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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3화 〉청산(2) (153/218)



〈 153화 〉청산(2)

‘와씨, 카야한테는 함부로 장난 걸면 좆되겠네.’

카야가 휘두른 철퇴에 나무가 박살났다. 나무 크기가 그리 작지도 않았는데… 아무튼 박살나면서 비산한 파편  하나가 내 볼을 스쳤다. 반사적으로 얼굴을 틀어서 스친 거지, 반응 못했으면 좀 위험할 뻔했다. 볼이 상당히 화끈했지만, 카야의 놀란 얼굴이 웃겨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물론, 내게 멧돼지처럼 달려오는 카야의 기세는 웃기지 않았다.

“대장! 대장!!”

“그래, 카야. 어디 있나 했더니 여기서 땀 흘리고 있었….”

“죄송, 죄송합니다! 당장 여관으로 돌아가서…!”

“뭐 이 정도 상처가지고 그래. 이 정도면 침 바르면 나아. 아. 카야가 발라주면  빨리 나으려나?”

“대장!”

“괜찮아. 진짜로.”

무시할 정도의 상처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막 엄청 심각한 상처도 아니었다. 내 상처를 보고 안절부절못하던 카야의 어깨를  잡아눌렀다. 그제서야 그녀의 시선이 내 눈을 향했다.

“할 말이 있어서 찾았어.”

“돌아가고 나서 대장 상처 치료하고….”

“기왕이면  둘이 얘기하고 싶어서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왔지. 마침 조용하고  좋네.”

잡초 위에 적당히 앉았다. 볼에 흐르는 피가 거슬려서 소매로대충 닦아냈다. 카야가 기겁하며자기가 닦아내려 했지만 굳이 그녀의 손이랑 옷까지 더럽힐 필요는 없었다.

“카야.”

“예, 대장.”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고민이라니, 딱히 그런 건 없습니다.”

“근데 왜 이렇게까지 해?”

“예?”

“저번 던전행 전까지만 해도, 단련을 이정도까지 하진 않았잖아. 게다가 지금은 회복 및 재정비기간인 걸 생각하면.”

“던전에서 튀어나오는 괴물은 점점 강해지고, 던전의 기운은 더 음습해지고 치명적으로변하지 않습니까. 몸은 다 회복됐으니, 다음에 갈 때를 대비해 지금부터라도 꾸준한 단련을….”

“내가 아는 카야라면 내가 갑자기 찾아왔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당황하진 않았을 거야. 나무를 박살낼 정도로 말이지.”

“대장.”

“정말로 고민 같은 게 없다면 내가 괜한 신경을 쓴 거겠지만, 만약 있다면… 혼자서 끙끙 앓고 있다면 나한테 공유해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어.”

셰이는 자신을 되도록 언급하지 말아달라 했으니, 이 정도가 지금 내가 말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나한테 모든 비밀을 까발리라는 얘기는 아니야. 그냥… 나라면 들어줄  있고, 어쩌면 해결해줄 수도 있을지도 모르고.”

“….”

“으음, 너무 과한 참견이었나.”

“아뇨.”

카야가 고개를 저었다. 단련을 위해 질끈 묶은 머리가 휙휙 움직였다. 날개뼈 부근까지 찰랑거리던 셰이의 머리와는 다르게 어깨 부근까지 내려오는 머리를 묶어서 그런지 짧은 꼬리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귀여웠다.

“대장의 말은 기쁩니다.  말을 들어줄 수 있다… 대장은 이미 좋은 청자입니다. 대장은 지금까지 제 불평과 불안을 애정과 관심으로 품어주었습니다. 여러모로 모자란 제게 과분할 정도로 말입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대장에게 말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해결까지는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

“고민거리가 있긴 있다는 거네?”

“…예.”

카야가 입을 달싹거렸다. 셰이의 감이 맞았던 것이다. 반면에 나는 카야의 이상한 점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해서 마음이 좀 씁쓸하긴 했지만… 우선은 그녀의 입에 집중했다.

“하아… 사실 말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떻게 알아차리셨는지. 역시 대장입니다.”

“으, 으음.”

