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57화 〉청산(6) (157/218)



〈 157화 〉청산(6)

다가닥다가닥-

마차를 이끄는 두 마리의 말은 사람이 걷는 것보다 빠른 정도의 속도로 꾸준히 나아가고있었다. 계속 들리는 말발굽소리는 굉장히 규칙적이었고, 그건 듣는 사람에게 평온함과 따분함을 가속시키는 주 요소이기도 했다. 하지만 마부석에 앉아있는 사람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라엘라.  말이  들리나요.’

라엘라는 고삐를 쥐고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현 상황을 이야기하기 위해 본래의 라엘라에게 말을 걸었지만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면 당연히 알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직접 대화해서 확인하는 것과는 다른 얘기였다.

본래의 라엘라가 잘못된 건지, 아니면 단순히 이쪽의 기도를 듣지 못하고 있는 건지  방도가 없었다. 새삼 라엘라가 신도들을 가장 잘 챙기는 신들 중 하나라고 해도, 필멸자의 몸에 갇혀보니 얼마나 이들이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가졌을까 절실히 깨닫는 중이었다.

‘내 아이의 고향으로 가면 어떻게든 아이의 정신에 자극이  테고, 그렇다면….’

상처가 아물기 전에 또 다른 상처가 생기고, 그 상처가 아물기 전에 또 다른 상처가 생기고. 그렇게 수십 번, 수백 번이 넘게 계속 상처가 난 자리는 영영 지워지지 않는 크레바스가 되어 있었다.

헨드릭을 만나고  어느 때보다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흉터가 없어지진 않았다. 흉터 위에 인내라는 붕대가, 자기방어라는 가면이, 행복이라는 드레스 때문에 가려졌을 뿐.

카야가 원초의 형태로 돌아간 상황에서 라엘라는 그녀가 깨어나기 전, 가장 오래된 흉터를 아물게 해주고 싶었다.

“멈춰!”
“거기 멈춰!”
“멈추라고 씨발! 말이 말 같지가 않아?”

“으응…?”

무척이나 한적했던 길이었건만 갑자기 길을 가로막고 행패를 부리는 이들이 나타났다. 라엘라는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 싶어 가만히 있었지만, 길을 가로막는 이들에겐 그 모습이 꼭 자신들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이 활을 꺼내고 검을 뽑았다. 딱 봐도 조잡한 무장이었지만 여자 한 명을 죽이기엔 충분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처음엔 왜 길을 가로막고 있는 건지 가만히 지켜보던 라엘라의 눈빛이, 그들이 무기를 꺼내들자 일순간 날카로워졌다.

“라엘라님. 무슨 일….”

“들어가 있으렴.”

“예? 하지만 아까 뭔 소리가 들린  같은데.”

“들어가, 있으렴. 많이 피곤한 것 같은데.”

“예, 예.”

마차 안에 있던 세  중 둘은 급작스런 여행 준비 때문에 피곤했는지 졸고 있는 중이었고, 유일하게 깨어있던 헨드릭도 반쯤 졸고 있었기에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나마 도중에 나와서 파악하려 했지만 라엘라의 기세에 끽 눌려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다가닥-

“옳지. 무서워도 조금만 참고있으렴. 도망가면 안 된다?”

푸르르르-

라엘라는 태연하게 마차를 세우고는 말들을 쓰다듬었다. 방해자들은 마차가 순순히 멈추자 저들끼리 히히덕대다가도 마부로 보이는 이가 너무나 태연자약한 태도를 보이자 다시 불쾌해졌다.

“이봐! 마부! 너! 당장 가진 것 전부….”

“처음이니?”

“뭐?”

“처음이냐고 물었단다.”

라엘라는 여상하게 물었다.

“뭔 개똥같은 소리야? 말투는 또 뭐고? 칼밥 먹고 싶지 않으면 당장 꺼져!”
“얌전히 멈춘 것에 대한 자비라 생각하라고!”
“씨발 얼마 만에 마차냐. 흐흐. 저거 말 두 마리만 해도….”

“처음이 아니구나?”

“아까부터 뭐라 지껄이는 거야 이 씨발새끼가…?”

라엘라가 후드를 벗었다. 그러자 쌍욕을 내뱉던 방해자들이 일제히 입을 멍하니 벌렸다. 침을 흘리는 이도 있었다.

“너희들의 눈 속에 그릇된 욕망이 가득하구나.”

라엘라가 오른손을  펼쳤다. 그러자 허공에서 거대한 철퇴가 나타나 그녀의 오른손에 정확히 안착했고, 왼손엔  손 크기의 책이 안착했다.

“어디  번.”

