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화 〉친구(2)
빈민가를 뒤진다는 건 극단적으로 말해서 커다란 쓰레기통을 뒤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포함해 모조리 쓰레기라고 표현하는 게 좀 과격하긴하지만, 그곳의 치안과 위생 상태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해보면 그렇게 틀린 말도 아니었다.
아무리 조를 두 개로 나눴다고는 하지만 두 명이서 도시의 쓰레기통, 그 중 반절을 뒤진다는 건 막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라지….’
실제로 걷는 거라면 천릿길은커녕 십 리도 걷기 싫었지만, 특별한 방법이 없는 이상 별 수 있나. 1초라도 더 부지런히 움직이는 수밖에.
그렇다고 무식하게 처음부터 들쑤시진 않았다. 아르의 집도 저리 박살난 거 봐서, 빈민가도 분명 우리보다 먼저 난리가 난 곳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뭣 좀 물읍시다.”
“앙? 갑자기 뭔 개-”
띵-
“-처럼 답하겠습니다!”
“오늘 혹은 어제, 혹은 그저께까지. 한바탕 쫓고 쫓기는 난리에 대해서 아는 거 있으면 전부. 유용한 정보 있으면 방금 거 하나 더.”
“제가 그저께 저쪽에서 겪은 일인데….”
그 생각은 적중했다. 탐욕스러운 도시 세일럼에서 낯선 사람은 믿기 힘들지만, 돈의 위력은 믿을 수 있었다. 하루살이 혹은 빈민가 사람들은 영롱한 금화의 자태에 온갖 정보를 술술 쏟아냈다. 너무 쓸데없는 말까지 부풀려 말하려고 해서 오히려 걸러들어야 할 정도였다.
그렇게 징검다리처럼 흔적을 쫓아가다보니 곳곳에 난장판이 있었다. 물론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 빈민가다보니 전부 연관되어있는 건 아니었지만, 수색해야 할 후보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었고 한 번 탄력이 붙자 나중엔 우리만의 힘으로 흔적을 쫓아갈 수 있게 되었다.
셰이, 일루미나와 흩어진 지 약 세 시간.
나랑 카야는 아르가 숨어있을 거라 생각한 곳에서 약 500m 정도 떨어진 장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 이상 접근하면 들킬 것 같은데. 그치.”
“예. 게다가 저희는 최대한 빨리 아르를 찾기 위해 행동을 대놓고 드러냈습니다. 소문이 퍼지는 속도를 생각하면 시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저쪽에 라엘라님을 따르는 수녀가 있다고 했어. 그 때문에 아르가 더 곤란해지게 된거고.”
“무슨 말씀인지 이해했습니다.”
“물론 그 수녀를 비난하는 게 아냐. 그 수녀는 통상적인 신념을 발휘한 것뿐이고, 아르를 잘 모르니까.”
“알고 있습니다. 추격자들은 제게 맡겨주십시오.”
“…고마워.”
우리와 접촉하기 전에도 안 들키고 잘 살아갔던 아르가 갑자기 이런 추격전에 휘말린 건 한 수녀 때문이고, 그것도 같은 교단의 수녀라면 카야에게 다짜고짜무기를 들이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여러 증언자들의 증언을 교차검증한 것에 따르면, 추적자들은 널리 퍼져있긴 하지만 방향과 거리를 결정하는 건 수녀가 포함되어있는 일행이라 했으니 카야가 그 수녀를 붙들고 있으면 어떻게든 시간이 날 거라 판단했다.
“최대한 길게, 하지만 안전하게. 알지? 시간 지나면 결과가 어찌되든 그냥 여관으로 돌아와.”
“걱정 마십시오. 나중에 뵙겠습니다.”
고마움과 걱정의 의미로 가볍게 입을 맞추자 얼굴을 붉힌 카야는 답례로 두 번의 키스를 돌려주었다. 그리고는 곧장 존재감을 드러내며 대놓고 추적자들이 어슬렁거리는 쪽으로 접근했다. 마음속으로 30을 세다가 움직였다.
‘존나 머네.’
그냥 걸어가도 꽤 되는 거리였다. 근데 최대한 들키지 않고 접근하려니 체감상 더 길게 느껴졌다. 딱히 은밀한 행동에 소질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듬성듬성 배치되어 있던 패거리랑 몇 번이고 마주칠 뻔했다. 한 소녀를 등골까지빨아먹기 위해 이렇게까지 하다니, 아무리 세일럼의 하루살이들이라 해도 정말치가 떨리는 새끼들이었다.
