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0화 〉친구(5)
세스티아가 방을 나가고 난 후, 침묵이 찾아왔다. 살면서 침묵은 참 익숙할 정도로 많이 겪어봤지만, 이 정도로 임팩트 있으면서도견디기 힘든 침묵이 또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오래 가지 않았다.
“뭐 하십니까?”
“어,어?”
“세스티아 자매님 안 쫓아가시고.”
“어…?”
“하아….”
임신이란 단어를 들은 이후부터 혼이 나가버린 내게 카야가 예상외의 말을 내뱉었다.
“대장 당신의 아이를 밴 여자를 저리 방치하실 거냐는 말입니다.”
“아, 그….”
“그때 대장과 세스티아 자매님 사이에서 있었던 일은 그때 매듭을 지었습니다. 지금은 그저… 그만큼 놀랍고 또, 가질 수 없었던 것에 대한, 그런….”
카야가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듯 보였다. 그녀의 반응을 보니 정말 몹쓸 짓을 했다.
임신.
그녀에겐 불가능한 천형(天刑).
내 동정을 가져간 카야는 절대 불가능한 일을, 단 하루 어울린 세스티아가 해내버렸으니 카야입장에서 박탈감이 장난 아닐 것이다. 그나마 셰이도 비슷한 이유로 임신이 안 되고 있는 것 같았고, 일루미나도 딱히 임신이 안 되고 있어서 어쩌면 내 쪽도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적어도 당분간 아르가추적당할 일은 없을 것 같으니, 세스티아 자매님과 이야기하러 가십시오.”
“그건….”
“아예몰랐다면 모를까, 알게 되었는데 저대로 외면하실 겁니까? 세스티아님이라고 좋아서 그런 마음가짐을 먹으셨겠습니까? 어떤 임신한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에게서 떠나고 싶겠습니까. 평소보다도 더 보호받고 사랑받아도 모자랄 판에.”
“카야….”
“아무리 제 마음이 아프다 하더라도… 저희를, 그리고 대장 당신을 인면수심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의 마음이라….
‘아니, 카야.난 인면수심 그 이하야.’
짐승도 제 새끼는 소중히 다뤘다. 나는 세스티아의 말을 듣고, 생각보다 별 마찰이 없이 이 일이 끝난 것을 그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 다음에 그녀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만 생각하고 있었다.
카야와 셰이의 눈치만 보고, 세스티아가 어떤 심정일지는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난 쓰레기였다.
던전?
그래. 동료들 중 누구라도 임신을 하게 된다면 던전행은 사실상 불가능해질 것이다. 새로운 동료를 맞이하지 않는 한은. 애초에 카야나 셰이는 임신이 불가능한 걸로 알고 있고 일루미나도 발정기를 제외하면 임신 확률이 제로에 가까웠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은 없지만,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마음가짐의 문제였다.
‘이래서야마치 친모 자궁에 싸지르고 튄 얼굴도 모르는 내 애비새끼랑 다를 바가 없잖아.’
미안, 카야. 미안, 셰이. 일루미나랑 아르도 미안.
나는 솟구치는 자기혐오감을 느끼며 수도원으로 향했다.
**
헨드릭이 방을 나간 후, 이곳저곳에서 한숨 소리가 터져나왔다. 심지어 숨을 급하게 몰아쉬는 소리도 있었다.
전자는 카야와 셰이였고 후자는 일루미나와 아르였다. 카야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다들 너무 눈치 보지 않아도 됩니다. 괜찮으니까.”
“나 때문에 이렇게 됐어. 왜말했을까…?”
“세스티아 자매님께 위로받았고,아르 당신도 당신 방식대로 위로하고 싶었겠죠. 틀립니까?”
“그건 그렇지만 결과가….”
“잘못이 있다면, 세스티아 자매님이 밝히길 원하지 않았던 걸 밝힌 것이 잘못이지 저희의 기분이 이렇게 된 건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분하지만, 이건 대장과 세스티아 자매님 둘 사이의 문젭니다.”
“맞아요. 분하지만.”
셰이가 마른세수를 했다. 두 눈과 얼굴이 울긋불긋했다.
“아무리 나랑 대장님이랑 사랑하는 사이라고 해도, 같은 길을 걸어간다 하더라도… 그 결실이라 할 수 있는 아이를 못 가진다는 건 여자로서 굉장히 슬픈 일이니까요. 반면 세스티아님은 굉장히 기쁠 거예요. 대장님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말했을 때 세스티아님이 순간 보였던 표정, 다들 봤잖아요?”
“응… 정말 행복해보이더라. 바로 표정관리 했지만.”
“카야 언니 말대로 그때의 감정은 그때 풀었어요. 아기가 생긴 건… 별개의 문제죠. 아기는 아무 잘못이 없어요. 분하고 부러우면서도, 아기가 어떤 모습으로 태어날지 기대하고 있었어요. 대장님을 더 많이 닮을까? 세스티아님을 더 많이 닮을까? 딸일까, 아들일까? 혹시 쌍둥이로 태어나려나?”
