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3화 〉청산(12)
“엘디니움의 송곳니? 그거 엘프놈들 수색대원 중 잘난 사람에게 붙여지는 호칭 아녀?”
“우리 마을에 특급 용병이 있었다고?”
“아니 잠깐. 그러고 보니까 저 여자, 혼혈 아냐?”
“어? 설마.”
“설마 뭐?”
“그거 있잖아. 저 안쪽에 기념….”
“전부 조용히 해!”
라엘라님의 선언 이후 방벽 위는 시끄러워졌다. 우릴 제지했던 남자는 손이 하얗게 될 정도로 난간을 꽉 움켜쥐며 라엘라님을 바라보다가, 돌연 소릴 질러 다들 닥치게했다.
“문, 개방해.”
“대장님?”
“문 개방하라고! 마을 출신 맞으니까.”
“어어….”
“내 말 안 들려?”
“예!”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린 건 좋은데, 나는 저 남자가 무슨 생각으로 열어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솔직히 그런 사람 기억 안 난다고 뻗대거나, 더러운 잡종년이 무슨 낯짝으로 기어오냐고 지랄할 줄 알았다. 예전에 카야가 말했던 이야기를 떠올려보면….
‘표정 보니까 기억한 거 같긴 한데.’
억지로, 혹은 몰래 들어가는 것보다는 이렇게 트러블 없이 들어가는 게 좋긴 하니 일단은 통제에 따랐다.
‘수틀리면 무력으로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긴 하니까. 라엘라님이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고도 말씀하셨고.’
동물원의 동물이 된 것 같았다. 흔치 않은 외부인인데다가 무려 40년 전에 마을을 빠져나간 사람이 부모의 유품을 챙기기 위해 돌아왔다는 소식까지 퍼져서 그런지 아까보다 몇 배 이상의 사람들이 우릴 구경했다.
‘하기야 아무리 깡촌 마을 치고 규모가 제법 있는 거지, 절대적으로 보면 작은 마을이긴 해.’
이렇게 폐쇄적인 마을에 외부인만큼 자극적인 게 또 있고, 소문만큼 재밌는 게 있을까. 이해는 한다만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애초에 우릴 구경하는 시선에호의보다는 경계와 의심이 더 강해서인 것 같기도 했다.
“라엘라님. 후드는 다시 쓰시는 게.”
“음, 아니, 그럼 여기까지 온 이유가 없잖니.”
나조차 그러한데 혹여나 라엘라님이 불쾌하실까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라엘라님은 덤덤하게 시선들을 받아넘기셨다.
평범한 집.
평범한 가게.
사람 사는 곳은 다 거기서 거기라는 말이 있듯, 카야에게 매일같이 최악의 하루를 안겨준 마을은 지극히 평범했다. 너무나 평범한 시골 마을이라 벌써부터 하품이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평범한 마을에서 어린 카야가 숱한 모멸을 받았다는 걸 생각하니 순식간에 역겹게 느껴졌다.
왜.
니깟 놈들이 그딴 식으로 쳐다보면 어쩔 건데. 인간의탈을 쓴 쓰레기 새끼들아.
“여기서부턴 저희가 알아서 가겠습니다.”
“….”
말없이 우릴 안내하던 남자가 우뚝 멈춰섰다. 그리고 돌아서서 라엘라님을 흘끗 보다가 내게 고갤 돌렸다.
“정말 저 하프엘프의 남편이 맞나?”
“무슨 문제라도?”
“…그래. 굳이 이런 마을까지 같이 온 걸 보면, 이야기는 어느 정도 들었겠어. 하지만 알아둬야 할 게 있다.”
“지금 우리가 멈춰야 할 정도로 중요한 이야깁니까?”
띠꺼워서 나도 모르게 말투가 사나워졌다.하지만 남자는 개의치 않았다. 아니, 오히려 라엘라님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가 보면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아 미리 말하는 거다. 우선… 네 부모님의 무덤은 보존되어 있다.”
“….”
“그리고 그 앞에 작은 기념비가 있다.”
“기념비?”
더 이해할 수 없었다. 들여보낸 것까진 그렇다치더라도, 카야의 부모님의무덤에 기념비가 있다니? 인간과 엘프가 붙어먹고 더러운 혼혈을 싸지르고 먼저 뒈져버렸다는 신종 조리돌림인 것인가?
