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화 〉친구(4)
당장이라도 우리 일행이 머물고 있던 여관으로 달려갈 것 같았던 세스티아의 움직임은 생각보다 느렸다. 정확히는 수도원을 빠져나갈 때까지만 빨랐고, 빠져나간 후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느긋하게 걸었다. 오히려 평소보다 더 느리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세스티아?”
“나오고 나서 생각해보니까 여관까지는 그리 멀지 않은 거 있죠? 어디로 도망갈 것도 아니잖아요. 그렇죠?”
“그…렇지?”
“한 달 넘게 못 봤는데, 천천히 걸어도 되잖아요. 그렇죠?”
“그렇지…?”
“여관에 도착하고 나면 헨드릭님이랑 따로 이야기는 못할 거 같은데, 지금 천천히 걸어가면서 해도 되는 거겠죠. 그렇죠?”
“그, 그렇지.”
데자뷰가 느껴졌다. 싱긋 웃는 세스티아의 말은 거부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결국 그녀는 내 옆에 딱 달라붙었다. 보는 눈들이 없었다면 왠지 팔짱을 꼈을 것 같았다.
“갔다온 일에 대해서 좀 더 말해주세요. 궁금하거든요.”
“총 기간 중 9할 9푼은 마차랑 텐트에 있었고 나머지도 그리 즐거운 얘기는 아니라 딱히 말해줄 게 없는데?”
“그런가요? 그래도요.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까요. 뭐라도 이야기 해주세요, 헨드릭님.”
“으음….”
카야의 사정을 이야기하는 건 아닌 것 같아서 그걸 빼니 진짜로이야기할 만한 게 없었다. 좆같았던 카야의 고향이나 라엘라님이 잠시 신력을 사용해 도적들을 침묵시켜버린 일을 포함해서 말이다. 결국 내가 세스티아에게 말해준 건 정말 아무래도 좋은 잡담들밖에 없었다.
“와아….”
“정말요? 그래서요? 어떻게 됐는데요?”
“궁금해요. 신경 쓰이는데요?”
그러나 세스티아는 내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풍부한 리액션을 보여주었다. 순간 오버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지만 그녀는 그럴성품이 아니었다. 정말로 즐거워하고 있었다. 맨 처음에 평소 이상의 함박웃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뭔가 즐거운 일이 있던 차에 나랑 오랜만에 만나서 더 즐거운가보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다보니 시간은 금세 흘렀고 곧 여관에 도착했다. 나는 작은 아쉬움을 느끼는 스스로에게 놀랐다.
“시간은 많지만 결코 무한하지 않고, 언제나 똑같이 흐르지만 그렇다고 모든 순간이 같은 밀도를 지니고 있지 않아요. 제겐 지난 한 달은 한없이 길게 느껴졌으면서도 딱히 남아있는 게 없지만, 당신과 수도원에서부터 여기까지 함께했던 한 시간은 그 어느 때보다도 농밀한 시간이었어요.후후.마치 행복이 두 배가 된 기분이에요.”
“어, 어어. 그렇다면 다행이고.”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아챘는지 세스티아가 다소 낯간지러운 말을 했다.
‘훅 치고 들어오네.’
나는 부끄러워서 괜히 방문을 만지작거렸다. 날 향한 깊은 호감이 대놓고 느껴졌다. 구름에 두둥실 뜨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똑똑-
‘아. 아직도 자고 있었네…?’
당황스러웠다. 동료들이 곤히 자고 있다는 걸 뒤늦게야 깨달았다. 특히 셰이와 일루미나는 밤늦게까지 빈민가를 수색했고 아르는 말할 것도 없었다. 생각해보니 쪽지를 두고 나온 지 한 시간 정도밖에안 지나지 않았나.
“저, 어제 일 때문에 아직 못 일어난 거 같은데.”
“어머. 이럴 줄 알았으면 아예 제 집무실에서 더 있다 올 걸 그랬어요.”
세스티아는 아쉽다는 듯 얘기했다. 허나 말과는 다르게 진짜로 아쉬운 것 같진 않았다. 나와의 만남이 만족스러운 것 같았다.
‘음, 그건 너무 자뻑인가.’
어쨌든 나는 다시 문을 닫고 나가려 했는데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헨드릭…?”
아르였다.
그녀는 눈을 부비적거리며 일어나려다 셰이에게 꽉 안겨있다는 걸 깨닫고는 끙끙대며 셰이의 팔다리를 풀어냈다. 장장 30초 간의 사투 끝에서야 셰이의 마수에서 벗어난 아르는 비틀거리며 다가오다가 그제서야 내 옆에 세스티아가 있는 걸 발견했다.
