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62화 〉청산(11) (162/218)



〈 162화 〉청산(11)

인간-엘프 전쟁.

사실 나랑은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전쟁이 일어나든 말든, 누가 이기든 세일럼 밖의 이야기였다. 세일럼 밖의 이야기는 더 롱 테러가 진행하는데 어떠한 영향도 없고 그러니 신경 쓸 일도 아니었으니까. 애초에 세일럼 밖으로 나온 것조차도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근데… 타이밍 참.’

하지만 지금은 상관이 없지 않았다. 카야의 고향이 엘프들의 영역에 더 가까워지기도 한데다가, 그녀는 하프엘프였다. 가뜩이나 천시받는 하프엘프가 적국에 가까운 마을에 제발로 걸어들어간다?

여관주인은 어디까지나 소문에 불과하다며 보험을 들었지만, 소문도 소문 나름이다. 그가 말해준 소문들은 상당히 자세했고 나름 근거가 있었다.

‘우선 이 정보를 공유하자.’

특히 라엘라님의 의견이 제일 중요했다. 바로 올라가려던 나는, 동료들이 어차피 씻고 있을 게 뻔했기에 먹을거리를 싸들고 올라가기로 했다. 대충… 8인분?

여관주인까지 동원해 방 앞까지 음식을 옮기고 문을 여니, 가운이나 잠옷으로 갈아입은 동료들이 서로의 머리를 손질해주고 있었다. 아니, 라엘라님. 고작 머리 손질하는데 왜 손에서 광채가 나오는 건데요.

고소한 냄새를 맡은 그들의 시선이 음식에 쏠렸고, 나는 테이블에 그릇을 세팅하며 여관주인에게 들었던 정보들을 전부 풀었다. 셰이와 일루미나가 라엘라님을 바라봤다.  또한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라엘라님의 의사였다. 이 여행 자체가 라엘라님의 부탁에서 시작된 것이었기 때문에, 만일 여기서 돌아가는 게 좋겠다고 말씀하신다면 여기까지   아쉽긴 하지만 적어도 나는 수긍할 것이다.

“지금 당장 전쟁이 일어난 것은 아니란 말이지?”

“예, 라엘라님. 하지만 전조가 나타난 건 맞는 것 같습니다.”

“내 아이의 고향에 도착하고 나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란다. 기껏해야 하루 정도면 될 것 같은데… 나는 이 기회를 낭비하고 싶지 않구나.”

“저희는 고려하지 않으셔도.”

“왕복만 한  넘게 걸리는데 너희들의 노고를 어찌 고려하지 않을 수가 있니. 그 귀중한 시간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싶지 않단다. 게다가 이건 내 아이의 정신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  있으니… 꼭 부탁하고 싶구나.”

“….”

“안 되겠니…?”

아.

라엘라님. 그 표정, 그 대사. 반칙이라고요 진짜.

라엘라님은 절대 강요는 안 하신다. 하지만 저렇게 말씀하시면 들어드릴 수밖에 없다. 거절하면 뭔가 죄책감이 생길  같다. 일루미나는 카야의 고향에 가는  자체에 흥미가 있는 것 같고, 셰이의 경우엔 여신이 직접 부탁하는 시점에서 이미 게임 셋.

“그럼 최대한 빨리 갔다가 빨리 해결하는 걸로 하죠.”

“고맙구나, 다들.”

라엘라님이 눈시울을 붉히셨다. 우린 차마 여신의 눈물을  수 없어 고개를 숙이고 음식을 집어먹었다. 8인분이 사라지는  순식간이었다….


**


‘아이야. 내 아이야.’
[….]

‘깨어난 것, 다 알고 있단다.’
[라엘라님….]
‘그래, 아이야. 잘 잤니?’
[….]

두 개의 이층 침대  왼쪽의 1층을 차지한 라엘라는 진즉 눈을 감았지만 실은 자고 있지 않았다. 내면에 웅크리고 있는 카야에게 말을 걸고 있던 것이다.

‘왜 깨어났는데도 여전히 나오질 않는 거니.’
[….]
‘나는 어디까지나 너희들을 돕기 위해 강림한 거라고 말하지 않았니? 그런데 내가 계속 주도권을 쥐고 있는  기만이란다.’
[라엘라님.]
‘으응? 왜 그러니?’

[이렇게  거, 라엘라님이 그대로 제 몸을 차지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나….]
‘뭐?’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야! 이 몸은  것이야! 어찌 그런 생각을 한단 말이니!’

