 쌓아올린 수준까지 한꺼번에 초기화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거든.”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안 될 것도 없지. 던전 그 자체부터가 말이 되고? 던전 안에서는 뭐가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아. 여신님들껜 굉장히 불경한 말이지만, 그놈을 신과 동격인 존재라고 했을 때 던전에 한해서 ‘초기화’한다는 건 거짓이 아닐 거야. 그렇다면, 던전을 돌파하고 우리가 강해진 것 자체도 초기화된다면?”
1레벨.
모래주머니 달다가 해제하는 것도 아니고 그 반대라면, 너무 끔찍했다. 어떻게 돌파했는데. 몇 번을 죽을 뻔했는데.
그걸 또 반복하라고?
내가 지식이 없어서 그 개고생을 했나?
단언컨대 우리가 겪었던 일들을 그대로 똑같이 재현한다고 해도 무사할 가능성은굉장히 적었다. 그 정도로 중요할 때마다 운이 따라주었다.
“그, 그렇다 하더라도 경험이 있으니까 처음부터 다시 한다면….”
“정말로 운이 좋아서, 다시 도전해서 여기까지 왔다 치자. 그건 너도 인정하지? 거기에 그놈도 다시 만날 수 있다 치자. 근데 지금이랑 상황이 똑같으면? 그때도 또 돌아갈 거야?”
“그래도 지금 들어가는 건!”
“내 생각에, 여기서 포기하는 건 던전 격파를 영원히 포기하는 거랑 같은 말이야.”
“헨드릭! 그 시간 제한이라는 게 괜히 사람 마음 조급하게 하는 거야! 냉정하게 생각해!”
“내 정신 상태가 불안하다는 건 나도 인정하지만, 지금 씨발 그 어느 때보다도 냉정해. 목숨이 달리고 지금까지 해온 게 달렸는데. 나라고 안 쉬고 싶겠어? 나라고 안전한 길 택하고 싶지 않겠냐고. 나라고 네 말이 옳다는 걸 모를 정도로 지능이 떨어지지도 않고 겁대가리를 상실하지도 않았어. 난 오히려 쫄보에 가까운 놈이지. 그런데도 강행돌파를 고려할 수밖에 없어. 왜? 난 그 고통을 다시 겪을 자신이 없거든. 알면서도 또 겪을 수밖에 없는, 어쩌면 우리가 겪었던 그 끔찍한 고통들이 ‘최선의 결과’였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 크니까.”
“그, 건…….”
“결정해야 돼.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은 줄어들고 있어.”
[남은 시간 : 12시간 40분 57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