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5화 〉3구역(4)
3-1을 아무 피해 없이 박살낸 우리는 곧바로 3-2를 향해 바삐 움직였다. 무기도 이동하면서대충 닦아냈다. 함정에 걸리는 것도 감수했다. 천천히 이동하면 함정을 피할 확률도 올라갔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공포의 기운이 용사들의 틈을 노립니다.]
[셰이 멘탈리티 –0]
[카야 멘탈리티 –3]
[유진 멘탈리티 –4]
[일루미나 멘탈리티 –5]
가장 최심부에 가까운 3구역이라 그런지 그 어느 때보다도 공포의 기운이 심했으며, 그만큼 멘탈리티 감소 속도가 더 빨라졌다.
특히 일루미나의 멘탈리티가 회복될 땐 반절밖에 회복이 안 되는데 감소할 땐 그런 거 없이 통으로 깎이니 진짜 욕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피잉-!
“또 함정입니다!”
“달려!”
함정의 빈도 또한 높아졌다. 우리의 조급함을 조롱이라도 하듯 통로 일부분이 움푹 들어가 넘어지게 만들고, 일어나기 위해 손을 짚은 곳에 송곳이 튀어나왔다. 악질이었다. 함정에 당할 때마다 멘탈리티가 갈리는 건 기본이고 지금까지 없던 ‘연계’ 함정이 우릴 괴롭혔다.
[멘탈리티]
셰이 : -14
카야 : -31
유진 : -38
일루미나 : -84
‘…텄다.’
입 밖으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최선을 다했음에도 일루미나의 멘탈리티 방어는 요원해보였다. 순간, 잠들어있는 지금 상태에서 잠식이 터진다면 우리한테 별 영향이없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씨발 아무리 그래도 그런 생각은 아니지!’
조급함과 압박감, 그리고 한 층 더 심해진 공포의 기운이 내 멘탈을 짓눌렀다.
“열게요.”
“그래.”
‘설마, 이번에도 두 번째 방에서 정예 괴물이 등장하진 않겠지?’
두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그런다면 로그라이크 딱지는 떼야 하는 게 옳았다.
“대장님? 저건 대체…?”
셰이가 문을 열었다. 안에 일단 괴물은 없었다. 사방이 깜깜했다. 그렇다고 휴식처는 아니었다. 공포의 상자방인가 싶었지만 미믹같이 생긴 상자도 없었다.
맨앞에 서 있던 셰이가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가리킨 순간. 그걸 확인한 나는 하마터면 일루미나를 떨어뜨릴 뻔했다.
“포탈!”
“네?”
“예?”
“어, 그러니까… 그래. 지름길이야! 어쩌면 저번에 건너뛰었던 것보다 더 뛰어넘을 수 있을지도 몰라!”
“아, 저게요?”
“그래!”
뭐지 3구역? 병 주고 약 주고인가?
아니면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주파한 우리의 기세에 던전이 레드 카펫이라도 깔아주려고 그러는 건가? 어차피 이놈들은 어떻게 해서든 보스 방까지 기어갈 놈들이니 프리패스라도 시켜주자고?
가까이서 보니 더 확실해졌다. 사람 키보다 조금 큰 높이에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한 폭의 검은색 타원. 더 롱 테러에서 봤던 포탈 일러스트와 똑 닮았다.
“이거,들어가도 되는 걸까요? 안쪽에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생긴 것만 보면 꼭… 지옥으로 향하는 문처럼 보입니다.”
“어쩌면 카야 네 말이 틀린 것도 아니야. 저걸 타고 가면 보스 괴물에 훨씬 빨리 도달하는 거고, 그건 죽음을 앞당기는 일이 될 수도 있어. 하지만.”
우리는 어차피 3구역 보스를 죽이고 미지의 4구역까지 돌파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일루미나를 제외하면 컨디션이 좋은 상황에서 미지의 전투 손실과 더불어 비전투손실까지 스킵할수 있는 포탈은 그야말로 넝쿨째 들어온 호박이었다. 2구역에서 바퀴벌레 같았던 최후의 문지기를 뚫고 방 두 개를 꽁으로 건너뛰었을 때도 얼마나 기뻤나. 그걸 생각하면 설령 휴식처나 상점을 건너뛰고 포탈 끝에 정예 괴물방이 뜨더라도 포탈을 타는 게 맞았다.
“그래도 가야 해. 보이는 건 많이 섬뜩하지만.”
이번엔 내가 선두로 나섰다. 카야나 셰이나 둘 다 용기 있는 이들이었지만 본능적으로 저 포탈이 꺼려지는 것 같았다. 반면 나는 별 느낌 없었다. 그저 빨리 들어가야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질적이긴 하네.’
