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1화 〉3구역(10)
[공포 해방]
[가장 기나긴 공포의 편린이 공포의 심장을 통해 모습을 드러냅니다.]
[밝기가 0으로 고정됩니다.]
[이동할 수 없습니다.]
[명중률이 하락합니다.]
[회피율이 하락합니다.]
[멘탈리티 저항력이 하락합니다.]
[공포의 심장의 치명타율이 상승합니다.]
[공포의 심장이 가한 데미지의 일부분을 체력으로 전환합니다.]
[다음 턴이 될 때까지 공포의 심장은 피해를 받지 않습니다.]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주르륵 떠오른 메시지, 그리고 동료들의 작은 숨소리 덕분에 감각 자체엔 이상이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한 라운드 무적? 아무리 그래도 무적은 선 넘는 거 아니냐…?’
앞선 효과들은 당연히 예상했었다. 더 롱 테러에서도 수도 없이 많이 본 스킬이었으니까. 밝기가 0이 되는 페널티도 익히 알고 있었고.
하지만 맨 마지막 효과는 달랐다. 원래는 모든 피해 반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너무 빡세서 저 스킬을 스킵하는 방법이 연구될 정도였다. 보통 저놈이 저 스킬을 사용할 때쯤 되면 용사대도 누더기가 되어있는 게 보통인데, 저 데미지 반감 때문에 피 몇 차이로 못 죽였다가 저놈이 다음 공격에 체력이 차오르는 모습을 보고 뒷목 잡았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걸 생각하면….
‘모르겠다….’
정말, 여기서 뭘 더 해야 할지 답이 안 보였다. 여기까지 오면서 아무리 운이 따르고 많은 도움을 받았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나와 동료들의 굳은 의지와 노력, 그리고 내 지식과 판단이 있었기에가능했던 일이라고 생각했다.
3-10까지 쉽게 와서, 그리고 현신의 절륜한 위력 덕분에 어쩌면 겁먹은 거에 비해 싱겁게 끝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3구역은 역시 3구역이었던 것일까.
이미 아무것도 안 보였지만 눈을 감았다. 그러자 다른 감각이 더 두드러졌다. 염통놈이 뭐라뭐라 지껄이고 있었다. 대충 위대하고 전능하신 그분의 힘 대단해 너흰 이제 뒤졌다 이런 내용일 것이다. 개짖는 소리라 생각하고 팔을 옆으로 뻗었다. 뭔가 물컹한 게 잡혔다. 아주 작게 앗 소리가 들렸다. 일루미나였다. 그녀를 끌어당긴 다음 그녀의 감을 이용해 나머지 둘도 찾았다. 그렇게 세 명의 각기 다른 숨소리를 들으며, 최후가 될지도 모르는 지시를 내렸다.
“우리들이 뭘 하든 저놈에게 타격이 들어가진 않을 거야. 그리고 매우 높은 확률로 저놈의 다음 공격 때 내가 잠식당할 거고.”
“헨드릭….”
“걱정하지 마…라고 단호하게 말할 수 없는 게 슬프긴 한데, 그래도 뭐,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 여신님께서도 도와주셨고, 우리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
“이런 말을 지금 같은 타이밍에 하는 건 뭔가 불길한 플래그 꼽는 거 같아서 하기는 싫지만… 그래도 안 하면 평생 후회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수배범 발견]
[유진이 공포의 심장을 수배범으로 낙인을 찍습니다.]
[공포의 심장은 피해를 입지 않습니다.]
[유진이 공포의 심장에게 0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5/225]
[낙인은 3턴 간 유지됩니다.]
[낙인이 유지되는 한, 모든 물리적 데미지가 25% 증폭됩니다.]
[공포가 용사들을 압박합니다.]
[셰이 멘탈리티 –4]
[카야멘탈리티 –3]
[유진 멘탈리티 –4]
[일루미나 멘탈리티 –4]
“함께해줘서 고마웠고.”
[일루미나는 현재 스킬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일루미나가 턴을 넘깁니다.(남은 턴 : 3)]
[공포가 용사들을 억압합니다.]
[셰이 멘탈리티 –4]
[카야 멘탈리티 –3]
[유진 멘탈리티–4]
[일루미나 멘탈리티 –4]
“대단한 너희들이 나 같은 놈을 대장이랍시고 따라줘서 영광이었고.”
[카야가 턴을 넘깁니다.]
[공포가 용사들을 옥죄어듭니다.]
[셰이 멘탈리티 –4]
[카야 멘탈리티 –3]
[유진 멘탈리티 –4]
[일루미나 멘탈리티 –4]
“착하고 아름다운 너희들이 나 같은 놈을 사랑해줘서, 그 기간은 짧았지만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누렸어.”
“아직, 우리들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잖아… 뭘 벌써부터 결말 이후의 내용을 생각하고 있는 거야….”
