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55화 〉청산(4) (155/218)



〈 155화 〉청산(4)

‘침착하자. 침착. 침착. 침착. 침착침착침착침착….’

전혀 침착해지지 않았다. 계속 몸에 물을 끼얹으면서도 카야의 몸에서는 계속 식은땀이 흐르고 심장은 정신없이 벌렁거렸다.

[내 아이야.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구나. 준비할 수 있겠니. 사흘 후, 네게 내려갈 테니.]

사흘 전 경애하는 여신에게서 강림 예고를 듣고, 카야는 수도원에 칩거했다.  안에 들어간 순간부터 누구도 마주치지 않고 밥도 먹지 않았다. 오로지 깨끗한 물만 마셨다.  날엔 세 번, 둘째 날엔 여섯 번, 그리고 오늘은 열두 번을 씻었다.

“라엘라님, 라엘라님, 라엘라님.”

잠도 자지 않았다.

계속 기도하고 마음을 다스렸다.

셰이에게 ‘여신님을 강하게 떠올리면서 다른 잡생각을 비워야 한다.’는 말을 들은 탓이었다.

셰이는 강림 직전에 그러면 된다는 뜻에서  조언이었지만, 카야는 3일 내내 그러고 있었다.

‘나는 셰이보다 많이 모자라니까.’

안 그래도 호리호리했던 몸매가 더 쪼그라들었다. 배가 꼬르륵 소릴내며 제발 뭐라도 좀 쳐먹으라고 아우성쳤지만 여태껏 그랬듯 이번에도 무시했다. 물조차 끊은지 오래였다. 이 정도 배고픔이나 목마름을 견디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제 여신님이 강림하시기 직전이었다. 감히 여신님께 요의를 느끼게  수는 없지 않은가.

“제 몸이 부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운명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감내하겠습니다.

카야가 눈을 감은 순간, 여신상이 연녹색 빛을 발했다. 닫힌 눈꺼풀 너머로 빛의 존재를 느꼈지만 카야는 여전히 눈을 감았다. 눈을 뜨고 그 기적을 직접 보고 싶었지만, 그러면 집중력이 저하될  같아서였다.

강림 과정은 유스티티아 때와 비슷했다. 다만 체형과 머리카락의 변화가 극적이었다. 키는 거의 변화가 없었지만 가슴과 하체가 상당히 풍만해졌다. 카야의 몸매가 밋밋한 통짜는 절대 아니었지만, 지금의 변화가 너무 압도적이었다. 과장 좀 해서 머리통만큼 커진 가슴,  벌어진 골반과 큼직한 엉덩이와 허벅지까지. 군살이 없던 카야의 몸에 비해 살집이 좀 있었지만, 그렇다고 단순한 지방덩어리는 결코 아니었다.

헨드릭이 봤다면 건강미와 퇴폐미가 공존하는 지독히 야한 몸이라고 했을 몸매였다.

몸의 변화가 끝나고, 귀가 작아지고 회색 단발 머리는 연녹색으로 물들어 엉덩이부근까지 길어졌다. 그리고 카야의 무뚝뚝하고 차가운 인상이  달라졌다. 누구라도 달려가서 품에 안기고 싶은, 누구라도 자신의 죄를 고하고 싶고 위로받고 싶은 마음이 드는 자애롭고선한 인상의 얼굴로 말이다. 마지막으로 한쪽 다리가 드러나는 드레스가 나타나자 광채가 완전히 사라졌다.

자애와 관용의 여신, 라엘라가 카야의 몸에 강림했다.

강림으로 인한 신체 변화가 끝난 걸 인지한 카야, 아니 라엘라가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눈을 뜨자 따스한 봄을 담은 듯한 녹색 눈동자가 주위를 살폈다.

“으응….”

라엘라는 모든 것이 낯설면서도 그리우면서도 익숙했다. 원래 라엘라가 떼어낸 분신에 가까운 제2의 라엘라는, 신체의 주인에게 말을 걸었다.

“괜찮니?”
[아아… 라엘라님…!]

“으응. 생각보다 괜찮구나. 어디 불편한 데라도 있니?”
[없습니다. 전혀 없습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라엘라님께서  미천한 육체가 불편하지 않으신지 걱정됩니다.]

“내 아이야. 스스로에게 그런 말을 하면  돼.  말을 듣는 이도, 하는 네 자신도 마음 아파지는 이야기잖니?”
[…죄송합니다.]

라엘라는 카야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을 읽었다. 그리고 유스티티아가 말했던 ‘그 기운’ 또한 적나라하게 느낄 수 있었다. 어째서 위험하다 만류했는지, 어째서 빠져나오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는지 말이다.