[저는 대장과 대장의 목표를 위해 참람되게도 라엘라님이 강림하기를 원했습니다.]
‘아이야.’
[도움이 되기 위해서. 던전에서 힘이 되어주기 위해서.]
‘아이야. 내 말을 더 들어보렴.’
[하지만 라엘라님의 힘을 받은 제가 나서는 것과 라엘라님이 직접 활약하시는 것.  중  낫겠습니까? 누가  도움이 되겠습니까?]
‘아이야! 말도  되는 소리 하지 말거라!’
[라엘라님.]
‘카야! 내 딸아!’

카야가 흠칫 떨었다. 라엘라가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처음으로 그녀를 딸이라고 불러주었다.

‘네 말에는 두 가지 오류가 있단다. 첫 번째, 나는 본래 라엘라에게서 떨어져나온 파편에 불과해. 본래의 힘을  수는 있어도 원래의 위력을 다 내지도 못하고, 낸다 한들 몸이 버티질  한단다. 내가 지원할 수 있는   육체를 더 뛰어나게 하는 것과, 아주 위급한 상황에서 상당한 대가를 치르고 신으로서의 힘, 그 일부분을 행사하는 것이지. 내가 네 몸에 융합되었다해서 온전히 내가 되는 것은아니라는 말이란다.’
[….]
‘둘째로… 다시 말하지만 이 몸은 카야, 네 것이란다. 그리고 헨드릭은 카야 너를 사랑하는 것이지, 날 사랑하는  아니란다.’
[저는 대장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할  있습니다.]
‘네가 그런 식으로 사라지는  헨드릭이 결코 원하지 않을 거라는 건 너무나 자명한 일인 것을… 만약 내가  몸을 완전히 차지한다면, 헨드릭이 정말 좋아할 것 같니?’

대답은 없었다.

‘그리고 은근슬쩍 말을 돌리면 내가 까먹을  아는 모양인데, 왜 나오질 않는 거니.’
[라엘라님의 배려심은 감사하지만… 고향은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미 근처까지 왔으니 어쩔 수 없이….]
‘그 상처, 평생 간직하려는 생각이니? 그때의 충격 때문에 2주 정도 의식을 잃었어. 지금 해결하지 못하면 평생 네 안에서 곪고  텐데….’

카야의 유년 시절은 오래된 흉터 그 자체였으나 라엘라가 강림하고 융합되는 과정에서 다시 벌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아문 줄 알았던 흉터 안쪽엔 수많은 고름이 가득 차 있던 셈이었고, 라엘라는 그걸 가만 놔둘 수 없었던 것이었다.

‘아직은 고향에 도착한 게 아니니까 괜찮긴 하지만 고향에 도착하면, 그때는 도망가지 마렴.’
[라엘라님….]
‘며칠 더 걸릴테니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좋겠구나.’
[….]
‘내가 있고, 동료들이 있잖니?’

라엘라는 한순간이지만 정말로 딸아이를 달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거기서 헨드릭의 얼굴이 떠오르는 바람에 곧바로 부정했지만.


**

사람도 쉬고 말도 쉬었으니 곧장 카야의 고향으로 출발했다. 중간에 바뀌지 않았다면 마을 이름은 ‘페인’이었고, 마을 이름 참 거지 같다고 생각하며 점점 협소해지고 험난해지는 길을 거쳤다.

“나무가 꽤나 울창하네?”

“조만간 마차로 진입하기 힘든 길이 나올 것 같습니다.”

페인은 시골, 그 중에서도 산 깊숙이 들어가야 나오는 마을이었다. 셰이의 말대로 우린 좁고 낡은 다리 앞에서 마차를 세워둬야 했다. 도저히 이두마차가 지나갈만한 다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페인」「↑엘시움」

일루미나랑 내가 말  마리씩 끌고 다리만큼이나 낡은 이정표를 지나쳤다. 라엘라님은 이제 부축 없이도 스스로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됐다.  그래도 플라하를 떠나면서 말 수가 줄어들었던 우리는 페인에 가까워지자 아예 대화가 끊겼다.

“아. 저기 보이네요.”

“엄청 깡촌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단 크네?”

“내가 살았던 마을보다도  거 같아. 방책도  높은 편이고.”

아무리 최소로 잡아도 50가구는 넘을 것 같았다. 플라하에 들리기 전에 들렀던 마을보다도  컸다. 굉장히 후미진 곳에 있는 마을이  정도 규모라는 건 뭔가가 있다는 소리겠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우리가 저 마을을 발견했듯, 마을도 우릴 발견했다. 가뜩이나 외부인에 대한경계가 심할 텐데 어물쩡거리다가는 경계심이 적대심으로 발전할  있었다. 태도를 확실히 해야 했다.