‘일단 빼내는 거부터 생각하자.’
약 세 블록 앞까지접근했다. 여기서부턴 완전 도박이었다. 여기에 아르가 있을 거라는 것도 추측에 불과했기 때문에 괜히 잘못 쑤셨다가 귀찮아질 수 있었다. 카야가 시간을 끄는 것도 한계가 있을 테고.
여러 명에게 오랜 시간 쫓기고있는 아르의 심정을 생각해보면… 그녀는 어디 있을까. 어디에 숨어있을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잠시 멈춰서 상상해봤다. 함께한 시간은 짧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아르의 성격과 습관, 성향 등을 고려했다.
‘만나면 뭐라고 얘기해야 하지.’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느니, 불과 얼마 전 동료들을 나누는 걸로 선택했으면서 이번에도 또 선택의 기로에 섰다.
내 눈에 들어오는 후보지는 셋.
짧은 고민 끝에 세 후보지 중, 내가 숨어있는 곳에서 가장 가깝고 은밀성은 가장 떨어지지만 언제든지 다른 곳으로 도망칠 수 있는 곳을 선택했다.
판단은 신중하게, 판단했으면 신속하게.
살금살금 걸어가던 나는 내가 택한 장소 근처에 패거리 두 명이 짝다리 짚으면서 입을 털고 있는 걸 목격했다.
- 언제쯤 끝나려나.
- 낸들 알아? 그년 하나 때문에 뭔 고생인지 모르겠네. 먹고 떨어질 것도 없는데.
- 우리 같은 처지에 그년 만한 실력자가 없으니까. 그년 있고 없고에 따라 의뢰 수당이 존나 차이 나는데 욕심 안 나고 배겨? 실력만 따지자면 웬만한 용사는 그냥 넘길 년이야.
- 근데 왜 용사질 안 하고 우리같이 더러운 판에 껴서 지랄인 건데?
- 낸들 알아? 하여튼 수녀가 존나 가까워진 거 같다 하니까 이짓도 거의 마지막이겠지.
- 붙잡아서 아예 노예로 만들 생각인 거겠지?
- 노예일지 뭘지는 몰라도 존나 굴리긴 하겠지. 뭔가 속박을 씌워서 말이야.
- 씨발, 이래놓고 놓쳤다고 돈 안 주면 뒤엎어버리든가 해야지.
‘저놈들은 의욕이 없는 거야, 진짜로 못 찾아서 저러는 거야? 아니면 수녀의 지시가 없어서 마냥 시간 때우고 있는 건가?’
저놈들 사정 따위야 알 게 없었지만 저놈들에게 들키지 않고 지나갈 수 있는 방법은 없어보였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어쌔씬이 되어 볼까.’
뭐, 실제로 죽이면골치 아파질 수 있으니 죽이진 않겠지만… 흉내 정도는 내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도끼 대신 챙겼던 단검을 꺼내들고는 조심스럽게 나아갔다. 저놈들이 무서운 건 아니었지만, 한 걸음씩 가까워질 때마다 들킬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그 자체 때문에 상당히 긴장됐다.
“끅!”
“뭐야! 헉!”
하지만 내 걱정은 쓸데없는 것이었다.
저들이 경계심과 실력은 내 상상 이상으로 허접했다. 제대로 경계도 안 하고 서로 대화 중이라 그랬는지 내 발소리가 잘 안 들린 것 같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둘이 합쳐 5초도 안 돼서 무력화될 줄은 몰랐다.
‘나한테 이런 재능이? 에라이. 내 긴장감 돌려내 새끼들아.’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나는 두 놈을 구석에 쳐박아둔 다음 후보지에 접근했다. 그러자….
[아르Ar]
동료일 때 뜨는 메시지가 팍 떠올랐다. 내 시야엔 여전히 아르가 안 보였지만, 메시지는 적어도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나는 허름한 건물을 구석구석 뒤졌고, 다시 도망치기 직전이었는지 개구멍 사이에서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는 아르의 뒷모습이 보였다. 평소의 아르였다면 접근하기도 전에 바로알아차렸을 텐데… 녀석의 뒷모습을 보니 굉장히 안쓰러웠다. 원래부터 마른 편이었지만 우리랑 함께 있는 동안엔 음식을 많이 먹어서 조금 살이 붙었나 싶었는데, 고생을 얼마나 했기에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깡말라 있었다.
