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화 〉3구역(3)
답이 없었다.
“정말 유감스럽게도, 여긴 휴식처가 아니지….”
“그 말씀은.”
“업고 간다.”
“대장님!”
“너희들도 알잖아! 휴식처가 아닌 이상, 오래 있을 수 없다는 거! 일루미나가 언제 깨어날지, 아니 언제 제정신 차릴지 알 수 없는 상황이야. 계속 있다가는나가지도 못하고 던전에 잡아먹히고 말 거야.”
“…대장님 말이 맞아요.”
“제가 업고 가겠습니다.”
“아니, 내가 업고 갈게.”
대열 위치상으로도, 책임상으로도 그게 맞았다. 나는 간절한 마음에 성수를 먹여봤지만 발작이 조금 줄어든 것 말고는 별 차도는 없었다. 성수는 미리 마셨을 때 효과가 좋지, 이미 일이 벌어지고 나서는 효과가 급감했다. 그래도 업힐 땐 얌전해서 다행이었다.
“읏챠. 아휴 우리 일루미나, 뭘 먹어서 이렇게 무거운 거야? 성수 먹어서 그런가? 응?”
“으으….”
“이러다 보스 만나기도 전에 허리 휘어서 쓰러지겠어.”
“흐으….”
실없는 농담을 건네봤지만 겨우 그걸로 일루미나가 정신을 차리는 일은 없었다. 축 처진 팔이 덜렁거리고 그녀가 흐느끼는 소리가 귓가에 다이렉트로 꽂혔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몇 번을 겪었다든지, 얼마나 험한 죽음을 경험했는지 비교하는 건 의미 없었다.
죽음 앞에서 느끼는 공포는, 죽음을 바라는 자도 느끼는 것이었다. 나라고 안 죽고 싶었을까? 하지만 자살할 용기까지 나진 않았다. 생존 욕구가 있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그 공포는… 무난히 버틸 수 있는 그런 게 아니었다.
우리 중에선 ‘그나마’ 제일 평범한 인생을살아온일루미나조차도 정신력은 뛰어난 편이었다. 2구역에서예술가놈에게 갈고리에 등이 꿰여 죽을 뻔했을 때도 그녀는 강한 의지력으로 버텨냈었다.
생명체, 필멸자로서 가진 원초적 본능.
공포새끼의 말에 동의하는 것 같아서 짜증났지만, 그건 어떻게 컨트롤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일루미나랑 관계가 부족해서 극복을 못 한 걸까.’
신경 썼다고 생각했는데….
일루미나가 느꼈을 죽음의공포가 내 어깨를 강하게 짓눌렀다.
“대장님. 전방에 수상한 물체가 있어요.”
“어디.”
셰이가 가리키는 걸 보니 상당히 길쭉한 조각상이 통로를 가로막고 있었다. 꽤나 괴상하게 생겼는데 처음 보는 기물이었다.하지만 저게 뭔지 한눈에 알아봤다.
‘dlc에서 추가된 거짓된 우상인 거 같은데.’
dlc에서 새로운 구역 및 괴물들이 추가되고 새로운 클래스가 추가됐듯, 새로운 기물들도 추가됐다. 눈앞에 보이는 조각상은 사전에 풀린 정보들 중에 수록되어 있었는데, 사전 정보라 그런지 생김새와 기물에 대한 간략한 설명밖에 없었다.
‘「이 정체불명의 우상에 접촉한다면믿음이 흔들릴 수도 있지만 굳건해질 수도 있습니다.」였었지.’
더 롱 테러에서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종류의 텍스트가 나온다면, 제대로 된 준비물이나 파훼법을 모르는 이상 일단 거르고 보는 게속 편했다.
“그냥 지나가자.”
“네, 대장님.”
‘설마 그냥 지나갔다고 뭐 있진 않겠지?’
초장부터 별 엿 같은 걸 겪다 보니 의심암귀가 생겼다. 괜히 셰이에게 빨리 걷자고 재촉했다. 조각상이 시야에서 없어질 때까지 불안함은 없어지지 않았다. 다행히 우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왠지 조각상이 날 계속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으으….”
‘일루미나, 너도 그런 거 같지?’
[강해진 공포의 기운이 용사들의 정신을 갉아먹습니다.]
[셰이 멘탈리티 –0]
[카야 멘탈리티 –3]
[유진 멘탈리티 –4]
[일루미나 멘탈리티 –5]
가장 신중하게 나아가야 할 구역에서, 던전은 어림도 없다는 듯 속도전을 강요하고 있었다. 이 와중에 셰이의 멘탈리티는 새로 얻은 특징 덕분에 끄떡없다는 게 참 놀라운일이었지만, 일루미나가 문제였다. 후반부도 아니고 극초반부에이렇게 삐걱거리는 건 더 롱 테러에서도 거의 드문 일이었다.
