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화 〉청산(3)
“못 빠져나간다? 그게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야. 네 아이가 가지고 있는 그 이상한 믿음의 기운과 기존에 너를 향한 믿음이 공존하는 형태야. 너를 향한 믿음으로 널 받아들였다가, 그 맹랑한 아이를 위한 믿음으로 널 가둬버릴 수가 있다는 뜻이지.”
“그런… 말도 안 되는 얘기야. 듣도 보도 못했어.”
“나도 그래. 근데 직접 강림해서, 가까이서 보니까 확실히 느껴지더라고. 네 아이는… 으음….”
“왜 말을 흐려?”
“에이, 직설적으로 말해서. 누군가 네 아이에게 너랑 그 맹랑한 아이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고 요구한다면, 망설임 없이 그 맹랑한 아이를 고를 수준이야. 아니지. 그냥 그 아이가 원하는 방향으로 행동한다고 해야 하나.그 아이가 배교하라면 널 저버릴 것이고, 타락하라고 한다면 타락할지도 몰라. 네 아이에게 있어서 너에게로 향하는 신앙심은, 맹랑한 아이를 돕기 위해 수단화되었어. 정작 네 아이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지만 말이다.”
라엘라의 얼굴이 바짝 굳었다.
“네 아이는 널 여전히 경애하고있어. 변하지 않았지. 근데 맹랑한 아이를 향한 ‘믿음’, 아니 그건 이미 맹목적 집착의 영역이라 할 수 있겠네. 어쨌든 그 집착이 무럭무럭 자라서 잡아먹힌 거야.”
“그럼, 그럼 네 아이는?”
“내 아이는 네 아이보다는 덜했지. 그래서 그게 더 커지기 전에 황급히 강림했던 거고. 지금은 얼추 균형이 맞는 상태에서 유지되고 있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네 아이는… 내가 내 아이에게 강림하고 나서 그 이상한 기운이 급속도로 자라났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그런…그럴 수가. 아니, 그래도 티티가 하는 말이니까 거짓은 아닐 텐데… 난 어찌 해야….”
“어차피 라엘라 너, 강림하는 거에 소극적이었잖아. 내가 먼저 강림해보고 이상 있으면 안 하기로 했으니, 안 하면 되는 거잖아.”
라엘라는 구슬에 비친 자신의 아이를 바라봤다. 최근 아이의 기도를 전부 무시했다. 강림할지 말지 정해지지도 않았는데 괜한 기대감이나 실망감을 주기 싫어서였다.
유스티티아가 강림을 끝내고 나서 잠시 고민해보고 말해주겠다고 할 때까지 기다렸건만, 들리는 답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강림은 위험해보여.”
“내 아이가… 가장 위대하지만 고통스러운 위업의 길을 걷고 있는 내 아이가, 간절히 바라고 있는데… 괴로워하고 있는데….”
“다른 방식으로도 도와줄 수 있잖아. 교단에 말해서 물질적인 지원을 명할 수도 있고, 그걸 통해 새로운 기술을 익히게 해도 되고.”
“그걸로는 내 아이의 바람을 충족시키지 못 할 텐데.”
“야. 강림이 무슨 산책하는 것 마냥 쉬운 거야? 나도 상당한 대가를 지불한 거잖아. 도박한 셈이라고. 근데 가뜩이나 신도도많아서 현상 유지도 벅찬 네가, 이 이상 특정 개인에게 몰아주는 건 위험해. 차라리 위험부담이 없다면 또 모를까….”
유스티티아의 말은 구구절절 다 옳았다. 하지만 라엘라는 가슴이 답답했다. 유스티티아가 ‘가능성을 봤다.’고 말한 것 이전에도, 그녀는 은근히 힘을 써서 한 번씩 헨드릭과 카야를 돕곤 했었다. 헨드릭이 극한의 상황에서 속으로 라엘라님이라 외치며 찬양한 게 전혀 헛소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카야가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스킬을 사용할 때.
아이의 기도에 담겨있는 절박함이 극에 달해 도저히 지켜만 볼 수 없을 때, 힘을 불어넣어준 것만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그때를 생각해보면, 더 조급해졌다.