“….”
“설령임신할 수 있다 하더라도 임신은 피했겠죠. 사명이 있으니까요. 그렇기에, 원래가질 수 없는 것이 더 아름답고 더 값져보이는 거겠죠. 비록 제가 가지지 못한 게 평범한 여자라면 응당 누릴 수 있는 축복이라는 게슬프지만요.”
“셰이.”
“괜찮아요. 축복해줘야죠. 아르가 잘 지낼 수 있는 방안도 알아봐야 하고, 다시 던전에 들어갈 준비도 해야 하고요. 아. 이렇게말하니까 꽤 바쁘겠네요. 그쵸?”
“셰이….”
일루미나와 아르는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일단 당사자들끼리의 일을 잘 모르기도했거니와 섣부른 위로는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르는 풀이 죽었다. 처음 보는 수녀에게서 엄마의 느낌이 나 무심코 위로받아버렸는데, 그래서 임신한 줄 모르고 있을까봐, 몸조심하라는 차원에서 알려준건데….
“에이 참!”
“일루미나?”
“사정을 다 아는 건 아니지만 이럴 땐 술이 최고지. 다들 이상한 생각, 이상한 짓 하지 말고 여기 꼼짝 말고 기다리고 있어! 내가 기막힌 술이랑 안주 싸들고 올 테니까!”
축 처진 동료들을 보다 못한 일루미나가 벌떡 일어나더니 성큼성큼 방을 나갔다가, 10초도 안 돼서 돌아왔다.
“일루미나…?”
“금화 좀… 하하.”
“….”
**
여관에서 수도원은 그리 먼 거리가 아닌데 왜 이렇게 멀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세스티아랑 여관으로 아주 천천히 걸어올땐 시간이 금방 갔는데, 존나게 뛰어가고 있는 지금은 한없이 느리게 흘러갔다. 시간은 상대적이라는 세스티아의 말을 이렇게 빨리 체감하게 될 줄이야.
“용사님? 어쩐 일로 다시 오셨어요?”
“헉, 허억, 세, 세스티아는 안에 있죠?”
“…수녀장님께선 이제부터 많이 바쁠 거라고 손님 방문은 당분간 미뤄달라고 말씀하셨어요. 여기 계시는 건 자유지만수녀장님을 뵙게 해드리진 못할 것같아요.”
“꼭, 꼭 할 말이 있습니다. 부탁합니다. 부탁할게요.”
“그런 거라면 제가 수녀장님께 전달해드릴게요, 용사님.”
“아뇨! 꼭 제가 직접 전해야만 하는 겁니다. 아주 중요하면서도 위급한 일입니다!”
불과 한 시간 전에 봤던 수녀는 한숨을 쉬었다. 이 수녀랑 친한 건 아니었지만 몇 번 오다가다하며 면식이 있었고, 나는 그 얄팍한 면식에 매달렸다. 부디 라엘라님의 자애가 빛나길 바라면서.
수녀는 다시 한 번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녀장님껜 나중에 죄송하다고 말씀드려야겠네요.”
“고맙습니다!”
“가세요. 용사님.”
“정말 고맙습니다!”
저 수녀가 내 변명을 믿어준 것 같진 않았지만 어쨌든 빚을 졌다. 나중에 다시 만나면 뭐라도 쥐여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세스티아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씨발 뭐라고 하지?’
다급히 뛰어온 건좋은데 이 다음이 문제였다. 세스티아의 임신 소식을 들은 이후부터 뭔가 맛이 간 것 같았다. 이미 나한테 엄청 실망한 건 아닌가 싶어서겁이 나다가도 다시 한번 그녀와 이야기하고 싶었다. 내 빌어먹을 친모와는 극과 극 수준으로 다른 모성애를 벌써부터 보이고 있는 그녀와 말이다.
똑똑-
내 손은 제멋대로 문을 두드렸고, 들어오시라는 목소리가 들린 게 아니라 문이 열렸다.
세스티아가 서있었다.
“오지 않으셨으면 했지만, 막상 와주시니까 기쁜 거 있죠.”
“세스티아.”
“들어오세요.”
우린 한 시간 전에 앉았던 자리 그대로 앉았다. 하지만 분위기는 달랐다. 세스티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까와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 미소의 의미를 파악한 나는 웃기 힘들었다.
- 당신과 수도원에서부터 여기까지 함께했던 한 시간은 그 어느 때보다도 농밀한 시간이었어요. 후후. 마치 행복이 두 배가 된 기분이에요.
세스티아의 미소를 보니 이 말이 떠올랐다.특히 맨 마지막 말, 행복이 두 배가 된 기분이에요라는 말이 가슴에 박혔다.
그냥 나와 함께 있는 거 자체가 그만큼 기쁘다는 말인 줄 알았는데… 내게 ‘걸림돌’이 될까 임신 사실을 밝히지 않으려 한 그녀 입장에서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이었던 것이다.