일루미나가 핀잔을 날렸다. 맞는 말이었다. 벌써부터 다 끝난 것처럼, 달리 말해 여기서 다 뒤질 것처럼 이야기한 셈이니까. 근데 그녀의 목소리엔 물기가 한가득이었다.
“제가 할 말이에요.저와 함께해줘서, 저를 받아줘서 정말로 고마웠어요.”
일루미나의 말 뒤에 셰이가 힘겹게 끼어들었다. 그녀의 목소리에선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고 숨 쉬는 것 자체가 힘든지 말하는 중간중간 꺽꺽댔다.
“셰이….”
“저야말로… 행복했어요….”
“셰이…?”
[최후의 성전]
[셰이가 자신에게 낙인(1턴)을 새깁니다.]
[낙인이 유지되는 한, 모든 괴물은 셰이를 공격합니다.]
[상태이상 ‘절대 뒤로 밀려나지 않음’을 얻습니다.]
[셰이의 각종 상태이상 저항력이 상승합니다.]
[셰이의 방어력이 1 증가합니다.]
[피격 시 셰이의 체력이 1 회복됩니다.]
[피격 시 셰이가 일정 확률로 반격(데미지 보정 -25%)합니다.]
[낙인이 해제되고 한 턴간 행동할 수 없습니다.]
[공포가 용사들의 용기를 짓밟습니다.]
[셰이 멘탈리티 –4]
[카야 멘탈리티 –3]
[유진 멘탈리티 –4]
[일루미나 멘탈리티 –4]
“셰이! 너…!”
“헤헤….”
카야처럼 그냥 턴을 넘기라고 지시했는데, 셰이가 이번에도 내 지시를 무시했다.
“대체 왜!”
“기왕 아플 거… 한 사람이 몰아서 아픈 게 낫잖아요…? 대장님도 알다시피… 저… 아픈 거 참는 건, 익숙하니까….”
“셰이!”
“왜냐면….”
당혹스러웠다. 부정적 특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잠식에 걸린 것도 아닌데 내 말을 두 번 연속 무시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대장님은… 지금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뭐?”
“나랑 두 언니가 죽질 않길 바라는 마음…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대장님의 운명, 그리고 우리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선… 조금 더 냉철하게 생각해야 돼요….”
“난 언제나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있어! 이건, 이건 하지 않아도 될…!”
“이보다 더 준비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조금이 모자란 거잖아요…? 그러면, 하나는 포기해야 해요… 괜히 대장님이나 일루미나 언니가 공격당하기라도 했다간… 알잖아요? 제가 맞는 게 나아요….”
낫긴 뭐가 낫냐고, 제정신이냐고 묻고 싶었다. 아무리 던전을 돌파하는 게 중요하다 해도, 그 이전에 동료들의 무사를 더 중요시했었다. 두 마리 토끼를 노리다 한 마리도 놓칠 수 있다? 좆까는 소리였다. 가랑이가 찢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폐가 터지는 한이 있더라도 던전 돌파와 동료들 전원 무사라는 두 마리를 모두 잡아내려 했다.
안 그러면 의미가 없으니까. 그녀들이 소중해졌으니까. 내 삶의 일부가 되었으니까.
“네가 말 안 해줘도 내가 더 잘 알아! 거둬! 당장 거두란 말이다!”
“봐봐요… 감정적이잖아….”
깜깜했지만, 셰이의 미소가 눈에 아른거렸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지만, 어떻게든 쓸어담고 싶었다. 감정적이고 이성적이고 자시고 어째서 내 명령을 어기는 거냐고, 이렇게 어길 수 있는 거였냐고, 지금까지는 무슨 심정으로 내 명령을 듣고 이행했던 거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은 여기까지였다.
“분명 믿기 힘들 정도로 굳건히 저항하던 네놈들에게서도 드디어 공포가 느껴지는군.”
셰이의 턴이 끝나고 염통놈의 턴이 되면서, 염통놈의 목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한 라운드 쉬는 사이에 안정감을 되찾은 것인지 놈의 목소리와 어조는 처음으로 맞닥뜨렸을 때로 돌아와있었다.
“공포에 차 쓰러져라.”
[공포 선언]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염통놈의 스산한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아무것도 안 보여서 그런지 놈의 목소리만으로 공포가 급격히 차올랐다. 곧 이어질 염통놈의 공격은 ‘무조건’ 셰이에게 적중할 테니까.
“아… 안 돼…!”
“셰이!!!”
[공포의 심장이 셰이를 지정합니다.]
[셰이가 전 라운드 동안 받은 멘탈리티 피해만큼의 체력을 잃습니다.]
[셰이가 전 라운드 동안 받은 멘탈리티 피해의 두 배만큼의 멘탈리티 피해를 입습니다.]
[공포의 심장이 셰이에게 16의 데미지를 주었습니다.]
[남은 체력 –15/35]
[셰이 멘탈리티 –31]
[공포 해방의 효과로 공포의 심장이 16의 체력을 회복합니다.]