그러자 책이 촤라락 펼쳐지더니 글씨가 저절로 적혔다. 라엘라의 눈이 글자를 훑을수록 목소리가 점차 가라앉았다.

“약탈 및 약탈 시도 32회, 재물손궤 12회, 인신매매 10회, 강간 14회, 살해 13회. 회개 시도 없음. 반성의 여지는… 전무하구나.”

텁-

책이 닫히는 소리에 방해자, 도적들이 몸을 흠칫 떨었다.

“어째서 이런 극악무도한 것들이 버젓이 활동하고 있는 건진 모르겠지만….”

책을 허공에 집어넣은 라엘라가 철퇴를 앞세우며 한걸음 나아가자 굳어있던 도적들도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 라엘라의 고운 눈썹이 찌푸려졌다.

“멈추거라.”

“그….”

“다물거라.”

“…!”

라엘라의 말에는 힘이 담겨있었다. 그녀는 헨드릭과 그의 동료에게는 최대한 존재감을 낮추며 부드럽게 대했지만, 눈앞의 도적들에게는 그런 배려가 전혀 필요 없었다. 비록 필멸자에게 융합된 파편에 불과하지만 그녀는 여신이었다.

그 누구에게나 따스한 자애를 베풀어 주는 것에 반해 함부로 관용하지 않는 이 여신은 방금 전 그들을 관용하지 않겠다고 결정했다.

마땅히 그녀의 자애를 누릴  있는 수십 명 이상이 이들에 의해 목숨을 잃거나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은 것에 마음이 아팠다. 눈앞의 도적들이 저런 행동을 하게  상황 자체도 마음이 아팠다. 그녀의 자애로운 마음은 도적들의 사정에도 잠시 이입하고 말았지만, 그럼에도 결정을 번복하는 일은 없었다.

따스한 자애와 냉철한 관용을.

라엘라는 철퇴를 든 오른팔을 가볍게 우에서 좌로 휘둘렀다.

단 일격.

꽤 높은 현상금이 붙어있던 도적단은 그 일격에상반신이 죄다 날아가버렸다.  명도 빠짐없이 모조리.

“쉬이이… 착하지. 무서운  보여줘서 미안하구나. 다시 움직일 수 있겠니?”

푸르르르….

마차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까와 똑같은 속도로 나아갔다. 말들을 이끄는 마부도 그러했고, 마차 안에서 졸고 있던 이들은 여전히 졸고 있었다.

덩그러니 하반신만 남은 시체들만이, 수도원의 기둥처럼 굳게 서 있었다.


**


어쩌다보니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여행 계획을 짰지만, 세일럼을 처음으로 벗어나는 것이었다. 나름 설레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전자는 세일럼 밖은 어떻게 생겼을까에 대한 호기심이었고, 후자는 과연  이곳에 떨군 놈이 날 가만히 내버려둘까에 대한 노파심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기우였다. 이 세계는 생각 이상으로 더 볼  없었다. 사람도 적었고 문명의 수준 또한 그러했다. 애초에 기대를 엄청 많이 한  아니었지만, 세일럼이 기이할 정도로 발전이 몰빵된 도시라는  느꼈다. 그리고 더 롱 테러의 좁디좁은 배경인 세일럼을 벗어났는데 어떠한 제한이 없었다. 허무할 정도였다.

‘살기 좋은 세상은 아니긴 해…  여자들이 아니었으면 거들떠도 안 봤을 정도로.’

카야의 고향은 세일럼에서 꽤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녀의 고향에서 가장 가까운 영지가 세일럼에서 대략 2주일 가까이 걸릴 거라 했고, 그 영지에서도 며칠은 더 가야한다 했다.

그랬기에 우리에게 남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많은 시간이었고, 맨 처음엔 용사대와 던전에 대해 이것저것 고민하던 나는 곧 때려치우곤 즐거운 망상을 하곤 했다.

지금 하고 있는 ‘현대 지구에서의 생활 망상’이 그러했다.

- 미안… 집이 너무 좁지….
괜찮습니다. 오히려 더 가까이 붙을  있어서 좋습니다.
- 잘만 하면  같이 잘  있지 않을까요?
- 저 좁은 침대에?
- 대장님이 양팔로 두 명을  안고, 나머지 한 명이 대장님 몸에 올라타면….

망상은 엉터리여도 괜찮아서 망상이었다. 던전을 모조리 격파하고 내가 살던 원룸에 함께 전이된다. 안 그래도 좁은 방에 무장을 한  명이 들어서자 대번에 갑갑한 느낌이 든다. 방주인인 나는 여관만도 못한 방이라 미안해하는데 그녀들은 오히려 날 위로한다.