“그래도, 계속 숨기는 것도 슬슬 한계였던 걸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말하겠습니다.”

카야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저는… 셰이를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아니, 질투하고 있습니다.”

“셰이를.”

“최근엔 열등감마저 느끼고 있습니다. 열등감은 불안감과 초조함과 억울함을 낳았습니다.”

카야는 철퇴머리로 나무 파편을 짓눌렀다. 파편이 으지직 소릴 내며 갈라졌다.

“이 말을 끝까지 들으시면 대장은 저를 한심하게 볼 겁니다. 경멸할지도 모릅니다.”

“내가 너를? 그럴 리가.”

나는 즉답했지만 카야의 표정은 씁쓸했다.

“저는 대장도 알다시피 엘프와 인간의 혼혈입니다. 엘프는 수명이 인간에 비해 아주 긴 편이고, 혼혈인 저는 엘프만큼은 아니지만 순수한 인간에 비하면 아마도… 상당히 오래 살 겁니다.”

“그렇겠지.”

“예전에 일루미나를 받아들였을 때였나, 어쩌다 나이에 대한 언급이 있었습니다. 기억하십니까.”

“그럼.”

“저는… 올해로 58번  살라미를 먹었습니다.”

“살라미?”

“아. 어렸을 적 아버지에게 배웠던 엘프들의 풍습인데, 연초에 직접 채취한  음식을 말하는 겁니다. 동물의 고기든, 과일이든, 야채든, 꽃잎이든… 채취한 걸 남김없이 먹고는 먹은 것에  배에 해당하는 걸 자연에 되돌려야 합니다. 스스로 움직이는 게 불가능한 아기 때는 보호자가 대신 해주지만… 그것까지 포함한 횟수입니다.”

“아아. 그렇다면.”

“예. 올해로 58…살입니다.”

카야가 시선을 회피했다. 그녀가 아무리 하프엘프라 해도 결국은 인간 사회에서  살았기 때문에, 나이에 대한 개념도 인간과 흡사할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나와의 나이 차이도 엄청 신경 쓰이는 것이리라.

무심코 36년 차이라고 중얼거렸다가 카야의 얼굴이 우울해지자 황급히 입을 닫았다.

“나이가 뭔 상관이야!  그래? 서로 사랑하면 됐지.”

“…새삼 나이 많은 것을 자랑하려고 나이를 밝힌 것은 아닙니다. 대장. 제가  년 동안 라엘라님을 섬겼는지 아십니까?”

“어어, 글쎄….”

예전에 환상에서 그녀의 과거를 보긴 했지만 정확한 나이를 아는  아니었다. 그녀가 몇 살에 부모를 잃었는지, 몇 살부터 길거리를 전전하기 시작했는지, 몇 살까지 괴롭힘을 당했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그녀가 어렸을 때라는 점에 근거해 추측해봤다.

“40년 정도?”

“역시 대장입니다. 비슷합니다. 정확히는 39년 정도 됐습니다만… 어쨌든 저는 이번에 유스티티아님을 감당한 셰이를 보고 불경하게도 이런 생각을 하고 만 겁니다.



나는?”


이제 22살인 셰이가, 그것도 성전사가 된  10년도 안 된 그녀는 여신의 강림체가 되었는데.

셰이의 일생의 약 두 배에 달하는 시간을 모신 나도 가능하지 않을까.

여신님의 강림은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아닌 걸 알면서도, 왜 나는 셰이에게 축하를 하면서도 분수에 맞지 않는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녀는 강해졌는데.

금화나 노력으로 강해질 수 있는 이외의 방법으로 강해졌는데.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더 강해져야 할까.

그 끔찍한 던전에서 뒤쳐지지 않으려면, 대장의 곁에 서려면…!

하지만 여신님께서 강림해주시는 것만큼은 내 노력만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인데.

혹시, 나한테도가능한 것인지 여신님께 기도해볼까… 근데 왜 이 문제에 대해선 응답이 없으신 것인지….


“…….”

카야의 말을 쭉 듣고 있던 나는  그녀가 그런 식으로 주저했는지 이해했다.

여신 강림.