아이의 일행이 1구역에 있을 때도 그랬고 2구역에 있을 땐 더 심각했는데, 앞으로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게 되면 자신의 개입은 거의 불가능해질 테니까. 그래서 이번에 고통을무릅쓰고서라도 최대한 자신의 힘을 주고 싶었던 것이었다. 유스티티아처럼.
- 라엘라님, 라엘라님, 라엘라님.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의 아이는 간절히 원하고 또원했다. 자신의 강림을.
원래라면 감히 상상조차 못하고 또 바라지도 못했을 그 숭고한 기적을, 자신의 남자를 위해서.
‘세일럼에서 운명을 찾게 되리라 계시를 말한 건… 다름 아닌 나야.’
잠깐의 변덕과 우연이 겹쳐 내렸던 계시가 이런 흐름을 만들었다.
아이가 더 이상 자신만을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이 서운하면서도, 드디어 스스로의 의지와 소망을 구축한 것이 라엘라는 기뻤다. 동시에 책임감을 느꼈다.
“너… 할 생각이구나.”
“으응?”
“에휴, 네 눈. 지금 맛이 가있거든.”
“내, 내 눈이 어때서.”
“가끔씩 네가 그런 표정 지을 때마다 꼭 사고를 터뜨렸지. 내가 지금까지 네 뒤처리를 몇 번이나 했다고 생각해?”
“….”
“지금의 넌 내가 말린다고 들을 상태가 아니거든. 난 충분히 경고했다?”
- 같이 기도해보자. 둘이 안 되면 셰이도, 일루미나도 같이. 그리고 혹시 알아? 라엘라님께서 더 큰 선물을 위해 뜸을 들이시는 것일 수도 있어. 그러니까 혼자 끙끙 앓지 말자. 응?
그 순간 맹랑한 아이의 말이 들렸다. 그리고 그 말을 듣고 자신의 아이의 얼굴에 미소가 띄는 것이 보였다.
라엘라는 결심했다.
**
카야와 진솔한 대화를 나눈 이후,나는 매일같이 라엘라님 수도원에 들러 진심으로 기도했다. 그 전까지의 기도들이 진심이 아니었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뭐라 해야 되나. 약간 가벼운 느낌의 기도도 있었고, 막연하게 찬양만 하고 끝난 기도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기도는 달랐다.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오로지 카야를 위한 기도였다.
“강림이라는 게 밥 먹는 것처럼 쉽게 되는 일이 아니라는 잘 알고 있습니다.카야가 적합한 강림체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셰이도 강림체가 되었는데 카야는 안 될 게 뭐냐, 무작정 강림해주십사 떼를 쓰는 건 라엘라님, 아니 장모님이 곤란하실겁니다.”
내 팔뚝만한 라엘라님 조각상 하나와 경전 한 권만이 덩그러니 놓여있는 조용한 기도실. 그곳에서 조각상을 진짜 여신님이라 생각하며, 대화하듯 기도하는 중이었다.
“지금껏 라엘라님의 말씀을 직접 들어본 적은 없지만 간접적으로 라엘라님을 느낀 적은 몇 번 있습니다. 로자리오에 맹세할 때도 그렇고, 카야가 철퇴를 휘두를 때도 그렇고, 던전 안의 휴식처에서도 그랬습니다. 그리고 카야뿐만 아니라 세스티아를 통해서도 라엘라님의 자애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자애와 관용의 여신.
우스갯소리로 철퇴를 통한 자애라고 몇 번 생각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무지함에서 파생된 농담이었다. 라엘라님이 어째서 자애와 관용의 여신이 되었는지를 경전을 통해 알게 된 이후로,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은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카야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지만, 그녀를 이끄는 제가 여러모로 부족한 탓에 고생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계속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물론 열 번 노력해도 한 번 잘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 한 번을 잘하기 위해 열 번, 열 번이 안 되면 백 번을 노력할 것입니다.”
3구역.
몇 천 시간을 플레이했던 나조차 조금만 실수하면 바로 훅가버리는 미쳐버린 구역.
그나마 게임같았던 1구역과 좆같음이 물씬 올라오는 2구역을 지나고, ‘좆망겜’소리가 한 방을 돌파할 때마다 튀어나오는 마의 3구역.
거기에 한 번도 플레이해보지 못한 미지의 4구역까지.
