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화 〉청산(11)
인간-엘프 전쟁.
사실 나랑은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전쟁이 일어나든 말든, 누가 이기든 세일럼 밖의 이야기였다. 세일럼 밖의 이야기는 더 롱 테러가 진행하는데 어떠한 영향도 없고 그러니 신경 쓸 일도 아니었으니까. 애초에 세일럼 밖으로 나온 것조차도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근데… 타이밍 참.’
하지만 지금은 상관이 없지 않았다. 카야의 고향이 엘프들의 영역에 더 가까워지기도 한데다가, 그녀는 하프엘프였다. 가뜩이나 천시받는 하프엘프가 적국에 가까운 마을에 제발로 걸어들어간다?
여관주인은 어디까지나 소문에 불과하다며 보험을 들었지만, 소문도 소문 나름이다. 그가 말해준 소문들은 상당히 자세했고 나름 근거가 있었다.
‘우선 이 정보를 공유하자.’
특히 라엘라님의 의견이 제일 중요했다. 바로 올라가려던 나는, 동료들이 어차피 씻고 있을 게 뻔했기에 먹을거리를 싸들고 올라가기로 했다. 대충… 8인분?
여관주인까지 동원해 방 앞까지 음식을 옮기고 문을 여니, 가운이나 잠옷으로 갈아입은 동료들이 서로의 머리를 손질해주고 있었다. 아니, 라엘라님. 고작 머리 손질하는데 왜 손에서 광채가 나오는 건데요.
고소한 냄새를 맡은 그들의 시선이 음식에 쏠렸고, 나는 테이블에 그릇을 세팅하며 여관주인에게 들었던 정보들을 전부 풀었다. 셰이와 일루미나가 라엘라님을 바라봤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라엘라님의 의사였다. 이 여행 자체가 라엘라님의 부탁에서 시작된 것이었기 때문에, 만일 여기서 돌아가는 게 좋겠다고 말씀하신다면 여기까지 온 게 아쉽긴 하지만 적어도 나는 수긍할 것이다.
“지금 당장 전쟁이 일어난 것은 아니란 말이지?”
“예, 라엘라님. 하지만 전조가 나타난 건 맞는 것 같습니다.”
“내 아이의 고향에 도착하고 나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란다. 기껏해야 하루 정도면 될 것 같은데… 나는 이 기회를 낭비하고 싶지 않구나.”
“저희는 고려하지 않으셔도.”
“왕복만 한 달 넘게 걸리는데 너희들의 노고를 어찌 고려하지 않을 수가 있니. 그 귀중한 시간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싶지 않단다. 게다가 이건 내 아이의 정신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으니… 꼭 부탁하고 싶구나.”
“….”
“안 되겠니…?”
아.
라엘라님. 그 표정, 그 대사. 반칙이라고요 진짜.
라엘라님은 절대 강요는 안 하신다. 하지만 저렇게 말씀하시면 들어드릴 수밖에 없다. 거절하면 뭔가 죄책감이 생길 것 같다. 일루미나는 카야의 고향에 가는 것 자체에 흥미가 있는 것 같고, 셰이의 경우엔 여신이 직접 부탁하는 시점에서 이미 게임 셋.
“그럼 최대한 빨리 갔다가 빨리 해결하는 걸로 하죠.”
“고맙구나, 다들.”
라엘라님이 눈시울을 붉히셨다. 우린 차마 여신의 눈물을 볼 수 없어 고개를 숙이고 음식을 집어먹었다. 8인분이 사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
‘아이야. 내 아이야.’
[….]
‘깨어난 것, 다 알고 있단다.’
[라엘라님….]
‘그래, 아이야. 잘 잤니?’
[….]
두 개의 이층 침대 중 왼쪽의 1층을 차지한 라엘라는 진즉 눈을 감았지만 실은 자고 있지 않았다. 내면에 웅크리고 있는 카야에게 말을 걸고 있던 것이다.
‘왜 깨어났는데도 여전히 나오질 않는 거니.’
[….]
‘나는 어디까지나 너희들을 돕기 위해 강림한 거라고 말하지 않았니? 그런데 내가 계속 주도권을 쥐고 있는 건 기만이란다.’
[라엘라님.]
‘으응? 왜 그러니?’
[이렇게 된 거, 라엘라님이 그대로 제 몸을 차지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나….]
‘뭐?’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야! 이 몸은 네 것이야! 어찌 그런 생각을 한단 말이니!’
[저는 대장과 대장의 목표를 위해 참람되게도 라엘라님이 강림하기를 원했습니다.]