“네 부모님, 엘카니스님과 예시엘님이 우리 마을에 오기 전에 벌이셨던 일을. 그 두 분은 우리 마을을 엘프들로부터 지키기 위해 각기 찬란한 미래와 자유를 버리고 우리 마을과 동떨어진 곳에서 습격자들을 미리 저지하셨다.”
“그게, 지금 무슨.”
“엘카니스님은 예시엘님을 위해 동족을 배신하고 모든 미래를 내던졌고, 예시엘님은 그런 엘카니스님을 도와 목숨을 걸었다. 두 분이 어떻게 만났고 어느 시점부터 그런 결단을 내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중요한 건 두 분이 인간 측과 엘프 측 양쪽 다 모르게 우리 마을의 위협을 제거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혹시 몰라서 우리 마을에 정착하기까지 하셨지.”
“….”
“그렇게 빨리 돌아가신 이유도알지 못한다. 겉으로 보이는 우리 마을은 적어도 평화로웠으니까. 누군가의 아버지들이, 누군가의 아들들이 징집되어서 화살받이가 되었다는 것을 빼면 말이지. 어쩌면 그 두 분도 우리가 모르는 어떤 부상을 당하셨을지도 모른다.”
남자는 손가락으로 한곳을 가리켰다.
“저쪽이다. 원래 무덤이 있던 곳은 짐승이 너무 자주 출몰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이장해야만 했다. 그리고.”
“….”
“혹시나 숲 깊은 곳에 들어가지 않기를 바란다. 짐승들도 많이 나타나고 그만큼 설치한 함정도 많으니. 마지막으로 현재 엘프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으니 가급적이면 빨리 마을을 떠났으면 한다. 특히 촌장에게 걸리면 골치 아파질 테니….”
“잠깐.”
사라지려는 남자를 라엘라님이 멈춰세웠다.
“할 말은 그게 끝인가?”
“할 말.”
남자는 고개를 흔들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럴 자격도 없고.”
“비겁하네.”
“…….”
남자는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라엘라님은 눈에 담기도 싫은 것처럼 카야의 부모님의 무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생전에 마을에서 떨어진 곳에 사셨다더니 무덤도 마찬가지였다. 마을은 금세멀어졌고 점점 울창해지는 숲이 우릴 감싸안았다.
“라엘라님.”
“….”
마을에서 약 30분 거리, 햇볕 드는 터 좋은 땅 위에 아담한 집이 있었다. 그 앞에 묘비 두 개가, 그 옆에 묘비보다 몇 배는 커다란 기념비가 서있었다.
「엘카니스 에펜젤」
「예시엘 에펜젤」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이름만 덩그러니 적혀있는 두 묘비는 절로 분위기를 숙연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진짜 장인어른, 장모님.’
그간 라엘라님을 장모님이라 부르긴 했지만, 염연히 따지자면 이쪽이 진짜였다. 비록 한 번도 뵌 적은 없지만, 지금이라도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카야가 깨어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일단은 나라도 내 방식대로 인사를 올리려는 순간이었다.
“아빠… 엄마….”
“라엘라님?”
“저… 왔어요… 카야가 왔어요….”
묘비 앞에 털썩 무릎을 꿇은 라엘라님이 묘비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대장님.”
“헨드릭.”
“그래.”
울고 있는 건 라엘라님이 아니라 카야라는 것을 깨달은 우린 뒤로 물러났다.
카야가 깨어난 것이 너무 기뻐 얼싸안고 싶었지만, 약 40년 만의 재회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오열하는 카야의 뒷모습을 보며, 최대한의 존중을 담아 그녀의 부모님께 두 번 절을 올렸다. 그게 무슨 자세냐며 어리둥절하던 셰이와 일루미나가 뭣도 모르고 엉성하게 따라했다.
‘항상 행복하게 하겠다고, 힘든 일을 겪지 않게 하겠다는 말은 못 하겠습니다. 능력 밖의 일을 빈말로 포장해서 약속을 깨는 건 서로가 실망스러울 일이니까요. 하지만 이거 하나만큼은 장담하겠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카야와 함께하겠다고.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함께하며 끝내는 공포새끼를 쳐죽이고 사소하면서도 평범한 행복을 추구하겠다고.’