“지금껏 저희를 지켜봐주시고 도와주셨던 것처럼, 앞으로도 그래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구역과 2구역도 그렇게 좆같았는데, 3구역은 어떨지. 4구역은 또 어떨지.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절대적인 존재에게 기도한다는 건 생각보다 마음에 위안을 가져다주는 행위였다.
당장 해결되는 것은 없지만, 여신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실 거라 생각하는 그 자체만으로 뭔가 내 일이 잘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내일 또 오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오늘의 기도를 마치고 펼쳐두었던 경전을 원위치 시키려는 그때였다.
[아이야.]
“흐억!”
엉거주춤 일어났던 나는 갑작스레 뇌리에 파고드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우당탕탕 넘어지고 말았다. 주위를 둘러봤으나 바뀐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여신상의 얼굴 부분이 아주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서, 설마….”
[오래는 이야기 못 하겠구나.]
목소리는 그 어느 목소리보다도 따스했다. 귀랑 마음이 사르르 녹을 것만 같았다.
[내 아이에게 전달해주겠니. 준비하는 것이 있어서 미처 대답해주지 못했다고.]
“아, 아아.”
[항상 지켜보고 있다고. 조급해하지 말라고. 사랑한다고.]
따스하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엔 걱정과 애정이 담겨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여신상 앞에 무릎을 꿇고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고있었다.
[그리고… 유스티티아에겐 질 수 없지 않겠니?]
“예?”
[후후….]
여신님께선 귀르가즘, 아니 뇌르가즘을 일으키는 웃음을 끝으로 침묵하셨다.
“씹, 아니 라엘라님! 아니, 와… 이러고 여관까지 어떻게 가지? 미쳐버리겠네.”
바지 앞섶이 찐득거렸다…….
**
“라엘라 이년아… 새삼스럽긴 하지만 넌 진짜 미친년이야.”
“말이 심하잖아, 티티! 난미치지 않았어.”
“그래. 미치지 않았네. 단단히 미쳤지.”
“왜…? 그렇게까지 말할 일이야?”
“아니! 하!”
유스티티아는 라엘라, 정확히는 라엘라바로 옆에 붙어있는 두 번째 라엘라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신성과 존재를 분리해서 강림시키겠다니, 미쳐도 단단히 미쳤지 그럼!!!”
“이쪽도 진짜 나니까 내가 강림하는 거나 다름없고, 최악의 경우에도 일부분만이 손해 보는 거잖아. 좋은 생각이라고 생각했는데….”
“좋은 생각은 무슨!”
유스티티아가 뒷목을 주물렀다. 왜 허구한 날 수많은 인간들이 분노에 휩싸여 몹쓸 짓을 저지르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진짜로 잘 생각해!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냐! 단순히 네 일부분을 떼어준다는 개념이 아니라고! 자칫 잘못하다가 네 일부가 너의 개념을 침범할 수도 있고, 또 네 일부와 결합해버린 저 아이가 어떻게 될지 상상은 해보고 저지른 거야?”
“걱정해줘서 고마워, 티티.”
“아.”
유스티티아는 탄식했다.
자신을 분리해서 강림시킨다는 미친 짓까지 저지르려 하는데, 이제 와서 자기 말을 들어먹을 리 없는데 이렇게 열 내는 게 우습게 느껴졌다.
‘예전부터 그랬지… 세상 온순하고 무던하고 착한 년인데 한 번 꽂히면….’
생각해보니 라엘라의 아이도 맹랑한 아이에게 품은 집착이 기이한 ‘믿음’으로까지 번지지 않았던가.
‘그 어머니에 그 딸이네 진짜.’
유스티티아는 멍하니 라엘라들의 대화를 지켜봤다.
“라엘라. 준비됐어요?”
“네, 라엘라.”
“몇 번이고 말했지만, 영영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어요.”
“각오하고 있어요. 티티가 그랬듯, 놈을 무찌르기 위해선 저도 대가를 치르고 싶으니까요.”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라엘라.”
“미안해하지 말아요, 라엘라. 제가 원해서 하는 일이니까요.”
“고마워요. 아이에겐 말해두었어요. 이제 곧 재계가 끝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잘못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저나 아이에게나.”
“믿어요.”
유스티티아는 생각하기를 포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