피곤함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눈을 깜빡깜빡하며 세스티아를 쳐다보는 게 멍청해보이면서도 귀여우면서도 조마조마했다. 고갤 돌렸다. 세스티아도 아르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말한 적 없는데.’
아르를 어떻게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에 너무 서둘렀던 것 같다. 세스티아의 태도를 봐선 내가 뭐 어떻게 한다고 해도 결국 아르를 직접 알아봤을 거긴 하지만, 그래도 아르 입장에선 마른 하늘에 날벼락일 수 있었다.
카야 때와는 다르게 아르가 돌발행동은 안하고 있었지만 또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티내지 않게 몸에힘을 주었다. 언제든 둘 사이로 끼어들 수 있게 위치를 옮겼다.
‘눈싸움하는 것도 아니고, 대체 언제까지?’
세스티아와 아르의 대치…라고 하기엔 그렇고 그런 상황이 3분 넘게 지속됐다. 이 이상 오래 가는 건 안 좋을 거 같아 끼어들기로 했다. 하지만 그 직전, 세스티아가 움직였다.
“많이 힘들었겠군요.”
“….”
“잠시, 안아봐도 될까요?”
“….”
아르는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세스티아가 아르에게 다가가 그대로 꼭 안아주었다. 그녀는 왼손으로 아르의 머리를, 오른손으로 등을 토닥여주었다. 아르는 반항 하나 없이 그대로 서 있었다. 아니, 오히려 살짝 파고들기까지 했다.
‘아니, 아르가?’
다른 의미에서 당황스러웠다. 초면에 스킨십을 좋아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냐만, 아르는 우리 중에서도 가장 경계심이 강했었다. 감도 좋은 녀석이니 세스티아가 범상치않은 사람이라는 것도 첫 대면에서 바로 깨달았을 것이고. 심지어 세스티아는 걸어다니는 신성력 덩어리나 마찬가지인 수준이라 몸이 거부하는 게 장난 아닐 텐데….
“가여운 사람.”
“….”
“헨드릭님의 말을 믿고 안 믿고를 떠나, 역시 사람을 판별하는데는 직접 보는 게 제일 정확해요. 그런 의미에서 당신은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어요. 남을 해한 적 없다는 걸. 해하고 싶지도 않아서 본인의 양심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았다는 걸.”
“…당신은 누구야?”
“저는 라엘라님을 따르는 어리석은 딸이자 한때 헨드릭님과 함께 공포에 맞선 적 있는, 관용의 길을 걷고 있는 세스티아라고 해요. 당신은요?”
“…아르.”
이 무슨 예상을 벗어나고 또 벗어나고 또 벗어나는 전개란 말인가.
‘몰래카메라야?그런 거야?’
아 물론 트러블이 발생하는 것보다야 사이좋게 끝나는 게 베스트이긴 한데.
‘그럼 이대로 세스티아가 모른 척 넘어가고 아르가 안전하게 머무를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면 되는 건가.’
속으로 다음 계획을 짜고 있을 때, 아르가 세스티아의 품에서 빠져나오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당신이야말로 힘들지 않아?”
“네?”
“몸, 바뀐 거 같은데.”
“…네?”
“혼자가 아니잖아.”
“아르, 그게 무슨 말이야?”
“헨드릭님!”
“이 여자, 임신한 거 같은데. 심장 박동이 두 개가 느껴졌어.”
“……지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세스티아 자매님?”
“아아……….”
“…말하면 안 되는 거였어?”
아르 때문에 깼는지 어느새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셰이, 그리고 언제 돌아왔는지 우리 등 뒤에 가만히 서 있던 카야. 들키고 싶지 않은 걸 들켜버린 사람의 전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는 세스티아. 갑자기 싸해진 분위기에 움츠러든 아르와 이와중에도 쿨쿨 자고 있는 일루미나까지.
아무리 오늘 일진이 예상에 예상에 예상을 뛰어넘는다지만, 이건 또 무슨 대형 사건이지?
임신?
세스티아가 임신이라고?
정신이혼미해졌다.
**
세스티아의 아르 검증은 졸지에 세스티아의 임신 청문회로 바뀌었다. 아르에겐 정말 미안하지만, 일행의 관심사는 그녀에게서 세스티아에게로 쏠려있었다.
“아르가 한 말이 사실입니까, 세스티아 자매님?”
“그….”
“언제예요? 얼마나 된 거죠?”
“그러니까….”
“으음~ 라엘라 교단은 임신하면 안 되는 교리라도 있어?”
“딱히 결혼과 임신을 금하는 교리는 없어요.”
“근데 왜 이렇게, 뭔가, 따지고 드는 것 같은 분위기가….”
“일루미나.”
“응?”