“좀 더 속도를 높이자.”
“예.”
조급함은 사고를 부르는 가장 큰 원인이었지만 지금은 리스크를 짊어져야 할 때였다. 그렇게 거의 20분 정도를 뛰다시피 걸어간 끝에서야 3-1이 눈앞에 보였다. 중간에 멘탈리티가 한 번 더 떨어졌고, 일루미나는 여전히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대장. 일루미나는.”
“바로 가자. 가혹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기다릴 여유가 없어.”
“…알겠습니다.”
셰이가 문을 열었다.
크르르르-
“고오오옹-!”
“포오오오-!”
“그입닥쳐하등한쓰레기들아!”
첫 번째 방은 언제나 그렇듯 일반 괴물이 등장했다. 하지만 보통 인간과 다를 바 없던 1구역 괴물들, 상당히 변했지만 그래도 인간형으로 봐줄 수 있었던 놈들과 이미 괴수로 변해버린 2구역 괴물들에 비해 훨씬 기괴했고 징그러웠다.
그냥 인간처럼 두 발로 서 있는 입 뚫린 괴물이냐, 네 발로 서 있는 괴물이냐 그 차이였다.
[공포에 물든 광신도1]
[공포에 물든 광신도2]
[공포에 젖은 실험체]
[공포에 물든 광신도]
최대체력 : 59
공격력 : 9~16
방어력 : 5
속도 : 5
[공포에 젖은 실험체]
최대체력 : 52
공격력 : 7~11
방어력 : 4
속도 : 4
역시 괴물들의 스펙은 한 층 더 강해져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1구역에서 2구역 넘어갈 때 상승했던 비율만큼 오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속도 체크]
셰이 : 5
카야 : 5
일루미나 : 5
유진 : 7
공포에 물든 광신도1 : 5
공포에 물든 광신도2 :5
공포에 젖은 실험체 : 4
[유진의 턴이앞서게 됩니다.]
그냥 신도가 아닌 ‘광신도’와 단어 자체부터 꺼림칙한 느낌이 드는 ‘실험체’. 원래 미쳐있긴 했지만 지금은 아예 이성과 지능이라는 게 완전히 사라져 ‘공포’만을 외치는 괴물.
꿈에 나올까 좆같은 면상들이었지만, 차라리 실체를 가진 괴물들을 보니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저건 대가리를 깨부수면 영원히 닥치게 만들 수 있으니까.’
일루미나를 조심스레 내리고는 문에 기대게 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계속 신음소릴 내던 그녀는 그사이 기력이 다했는지 가쁜 숨을 내쉬며 잠에 빠져들었다. 속도 체크엔 잡히는 걸 봐선 저 상태로도 전투에 참가한 것처럼 처리는 되지만 전투는 불가능할 것이다.
[일루미나 : 상태이상 ‘행동불능’]
저 상태이상이 없어지지 않는 한.
도끼를 쥐었다. 일시적으로 일루미나가 내려가서 몸은 가벼워졌지만 마음은 한층 더 무거워졌다.
설정상 광신도와 실험체는 공포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잡아먹힌 숭배자들과 공포의 힘을 강제로 주입당해 변이해버린 실패작들이었는데, 까딱 잘못하면 우리들도 저 꼴이 될 수도 있다 생각하니….
“너넨 그 병신같은 전도 방식부터 바꿀 필요가 있어 이 사이비 새끼들아!”
[대가리 분쇄]
[파멸적인 일격!]
[유진이 공포에 물든 광신도1에게 63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4/59]
[공포에 물든 광신도1이 죽었습니다.]
[한번에 공포의 하수인을 격살한 당신의 무용에 동료들의 사기가 솟아납니다.]
[셰이 멘탈리티 +8]
[카야 멘탈리티 +7]
[유진 멘탈리티 +8]
[일루미나 멘탈리티 +4]
침을 질질 흘리며 귀 아프게 연신 공포를 외쳐대던 광신도 새끼의 대가리를 한번에 터뜨려버렸다. 이름에 공포가 들어간 괴물에게 10% 추뎀이 붙는 공포 학살자와 인간형 괴물에게 15% 추뎀이 붙는 도살자, 인간형 괴물에게 추뎀이 붙는 대가리 분쇄 특징에 치명타가 어우러진 결과였다.
“공포오오오!!!”
“닥쳐 씨발!!!”
저 개같은 공포무새의 대가리를 빠개는 이 짧은 순간만큼은 스트레스가 확 풀렸다. 저 괴물이 죽는다한들 공포새끼는 하나도 신경 안 쓰겠지만, 그놈을 조지러 가는 내 입장에서 그놈의 일부분을 확실하게 깎아내는 기분이었으니까. 일루미나에 대한 복수이기도 했다.
[셰이와 카야와 일루미나와 공포에 물든 광신도2의 속도가 같습니다.]
