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8화 〉친구(3)
“엄마아아!”
“아르야.”
“우웅?”
“우리 귀여운 아르.”
“헤헤.”
아르는 엄마에게폭 안겼다. 이렇게안겨 배에 얼굴을 묻으면 세상에서 제일 아늑하고 기분이좋았다. 이렇게 하면 엄마는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이러면 기분 좋음이 두 배, 아니 세 배였다. 아르는 엄마 품이 세상에서 제일 좋았다.
“아르야.우리 아르.”
“왜애?”
“우리 아르는 만약에 엄마가 없으면 어떨 것 같아?”
“웅? 엄마는 여기 이짜나!”
“그러니까 만약에 말이야.”
“우웅… 얼마나아?”
“으음~ 백 밤? 백 밤 동안 엄마가 없으면 어떨 것 같아?”
“백 밤이나아? 왜애?”
“어떨 것 같아? 응?”
“엄마아… 어디 멀리 가는 거야? 으으….”
“아르, 뚝! 엄마 어디 안 가요.”
“흐윽, 흥, 정말이야아?”
“그러엄! 그냥 우리 귀여운 아르가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해서 그런 거야.우리 아르, 귀여운 아르가 아니라 울보 아르였네?”
“나 울보 아냐! 아, 안 울었어!”
“후후.”
“정말이야!”
“그래그래.”
아르는 다시 엄마 품에 안겼다. 엄마가 백 밤이 지날 동안 없다는 건 상상이 안 되는 일이었다.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너무 무서워서 눈물이 찔끔 나오긴 했지만 울보 소리는 싫었다. 엄마가 웃을 땐 원래 아르도 따라 웃었는데, 이상하게 지금은 눈물이 핑 돌았다. 그녀는 절대 떨어지기 싫다는 듯, 백 밤은커녕 하룻밤도 떨어질 수 없다는 듯 엄마에게 달라붙었다.
엄마는 그런 아르를 더 꼭 안아주며 속삭였다.
“아르야.”
“시러. 백밤 떨어진다는 거 시러.”
“아냐 그런 거.”
“그러엄?”
지금 말해주기엔 지나치게 빠른 것 같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중얼거린 엄마가 아르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지금부터 평생 아르만 기억해야 할 말을 하나 알려줄거야.”
“우웅?”
“그게 뭐냐면….”
**
“…….”
아르는 눈을 떴다. 주위는 깜깜했고 몸을 뒤척이니 스르륵 이불이 비벼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불… 아.’
차갑고 딱딱한 바닥이 아니라 따뜻하고 부드러운 침대에 누워있다는 걸 깨달은 아르가 기억을 더듬었다. 며칠에 걸친 억울한 도망, 절박한 심정에서 요청한 도움, 포기와 오기 사이를 저울질하고 있던 심정,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던 몸 상태까지….
위기의 순간 헨드릭이 나타난 건 꿈이 아니었다. 안겨서 여관까지 온것, 오자마자 거지처럼 배를 채우고 부끄러워하던 차에 돌아온 카야와 욕실에 들어가서 한바탕 물난리가 났던 일, 그동안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와 깜빡 잠이 들었는데 뒤늦게 귀환한 셰이가 껴안아서 화들짝 놀랐던 일, 유도한 일이긴 했지만 제 금화 주머니를 노렸던 괘씸한 음유시인이 어정쩡한 미소로 환영해서 그녀도 애매한 미소를 지었던 일,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너무나 억울하고 억울했는지 그동안 겪었던일들을 하소연한 일까지.
특히 마지막엔 어째선지 헨드릭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고, 그녀는 거부하기는커녕 기분 좋게 그에게 몸을 의지한 기억까지 떠오르자 이불을 발로 찰뻔했다.
곧바로 이성을 되찾아서가 아니었다.
잠들기 전에 있었던 일들의 기억이 아닌, 방금 전까지 꿨던 꿈 때문이었다.
‘난 엄마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는데, 어째서 이렇게 선명한꿈을 꾸게 된 걸까?’
엄마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는 것이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이름하고 얼굴 정도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얼굴은 좀 가물가물하긴 하지만… 물론 나쁘다는 게 아니었다. 너무 좋았다. 좋아서 어렸을 때의 그녀처럼 눈물이 날 뻔했다. 하지만 진짜로 울고 싶은 건, 꿈속에서 봤던 일들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는점이었다.
꿈을 되뇌고 있는 이 순간조차도 내용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아름답고 다정한 엄마의 모습이 빗방울에 글씨가 뭉개지듯 흐려지는 건 너무나 괴로운 일이었다.오랜 세월 타지에서 홀로 힘겨운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그녀의 입장에선 더욱 더 그러했다.