공포의 기운이 넘실거리는 정체불명의 뻥 뚫린 타원 안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내 스스로가 순간 낯설었다. 난 원래 겁이 많은 성격인데, 처음부터 도끼로 괴물의 머리를 스스럼없이 빠개는 것부터가 그랬다. 그래도 그땐 내가 빙의한 캐릭터가 원래 그래서 영향을 받았나보다, 괴물을 죽일 때마다 매번 겁먹고 스트레스 받는 것보단 오히려 좋은 게 아닌가라고넘겼다.
반면 지금은 경우가 달랐다. 헨드릭도 경험해본 적 없는 건 똑같으리라.
‘내가 이세계인이라는 것, 거기에 여전히 던전을 게임처럼 생각하는 면이 있다는 거겠지….’
평소라면 이 낯섦 때문에 한동안 또 혼란을 겪었겠지만, 지금은 오히려 좋았다. 대장인 내가 지금 이 순간 두려워하지 않고 확신을 가질 수 있었으니까.
일루미나를 고쳐 업은 나는 망설임 없이 포탈에 발을 내디뎠다.
**
[넌 굴복할 것이다.]
‘아니야.’
[네 목표는 이뤄지지 못할 것이다.]
‘아니야.’
[너라는 존재는 사라지고 다른 이들에게서 잊힐 것이다.]
‘아니야.’
[끝내 넌 파멸할 것이다.]
‘아니야.’
[넌 죽을 것이다.]
‘아니야.’
[네 동료들은 처참한 최후를맞이할 것이다.]
‘아니야.’
[동료들에 비해 여러모로 부족해 끝내 굴복한 너는 동료들을 공격하고 그들의 대의를 방해할 것이다. 끝내 좌절하여 스스로의 파멸을 선택하게 되리라.]
‘아니야.’
[버티는 것은 끝이 없지만 무너지는 것은 한 순간이다. 파멸은 이미 예정된 운명일지니, 저항은 부질없는 것이다.]
‘아니야.’
[받아들여라.]
‘싫어.’
[포기하라.]
‘싫어.’
[받아들여라.]
‘싫어!’
[포기하라.]
‘싫다고!’
[포기하라.]
‘싫다니….’
[포기하라.][포기하라.] [포기하라.] [포기하라.]
[포기하라.] [포기하라.] [포기하라.] [포기하라.] [포기하라.] [포기하라.] [포기하라.]
- 아악-!
- 카야!!!
- 언니--!!!
‘어…?’
[포기하라.]
[포기하라] [포기하라] [포기하라]
[포기하라.] [포기하라]
[포기하라] [포기하라]
[포기하라.] [포기하라] [포기하라]
[포기] [포기하라] [포기] [포기]
[포기] [포기하라] [포기]
[포기하라] [포기] [포기하라]
[포기하라] [포기하라] [포기하라] [포기]
- 이 씨발새끼가!
- 저, 전 괜찮습니다… 그보다 일루미나를….
- 대장님!!
‘어어…?’
[포기하라.]
- 아… 안 돼….
- 대장님…?
- 씨발….
‘나, 왜….’
[포기하라.]
- 일루미나 언니 어떡하죠…? 막아내려고 노력하긴 했지만….
- 셰이가 잘못한 것은 없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우린 최선을 다했습니다.
- 우리가 뭐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없어. 일루미나가 스스로 이겨내길 기도하는 수밖에….
‘일루미나…? 아.’
[포기]
- 제발, 제발, 제발.
- 라엘라시여.
- 유스티티엘님…!
[포기][포기][포기][포기][포기][포기][포기][포기][포기][포기][포기][포기][포기][포기][포기][포기][포기][포기][포기][포기][포기][포기][포기][포기][포기][포기][포기][포기][포기][포기][포기][포기][포기][포기][포기][포기][포기][포기][포기][포기][포기][포기][포기][포기][포기][포기][포기][포기][포기][포기][포기]
**
3-2에서 등장한 포탈은 무려 4개의 방을 건너뛸 수 있게 해주었다. 나 빼고 아무것도 안 보이는 어두컴컴한 길을 걸어야 해서 조금 전의 공포가 떠올랐지만 그다지 길지 않았다. 체감상 5분 정도 걸었는데 3-7 바로 앞에 도착해있었다. 포탈에서 나온 직후 발동된 정찰 덕분에 그 사실을 알게 되고 잠깐이지만 환호성을지르기도 했다. 엄청 긴장하고 있던 카야와 셰이도 잠시나마 기뻐했다.