‘아이야.’
[도움이 되기 위해서. 던전에서 힘이 되어주기 위해서.]
‘아이야. 내 말을 더 들어보렴.’
[하지만 라엘라님의 힘을 받은 제가 나서는 것과 라엘라님이 직접 활약하시는 것. 둘 중 더 낫겠습니까? 누가 더 도움이 되겠습니까?]
‘아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거라!’
[라엘라님.]
‘카야! 내 딸아!’
카야가 흠칫 떨었다. 라엘라가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처음으로 그녀를 딸이라고 불러주었다.
‘네 말에는 두 가지 오류가 있단다. 첫 번째, 나는 본래 라엘라에게서 떨어져나온 파편에 불과해. 본래의 힘을 낼 수는 있어도 원래의 위력을 다 내지도 못하고, 낸다 한들 네몸이 버티질 못 한단다. 내가 지원할 수 있는 건 네 육체를 더 뛰어나게 하는 것과, 아주 위급한 상황에서 상당한 대가를 치르고 신으로서의 힘, 그 일부분을 행사하는 것이지. 내가 네 몸에 융합되었다해서 온전히 내가 되는 것은아니라는 말이란다.’
[….]
‘둘째로… 다시 말하지만 이 몸은 카야, 네 것이란다. 그리고 헨드릭은 카야 너를 사랑하는 것이지, 날 사랑하는 게 아니란다.’
[저는 대장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네가 그런 식으로 사라지는 건 헨드릭이 결코 원하지 않을 거라는 건 너무나 자명한 일인 것을… 만약 내가 네 몸을 완전히 차지한다면, 헨드릭이 정말 좋아할 것 같니?’
대답은 없었다.
‘그리고 은근슬쩍 말을 돌리면 내가 까먹을 줄 아는 모양인데, 왜 나오질 않는 거니.’
[라엘라님의 배려심은 감사하지만… 고향은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미 근처까지 왔으니 어쩔 수 없이….]
‘그 상처, 평생 간직하려는 생각이니? 그때의 충격 때문에 2주 정도 의식을 잃었어. 지금 해결하지 못하면 평생 네 안에서 곪고 말 텐데….’
카야의 유년 시절은 오래된 흉터 그 자체였으나 라엘라가 강림하고 융합되는 과정에서 다시 벌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아문 줄 알았던 흉터 안쪽엔 수많은 고름이 가득 차 있던 셈이었고, 라엘라는 그걸 가만 놔둘 수 없었던 것이었다.
‘아직은 고향에 도착한 게 아니니까 괜찮긴 하지만 고향에 도착하면, 그때는 도망가지 마렴.’
[라엘라님….]
‘며칠 더 걸릴테니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좋겠구나.’
[….]
‘내가 있고, 동료들이 있잖니?’
라엘라는 한순간이지만 정말로 딸아이를 달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거기서 헨드릭의 얼굴이 떠오르는 바람에 곧바로 부정했지만.
**
사람도 쉬고 말도 쉬었으니 곧장 카야의 고향으로 출발했다. 중간에 바뀌지 않았다면 마을 이름은 ‘페인’이었고, 마을 이름 참 거지 같다고 생각하며 점점 협소해지고 험난해지는 길을 거쳤다.
“나무가 꽤나 울창하네?”
“조만간 마차로 진입하기 힘든 길이 나올 것 같습니다.”
페인은 시골, 그 중에서도 산 깊숙이 들어가야 나오는 마을이었다. 셰이의 말대로 우린 좁고 낡은 다리 앞에서 마차를 세워둬야 했다. 도저히 이두마차가 지나갈만한 다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페인」「↑엘시움」
일루미나랑 내가 말 한 마리씩 끌고 다리만큼이나 낡은 이정표를 지나쳤다. 라엘라님은 이제 부축 없이도 스스로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됐다. 안 그래도 플라하를 떠나면서 말 수가 줄어들었던 우리는 페인에 가까워지자 아예 대화가 끊겼다.
“아. 저기 보이네요.”
“엄청 깡촌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단 크네?”
“내가 살았던 마을보다도 큰 거 같아. 방책도 꽤 높은 편이고.”
아무리 최소로 잡아도 50가구는 넘을 것 같았다. 플라하에 들리기 전에 들렀던 마을보다도 더 컸다. 굉장히 후미진 곳에 있는 마을이 이 정도 규모라는 건 뭔가가 있다는 소리겠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우리가 저 마을을 발견했듯, 마을도 우릴 발견했다. 가뜩이나 외부인에 대한경계가 심할 텐데 어물쩡거리다가는 경계심이 적대심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태도를 확실히 해야 했다.
