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65화 〉청산(14) (165/218)



〈 165화 〉청산(14)

“미, 미친.”
“직접 쪼갠 것도 아닌데….”
“대체 힘이 얼마나 센 거야?”
“비키자고… 제발로 나간다는데….”

내 무력시위는 성공적이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보통 사람을 죽이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특히나 팔을 덜덜 떨고 있는 거의 대부분의 자경대원들은 ‘젊어서’ 카야를 모르는 이들이었고, 그들은 카야를 괴롭힌 적이 없었다. 죄가 있다면 그저 병신 같은 상관을 만난 죄밖에 없겠지.

‘씨발 빗나갔으면 존나 분위기 싸해졌겠네.’

표현 방식은 굉장히 거칠었지만 나름 이성적으로 경고한 셈이었다. 지금 우리 포위한 거, 니들 의도 아닌 거 아니니까 말로 할 때 풀으라고. 그럼 조용히 꺼져주겠다고.

실제로 내 도끼의 위력을 목도한 이들이 무기를 거두고 제멋대로 포위망을 풀어주었고, 포위군은 졸지에 우릴 보호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촌장만 우습게 되었다.

“뭐, 뭣들 하는 게야! 왜 다들 멋대로물러나는 것이냐!”

“…촌장님. 스스로 나간다고 하는데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막아! 어떻게든 막아!”

나무 기둥에 박혀있던 도끼를 회수한 순간 포위망이 다시 형성됐다. 하지만 아까와는 달랐다. 포위가 아니라 정말 마지못해, 어쩔  없이 그곳에  있었다에 가까웠다.

‘저 미친 늙은이는 우리 카야 잡아둬서 뭐하려고 저 지랄 떠는 거지?’

자랑은 아니지만 내 도끼가 두꺼운 나무 기둥을 번에 갈라버리는 걸 보고서도 저딴 식으로 소릴 지른단 말인가? 이성을 상실한 게 분명해보였다. 아니면 뭔가 꿍꿍이가 있는데 제 맘대로 안 돼서 지랄났거나.

그딴  알  아니었다. 내가 다시 도끼를 치켜들자 뒤로 주춤 물러났으나 아까처럼 갈라지진 않았다. 전형적인 겁 먹은 모습으로, 언제라도 무기를 놓고 도망칠  있게 최대한 무게중심을 뒤로 쏟고 손만 쭉 앞으로 내민 자세였다.

“나참. 이젠 불쌍할 지경이네. 누구 하나 피를 봐야 멈추려나.”

“대장.”

“어?”

“제게 맡겨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리 말한 카야는 출구가 아닌 촌장 쪽으로 향했다. 제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난 저 노망난 것 때문에 카야가 괜한 상처를 받을까 걱정했지만, 기우였다.

“촌장님. 아니, 파울렉 아저씨.”

“뭐, 뭐냐. 뭐 때문에 40년 만에 돌아온 것이냐! 딱히 네 부모의 유품 같은 건 없을 터인데!”

“진짜 있었더라도 찾지 못했을 것 같긴 합니다. 중요한  그게 아니라….”

카야가 철퇴를 슬쩍 들어올렸다. 그러자 자경대장이 슬쩍 촌장을 가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야는 기겁하는 촌장에게 눈을 마주치며 한 글자씩 또박또박 때려박듯 말했다.

“파울렉 아저씨는  막을 권리가 없습니다. 이 마을은 파울렉 아저씨의 사유지가 아닙니다. 제가  마을에서 나고 자랐던 것은  실상이 어떠했든 사실이며, 제 부모님이 이곳에서 돌아가셨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제 부모님이 묻혀있는 곳이 나라에서 지정한 금지라도 되지 않는 이상, 제가 가지못할 이유는 단 하나도 없고 반대로이 마을을 나가지 못할 이유도  하나도 없습니다. 저는 저지른 죄가 없으니. 거기다가 저는 이 마을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이 마을에 정착할 생각도 없고 이 마을을 어떻게 해볼 생각도 없고  마을이 누군가에 의해 좌지우지되어도 상관없고 엘프들에게 침략당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니 제가  마을에 무슨 수작을 부린다거나 정보를 팔아먹을 거라는 건 지극히 아저씨의 망상이며,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은 저희 ‘용사대’의 앞길을 더 이상 가로막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지금껏 수많은 이단 및 괴물들의 머리를 터뜨린  철퇴에, 민간인의 뇌수가 묻을지도 모릅니다.”

“요, 용사대? 지금 용사대라고 했느냐?”

“제가 마을에 신경 쓰지 않듯, 아저씨도 저를 신경 쓰지 마십시오. 지금당신이 할 수 있는 건 포위 지시를 거두는 것, 그것뿐입니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카야는 딕션이 꽤 좋은 편이었다. 저렇게 길게 말하고서도 발음이 뭉개지지도 않고 헛숨을 들이키지도 않았다. 그래서 더 데미지가 강하게 박혔을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촌장은 부들대기만 할뿐 반박을 전혀 못하고 있었다.

“이제 가면 될 것 같습니다.”

“어, 어어. 그래.”

하나의 도끼와 하나의 클레이모어와 하나의 철퇴가 수십의 창과 활을 물리쳤다.

우린 그렇게 마을에 들어온 지 세 시간도  지나지 않아 다시 빠져나갔다.

“…세울 수 있었거늘.”

“촌장님?”

