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64화 〉청산(13) (164/218)



〈 164화 〉청산(13)

“그걸로 되겠어?”

“예. 정말로… 오히려 충분하고도 넘칩니다.”

눈물은 마르고 웃음은 이어졌다. 라엘라님께 이제 카야의 정신은 괜찮아진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지금 카야의 표정만 보면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래도 언제 또 이곳에 들릴지 모르니 나중에 제대로 물어보는  좋겠지.’

카야는 부모의 묘비를 쓰다듬었다. 먼지는 묘비에도 적잖이 쌓여있어서, 그녀가 쓰다듬은 흔적이 그대로 남았다. 카야의 하얀 손가락에회색 먼지들이 한가득 쌓였지만 그녀의 머리색과 눈동자와 묘하게 어울렸다. 마치 빛바랜 일기장이나 가족 앨범 속에 담겨있던 추억들이 그녀를 반기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야 왔냐고. 아니, 이제라도 와서 반갑고 기쁘다고. 우린 걱정하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라고.

그렇게 카야는 묘비에 쌓인 먼지들을 전부 닦아냈고, 흐릿했던 묘비 주인의 이름이 선명해졌다. 그녀가 묘비를 닦으며 추억에 잠겨 있는 동안 우리는 기념비를 닦아내고 주변의 잡초를 정리했다. 작은 묘지는 불과 한 시간 전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깔깔끔해졌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게 뭐가 있어. 감사하다고 하면 되는 거야.”

“…정말 감사합니다.”

카야가 손에 묻은 먼지들을 털어내려다 흠칫하는  보였다. 나는 잽싸게 남는 천 하나를 건넸다. 그녀는 배려에 감사하다며 고개를 꾸벅 숙였지만 건네받진 않았다.

“어째서?”

“아무리 그래도 먼지를 기념품으로 챙겨가는 건 부모님께서도 원하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 그리고… 먼지는 결국 지나간 세월의 쓸쓸한 흔적. 다른 흔적이 없다 해서 이런 쓸쓸한 흔적으로 부모님을 기억하고 싶지 않습니다. 어차피 지금의 기억은 영원히 제 머릿속에 남아 있을 테니.”

그러면서 카야가 두 손을 비벼 털었다. 묘비에 덮여있던 먼지가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흩날려 멀리 날아갔다.

“비록 머지 않아 다시 먼지가 쌓이겠지만, 제가 이곳에 왔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제가 기억하고 여러분들이 기억해주시고 부모님이 기억해주실 겁니다. 그러니,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게 네 뜻이라면.”

먼지를 털어낸 카야는 후련해보였다. 그녀도 몰랐던 마음속 오래된 짐을 털어낸 느낌이었다. 이게 바로 여신님의 의도였을까?

“저 때문에 여러분의 소중한 시간을 한 달 넘게 빼앗았으니, 하루라도 빨리 세일럼에 돌아가야겠습니다.”

“누구도 그리 생각하지 않아.”
“맞아요, 카야 언니. 오랜만에 한숨 돌릴 수 있어서 좋았어요.”
“동감이야. 덕분에 던전에서 겪었던 이야기랑 여신님께서 강림하실 때의 영감도  정리할 수 있었는 걸.”

“다들 그렇게 말씀해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제가 이 마을에 오래 있어봐야 좋을 게 하나 없다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물을게. 정말 이거면 되겠어? 알잖아. 어쩌면 두 번 다시 못  수도 있어. 이게 마지막 기회일 수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하지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카야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마을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그녀의뒷모습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움직이겠다는 의도가 보였다. 황급히 그녀를 따라갔다.

“여러분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마음이 많이 흔들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닙니다. 여러분과 함께 던전을 무사히 돌파해야 한다는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목표에 비하면, 이 작은 마을은 제 손에 묻었던 먼지만도 못한 것에 불과합니다.”

“카야.”

“물론, 예. 고향엔 굳이 오고 싶지 않았고 또 지금도 껄끄럽습니다. 절 괴롭혔던 이들이 전부 살아있다면 모두 모아놓고 그때  그렇게까지 했냐고 묻고 싶었던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정말 시간 낭비  이상  이하도 아닙니다. 그들에게  풍화된 감정을 풀기 위해 사용할 시간이 너무 아깝습니다. 차라리 그럴 시간에 여러분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단련하는 것이 백  천 배 유익하고 즐거울 겁니다.”

“….”

“그나마 남아있던 찌꺼기들도 부모님의 묘비를 보는 순간 깨끗이 씻겨나갔습니다. 여러분들이 뭘 걱정하고 계시는지는 압니다. 그래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정말로 괜찮습니다. 오히려 이런 쓸모없는 마을에서 여러분들의 시간을 갉아먹는 게 더 괴롭습니다.”