꿈에서 깨기 직전, 엄마가 얘기하려던 ‘평생 아르만 기억해야 할 말’이 뭔지 궁금하긴 했으나….
“흐음, 흐음냐, 음, 쩝쩝쩝, 대장님 바보….”
“윽.”
“헤헤….”
아르의 상념이 끊겼다. 바로 옆에서 자고 있던 셰이가 몸을 뒤척이면서다리를 아르의 몸통에 턱 올리고는 꽉 조인 것이다. 단순 근력으로만 따지면 일행중 최강인 셰이의 허벅지 조이기는 잠결이라도 무시할 게 못됐지만, 아르는 굳이 밀어내지 않았다. 셰이를 깨울까봐 그런 것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꽉 끌어안긴 이 느낌이 싫지 않았다.
‘이게 다 꿈 때문이야….’
셰이는 엄마랑은 하나도 닮지 않았는데.
아르는 그녀를 반겨주었던 일행들의 표정을 떠올리며 다시 잠을 청했다.
셰이의 품은, 엄마만큼은 아니었지만… 굉장히 아늑했다.
**
아침이 되었다. 상반신만 일으켜 옆 침대를 보니 셰이랑 일루미나, 그리고 아르는 여전히 누워있었다.
‘카야는 벌써 일어났나?’
나랑 같은 침대에서 잤던 카야의 자리만 비어있었다. 온몸이 찌푸둥한 게 체감상 여섯 시간도 못 잔 것 같은데, 정신은 멀쩡했다.
‘도로 자기는 글렀고… 아르 문제나 어떻게든 해야겠네.’
새삼 하루살이들이 무서워진 건 아니었다. 그쪽이랑은 마주칠 일도 잘 없었다. 하지만 수녀 쪽도 아니었다. 지금 당장은 괜찮겠지만 우리가 계속 세일럼에만 머무를 수는 없었다. 구해놓고 우리만 다시 던전으로 향한다면 아르는 이전과 똑같은, 아니 더 험난한 삶을 살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어쩌면 더 이상 세일럼에서 사는 걸 포기할 수도 있을 거고.
아르가 그걸 원한다면 모르겠지만, 글쎄? 그녀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러니 이렇게 아득바득 버텨온 것일 테고.
금화 수십 개면 엄청 풍족하게는 아니더라도 이전까지의 삶보단 훨씬 잘 살 수 있었을 텐데, 자립심 때문인지 내가 준 돈이 너무 과하다고 생각한 건지….
한때나마 함께했던 동료로서, 또 그 꼴은 볼 수 없었다.
「잠시 라엘라님 수도원에 들렀다 올게. 밥 먹을 때까지 나 안 오면 먼저 해결들 하고 있어. 헨드릭.」
간단하게 세수를 한 다음 여관을 나섰다. 물론 2구역 비밀방에서 격하게 얻은 교훈을 잊지 않고 쪽지를 남기고 왔다. 카야가 안 보이는 게 조금 신경 쓰이긴 했지만 그녀가 세일럼 내에서 갈 곳이라곤 뻔했고, 그마저도 미리 언질을 주지 않은 경우엔 오래 자리를 비우지 않으니 불안하지는 않았다.
‘완전 아침은 아니네.’
이제보니잠을 조금 잔 게 아니라 어제 사건 때문에 몸이 더 피곤한 거였다. 어제 한 소녀의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질 뻔했음에도 불구하고 날씨는 빌어먹게 화창했다. 무심코 중지를 들려다 라엘라님과 유스티티아님이 떠올라 주먹을 말아쥐었다.
“무슨 용무로 오셨어요?”
“수녀장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아, 네. 수녀장실에 계세요.”
“감사합니다. 따스한 자애와 냉철한 관용을.”
“따스한 자애와 냉철한 관용을.”
라엘라님 수도원이 원래부터 개방적이긴 했지만 그걸 감안해도 나는 거의 프리패스 수준이었다. 업적을 세우기도 했고 또 그동안 자주 들락날락하기도 했거니와 세스티아가 별도의언질은 준 모양이었다. 덕분에 보통 사람이라면 곧장 만나기 힘든 수녀장을 언제나 다이렉트로 찾아갈 수 있었다.
“어머, 어서오세요. 헨드릭님. 이런 오전에 다 오시고, 어쩐 일이세요?”
“꼭 어쩐 일이 있어서 와야 돼?”
“그런 건 아니지만, 아니 꼭 그러셨으면 좋겠지만 지금껏 용건이 있으셔서 오셨잖아요 전부? 아닌가요?”
“…크흠, 잘 지냈지? 별 일 없었고?”
“후후. 그럼요.”
오랜만에 보는세스티아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무슨 좋은일이라도 있어?”
“하루하루가 즐거워서 웃고 있어요. 혹시 이상한가요?”
“아니, 뭐. 그냥.”