“들어가자꾸나. 정문으로 당당히.”
“…예. 라엘라님.”
우린 거리낄 게 없이 당당하게 걸어갔다.
그러자 우릴 발견하고 곳곳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방책 위에서 창이나 활 따위를 꺼내들고 우릴 조준하고 있었는데, 솔직히 말해서 좆도 무섭지 않았다. 제정신 아닌 것들과 생사를 오가는 전투를 몇 번 하다 보니, 저들을 비웃으려는 건 아니지만 뭐라고 해야 하나… 그냥 애교로 보였다.
‘전이된 지 얼마 안 된 시절이었으면 살짝 지렸을지도 모르지만.’
“멈춰! 무슨 용건이지?”
문에 접근하자위에서 활을 들고 있던 한 남자가 우릴 제지했다. 남자는 50대 정도로 보이는 상당히 험상궂게 생겼는데, 말하는 태도를 보아하니 마을의 자경대장이나 조장쯤 되어보였다. 지금 네놈이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 중에 세상 그 누구보다 존귀하신 분이 계시며, 네놈들이 과거에 좆같이 굴었지만 굳세게 버티고 자라나 공포에 맞서는 용사가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입이 근질근질했지만… 갑자기 그리 말해봐야 뭔 개소리냐 꺼지라는 말만 돌아올 것이다. 너무 주목받는 걸 피하기 위해 평범한 옷을 걸치기도 했으니 저리 강압적으로 나오는 것도 이해안 가는 건 아니었다. 난 미리 맞춰둔 말을 꺼냈다.
“제 장인어른과 장모님의 유품을 챙기러 왔습니다.”
“장인어른과 장모님의 유품?”
“예. 이곳에 있다 들었습니다.”
“그간 마을을 나간 여자는 몇 있었어도 외부인과 결혼한 여자는 근 30년간 단 한 명도 없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폐쇄성 장난 아니네.
그래도 근 30년간이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갔다. 남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뭐가 웃기지? 너희들의 수상함만 더 늘어나는 말인데?”
“아. 제 아내는 30년이 아니라, 40년 정도 전에 마을을 나갔다고 들어서.”
“…40년 전이라고?”
남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 액면가는 아무리 높게 쳐봐야 20대 후반 정도니, 내 아내라는 여자와의 나이 차이를 계산하고는 그 괴리감에 정신이 아득해진 것이리라.
“믿을 수 없군. 일행 중에 아내가 있나?”
라엘라님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셨다.
“예.”
“혹 이름을 밝힐 수 있으면 밝혀라. 만일 마을 출신이라는 게 밝혀지면, 지금까지의 무례를 사과하고 정중히 안내하도록 하겠다.”
“40년 전인데 모든 사람들을 기억하십니까?”
“그건 전적으로 이쪽이 판단할 문제다. 밝힐 수 없다면 너희는 여전히 수상한 사람들에 불과하니, 마을에 들어올 수 없다.”
깡촌 마을 사람 치고 나름대로 격식 있는 말투였다. 연륜 때문인지, 자리 때문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말에 하자는 없었다.
다만, 라엘라님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라엘라님?”
“내 아이의 기억 속에 있는 이들 중 하나인 것 같구나. 세월의 흐름 때문에 못 알아볼 뻔했지만….”
라엘라님의 말에 남자의 평판이 수직낙하했다.
카야의 기억에 있는 이?
카야를 인도해주던 엘프 수녀를 제외하면, 전부 카야를 괴롭히던 쓰레기들 아닌가. 그리고 저 남자는 어떻게 봐도 엘프 수녀가 아니었다.
“라엘라님.”
“괜찮아. 괜찮단다. 여기선 오롯이 나와 내 아이가 나서겠다.”
라엘라님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후드를 벗으셨다. 그러자 방책 위 사람들이 일제히 입을 벌리며 경악했는데, 그 중 으뜸은 아까 그 남자였다.
“제 이름은 카야 에펜젤.”
라엘라님은 그들의 반응 따윈 알 바 아니라는 듯, 난간을 격하게 부여잡고 있는 남자를 향해 선언했다.
“‘엘디니움의 송곳니’ 엘카니스 에펜젤과 이곳에서 나고 자라 이름을 널리 알리던 특급 용병 ‘폭풍의 명사수’ 예시엘 에펜젤의 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