“상당한 공을 세울 수 있었거늘, 고작 네 명이 무서워서 겁을 집어먹는 꼴이란!에잉, 쓸모없는 녀석들 같으니라고.”

“….”

“분명 라엘라님 교단과 유스티티아님 교단이라 했었지… 감히 나를 겁박하고 설교를 해?”

**


‘라엘라님.’
[으응, 아이야.]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배려… 그래. 잘 돼서 다행이구나.]

불침번을 서고 있던 카야는 모닥불에 마른 나뭇가지를 툭 던져넣었다. 불똥 튀는 소리, 따뜻한 불길, 맑은 밤하늘은 그녀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아이야.]
‘예, 라엘라님.’
[나는 네 고향의 촌장이라는 자가 계속 마음에 걸리는구나. 옹졸하고 작은 것에 집착하는 자인 것 같은데….]
‘끽해봐야 시골 마을 촌장에 불과합니다, 라엘라님. 저흰 정식으로 등록된 용사입니다. 설령 촌장이 무슨 수작을 부린다고 해도 세일럼이 보호해줄 것입니다. 설령 세일럼이 모른 척 한다 해도 동료들이, 교단의 자매들이 있지 않습니까. 염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엘라는 그 이상 부정적인 말을 할 수 없었다. 이제야 가장 오래된 짐을 털어내고 의욕에 찬 아이를 방해할 수는 없었다.

[아이야.]
‘예, 라엘라님.’
[자나깨나 던전 생각이구나.]
‘다른 생각해서 죄송합니다.’
[그게 아니란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던전에 들어가면, 나는 없다고 생각하는 게 좋겠다는 말을 하고 싶었단다.]
‘예?’
[내 존재자체가 널 망설이게 하고 나약하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무슨 말씀이십니까, 라엘라님!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라엘라님께서 함께해주신다는 것만으로 저는 그 어느 때보다도 힘을 내고 의지하고 있습….’
[바로 그 점이란다. 지금까지 넌 내가 없어도 잘 해왔잖니. 하지만 네가 앞으로 뭘  때마다 날 의식하는 순간,  의지와 생각은 점점 약해지고 나에 대한 의존성이 높아질 거란다. 그건 정말로 지양해야  일이야.]

카야는 순간 울컥했다.경애하는 여신에게 믿음을 주지 못한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그녀는 어리석지 않았다.  여신의 뜻을 이해했다.

‘그렇다면 기도하는 것도 안 됩니까?’
[차마 그렇게까지는 말 못하겠구나. 하지만… 네게는 나 말고도 다른 믿음이 있지 않니?]
‘라엘라님!’
[뭐라 하는 게 아니란다. 네가 날 저버리지 않음은 잘 알고 있으니까. 그래… 딱 내가 네게 강림하기 전만큼만 날 생각할 수만 있다면, 기도든 뭐든 상관없지 않겠니?]
‘…그건.’
[어렵고 애매한 일이지. 그러니 미리 말한 거란다.  좋은 버릇 들기 전에 말이야.]
‘그렇다면 기존에 제가 사용하던 라엘라님의 힘을 빌리는 기술들도.’
[그건 오롯이 너의 신앙심으로 발휘되는 것이니 괜찮을 거란다. 내가 없다고 생각하라 해서 내가 정말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않니?]
‘어렵습니다… 그럼 앞으로 지금 같은 대화도 지양해야 하는 것입니까?’
[후후… 그런 셈이지. 너를 위해서도 그 편이 좋을 거란다.]

그 말을 끝으로 라엘라는 침묵했다. 카야의 마음이 복잡해졌다. 몸에 깃들어 있는 여신을 ‘없는 것’ 취급하라니?

수십  동안 라엘라를 믿고 따랐으며 최근에 강림과 심신의 융합까지 경험한 카야로서는 그야말로 난제 중의 난제였다.

라엘라의 파편은, 이미 카야의 일부나 마찬가지였으니.

**


세일럼으로돌아가는 길은 심적으론 여유로웠다. 그렇다고 느긋하게 간  아니었다. 오히려 5일 정도를 단축했다. 카야가 자기 때문에 시간 낭비했다며 최대한 말을 재촉했기 때문이었다.

“으음~ 세일럼 냄새.”

“세일럼 냄새는 뭐예요?”

“온갖 욕망이 뒤섞인 꾸리꾸리한 냄새지~”

“뭐예요 그게.”

약 한  만에 돌아오니 감회가 남다르긴 했다. 마치 고향에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좆같음이 밀려왔지만, 어쨌든  마을보다는 여기가 낫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우리는 여독을 풀고 스펙 업을 한 다음 3구역 준비에 박차를 가하기로 했다.

“생각보다 빨리 돌아왔군.”

“예, 뭐. 오는데 조금 서둘러서… 방은 그대로 주시죠.”

“똑같은 방으로 이미 준비해놨다. 다만 이거.”

“음? 뭡니까 이건.”

“본인이 확인해야 할 거 같아서 난 몰라. 다만 그걸 준 사람은 상당히 급해보이긴 했지.”

여관주인이 쪽지 하나를 건네주었다.

「도와줘」

쪽지에 적혀있는  단 한 단어뿐이었다. 하지만 글씨체에서 굉장한 급박함이 느껴졌다.

“누굽니까?  쪽지 건넨 사람이.”

내게 도와달라고 부탁할 사람이….

“아르, 라고 하던데.”

“……하?”

대체, 돌아오자마자 무슨 일이야 이건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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