뒤늦게 일어나서 꿀잠 잤다고 헤실거리던 일루미나는 갑작스레 싸해진 분위기에 의문을 제기했지만, 난 가만히 닥치고 있으라는 뜻에서 일루미나의 꼬리를 두드렸다. 그러자 금세 눈치 챈 일루미나가 내게 눈을 흘기더니 헛기침을 하며 구석으로 가 베이파를 손질하는 척했다.
‘시발, 나도 찌그러지고 싶다.’
임신.
아르 때문에 폭로 당한 세스티아는 계속 말을 머뭇거리고는 있었지만, 부정 자체는 안 했다는 게 문제였다.
거짓말은 못 하겠고, 그렇다고 내 연인들 앞에서 긍정하긴 그렇고.
하다못해 그녀가 수녀가 아니라 일반 사람이었으면, 여자 용사였으면 내 동료들이 이런 분위기를 조성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의심이야 할 수도 있겠지만 누구랑 섹스하든 누구 애를 임신하든 알 바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세스티아처럼 신실한 수녀가 임신했다?
배는 그대로라서 육안으로 봤을 땐 전혀 눈치챌 수 없었지만, 시기상으로 볼 때 저 뱃속에 들어있는 아이가 내 아이라는 건 빼박이었다. 그걸 부정하려면 세스티아가 몸을 함부로 굴리는 여자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즉, 이미 카야와 셰이는 답을 확정하고 세스티아를 추궁하고 있는 것에 가까웠다.
어서 긍정하라고 말이다.
“……세스티아 자매님. 왜 말씀을 머뭇거리십니까? 혹여 제 질문이 무례한 것이었습니까?”
“맞아요. 했으면 했다고 말하는 거 뿐이잖아요?”
고개를 푹 숙이고 한참을 침묵하던 세스티아가 마침내 고갤 들었다. 순간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쓴웃음을 지었다.
“이래서 밝히고 싶지 않았던 건데….”
“…미안.”
“괜찮아요. 으음, 이 또한 운명일지도 모르겠어요. 맞아요.”
아르의 사과를 받아들인 세스티아가 양손을 배에 얹으며 미소지었다.
“임신했어요. 헨드릭님의 아이를요.”
“……….”
“……….”
“우연과 행운과 제 욕심과 기적이 겹친 산물이에요. 결코 자매님들을 업신여기고 기만할생각은 없었어요. 원래라면 배가 부르기 전에 수녀장 자리를 내려놓고 세일럼을 떠날 생각이었거든요.”
“예?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수녀장 자리를 내려놓으시겠다니?”
“뭐라고?! 세일럼을 떠나?”
“공식적인 연인도 없는데 임신한 수녀장… 아무리 우리 교단이 사랑에 너그러운 편이라 해도 교단 체면이 필시 깎일 거니까요. 거기에 제가 임신했다는 걸 알면, 헨드릭님은 부담감이나 책임감 느끼실 수도 있고 자매님들에게도 죄송한 마음이 들어서 조용히 사라지려 했었거든요.”
막상 세스티아가 덤덤하게 사실을 인정하고 심지어 수녀장 자리를 내려놓고 세일럼을떠나려했다는 말에 우린 할 말을 잃었다.
“이렇게 밝혀졌으니 말할게요. 이 아이가 태어난다고 해서 으스댈 생각은 없어요. 헨드릭님에게 족쇄를 채울 생각도 없어요. 그저 이름만 주고 나머진 못 준 첫 번째 아이와는 다르게 온전히 어머니로서의 사랑을 주면서 키우고 싶어요.”
“그건 아이에게도, 세스티아 자매님에게도 잔인한 일 아닙니까? 아비 되는 자가 죽었으면 모를까… 눈앞에 멀쩡히 살아있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의 걸림돌이 되긴 싫으니까요. 저와 아이의 존재 자체가 여러분들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고 집중력을 흩트릴 수도 있어요. 특히 그 누구보다 고된 길을 걸어가는 여러분들에게, 그건 치명적인 비수가 될 수 있죠. 이미 자매님들의 마음에 상처를 입혔는데, 이 이상 욕심을 부릴 순 없어요. 아까 말씀드렸던 현실적인 문제도 있구요.”
나랑 단둘이 있을 때와는 다른 웃음을 지은 세스티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적어도 제가 수녀장으로 있는 동안은 아르, 당신을 조사하는 수녀는 없을 거예요. 몇 달 안 될 테지만, 그 전에 다른 방도를 찾아두시는게 좋을 거예요. 그리고 카야 자매님, 셰이 성전사님. 다시 한번 죄송해요.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이만 돌아가볼게요.”
끼이익-
방 안에 침묵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