카야는 거침없이 내려갔다.

[부정적 특징 ‘어둠 공포증’이 삭제되었습니다.]
[긍정적 특징 ‘냉철함’이 삭제되었습니다.]
[긍정적 특징 ‘새로운 마음가짐’이 추가되었습니다.]

오래된 마음의 짐을 떨쳐버린 자의 한결 가벼워진 움직임이었다.

**

“아무리 그렇다 해도  허락도 없이 들여보내?”

“촌장님,  자경대장입니다! 그 정도 권한은 당연히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가뜩이나 시기가 흉흉한데 외부인을 들여보낸 것도 모자라서, 그,  혼혈까지 들여보내? 무슨 의도가 있을 줄 알고!”

“촌장님! 아무리 엘프가 우리들의 원수라 해도, 그래도  여자는 그 두 분의 딸이지 않습니까. 40년 만에 부모의 유품을 찾으러 왔다는데어떻게 막습니까?”

“그게 이상하다는 거야! 40년! 자그마치 40년이야! 다른 때였으면 내가 이러지도 않았지! 근데 하필이면 전쟁의 기미가 보이네마네 하는 이 시기에 왔다는 것이 수상하다는 게야!”

“촌장님, 우리 마을이 아무리 엘프놈들의 영역에서 가깝다고는 해도 영양가 있는 곳은 아니라 당장 침공받을 일은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아직 전쟁이 벌어진 것도 아니고요!”

“제 애미애비의 복수를 하겠다고 날뛰면 어찌할 게냐. 응? 말해 보거라. 네 녀석도  혼혈을 괴롭혔던 아이들 중 하나 아니었어?”

“….”

“당장 출입구를 봉쇄하고 묶어둬라. 내 직접 찾아가서 물어야쓰겠다.”

“촌장님! 혼자가 아닙니다. 넷이나 됩니다. 그것도 보통이 아니라 자경대가둘러싸고 있었는데도 전혀 주눅든 기세가 없는 네 명이었단 말입니다!”

“에잉, 겁쟁이 같으니! 그러고도 네녀석이 자경대장인 것이냐! 정말 그 반쪽짜리에게 헛된 의도가 없었다면 안전할 것이고, 헛된 의도가 있었다면 그 자리에서 어떻게든 해야 하지 않겠어! 뭐해! 퍼뜩 움직이지 않고!”

자경대장은 한숨을 쉬며 촌장의 집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너희는 출입구 막고, 너희는 에펜젤 기념비로 가는 길목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외부인들 내려오면 최대한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이쪽으로 인도해. 너희는 비번인 녀석들 불러오고.”

“어… 고작 4명인데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시키는 대로 해. 토 달지 말고.”

“옙!”

그는 불안했다.

이제 와서 하프엘프가 난동을 부릴 것 같지는 않았다. 생각해보면 그 하프엘프는 어렸을 때도 그를 비롯한 패거리들에게 괴롭힘을 당했으면 당했지 반격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미련할 정도로 인내심 있는 여자였다.

실제로 그와 재회했을 때도 복수는커녕 눈살을 아주 잠깐 찌푸린 것에 그치지 않았나.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달랐다. 단순히 40년이 지나서가 아니었다.

직접 마주쳤을 때 느껴지던 단단하고 단호하고 냉철한 분위기. 거기에 옆에 서 있던 ‘남편’을 조준하고 있던 자경대원을 노려보던 그 눈빛에서 그는 섬뜩함까지 느꼈다.

이 작은 마을에서 나름 권력을 누리곤 있다곤 하지만, 아무리 포장해봐야 사냥  하고 힘 좀 쓴다는 시골 남자들에 불과했다. 마음 같아선 이방인들을 빨리 내보내고 싶었지만, 이 마을에선 촌장의 말이 법이었다.

본능적으로 늑대를 알아본 양들의 우두머리는 그렇게 최대한 양들의 수를 늘렸다.


**


“이게 무슨 일이래.”

“역시, 더 빨리 내려갈  그랬습니다.”

묘지에서내려온 후 자경대원들이 우릴 가로막고 있었다. 그들은 촌장님이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니 잠시 함께 이동해달라고 했다. 일단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순순히 따라갔던 우리는 웬 꼬장꼬장하게 생긴 노인 주위로 어림잡아 오십 명 정도의 남자들이 포진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노인 옆에 서 있던 남자가 손짓하자 주위에 있던 남자들이 우리를 포위했다.

“여기 촌장일세.”

