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6화 〉청산(5)
문이 열렸다는 것은 곧 카야의 몸에 강림한 라엘라님이 직접 문을 여셨다는 뜻.
상정할 수 있는 최악의 경우는 아니었기에, 일단 메시지들을 한쪽에 치워놓고 문이완전히 열리기를 기다렸다.
“….”
“….”
“….”
문이 완전히 열리고 나타난 ‘인물’의 모습을 본 우린 어떠한 말도 꺼내지 못했다.
내 눈앞에 나타난 저 인물은.
카야인가?
아니면 라엘라님인가?
카야라 하기엔 얼굴과 분위기와 체형이 꽤 바뀌어있었고, 라엘라님이라 하기에도 여신으로서의 격이 거의느껴지지 않는….
‘아. 설마. 화신이라는게…?’
어찌됐든 이 또한 강림의 영향일 터.
나는 유스티티아님께 그랬던 것처럼 무릎을 꿇으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빠르게 날 붙잡는 손길에 가로막혔다.
“그러지 말거라.”
“어어….”
“많이 당황스럽겠지. 이해한단다.”
라엘라님이 미소를 지으셨다.
“설명하려면 꽤 걸릴 텐데, 이왕이면 편한 장소에서 하면 좋겠구나.”
라엘라님의 말씀에 우린 세스티아가 우리에게 내준 방으로 라엘라님을 모셨다. 라엘라님은 햇빛이 내리쬐는 창가에 다소곳이 앉으시더니, 조곤조곤 현 상황에 대해 설명해주셨다.
“그, 그럼 카야 언니는.”
“지금은 완전히 기절한 상태라 내가 전면에 나선 상태란다. 평상시엔 내 아이가 주도권을 쥐고있을 거고.”
“그럼, 그 육체는 어찌된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원래대로라면 나는 내 아이에게 흡수되어 사라졌어야 했단다. 그럼 내 아이는 훨씬 더 강력해진 신체와 치유 능력을 보유하게 됐을 거고. 하지만 내 아이가 한사코 그럴 수 없다고 하더구나. 그래서 한 신체에 두 개의 존재가 공존하게 되었어. 신체에 대한 주도권은 아이가 가지고 있지만, 내 존재 자체가 평범하지 않기 때문에 신체가 내 영향을 받아 어정쩡하게 변하게 된 거란다. 이건 나라도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니….”
어깨에 닿을 듯 말듯했던 머리카락은 어깨 밑까지 자라있었고 군데군데 연녹색으로 물들어있었다. 가슴과 골반이 최소 한 치수는 커졌으며, 손바닥의 굳은살이 다 없어져있었다. 얼굴은 거의 그대로였고 인상이 약간 부드러워졌지만… 눈은 그렇지 못했다. 오른쪽 눈에 녹색 눈동자가 박혀있었다. 흡사 겨울과 봄이 공존하는 느낌이었다.
“라엘라님께선… 괜찮으신 겁니까?”
“나? 아니면 저 위에 있는?”
“둘 모두입니다.”
“후후… 걱정해주는 거니?”
“당연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카야가 제 소중한 동료라 할지라도 라엘라님께서 이 일로 인해 잘못되신다면 이 세계에도 크나큰 악영향이 갈 것이고, 카야 또한 평생의 죄업을 지고 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저희의 욕심 때문에 저흴 돌봐주셨던 여신님께서….”
“맹랑한 아이야. 나는 괜찮아.”
“라, 라엘라님?!”
“너는 내 아이가 말했던 대로, 자상하구나.”
졸지에 라엘라님의 품에 안기고 말았다. 카야의 몸에 가까웠기 때문에 라엘라님의 신체는 아니었지만, 그런 기분이 들었다.
안기는 순간.
모든 걸 내려놓고 싶고 휴식을 취하고 싶은… 응석을 부리고 싶을 정도로 편안한 기분 말이다.
“어쩌면 위쪽의 라엘라는 날 부러워하고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불완전하게나마 지상에서 너희들을 직접 바라볼 수 있게 되었으니.”
“라엘라님.”
“그러니 내 걱정은 말고, 정진하려무나. 한 번을 잘하기 위해 열 번을 노력하기로 하지 않았니?”
“…맞습니다.”
