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화 〉청산(10)
“꼴 좋네.”
“티티….”
“그러게 내가 몇 번이고 경고했지? 위험하다고. 미친 짓이라고.”
“으응… 그치만 최악의 결과는 피했으니 나름 만족하고 있어….”
“만족? 마안조옥?”
“아으으, 아흐아….”
유스티티아는 라엘라의 볼을 사정없이 꼬집었다. 힘없이 누워있던 라엘라는 반항하지도 못하고 속절없이 당해야만 했다. 한쪽 볼이 완전히빨개질 때가 되어서야 놔준 유스티티아가 혀를 찼다.
“그래. 네 말대로 최악은 피했지. 근데 말 그대로 최악만 피한 셈이야. 네 파편이 네 아이와 어찌저찌 융합은 잘 한 모양이지만, 정작 네가 이렇게 되어서야 본말전도야. 네가 흔들리면 너 하나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고.”
“알고 있어어….”
“알고 있다는 년이 어휴.”
일명 ‘집념’ 상태가 풀린 라엘라는 몸을 쭈그렸다. 상당히 처량하고 찌질해보이기까지 했다. 신도들이 봤다면 부디 체통을 지켜달라고 읍소할 정도였다.
“공포 그놈을 강하게 억누르거나 없애는 것, 그거 하나만 있다면야 상관없지. 그랬다면 나도 훨씬 더 많은 힘을 지원했을지도 몰라. 근데 우린 그 다음까지 내다봐야하잖아.”
“….”
“그놈을 진짜로 없애고 싶은 자가 우리 중 몇 명이지? 얼마 안 되잖아. 지상이 어떻게 되든 말든 방관하거나 제멋대로 즐기는 녀석들,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녀석들, 현 상태만 유지하면 족하다는 녀석들… 그 녀석들 다 제외하면 진짜 도움될 만한 이는 한 손에 꼽아. 그마저도 그놈을 상대할 정도로 강력한 이는 더 걸러지고.”
“암담하네.”
“암담하지. 너랑 내가그몇 안 되는 가능성인데, 그 중 하나가 스스로 고장나버렸으니.”
“안 고장났어….”
“파편을 너무 많이 떼서 강림시키는 바람에 신도들에게 신력 나누어주는 것도 벅차서 거동도 불가능해진 게 고장난 게 아니면 뭔데?”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거야.”
“그게 얼마나 걸릴 줄 알고. 그 맹랑한 아이는 그렇게 오래 끌 생각이 없어.”
“그래서 어떡하자는 건데?”
“뭘 잘했다고 그렇게 쳐다보는 거야 이년아.”
“아으아….”
유스티티아가 이번엔 반대쪽 볼을 꼬집었다. 라엘라는 즉시 항복을 외쳤다.
“네 아이에게 융합된 파편은 회수가 불가능하겠지.”
“으응. 가능하다 해도 그럴 생각은 없어. 내 아이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또 줬다 뺏는 건 마음이 아프잖아.”
“…어쨌든. 잃어버린 신력을 채우기 위해 하나는 포기해.”
“무슨 말이야?”
“못 알아들은 척 하지 말고. 하나를 밀어주기로 했으면, 다른 하나는 포기해야지. 다른 신도들에게 나누어주는 신력.”
“안 돼.”
“줄여.”
“지금 이 순간에도 내 힘이 없으면 죽는 이들이 넘쳐나. 어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더 중요한 걸 위해서지. 게다가 이건 네가 자초한 일이기도 하니, 결정적인 때 네 상태가 이도저도 아니게 되면… 그래서 네 아이에게 도움을 줄 수 없다면. 그땐 정말 후회할 텐데.”
“….”
“개입이 급격히 힘들어진다곤 하지만 그래도 나중을 위해 힘을 모아놔야 해. 가령, 아이들이 그놈을 상대할 때라든가.”
“….”
“지금 그 아이들이 그놈을 제대로 상대할 수 있을 거 같아?직시하지도 못할 거야. 맞아 아니야.”
“맞아….”
“그러니 직접 그놈을 쳐죽이진 못하더라도, 그놈을 상대할 수 있게 축복 정도는 세게 밀어넣어줘야 할 거아냐.그래야 우리 체면도 서지. 맞아 아니야.”
“맞아….”
“공포 그놈이 여기서 한번 더 강해지면, 그땐 더 감당하기 힘들 거라는 거. 그래서 이번 기회를 꼭 노려야 한다는 거고. 맞아 아니야.”
“그것도 맞아….”
“그러니까, 줄여. 나도 이미 줄이고 있으니까.”
“으응… 티티 말이 맞아….”
라엘라는 눈을 찡그리고선 무어라 중얼거렸다. 그러자 곧 사방에서 연녹색 빛줄기가 날아와 그녀의 몸에 모여들었다.