“들어가자꾸나. 정문으로 당당히.”

“…예. 라엘라님.”

우린 거리낄 게 없이 당당하게 걸어갔다.

그러자 우릴 발견하고 곳곳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방책 위에서 창이나 활 따위를 꺼내들고 우릴 조준하고 있었는데, 솔직히 말해서 좆도 무섭지 않았다. 제정신 아닌 것들과 생사를 오가는 전투를 몇  하다 보니, 저들을 비웃으려는  아니지만 뭐라고 해야 하나… 그냥 애교로 보였다.

‘전이된 지 얼마 안  시절이었으면 살짝 지렸을지도 모르지만.’

“멈춰! 무슨 용건이지?”

문에 접근하자위에서 활을 들고 있던 한 남자가 우릴 제지했다. 남자는 50대 정도로 보이는 상당히 험상궂게 생겼는데, 말하는 태도를 보아하니 마을의 자경대장이나 조장쯤 되어보였다. 지금 네놈이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 중에 세상 그 누구보다 존귀하신 분이 계시며, 네놈들이 과거에 좆같이 굴었지만 굳세게 버티고 자라나 공포에 맞서는 용사가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입이 근질근질했지만… 갑자기 그리 말해봐야 뭔 개소리냐 꺼지라는 말만 돌아올 것이다. 너무 주목받는 걸 피하기 위해 평범한 옷을 걸치기도 했으니 저리 강압적으로 나오는 것도 이해안 가는 건 아니었다.  미리 맞춰둔 말을 꺼냈다.

“제 장인어른과 장모님의 유품을 챙기러 왔습니다.”

“장인어른과 장모님의 유품?”

“예. 이곳에 있다 들었습니다.”

“그간 마을을 나간 여자는 몇 있었어도 외부인과 결혼한 여자는 근 30년간 단 한 명도 없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폐쇄성 장난 아니네.

그래도 근 30년간이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갔다. 남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뭐가 웃기지? 너희들의 수상함만 더 늘어나는 말인데?”

“아. 제 아내는 30년이 아니라, 40년 정도 전에 마을을 나갔다고 들어서.”

“…40년 전이라고?”

남자는 믿을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 액면가는 아무리 높게 쳐봐야 20대 후반 정도니, 내 아내라는 여자와의 나이 차이를 계산하고는 그 괴리감에 정신이 아득해진 것이리라.

“믿을  없군. 일행 중에 아내가 있나?”

라엘라님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셨다.

“예.”

“혹 이름을 밝힐 수 있으면 밝혀라. 만일 마을 출신이라는  밝혀지면, 지금까지의 무례를 사과하고 정중히 안내하도록 하겠다.”

“40년 전인데 모든 사람들을 기억하십니까?”

“그건 전적으로 이쪽이 판단할 문제다. 밝힐 수 없다면 너희는 여전히 수상한 사람들에 불과하니, 마을에 들어올 수 없다.”

깡촌 마을 사람 치고 나름대로 격식 있는 말투였다. 연륜 때문인지, 자리 때문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말에 하자는 없었다.

다만, 라엘라님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라엘라님?”

“내 아이의 기억 속에 있는 이들  하나인 것 같구나. 세월의 흐름 때문에 못 알아볼 뻔했지만….”

라엘라님의 말에 남자의 평판이 수직낙하했다.

카야의 기억에 있는 이?

카야를 인도해주던 엘프 수녀를 제외하면, 전부 카야를 괴롭히던 쓰레기들 아닌가. 그리고 저 남자는 어떻게 봐도 엘프 수녀가 아니었다.

“라엘라님.”

“괜찮아. 괜찮단다. 여기선 오롯이 나와 내 아이가 나서겠다.”

라엘라님이  걸음 앞으로 나서며 후드를 벗으셨다. 그러자 방책  사람들이 일제히 입을 벌리며 경악했는데,   으뜸은 아까  남자였다.

“제 이름은 카야 에펜젤.”

라엘라님은 그들의 반응 따윈 알 바 아니라는 듯, 난간을 격하게 부여잡고 있는 남자를 향해 선언했다.



“‘엘디니움의 송곳니’ 엘카니스 에펜젤과 이곳에서 나고 자라 이름을 널리 알리던 특급 용병 ‘폭풍의 명사수’ 예시엘 에펜젤의 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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