카야의 말이 백 번 옳았다.
세스티아라 해서 나랑 떨어지는 게 좋을 리가 없었다. 자기 딸에게 아비 없는 삶을 주는 게 좋을 리가 없던 것이다.
“세스티아.”
“헨드릭님. 괜찮아요.”
“…어?”
“그리고 여관에서 했던 말들도 전부 사실이구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에요. 헨드릭님도 제가 한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아시잖아요?”
“알아. 알지. 근데 안 괜찮아.”
“네?”
“네 아이면, 내 아이기도 한데. 어떻게 괜찮아?”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아서 말 안 하려고 했던 거예요. 신경 쓰실까봐. 걱정하실까봐. 헨드릭님은 착하고 다정하시니까요.”
“착하고 다정하긴 개뿔이! 내가? 난 쓰레기야!”
“헨드릭님.”
“내가 진짜로 착하고 다정했으면, 여자를 이렇게 여럿 두지도 않고 너 하나만을 신경 썼겠지. 임신 사실은 네가 알리지 않았으니 몰랐다 쳐도, 네가 밝혔을 때 즉각 네게 다가가서 몸은 괜찮냐고, 기분은 어떠냐고 물어봤겠지. 아이도 뱄는데 무리하지 말라거나 향후 계획을 같이 세우거나 물어봤겠지. 근데 난, 그 중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왜? 그때 내가 무슨 생각했는 줄 알아?”
“헨드릭님.”
“씨발 좆됐다! 아무리 세스티아가 던전에 안 간다지만 임신이라니?”
“헨드릭님!”
“카야랑 셰이는 어떻게 달래지? 서로 싸우면 어쩌지? 나랑 사이가 멀어지면 어쩌지? 휴, 이렇게 넘어가서 다행이다. 생각보다 쉽게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헨드릭!”
“내가 여기 온 것도, 우물쭈물하다가 카야가 얼른 가보라고 해서간 거야. 네 유혹에 못 이긴 척하고 같이 즐겨놓고서는, 쓰레기 같은 책임 없는 쾌락으로 널 다시 고통스럽게 했….”
짜악-!
시야가 변했다. 고개가 휙 돌아가있었다. 뒤늦게 뺨에서 열기가 확 올라왔다.
세스티아의 손바닥이 빨개져있었다.
“내 말 좀 들어요, 헨드릭!”
“세스티아…?”
“아까부터 무슨 말씀을 다다다 내뱉는 거예요? 전 그런 쓰레기하고 몸을 섞을 정도로 헤픈 여자가 아니에요. 아니면뭔가요. 헨드릭 당신은 스스로가 제2의강간범이 되고 싶은 거예요?”
“아니, 그건 아니지!”
“전 당신의 아이를 가졌다는 것 자체가 너무 행복해요. 당신을 닮은 아이를 몇 달 후에 낳을 수 있다는 게 너무 행복해요. 딸아이의 빈자리를 다시 채울 수 있다는 게 너무 행복해요. 설령 당신과 24시간 365일 함께할 수 없다 할지라도, 당신의 피와 사랑을 물려받은 아이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헨드릭, 당신은 저와 아이보다 훨씬 중요한 걸 하고 있잖아요. 우선순위를 착각하지 마세요. 사적으로도 그래요. 저보다는 자매님들이 더 우선이잖아요?”
“그렇지만 아이를 가진 건…!”
짜악-!
“아이가 소중한 건 맞지만 그렇다고 아이를 기준으로 두지 마세요! 아 정말! 늑대인간은 어떻게 알아챈 걸까요, 골치 아프게….”
양 뺨이 얼얼하다. 세스티아가 팔짱을 끼며 한숨을 쉬다 내 뺨을 쓰다듬었다.
“정 그렇다면 이렇게 해요.”
“뭘?”
“약속하는 거예요.”
“할게.무조건 약속할게.”
“들어보지도 않고 그러냐고 뭐라고 하고 싶지만… 그래요. 반드시 무사히 돌아오겠다고 약속해주세요. 모든 걸 잘 끝내면, 그때 저와아이를 보러 와주세요. 나중에 태어날 제 아이에게, 당신이 골라준 이름을 불러주세요. 그렇게 약속해요.”
“….”
“그 대신, 그 약속을이루기 전까지 저에 대해 신경을 끄시구요.”
“….”
“대답하세요.”
“…알았어.”
“뭐라구요?”
“알았어! 약속할게!”
“제가 뭐라고 했죠?”
“모든 걸 끝나고 무사히 돌아와서 너랑 아이를 보러 가겠다고!”
“그거예요. 잘했어요.”
세스티아가 내 볼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약속은 지금부터예요. 헨드릭님.”
“…세스티아?”
“돌아가주세요.”
“세스티아!”
세스티아는 말없이 검지로 문을 가리켰다. 소리 없는 그녀의 입모양은 ‘약속’을 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