‘기껏 준 금화는 하나도 안 쓰고… 괜히 짠내나 풀풀 풍기고 말이야.’
어떤 마음에서 그랬는지는 이해는 가지만, 조금은 괘씸했다.
‘힌트 한마디 정도는 적어줘도 됐잖아, 아르야.’
나는 그녀의 등을 톡톡 두드리며 아까 쓰러뜨렸던 남자의 목소리를 흉내냈다.
“여기 있었네.”
“…!”
“한참 찾았잖아.”
자다가 물에 내던져진 고양이처럼 기겁하다 한순간에 안심함을 되찾은 아르의 표정은 육체의 피로를 싹 날려버리기에 충분했다.
“이거 둘러 입고 업혀.”
“….”
“어서.”
“…헨드릭.”
“어서, 시간 없다니까?”
“헨드릭… 헨드릭 맞지…? 나 도와주러 온 거 맞지…?”
“내가 누구로 보이냐 그럼. 네 입으로도 헨드릭이라 말해놓고선.”
뒷모습이 아니라 앞모습은 더 심했다. 꾀죄죄함을 숨길 수 없었다. 입술을 앙다물고 눈물을 참는 것처럼 보였다. 마음 같아선 달래주고 싶었지만 그럴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나는 그녀의 외형을 가리기 위해 내가 입던 로브를 아르에게 입혔고, 그녀의 기운을 숨기기 위해미리 카야에게서 받아온 여분의 로자리오를아르의 목에 걸어주었다.
“으으….”
“많이 힘들어?”
그러자 아르는 로자리오에서 나오는 기운이 거북했는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제대로 매달리지 못할 것 같았다.그래서 업는 대신 안아들었다.
“조금만 참아. 맛있는 것도 먹고 따뜻한 물에 목욕도 시켜줄 테니까.”
“…응.”
아르는 힘없이 긍정했다. 어으, 진짜 짠내 난다 짠내 나.
나는 미리 알아둔 다른 길로 삥 돌아 여관으로 향했다. 아르는 가여울 정도로 가벼웠다.
**
“대장님! 아르는요?”
“카야가 욕실에서 씻기고 있는 중이야.”
“아아…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에요….”
아르는 무사히 구출했다. 연락 수단이 없었기에 먼저 귀환한 난 혹시 몰라 쉬지 않고 여관방에서 기다렸고, 셰이와 일루미나가 밤늦게 돌아온 후에야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카야 언니가 시간을 끌었던 건 좋은데, 그렇게 되면 교단이랑 세일럼 성에 이야기가 들어가는 건 시간 문제 아니에요?”
“아니, 그 수녀가 뭔가 꺼림칙한 기운을 추적한 건 맞는데 늑대인간이라는 건 모르는 상태라고 하더라. 젊은 수녀였고 늑대인간을 실제로 본 적은 없어서 그랬나봐. 아르가 혼혈이라 그 기운이 약한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수녀까지 연관되어 있고 빈민가가 상당히 뒤집어졌는데 세일럼 성에서 가만히 있을까요? 조사라도 나오면 굉장히 골치아파질 거예요.”
“안쪽도 아니고 빈민가 건물 좀 무너진 거야 성에선 신경도 안 쓸 걸? 누가 죽은 것도 아니고 말이야. 게다가 젊은 수녀가 세일럼 성에 인맥이 있을 거란 생각은 안 들어. 오늘 사건을 수도원의 윗선에 보고한다고 해도… 세일럼 지부 최고봉은 어차피 세스티아잖아? 그러니까 괜찮을 거야.”
“세스티아님은 확실히 우리 편이라고 할 수 있지만요… 그래도 아르의 정체를 알게 되면 또 모르는데.”
“내가 돌아오고 몇 시간이나 지났어. 근데 어느 쪽에서도 오지 않았지. 하루살이놈들은 용사를 씹어대면서도 두려워하기도 하고, 설령 이곳을 알아냈다 치더라도 여기까지 올 간 큰 놈들은 없어. 그리고 수도원에서 사람을 보냈으면 진작 왔을 거야.”
“시간이 늦었으니 내일 아침에 올 수도 있지 않을까요?”
“글쎄, 시간 때문은 아닌 거 같은데… 그래도 네 말대로 가능성은 열어두는 게 좋겠지.”
어쩌면 내일, 세스티아에게 무리한 부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