“아이야.  문을 나가기 전에 하나 묻고 싶은 있는데, 답해줄 수 있겠니.”
[물론입니다. 얼마든지, 무엇이든지 말씀하십시오.]

“만일 내가 계속  몸에 머무를 수 있다면 어떨 것 같니?”
[예?]

“그 대신 넌 온전히 너로서의 모습을 잃게 될 거야.”
[라엘라님,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갑자기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아이야.”

라엘라는 앞에 둥둥 떠다니는 철퇴와 경전을 휙 취우며 말했다.

“직접 강림하니 더욱 확실하게 느껴지는구나. 아이야. 너는, 네 운명의 상대를 위해서라면… 너 자신마저 버릴 생각이구나.”
[…….]

“그리고 그를 위해서라면,  몸에 내려온 나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을 거라는 마음도 느껴지고.”
[라엘라님, 제가 어찌 감히!]

카야는 힘껏 부정했지만 라엘라는 그 부정을 부정했다.

“네게 불경하다 말할 생각은 없단다. 네 의도도 아니었고 애초에 나도 각오하고 내려온것이었으니. 하지만 아이야. 너는 결정해야 해. 내가 이 방을 나서는 순간, 더는 되돌릴 수가 없게 될 거란다.”
[라엘라님… 꼭, 꼭 제가 결정해야 하는 것입니까?]

“으응. 네가 간절히 원한 만큼, 네게 맡길 생각이란다.”
[라엘라님…….]

“무엇보다 아이야. 만약 유스티티아의 아이처럼 되는 것에 만족했다면, 지금 그렇게 고민할 필요도 없는  아니겠니?”

카야는 침묵했다. 라엘라의 말은 송곳 그 자체였다.

카야는 욕심이 들었다.

라엘라님이 정말로 강림하셨으니, 조금만 더. 적어도 유스티티아님께서 강림하셨던 시간보다 좀 더 오래 견디고 싶었다.

불경했다.

라엘라님이 말씀해주시기 전까진 파악조차 못했던 자신의 진짜 ‘욕망’이 드러난 것도 모자라, 곧바로 품어선 안  마음을 품었다. 당장 신벌을 받아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라엘라님이라면… 헨드릭과 관련된 일에 한해서 이런 욕심을 부리는 자신에게 자애를 베풀어주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강림한 이 방에 한해서는 전으로 돌아갈 수 있지만.”

라엘라는 카야의 속마음을 애써 모른 척, 말을 계속했다.

“저 문을 열고 나가면, 아이야, 너는 더 이상 온전한 너가 아니게 될 거란다.”
[온전한 제가 아니게 될 거라는 말씀은…?]

“네 영혼이 내게 먹히든지, 내가 네게 먹히든지, 아니면 둘이 융화가 되든지. 아니면… 견디지 못하고 네 신체가 붕괴할 수도 있단다.”
[….]

“하지만 어떤 형태로든 성공만 하면, 단순히 강림했던 흔적만 남았을 때보다 더 강해질 수 있을 거야. 그래서 이런 말을 하는 거란다.”
[그렇습니까.]

“으응. 이제, 3분정도 남았네.”
[예?]

“제한시간이야. 3분이 지나면, 저 문을 나가지 않아도 되돌릴 수 없게 될 거야.”
[자, 잠깐. 라엘라님!]

카야의 다급한 외침은 라엘라를 제외한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았고, 정작 유일한 청자인 라엘라는 적어도 3분 동안은 사랑하는 아이의 외침을 무시하기로 했다.

그녀는 자신을 닮은 조각상을 보며 복잡한 마음을 다스렸다.

‘전례가 없는 일이야. 타락도 하지 않고, 그렇다고 개종하는 것도 아닌데 새로운 믿음이 공존하는 것은.’

그런 전례가 없는 일이 하필 자신의 아이에게 나타났다는 건 이참에 공포를 확실히 억누르려 마음먹은 라엘라로선 마냥 웃을 수도 없고, 슬퍼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내가 본래의 라엘라에서 떨어져 나온 일부분에 지나지 않더라도, 나 또한 라엘라.  결정이 본래의 라엘라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모르겠지만….’

모든 일엔 대가가 필요한 법.

던전의 최심부에 가까워질수록 개입은 기하급수적으로 더 힘들어지니, 지금의 행위는 미래에 있을 지원 모두를 현재로 끌어다 모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대가 또한 커지는 건 당연했다. 그건 이 세계 모든 이들이 신이라 부르는 라엘라 또한 벗어날 수 없는 순리였다.

‘세상 모든 건 예상한 대로 흘러가는 것보단, 예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더 많아. 그런데도 세상은 어떻게든 굴러가지.’