“오히려 너희들이 지금까지 겪어온 일들과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에 비하면, 내가 겪는 대가는 그리 무겁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너희들을 돕고 축복한다는 명분으로 너희들을 사지로 밀어넣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그런 말씀 마십시오, 라엘라님. 저는 원래부터 저 빌어먹을 던전과 그보다 수천 배는 더 빌어먹을 공포새끼를 죽이기로 결심했었습니다. 딱히 여신님 책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후후….”
라엘라님은 그저 웃으셨다. 날 품에 안은 채 내 머리를 쓰다듬는 게 진짜로 어린 아이를 다루는 것 같았지만… 싫지 않았다. 뿌리치고 싶지 않았다. 굳이 비율로 표현하자면 지금 카야는 예전에 비해 0.8카야 같은 느낌인데, 그 약간의 변화에서 발생한 갭이 장난이 아니었다.
“유스티티아의 아이야.”
“네, 라엘라님.”
“신체가 바뀌어서 내 아이가 당분간은 많이 헤맬 것 같은데, 네가 조금 신경써주었으면 좋겠구나.”
“물론입니다! 완벽하게 적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고맙구나. 그리고 프리실렌의 아이야.”
“프리실렌의 아이…요?”
“자유와 선율을 사랑하는 너희들의 수호자란다.너 또한 내 아이의 곁에서 혼란에 빠져있는 내 아이의 지식을 제대로 바로잡아줄 수 있겠니?”
“네, 네. 그럴게요. 여, 여신님.”
“착하구나.”
라엘라님은 셰이에게 신체의 적응을, 일루미나에겐 지식의 적응을 부탁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날 바라보시고는….
“맹랑한 아이야.”
“예, 라엘라님. 뭐든 말씀하십시오.”
“너는 내 아이의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단다.”
“…예?”
“그게 내 아이가 가장 원하는 것이니까. 그거야말로 내 아이가 가장 힘을 낼 수 있는 환경이니까. 이해하겠니?”
“아, 저. 그.”
“하고 싶은 말은 더 많겠지만,피곤하구나. 쉴 수 있게 해주겠니?”
“무, 물론입니다!”
“고맙구나.”
라엘라님은 그 자세그대로 눈을 감으셨다. 나는 조심스럽게 여신님의 손을 걷어내고 품에서 빠져나왔다. 몹시 허전한 느낌이 들었지만, 꾹 참고 여신님을 침대에 조심스럽게 눕혀드렸다. 그제서야 꾹 참고 있던 한숨을 터뜨렸다. 한 차례 폭풍이 지나간 것 같았다.
“대장님….”
“어, 셰이야.”
“앞으로… 어쩌면 좋을까요? 카야 언니는, 앞으로도 계속 카야 언니인가요?”
셰이의 눈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이젠 더 이상 예전의 카야라고 할 수 없게 변해버린 카야. 원래라면 감히 같은 눈높이에서 대화하는 것조차 불가능했을 지고의 존재를 몸속에 품고 있는 카야.
그런 그녀가 훗날 완전히 다른 존재로 변해버릴 가능성. 이미 그녀의 몸속에 라엘라님이 함께한다는 것을 알아버렸는데 그녀를 이전과 같이 대할 수 있느냐에 대한 것. 카야가 다치고 고통 받으면, 그녀 안의 라엘라님도 똑같이 고통 받을 것이라는 불안감.
셰이의 시선엔 그 모든 우려가 담겨있었다.
“셰이.”
“네….”
“셰이는 셰이야.”
“네?”
“옛날의 셰이도, 지금의 셰이도 내겐 셰이야. 네게 흉터가 있든 없든 내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셰이야. 그리고… 그건 카야도 마찬가지야.”
“아….”
“이것이 카야의 운명이라면, 이 또한 내가 품어야하는 일이야. 결국 그녀를 말리지 못하고 응원해준 것도 나고, 카야 또한 스스로의 의지로 라엘라님의 강림을 간절히 원하고 받아들였으니.”
조금, 아니 많이 신성해졌을지라도….
카야는 카야다.
내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
[긍정적 특징 : 새로운 신념*]
- 유진과 같이 출격할 시 데미지 +10%
- 속도 +1
- 확률적으로 적의 방어력을 6만큼 무시함
[긍정적 특징 : 라엘라의 화신*]
- 본 특징 습득시 임의의 부정적 특징 한 개 삭제
- 향후 습득할 부정적 특징 한 개 방어
- 최대 체력 +5
- 공격력 +5
- 스킬 ‘현신’ 생성
- ??? ??