“미안해. 미안하구나.”
“…쯧.”
라엘라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
‘시원하게 저질렀네….’
눈을 떴다. 곤히 잠들고있는 라엘라님의 얼굴이 보였다. 그러자 모든 기억이 떠올랐다. 어디 기억뿐인가. 지금도 꽉 껴안고 있었다. 심지어밑부분이 결합된 채로. 그 사실을 인지하자 나도 모르게 허리를 움직일 뻔했다. 그 정도로 라엘라님의 속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으응….”
“오 쉣….”
인내심을 발휘해 삽입을 풀어내려 했으나 타이밍 참 공교롭게도 라엘라님의 다리가 내 다리를 얽으며 보지가 조여들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그 자세를 유지하는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팔다리를 움직여서 호응하셨으니 확실히 차도는 있는 게 분명해.’
현자가 되니 이성이 돌아왔다. 돌아온 이성은 나로 하여금 강제로 반성하게 했다.
카야를 위해서 카야가 아닌 이와 몸을 섞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아까의 신음소리를 들으면 카야는 아직까지도 깨어나지 못한 건 확실했지만, 그렇다고 벌어진 일이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라엘라님이 딱히 거짓말을 할 거 같지도 않고 나 또한 카야에게 이런 걸로 거짓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카야가 이 일을 알게 될 거라는 가정 하에 다시 생각해보았다.
정당한 일인가. 그리고 카야는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안 그래도 내게 어느 정도 집착을 보이던 그녀였다. 그나마 셰이와 일루미나를 인정하고 친해짐으로써 그게 분산되어서 그렇지 날 향한 그녀의 마음은 무겁다는 말로도 가늠이 안 되는 수준이었다. 표현만 과격하지 않다뿐이지, 날 위해 자신의 신체와 정체성이 말살될 수도 있는 행위를 간절히 바란 시점에서 이미 증명은 끝난것이었다.
그 정도로 날 위하고 날 원하는 카야가, 만약 나와라엘라님의 화간에 대해서 분노한다면? 신체의 일부가 된 라엘라님을 도둑고양이라고 취급하게 된다면?
날 향한 무거운 마음가짐과는 별개로 나와 라엘라님을 둘 다 믿고 따르는 카야가 진심으로 화낼 확률보단 수긍할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죄책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날 일편단심으로 따르는데, 나는 좆을 좆대로 놀리고 있었으니까. 이건 어떤 사정이 있든 변명의 여지가 없는 팩트였다.
결론, 정당하지 않음.
유죄. 땅땅땅.
‘…모든 걸 솔직하게 밝혀야지.’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어리석은 짐승이 생각한 건 결국 똑같은 방법이었다. 정면돌파. 지금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최선을 다해 문제를 해결하고, 용서를 구하는 수밖에.
‘지금은 카야를 깨우는 걸 우선시하자.’
“으응… 헨드릭… 거긴….”
‘하… 여신님도 참.’
잠결에 질을 조이는 라엘라님을 향해 짧게 들이박았다.
“으응, 응, 으읏, 읏, 흣… 헨드리익…?”
“이건 다 엘라 때문입니다.”
“대체, 무슨… 아, 아, 아, 아앙!”
다짐도 무색하게 도중에 깨어나버린 라엘라님과 다시 질펀하게 몸을 섞은 걸 이게 정말 마지막이라며 변명한 건 또 다른 이야기였다.
**
따각- 따가닥-
“날씨가 좋네요?”
“….”
“….”
“…아하하, 신선한 공기나 마셔야겠다~”
간단히 아침을 먹고 다시 출발했다. 마차는 셰이가 몰았다. 라엘라님이 마차를 다시 몰 정도로 회복되지는 않았기 떄문이었다. 그래서 마차 안엔 나와 일루미나와 라엘라님이 타고 있었는데, 일루미나는 딴청을 피우다 마부석으로 피신했다.
“저….”
“헨드릭.”
“예, 라엘라님.”
날 바라보는 시선과 기세엔 자지를 찌를 때마다 앙앙대며 물을 뿜어내던 엘라는 없었다. 여신으로서의 라엘라가 날 엄하게 꾸짖고 있었다.
“분명 그쯤 한다고 하지 않았니? 그만해달라고 말했는데도 어째서 계속 내 몸을 탐했는지묻고 싶구나.”
“죄송합니다.”
“분명 내가 먼저 청한 건 맞지만, 자는 도중에도 하는 건 너무했다고 생각하지 않니?”
“죄송합니다.”
“너는 그렇다 치더라도 다른 아이들에게까지 그런 저열한 모습을 보인 건….”
“죄송합니다….”
“하아…….”