그녀가 원래 잘 웃는 편이기도 하고 웃는 게 나쁜 건 아니니 이상하고 말고 할 건 없었다.
“세스티아.”
“네, 헨드릭님. 말씀하세요.”
“그, 혹시 어제 보고 올라온 거 있어?”
“아아.”
세스티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집무 책상 밑 서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혹시 어제 빈민가에서 벌어졌던 추격전과 관련된 내용 말씀하시는 건가요?”
“어. 혹시 카야도 언급되지 않았어?”
“맞아요.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어요. 아무래도 헨드릭님과 관련이 있다 보니 더 신중하게다뤄야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어떻게 된 건지 혹시 직접 들려주실 수 있으세요?”
“물론이지.”
세스티아에게 전후사정을 설명해주었다. 겉으로 보면 능력 좋은 소녀가 다수의 하이에나들에게 간이고 골수고 다 빨아먹힐 뻔한 걸 구출해줬다는 영화 같은 이야기였다.
그녀의 종족이 늑대인간이라는 것만 빼면.
“분명 보고서를 올린 자매님은 한용사의 부상 부위에서 꺼림칙한 기운이 느껴져서 추적을 개시했다고 적혀있었어요. 처음엔 엄청 집중해서 살펴야 겨우 알아차릴 정도였지만 추적을 진행할수록 기운이 조금씩 더 선명해졌다고도 하고요. 같은 인간이나 웬만한 이종족에게서 부상을 당했다고 해서 ‘꺼림칙하다’라는 표현은 쓰지 않아요. 그럴 땐 십중팔구 이단, 혹은 괴물의 기운을 마주쳤을 때의 감각일 거구요.”
“그래?”
“네. 그리고 수색이 거의 완료되기직전, 카야 자매님이 나타나셔서 대화를 나누셨고 그 사이에 그 기운이 갑자기 증발하기라도 한 듯 사라졌다… 이렇게 적혀있네요.”
세스티아가 종이를 내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내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맞아. 자진납세하러 온 거야. 좀 봐주면십사 해서.”
“자진납세요?”
“네가 지금 하고 있는 예상대로 그 기운의 소유자는 우리가, 정확히는 내가 빼돌렸어.”
“네?”
“늑대인간 혼혈이야. HAT에 몸담았던 동료이자, 우리들의친구지.”
“네……?”
“이단도,괴물도 아니야. 사람을 먹은 적도 없고 오히려 피를 무서워하는 별난 애야.”
세스티아가 놀라는 표정은 볼만했다.
“10할 연관이 있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늑대인간이라는 건 솔직히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
“음. 불쌍한 아이야. 남에게 해를 끼치기는커녕 동료의 호의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고 저 혼자 고통받으면서 살 정도로 착해빠졌어. 종족이 종족이다보니 제대로 용사 등록은 못하고 의뢰로 전전하고 있지만, 실력도 좋은 친구야.”
“헨드릭님.”
“가족도 없고 우릴 제외하면 인맥이라 할 것도 전무한 녀석이야. 걔가 원하는 건 그냥 한 사람으로 서 평범하게 살아갈 권리 정도야.”
“아무리 그래도, 좀 많이 당황스럽네요….”
역지사지로 생각해도 그랬다. 그래도 마음속에 찝찝함을 남겨두지 않기 위해선, 아르 녀석이 조금이라도 평범하게 살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었다.
“나도 염치가 있지 교단한테 늑대인간을 보호해달라, 뒤를 봐달라 소릴 하는건 아냐. 그냥 모른 척만해줘. 그러면 돼.”
“이미 그 자매님도, 저도 알아버렸는데요?”
“그러니까 모른 ‘척’ 해달라는 거지. 만약 내가 말하지 않아서 네가 조사하다가 진상에 도달하는 것보단, 지금 말하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했어. 네 입장에선곤란한 말인 건 알지만… 미안. 부탁할게.”
“하아, 어쩌면 좋을까요. 헨드릭님을 믿지만, 헨드릭님이 좋은 사람이라는말도 믿지만… 그래도 늑대인간은….”
세스티아는 이마를 짚었다. 다른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폈다 하는 걸 보니 맨 처음 카야처럼 거부감이 큰 것 같았다. 역시 셰이가 특이 케이스였다.
“후우… 아무리 헨드릭님 부탁이라 하셔도 이건 무조건 덮어놓을 수는 없는 문제예요.”
“세스티아.”
“제가 직접 보고 판단하겠어요. 그늑대인간 혼혈이라는 자를.”
“어, 어? 지금?”
“네. 시급히 처리해야 하는 문제니까요.”
어느새 일어난 세스티아가 방문을 잡으며 날 뒤돌아봤다.
“안 오고 뭐하세요?”
“끄응… 알았어.”
이건 예상 못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