[남은 체력 21/255]
어떠한 비명도 없었다.
하지만 전투 메시지는 정직했다.
[셰이가 사경에 빠졌습니다.]
[셰이에게 걸린 모든 버프가 사라집니다.]
[셰이의 모든 수치가 33% 감소합니다.]
[사경에 들어선 상태에서 데미지를 받으면 셰이는 사망합니다.]
[셰이가 두 번째 사경에 빠졌습니다.]
[세 라운드 안에 체력을 1 이상으로 회복하지못하면 셰이가 사망합니다.]
[용사들이 느끼는 공포가 극도로 증폭됩니다.]
[카야 멘탈리티 – 24]
[유진 멘탈리티 – 33]
[일루미나 멘탈리티 –34]
“아… 아아….”
더 롱 테러에서는 없었던 새로운 사경 페널티를 확인한 순간.
[유진의 멘탈리티가 –100을 초과했습니다.]
[공포가 유진을 잠식합니다.]
안 그래도 붕괴 직전이었던 내 멘탈리티는 순식간에 –100을 돌파했고….
[유진이 공포의 잠식에 저항합니다.]
마치 이 짙은 어둠이 우리들의 미래, 그것도 아주 가까운 미래처럼 보여서.
이게 꼭, 죽음 그 자체로 보여서.
셰이가 진짜로 죽을 것만 같아서.
내가 약한 탓에 이렇게 된 거 같아서. 왜 그때 사경에 빠져가지고, 데미지를 더 넣지 못해서.
내가 준비를 덜한 탓에 이렇게 된 거 같아서. 내가 왜 던전에 들어오기 전에 ‘이 정도면 과할 정도로 준비한 거겠지?’라고 생각해서.
어떻게든 돈을 더 박박 긁어모아서 무기 업그레이드 한 번만 더 할걸. 스킬 업그레이드 한 번만 더 할 걸.
셰이가 날 이렇게까지 사랑하지 않았다면. 내가 셰이를 이렇게까지 사랑하지 않았다면.
셰이와의 인연이 그냥 호흡이 잘 맞는 동료 정도에 그쳤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멀쩡했다면 그녀가 사경에 빠질 일 자체도 없었을 텐데.
내가 왜 그때 셰이를 욕심내서.
내가 왜.
나 때문에.
나 때문에.
나 때문에.
나 때문에.
셰이가.
그리고 카야가. 일루미나가.
이대로.
저놈에게 다 죽는 거야.
나 때문에.
[유진이 저항에 실패했습니다.]
[유진이 공포에 잠식됩니다.]
셰이가 우리를 지키다가 사경에 걸렸던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1구역 들어가기 전 인던에서도, 1구역에 들어가서도 경험했었다.
하지만….
[유진이 정신이상 ‘죄책감’에 걸립니다.]
[걸려있던 모든 버프가 해제됩니다.]
[멘탈리티 감소 속도가 25% 증가합니다.]
[일정 확률로 자신의 멘탈리티를 추가로 저하시킵니다.]
[부정적 기벽이 발동할 확률이 증가합니다.]
[일정 확률로 턴 외에 돌발적 행동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속도 -2]
[회피율이 감소합니다.]
[사경에 들어서거나 멘탈리티가 다시 한 번 -100에 도달할 경우, 바로 사망합니다.]
그땐 그나마 맡은 바 롤에 의해, 전투를 하다보니 어쩔 수 없이 그런 면이 있었다고 포장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경우가 달랐다. 그때는 미안함과 고마움이 공존했다면, 지금은 죄책감이 장난 아니었다.
내가 맞았어야 하는데.
내가 뒤졌어야 하는데.
[잠식된 공포는 동료들에게 빠른 속도로 퍼져나갑니다.]
[셰이 멘탈리티 –24]
[카야 멘탈리티 –17]
[일루미나 멘탈리티 –25]
습관이란 무서웠다. 잠식당한 상황에서도 메시지를 읽고 동료들의 컨디션을 확인했다.
[멘탈리티]
셰이 : -80
카야 : -86
유진 : -30(죄책감)
일루미나 : -144(각성)
“하하….”
앞은 안 보이고, 미래는 암담했다. 비록 저놈의 체력이 21이었으나, 일루미나는 절현을 쓴 후였고 카야는 여전히 깨어나지 못했고, 셰이는 공격하기는커녕 움직이기도 힘들어보였다.
“여기서, 끝인가….”
[유진 멘탈리티 –5]
무심코 전멸을 생각하며 중얼거린 그때였다.
“누구, 마음대로 끝입니까…?”
“카야 언니!”
“대장의 의지는… 대장의 운명은… 겨우 여기서 끝날 정도였습니까…?”
“……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암흑 속에서, 어느 새 밝은 점 하나가 우릴 비추고 있었다.
카야의 철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