종족을 초월한 금단의 사랑. 심지어 전쟁중인 두 종족의 선남선녀가 사랑과 사랑의 결실을 위해 밝은 미래를내던지고 온갖 오욕을 뒤집어쓰며 위험천만한 일을 각오한 것은 분명 엄청난 일이었다.
존경했다. 엘프들 입장에서야 카야의 아버지는 찢어죽일 배신자였을지 몰라도, 그래도 그분의 용단이 있었기에 카야가 세상에 태어날 수 있었다.
조금만 오래 사셨다면 카야는 친구는 못 사귀었을지 몰라도 나름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았기에 라엘라님의 품에 인도되었다는걸 생각해보면 참 아이러니했다.
「에펜젤 기념비」
「엘디니움의 송곳니 엘카니스 에펜젤과 폭풍의 명사수 예시엘 에펜젤이 마을을 위해 적국의 레인저 열둘을 격살하였다. 적국 레인저들의 유해가 발견된 곳은 이곳으로부터 약 열흘 거리 이상 떨어진 곳이었으며….」
‘두 분이서 열 둘이나.’
두 분이 그 때 당시 그 업적을 알리지 않고 묻어둔 건, 마을을 전쟁 영향권에서 아예 벗어나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인간 측에 알려서 괜히 병력이 파견되거나 추가로 인원을 차출하면 안 좋았고, 엘프 측에도 알려지면 더한 병력이 파견될 수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마을 주민들은 그들을 외면했다. 차마 대놓고 모욕할 깜냥은 못 돼서 뒤에서 신나게 호박씨를 깠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저열한 본성은 부모라는 든든한 방파제가 사라진 어린 카야에게 쥐약이 되었다… 너무 화나는 이야기다.
“아까 그 남자. 생각해보니까 존나 개새끼네.”
“대장님?”
“미안했다라는 한마디 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나? 나이 먹었다고 꼴에 자존심 지키려는 거였나?”
“….”
“여기도 그래. 그동안 뒷담 깐 건 미안해. 뒤늦게라도 너희들이 우리 마을의 은인인 걸 알았어. 그러니 반성의 의미로 기념비랑 생가를 복원해놨어 이거잖아? 근데 저기 봐. 먼지 쌓인 거 보라고. 반성은 찔끔 했을랑가 몰라도 결국 지네들 자기만족이야. 진짜로 반성하고 진짜로 두 분을 마을의 은인이라고 생각했었으면… 그딴 식으로 행동하진 않았겠지.”
“그 남자, 분명 속으로 언니를 싫어하고 있었을 걸? 나이 먹은 것도있고 미안한 것도 있고 언니의 부모님에게 고마운 것도 있지만 그렇다고 엘프와 엘프의 자식에 대한 혐오가 사라지진 않은, 그런 느낌? 그래서 기념비 얘기만늘어놓고는 마지막에 자격이 없네 이딴말 하면서 사라진 거지.”
“뭐예요, 그게. 엉망진창이잖아요!”
“그냥,내 감이야. 여러 곳에서 다양한 종족, 다양한 사람이랑 어울리다보니 저 정도는 대충 느껴지거든.”
베이파를 만지작거리던 일루미나가 신랄하게 비꼬았다.
“거기다 기념비를 봐. 기념비야. 추모비가 아니라. 헨드릭 말대로 저 사람들은 그냥 자기만족이었던 거겠지.”
“카야 언니가 저런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는 거잖아요. 10년 넘게.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 라엘라님은 그때의 상처를 어떻게든 하고 싶어 이곳에 오자고 하신 거고.”
카야의 흐느낌이 점점 작아졌다. 어느 정도 감정을 추스른 것 같았다. 다가가 어깨를 짚었다. 그녀가 고갤 들었다. 가끔씩 너무 차갑게, 무감정하게 느껴지던 회색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도 슬픈 감정을 담고 있었다.
“카야.”
“…예. 대장.”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아니, 뭘 하고 싶어? 뭐든 말해봐.”
내가 무슨 권한이 있겠냐만, 그녀가 복수를 원한다면 기꺼이 손을 더럽힐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대답에선 복수와 원망같은 건 들어있지 않았다.
“저는, 영영 다시 보지 못할 것 같았던 부모님을 이렇게 재회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큰 선물을 받은 기분이에요. 이렇게 뜻 깊은 선물을 받는데 다른 불순물은 필요 없어요. 그저… 지금 이 순간을 감사하고 싶어요.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카야는 울면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