- 대장, 물은 어떻게….
- 아. 이거 이렇게 하면 돼. 그리고 이건 샴푸라고 머리 감는데 쓰면 되고, 얼굴은 여기 폼 클렌저, 몸은 바디 워시로….
 전용 머리 전용 얼굴 전용 비누가 따로 있는 것입니까?
- 일단 써봐.
- 이런 향기가…?
- 근데 왜 냉수로 틀었어. 차갑게.
- 온수가 어떻게 꼭지에서 바로….

샤워기와 온수, 그리고 현대 화학물질의 충격에 빠진 동료들.

이게 대장이 입던 옷….
- 스읍, 하아-
- 킁킁, 이건 꼭 무리에서 낙오된 수컷의 냄새가 진하게… 앗. 미안해.

샤워를 마치고 나온 그녀들에게 당장 입힐 옷이 없어서 내가 입던 셔츠와 반바지를 입은 동료들. 집구석아싸가 입었던 구질구질한 옷들도 그녀들이 입으니 날개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여전히 말이 통하네? 이거 읽을  있어?
- 더 롱 테러?
- 한글 오피스?
- 메모장?
- 직박구리? 이건 뭐야?
- 아니! 그거 말고!

내가 그랬듯, 그녀들 또한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음을 깨닫고 기뻐한다. 참으로 편의주의적인 생각이 아닐 수 없었다. 뭐 어떤가. 내 망상인데.

- 이게… 정녕 닭이란 말입니까?
 커다랗고 알록달록한 원반은 뭐예요?
생긴 건 구정물같이 생겼는데… 꺄앗!

K-치킨과 피자, 그리고 탄산음료를 맛본 그녀들은 각양각색의 감탄사를 외치며 허겁지겁 위장에 쑤셔넣는다.

- 그냥 다 같이 자면 안 돼요?
- 침대무너져.
- 순서대로 하는 게 어떻습니까.
- 그러지 말고 제비뽑기로 정하자! 한 명은 같이 자고 두 명은 바닥에서 이불 깔고 자면 되잖아!

나와 함께 자기 위해 아웅다웅하는 동료들, 아니 여자들을 괜히 뿌듯하게 바라본다.

- 와아아!! 유스티티아님 최고!!!
- 이럴, 수가….
- 칫.

운이 좋은 셰이가 당첨을 뽑았고, 카야와 일루미나는 아쉬운 티를 팍팍 내며 이불을 깐다. 나는 셰이를 품에 꽉 안으며 그녀에게서 나는 바디 워시 향기를 만끽한다.

대장님.
- 난 이제 대장이 아니야.
- …네에?!
- 여긴 던전 같은 것이 없으니까. 공포 숭배자같은 흉악한 이단들도 없고. 그러니… 앞으로는 이름으로 불러.
- 정말요?
그럼.
- …유진님.
- 님도 빼도 되는데.
- 그건 포기할 수 없어요!

셰이와 즐거운 말들을 속삭이며, 그녀의 체온을 느끼며 잠에 든다…….


쿵!

‘스읍!’

바퀴가 돌이라도 밟았는지 마차가 덜컹거렸다. 뒤통수가 마차 벽에 부딪치며 집중력이 깨졌다.  반팔티와 반바지를 입고 곤히 잠들던 셰이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는데… 상상력이 좋은 편이긴 하지만 한 번 집중이 깨진 망상을 그대로 떠올리는 건 쉽지 않았다.

‘그나저나, 슬슬 야영할 때가 된 거 같은데?’

아주 작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으로 판단하건대 한 시간 정도 지나면 해가  것 같았다. 용사대의 대장은 나였지만, 그래도 여신님이 계신데 내 마음대로 결정내릴  없는 법.

나는 라엘라님의 의견을 묻기 위해 마부석으로 향하는 문을 열고 상반신을 들이밀었다.

“라엘라님.”

“….”

“라엘라님?”

“하아, 하아….”

“라엘… 라엘라님!!!”

고삐를 겨우 쥐고 계시던 라엘라님이 온몸에서 땀을 비 오듯 흘리고 계셨다.

“맹랑한, 아이야….”

“라엘라님!”

“난 괜찮으니, 그리 호들갑 떨지 않아도 괜찮….”

괜찮긴 뭐가 괜찮아요! 누가 봐도 안 괜찮구만!

내 얼굴을 보자마자 라엘라님이  쓰러지셨다.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셰이! 일루미나! 일어나! 어서!”

“대장님…?”

“라엘라님이 쓰러지셨어!”

우당탕탕-

긴급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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