“이거 지금, 무슨 의도인지 물어도 됩니까?”

“대화하는데 간단한 자기 소개도 안 하는 건가? 쯧쯧.”

뭐지 이 병신은?

“대화하자는 사람이 무장한 수십 명으로 포위를 합니까?”

“그거야 전적으로 저기 혼혈 때문이지. 우리 마을 사람들은 불안함에 빠져 있다네. 다시 한 번 전쟁이 열리는 것인가. 또 남편을, 아들을 잃어야만 하는 것인가 하고 말이야.”

“전혀 관련 없습니다. 제 아내는 고향에 와서 부모의 유품을 찾으러  것뿐입니다.”

“그래서 유품은 찾았나?”

유품은 없었다. 카야가 말하길 그녀의 부모님은 검소하게사신 편이었고 돌아가시기 전에도 딱히 물려준 게 없다고 했다. 있었어도 당시 마을 사람들에게 뺏겼을 확률이 높았겠지만 어쨌든. 우리 앞길을 가로막는 병신 촌장에게 곧이곧대로 말해서 말려들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찾았으면 어떻고 안 찾았으면 어쩌려고 그럽니까. 그쪽이랑 상관없는 이야깁니다.”

“그쪽? 허, 이거 이거 참. 허허.”

“다시 한 번 묻습니다. 지금 우릴 포위한 의도, 정확히 말해야 할 겁니다.”

내 단호한 대답에 촌장이 얼굴을 찌푸렸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더 심술궂어보였다.

“말하지 않았나? 마을 사람들이 불안해한다고.”

“어차피 나갈 거였는데 불안하다면서 왜 막는 겁니까?”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잖나. 정보를 빼돌릴지, 직접 복수를 저지를지. 정 나가려거든 저 혼혈은 놔두고 나머지만 나가게.”

“하. 노망났나. 미친 새끼 아냐 이거.”

“뭐, 뭐라고?”

털썩-

메고 있던 가방을 내렸다. 끈을 쫙 푸르고 동료들의 무기를 나눠주었다.

“부, 분명 검사할  아무 것도 없었는데!”

“마법 배낭도  알아본 그쪽 눈깔을 탓하시고.”

비록 방어구는 걸치지 못한 상태였지만 상관없었다. 우리가 무기를 손에 쥔 순간 저들의 과반이 덜덜 떨고 있었으니까. 저들은 분명 무기를 제대로 휘두른 적도 없는 게 뻔히 보였다.

“카야는 라엘라님의 전투 수녀고 여기는 유스티티아님의 성전사다. 이 둘을 적대한다는 건 곧  교단에게도 적대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봐도 되겠지?”

“아, 아무리 그래도 겨우 넷이서 오십이 넘는 우리를 거, 겁박하는 것이냐!”

“뭐래는 거야. 상식이란 게 있으면 입으로 방구 뀌지 말고 말을 내뱉으세요, 노망난 새끼야. 겁박이라는 건 그쪽이 먼저 했잖아.”

“저, 저, 저…!”

“길 터.”

마침 절묘하게 햇빛이 내 도끼날을 반사했다. 눈뽕 때문인지 내 말에 쫄려서 그런지는 몰라도 수십이 넘는 자경대원들이 뒤로 주춤했다.

“자, 자경대장! 다들 뭣들 하는 거냐!  무례한 놈을 제압하지 않고!”

“안 그럼  도끼날에 123번째 피를 묻히게 될 거 같은데. 123번이 되고 싶은 사람 있으면 계속 그대로 있으시고.”

한 걸음 나아갔다. 그러자 무기를 우리한테 겨누면서도 뒤로 물러났다. 대화를 나누자던 촌장은 덩달아 뒤로 물러나면서도 얼굴이 시뻘게져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냥 곱게 나간다는 것을 굳이 붙잡고 헛소리를 늘어놓는 게 어이가 없었다. 특히 말끝마다 저 혼혈, 저 반쪽짜리라고 카야를 지칭하는 것이 더 좆같았다. 자기만의 망집에 사로잡힌 노망난 늙은이의 사고를 어찌 이해할  있을까. 아니면 보잘 것 없는 자신의 권위를 드높일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궁금하지도 않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이 마을에서 더 머무르기 싫다는 카야의 말은 너무나 옳았다.

나는 있는 힘껏 도끼를 투척했다.

쩌적- 쩌저저적-

쿠우웅---!!!

저 멀리 있던 두꺼운 기둥 하나가 쓰러졌고, 자경대원들은 경악했다. 나는 예비용 손도끼를 꺼내들며 말했다.

“길, 트라고.”

진짜로 123번째 되기 싫으면.




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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