할 수 있는 변명은 많았다. 라엘라님이 먼저 유혹하지 않았냐, 보지를 먼저 조인 건 라엘라님이다, 자는 도중에도 계속 끌어안은 것도 라엘라님이다, 제대로 말리기는커녕 은근슬쩍 끌어안은 것도 모를 줄 아냐 등등….
하지만 이럴 땐 닥치고 숙이는 게 좋았다. 정말 죄송해서 미칠 것 같아 급기야 침울한 표정을 짓자 오히려 라엘라님이 당황했다.
“그… 어쨌든 다음부터는 그러면 안 돼. 알겠니?”
“다음부터는?”
“아. 아니, 잊어버리렴.”
라엘라님은 괜히 고갤 돌리며 몸을 베베꼬았다. 얼굴이 상당히 붉어졌지만 못 본 척했다.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그러자 곧바로 라엘라님의 알몸이 떠오르며 불과 몇 시간 전의 정사가 다시 펼쳐지려 했지만, 그럴 때마다 카야가 철퇴를 든 모습을 떠올렸다. 음란마귀가 생각보다 쉽게 도망갔다.
‘카야의 고향, 빨리 도착했으면 좋겠네.’
풍경은 느릿느릿 지나갔다.
**
약 2주가 지나고, 카야의 고향이 속한 영지의 중심 도시 ‘플라하’에 도착했다. 지난 2주간 아무리 마차 여행이 익숙해졌다곤하지만 우리의 첫 번째 목표는 여관, 두 번째 목표도 여관이었다. 중간에 경유한 작은 마을에서 간단히 씻고 쉴 수 있었다고는 하지만 외부인을 경계하는 마을에서 마음 편히 쉬기는힘들었다.
오늘 안에 목욕통에 몸을 담그지 못하면 누구 하나 조질 기세로 괜찮은 여관을 물색하던 셰이와 일루미나 덕택에 금세 이 마을 최고의 여관을 찾을 수 있었다.
“방 두 개로 드립니까?”
“4인실은 없습니까? 없다면 3인실도 괜찮습니다.”
“흐음… 뭐, 남는 게 방이라서. 4인실로 드리겠습니다. 며칠 묵으실 겁니까?”
“1박이요.”
“5은화… 아니 4은화만 주십시오.”
‘우라질.’
욕나오는 가격이었다.
비싸서?
‘아니, 왜 이렇게 싸! 열 받게!’
세일럼에선 혼자 하루 묵는데 5은화였는데.
열쇠를 셰이에게 넘겼다. 일루미나는 이미 열쇠에 적힌 방 번호(305)를보자마자 후다닥 계단을 올라갔고, 셰이는 라엘라님을 부축하다가 날 돌아봤다. 안 오고 거기 서서 뭐하냐는 표정이었다.
“먼저 가있어. 오래 안 걸리니까.”
“네, 대장님.”
라엘라님이 힐끗 쳐다보셨지만 이내 셰이에게 의지하면서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셨다.2주 내내 손 잡기와 가벼운 안마 등으로 스킨쉽을 유지한 보람이 있었다.
동료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카운터에 팔을 대며 몸을 기울였다.
“여긴 이 근방에서 가장 큰 마을 아닙니까?”
“역시 외부인이었습니까.”
“예 뭐, 여기가 제일 좋은 여관이라 해서 왔는데 텅텅 비어있다는 건 좀 그래서 말입니다.도중에 들른 작은 마을에선 경계도 엄청 심하게 받기도 했고….”
“흐음, 근데 이걸 입 밖으로 내미는 게 옳은 건지….”
나는 말 없이 은화를 튕겼다. 그러자 능숙하게 받아내며 언제 조심했냐는 듯 술술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아무리 이 마을이 영지의 중심지라 해도 그리 발달된 곳은 아닙니다. 2주 정도만 더 가면 일확천금의 도시 세일럼이 있는데, 칼 좀 휘두른다 싶으면 굳이 이런 작은 동네에 머물 이유가 없으니 말입니다. 여긴 그곳으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에 불과하죠. 그래도 인구가 엄청 적지도 않고 나름 평화로워서 살만은 합니다. 그게 유일한 장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그 평화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겁니다.”
“어디서 괴물이라도 나타난 겁니까?”
“설마. 차라리 괴물이었다면 병력이든 용병이든 소집하면 될 일이지만….”
남자는 괜히 고개를 두리번거리고는 목소리를 죽였다.
“어디까지나 소문이긴 한데.”
“대체 뭔데 그러는….”
“전쟁.”
“뭐요? 전쟁…?”
“약 30년전에 휴전을 맺었던 엘프들과의 전쟁이 다시 발발했다는 소문이점점 퍼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다른 마을에선 통행 금지랑 징집령이 떨어졌다는 구체적인 소문도 있고요. 그리고 여기도 엘프들 영역에서 그렇게 멀지는 않죠.”
이게 무슨 소리야?
전쟁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