허나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3-7에서 정예 괴물이 출현한 것이었다.
출현한 정예 괴물놈의 이름은 ‘공포추적자’. 2구역에서 만났던 ‘공포수확자’처럼 체력과 방어력은 약하지만 데미지딜링에 특화된 놈이었는데, 내가 최적의 타이밍에 셰이의 도발을 활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광역기에 휩쓸린 일루미나가 단 한방에 빈사상태에 빠져버렸다.
비교적 빨리 잡아내긴 했지만… 일루미나가 빈사상태에 빠지면서 멘탈리티가 –100을 돌파하는 바람에 잠식 저항 상태에 빠져버렸고, 이전의 행동불능 상태이상 때문인지 잠식 저항 상태가 꽤나 오래 지속됐다. 우린 혹여나 일루미나에게 악영향이 갈까 업고 이동하지도 못하고 발이 묶여버렸다.
“일루미나 언니 어떡하죠…? 막아내려고 노력하긴 했지만….”
“셰이가 잘못한 것은 없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우린 최선을 다했습니다.”
“우리가 뭐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없어. 일루미나가 스스로 이겨내길 기도하는 수밖에….”
우스갯소리로 운빨좆망겜을 하는 플레이어들은 신앙심이 얼마만큼 간절하냐에 따라 플레이의 향방이 갈린다고들 하는데, 지금 내가 딱 그 심정이었다. 일루미나가 뭐 해보지도 못하고 잠식까지 걸린다? 지금까진 포탈 덕분에 진행도에 비해 컨디션이 상당히 준수한 편이라지만, 버퍼가 잠식에 걸린 채 3구역 보스전을 치르고 싶진 않았다. 탱커 한 턴을 날리는 건 극복 가능하지만, 첫 턴에 버퍼 턴이 날아간다? 아니면 두 번째 턴에 시키지도 않은 버프 전환이나 미쳐버려서 절현을 사용해버린다?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제발, 제발, 제발!’
영혼 밑바닥부터 끌어모아 기도했다. 내 품에 안겨서 덜덜 떨고 있는 일루미나를 더 꽉 끌어안았다. 그녀가 내 온기를 느끼고 동료들의 기도를 들어서 공포를 이겨낼 수 있기를 바랐다.
‘일루미나. 넌 할 수 있어.’
“…………어…….”
“일루미나 언니?!”
“쉿!”
간절한 기도가 닿은 것일까.
일루미나의 의식이 돌아오고 있었다.
[일루미나의 멘탈리티가 –100을 초과했습니다.]
[공포가 일루미나를 잠식합니다.]
[일루미나가 공포의 잠식에 저항합니다.]
“……싫어…….”
“일루미나…?”
“…이 되긴, 싫어…….”
“일루미나.”
“나만, 짐이 되긴, 싫어……!!”
[동료들의 대의와 자신의 소원을 위해 죽음의 공포를 떨쳐내어 ‘각성’ 상태가 되었습니다.]
[멘탈리티 수치가 –50까지 회복됩니다.]
[걸려있던 모든 디버프가 해제됩니다.]
[속도가 1 증가합니다.]
[방에 진입할 때 일정 확률로 용사대 전원의 멘탈리티를 5 회복시킵니다.]
[방을 빠져나갈 때 일정 확률로 용사대 전원의 멘탈리티를 5 회복시킵니다.]
[일정 확률로 무작위 동료의 멘탈리티를 회복시킵니다.]
[사경에 들어서거나 구역 보스를 죽이면 해제됩니다.]
일루미나는 ‘각성’했다.
우리의 기도는 성공적이었다. 아니, 그녀의 의지가 끝내 공포를 이겨내는데 성공한 것이었다.
“다들, 미안해… 짐만 돼서….”
“아냐! 무사히 깨어난 것만으로 천만 다행이야!”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이런 일은 없을 거야.”
일루미나가 내 손을 부드럽게 밀어냈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그녀는배낭 속에서 베이파를 꺼내들었다.
“헨드릭, 네가 그동안 왜 그렇게 공포포기무새관음증변태새끼라고 하는지 확실히 알겠더라.”
“뭐?”
“계속 나보고 포기하래. 포기하지 않으면 내 손으로 파멸을 불러일으킬 거래. 끈질기더라고?”
“….”
“마음이 거의 다 꺾일 뻔했는데… 그때 너희들이랑 언니목소리가 들리지 뭐야. 그래서 계속 싫다고 했어. 그놈이 포기하라고 지껄인 횟수만큼.”
띠리링-
[유진 멘탈리티 +3]
“하하….”
그녀의 선율은 평소보다 더 영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