[속도 굴림]
셰이 : 5
카야 : 3
일루미나 : 1
공포에 물든 광신도2 : 4
[셰이의 턴이 앞서게 됩니다.]
“고오오옹- 포오오오-!”
크르르르-!
“셰이! 저 씨발새끼 입 좀 닥치게 해!”
“알겠어요!”
맨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하면 폭언이 줄어든 셰이였지만, 그 기질은 어디 안 갔다.
“고옹포오오-!”
“그역겨운면상에서더역겨운썩은내가나는가싶더니백날외치고다니는게그딴쓰레기라서그러는구나!지금이라도그입닥치면곱게죽여주겠다!”
“공포오오…!”
“그얼굴갈기갈기찢어네놈의눈과혓바닥으로네놈이그토록찬양하는공포를모독해주지!”
폭언의 강도를 보건대 멘탈리티 수치와는 별개로 셰이도 스트레스가 엄청났나보다. 그녀는 엄청 흉흉한 기세로 쿵쿵 다가가더니 클레이모어를 인정사정없이 휘둘렀다. 숫제 둔기로 마구 후려치는 모양새였다.
[정의의 심판]
[셰이가 공포에 물든 광신도2에게 26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33/59]
[공포에 물든 광신도2가 심판에 굴복합니다.]
[공포에 물든 광신도2가 상태이상 ‘기절’(1턴)에 걸렸습니다.]
[공포에 물든 광신도2에게 심판의 낙인이 새겨집니다.]
[낙인은 3턴간 유지됩니다.]
“고옹포오오….”
셰이의 기세가 어찌나 흉흉한지, 내가 한번에 광신도를 죽였을 때는 아무렇지 않게 꽥꽥 소릴 지르던 놈이 뒷걸음질치며 목소릴 죽였다. 물론 기절당한 영향도 있겠지만….
[공포에 물든 광신도2는 어떠한 행동도 할 수 없습니다.]
[공포에 물든 광신도2가 턴을 넘깁니다.]
[상태이상 ‘기절’에서 벗어났습니다.]
진정한 믿음을 가진 성전사 앞에 한층 기세가 꺾인 광신도새끼의 턴이 허무하게 지나가고 카야의 턴이 되었다. 그녀 또한 힘없이 늘어져있는 일루미나를 바라보며 이를 갈고 있었다.철퇴에 박힌 가시가 유난히 더 흉흉해보였다.
“침묵시키겠습니다.”
“그래.”
광신도와 실험체가 저지른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뭐 어쩌겠나. 어차피 이놈들은 공포를 숭배하다 못해 미쳐버린 놈들이다. 이놈들에 한해 죄책감 같은 걸 가질 필요가 없었다. 가졌다면 1구역 때부터 괴로웠을 것이다.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압도적인 일격!]
[특징 ‘새로운 신념’의 효과로 인해 괴물의 방어력을 6까지 무시합니다.]
[카야가 공포에 물든 광신도2에게 58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25/59]
[공포에 물든 광신도2가 죽었습니다.]
[반격조차 허용하지 않는 연격에 공포가 잠시 주춤합니다.]
[셰이 멘탈리티 +4]
[카야 멘탈리티 +4]
[유진 멘탈리티 +4]
[일루미나 멘탈리티 +2]
카야의 철퇴는 광신도의 머리뿐만 아니라 상반신까지 곤죽으로 만들었다. 그녀는 광신도를 침묵(물리)시키겠다는 제 말을 아주 잘 지켰다.
[일루미나는 어떠한 행동도 할 수 없습니다.]
[일루미나가 턴을 넘깁니다.]
이제 남은 건 아까보다 무게중심을 뒤로한 채 우리에게 달려들 준비를 하고 있는 짐승 한 마리뿐.
“얼마든지와라이미천한짐승새끼야!!!”
크르르르…!!
분명 실험체의 턴이었지만, 마치 셰이가 통제하는 느낌이 들었다.
[공포의 맹습]
[강력한 일격!]
실험체는 도발하는 셰이에게 돌진했지만….
[공포에 젖은 실험체가 셰이에게 0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35/35]
[특징 ‘트라우마를 극복함’의 효과로 인해 실험체의 공포 감염을 무시합니다.]
[셰이 멘탈리티 –0]
상당히 매서워보이는 괴물의 공격은 방어력 21에 멘탈리티 데미지5 이하 전부 무시 특징을 지닌 셰이 앞에 모든 데미지가 무효가 되었다. 심지어 치명타를 띄웠는데도!
크르르…!
공격에 실패한 괴물은 한 층 더 흉포한 소리를 냈지만, 글쎄….
“겁에 질린 개새끼, 딱 그꼴이잖아?”
다시 내 차례가 되었다.
[대가리 분쇄]
저 실험체의 다음 턴은 영원히 찾아오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