제대로 된 운명의 길을 걷고 있다면, 지금의 혼돈 또한 조화의 일부가 되리라.

라엘라는 눈을 감았고, 카야는 여전히 침묵했다.

3분이 지나도록.


“아…!”
[아…!]

3분이 지난 순간.

라엘라가 말한 ‘되돌릴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라, 라엘라님!]
“저항하지 말거라! 마음을 열고 순응해! 네 진심을, 네가 진짜로 원하는 모습을 상상하거라!”

몸에서 눈이 부실 정도의 녹색 광채가 발하다가 이내 회색 반점이 나타났다. 신체는 늘어났다 줄어났다를 반복하고 있었고, 녹색 광채와 회색 반점은 땅따먹기라도 하는 듯 마구 뒤엉켰다.

[라엘라님! 이대로 가다간…!]
“아이야. 너는 각오하지 않았니.”
[….]
“아까도 말했듯, 나는 각오했단다.”

한참길항상태를 유지하던 두 상태의 균형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확 무너졌다. 회색 반점이 녹색 광채를 잡아먹으며 신체 또한 카야의 것으로 회귀하고 있었다.

[저는, 저는… 이런 결과까지 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조금이라도 오래 모시고 싶었습니다….]
“자책하지 말거라. 이 또한 너의 운명이라고 생각하면 되지 않겠니.”
[감히 저 따위가…!]
“그런 말은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니? 널 내 품에 거둔 나까지 비하하는 셈이란다?”

라엘라의 목소리는 점점 줄어들었고, 회색 반점의 영역이 8할을 넘어섰다. 카야에 가까운 신체가 더 이상의 변화를 버티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이럴 수는 없습니다… 저 때문에, 제 참람한 욕심 때문에 라엘라님이 이런 희생을 겪으실 수는 없습니다.”
[아이야. 나는 괜찮아.]
“적어도 이런 결과는 싫습니다….”

신체의 주도권이 바뀌었다.

카야는 엄청난 자책감과 자괴감에 휩싸였지만, 지금은 후회하기보다 점점 자신에게 흡수되어 ‘소멸’하는 여신의 기운을 붙잡았다.

[아이야…?]
“이미 저는 제가 아니어도 좋다는 각오를 했습니다. 감히 제게 강림하신 라엘라님을  몸에 가둬버린 건 신벌을 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그래도 소멸하시는 것만큼은 막아야겠습니다.”
[아이야. 위험해. 내가 이대로 사라지는  자연스러운 흐름이 되었고, 이미 현상은 벌어졌어.]
“죄송합니다, 라엘라님. 이미 크나큰 죄를 저지른 이 모자란 딸에게, 영원토록 관용을 베풀지 말아주십시오.”

카야는 라엘라의 만류를 뒤로 한 채 손톱으로 손목을 그어냈다. 그리고는 흘러내리는 피를 여신상에 묻히며 기도하기 시작했다.

“따스한 자애와 냉철한 관용을. 라엘라님. 부디 미천하고 죄 많은 저를….”

**

수술실 근처에서 기다리는 환자의 가족의 심정이 이러할까.

강림처 바로 밖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나는 초조한 마음을 감출  없었다.

“왜 이렇게 떨리지?”

“잘 될 거예요.  될 거예요. 잘 될 거예요.”

일루미나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꼬리를 정신없이 팔딱거렸고, 셰이는 계속 왔다갔다하며 뭐라 중얼거렸다.

 너머가 보이진 않지만 신성한 기운이 강해졌다 약해졌다를 반복하는 것 때문에 초조함이  커졌으나, 모든 일이 끝나기 전까진 절대 들어가지 말라던 경고 때문에 차마 들어갈  없었다.

“어? 끝난, 건가?”
“응? 진짜로?”

계속 왔다갔다하던 셰이가 멈추며 문에 접근했고, 일루미나가 그녀를 따라갔다. 이중에서 신성력에 능통한 건 셰이뿐이었기에, 그녀의 감각은 신용할만 했고 나 또한 문에 바싹 붙어서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긴장감에 침을 삼킨 순간.

[관계도]
카야 : 6★
셰이 : 5*
일루미나 : 4*

갑작스레 팝업한 관계도와 함께.

[긍정적 특징 ‘굳건한 신념’이 삭제됩니다.]
[부정적 특징 ‘흔들리는 신념’이 삭제됩니다.]

연유를 알 수 없었던 특징들이 삭제됐고.

[긍정적 특징 ‘새로운 신념’이 추가됩니다.]
[긍정적 특징 ‘라엘라의 화신’이 추가됩니다.]
[부정적 특징 ‘일방통행’이 추가됩니다.]

경악스러운 새로운 특징들이튀어나왔다.

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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