[부정적 특징 : 일방통행*]
- 유진의 상태에 따라 영향을 받음
“홀-리.”
카야에게 생긴 특징은 셰이보다 더했다. 얼핏 단순비교하면 유스티티아의 강림체가 라엘라의 화신보다 뒤쳐지는 것 같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현신’이라는 스킬이 있었고, 미확인 옵션도 존재했다. 이렇게 뽕이 차오르는 특징에, 그것도 맨 밑줄에 미확인 옵션이 달려있다? 필시 대단한 것일 게 틀림없었다.
거기에 새로운 신념이라는 특징도 미쳤다 소리 나올 정도였다. 정황상카야와의 관계도가 6이 되면서 생긴 특징 같았는데, ‘일방통행’ 특징을 보는 순간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이상한 관계도도 그렇고 특징도 그렇고 라엘라님 말씀도 그렇고, 기존의 ’집착‘도 그렇고….’
고개를저었다.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카야가 날생각하는 마음은 진심이었다. 카야는 카야라고, 그녀가 어떤 모습이 되든 포용하겠다고 다짐한 건 다름 아닌 나지 않은가.
여신 강림이라는 초대박 이벤트를 둘이나 성공시켰으니, 이제 나는 그들을 걱정하는 남자가 아니라 이끄는 대장이 되어야했다.
예산을 어떻게 배분해야 할 것인지. 상대적으로 뒤쳐진 나와 일루미나는 어떻게 강화해야 할 것인지. 2구역에서 나타났던 괴물들의 스펙 상승폭을 생각했을 때, 3구역의 일반 및 정예괴물을 상대하기 위해서 최소 스펙은 어느 정도까지 끌어올리는 게 맞는지. 남은 자리에아티팩트는 어느 것을 착용하는 것이 최선일지 등등 생각할 것이 많아졌다.
“맹랑한 아이야.”
“라엘라님?”
“내 아이가 깨어날 생각을 않는구나.”
허나 그런 내 고민들은 라엘라님의 말에 후순위로 밀려났다.
“그게 지금 무슨 말씀이십니까!”
“진정하렴. 내 아이가 위험하다는 것은 아니니.”
“그럼 어째서….”
“나는… 내 아이의 고향에 가야될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구나.”
“카야의 고향 말입니까?”
“으응. 내 아이의 정신, 그 근원에는 고향에 대한 흉터가 깊게 새겨져 있더구나. 내가 강림하고 아이와 융합하고 공존하는 과정에서 아이의 정신이 상당히 흔들리고 충격을 받은모양인데, 그때 깊은 곳에 숨어있던 흉터가 위로 떠오른 것 같아.”
“지금 카야가 계속 의식을잃고 있는 게, 강림 때의 충격 때문이고 그 과정에서 카야가 어렸을 때 겪었던 안 좋은 기억들이 그녀를 또 괴롭히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내가 느끼기엔.”
“…카야가 라엘라님의 길을 따른 지 거의 40년이 지났다 했습니다. 그녀의 고향에 가는 것 자체는 나쁠 게 없지만, 그곳에 가는 게 어찌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십니까? 괜히 카야의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게 아닐지.”
“맹랑한 아이야. 내 아이는 그리 약하지 않단다.”
“하지만!”
“여신으로서의 강권하는 것이 아니라 부탁하고 싶구나. 내 아이의 남자인 너에게, 네가 표현한 것에 따르면 너의 장…모로서.”
“….”
“안 되겠니?”
저 얼굴로, 저 표정으로, 저 어조로.
‘장모로서 부탁하고 싶다’고 말하면.
그 누가 거절할 수 있을까?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어느 새 카야의 고향으로 떠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고, 셰이와 일루미나는 예정에 없던 여행 준비를 도와야 했다.
그런 우리를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시며 직접 배낭을 꾸리시는 라엘라님의 모습은 상당히 즐거우신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서글퍼보였다.
“준비가 끝났습니다, 라엘라님.”
“으응. 부탁을 들어줘서 고맙구나.”
“부탁이라니, 아닙니다.”
“후후… 맹랑한 아이야. 이 마차, 나도 한 번 몰아보고 싶은데… 그래도 되겠니?”
“라엘라님께선 굳이그러지 않으셔도.”
“안 되겠니?”
급하게 구한 이두마차에 탑승한 우리는 수도원에서 전해들은 카야의고향으로 향했다. 무려 여신님이 직접 모는 마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