이건 내가 어떻게 해결해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그녀는 셰이를 전혀 미워하지 않지만 셰이가 이룩한 전설 같은 업적에 자극된 것이었다.

차마 아끼는 동생인 셰이를 향해 부정적인 감정을 내보일 수는 없고, 그렇다고 자기의 노력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다가 믿고 따르던 여신에게서 대답은 들리지 않으니 카야의 속이 곪고 있던 것이었다.

“저는 원래 큰 욕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먹는 것도, 자는 곳도, 입는 것도 전부 욕심이 없습니다. 품질이 좋고 비싼  싫어하는 건 아닙니다만 평범하거나 질이 낮다 해도 딱히 상관없습니다. 살아남는 것 그 자체로 저는 다행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제가 내세울 수 있는 안 되는 장점 중에 하나입니다만… 그게 대장과 연관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이젠 형체조차 찾아볼 수 없는 나무 파편이 바람에 흩날렸다. 카야의 철퇴머리는 새로운 파편을 짓이겼다.

“제가 용사대의 약점이 되는 일은 참을 수 없습니다. 더 많이 활약하고 싶습니다. 대장에게 칭찬받고, 대장에게 의지 받고 싶습니다. 대장의 명령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것은  첫 번째 의지아자 가장  기쁨. 대장에게 도움이 되고 싶고, 대장의 운명을 어긋나지 않게 하고 싶고, 대장의 목표를 이루어드리기 위해서 저는 계속 강해져야 합니다. 쓸모가 있어야 합니다. 아니, 쓸모가 있는 정도가 아니라 꼭 필요한 존재여야합니다. 어디까지나.”

“카야. 지금까지  번이나 말했지만.”

“셰이를 깎아내릴 생각은 없습니다. 제가 그녀만큼 올라가고 싶은 것입니다. 하지만 방도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기도하고 기도하고, 단련하고 단련하고 단련해도… 잡생각과 부정적 감정들은 없어지지 않고 여전히 여신님의 응답은 없으십니다.”

“….”

“다 털어놓으니 조금 속 시원하긴 합니다. 하지만 그만큼 답답해지기도 합니다. 여신님께서 이런 절 한심하게 생각하실까 두렵기도 하고….”

뺨에 난 상처는 지혈이  지 오래였다. 간질거리는 느낌에 뺨을 쓸었다. 나무 가루가 묻어있었다.

“확실히, 그건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건 아니네.”

“예….”

“그래도 말해줘서 고마워. 네가 이런 맘고생하고 있다는  몰랐어. 눈치채지 못해서 미안해.”

“아뇨! 아닙니다. 숨기려면 더  숨겼어야 했는데 들킨 제가 잘못입니다.”

“그게  네 잘못이야. 사람이라면… 사람이라면, 그런 욕구에서 완전히 초탈할 수 없다고 생각해. 그게 남에게 피해를 끼치면 문제가 되겠지만,  끊임없이 네 자신을 엄격하게 통제하면서도 노력했잖아. 네가 그런 사람이라서 고맙고, 지금이라도 털어놔줘서 고마워.”

“대장….”

“지금 당장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인  맞지만, 그렇다고 아예 길이 막혔다고 단정지어진 것도 아니지?”

“예? 예. 그렇습니다만, 그건 오로지 여신님의 뜻이라….”

“역사상 몇 없는 사건이라 했어. 지극 정성을 들여야지.  그래?”

예로부터 사위 사랑은 장모라 했나니.

라엘라님의 딸 사랑, 사위 사랑은 결코 유스티티아님에게 꿇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같이 기도해보자. 둘이 안 되면 셰이도, 일루미나도 같이. 그리고 혹시 알아? 라엘라님께서 더 큰 선물을 위해 뜸을 들이시는 것일 수도 있어. 그러니까 혼자 끙끙 앓지 말자. 응?”

카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얼굴은 조금 전보다 밝아져 있었다.


**

“안 될 거 같아.”

“왜? 문제없었잖아. 오히려 생각 이상으로 잘 맞아서 오래 머물렀잖아.”

“그랬지. 오랜만에 밟아보는 싱그러운 땅과 밑에서 올려다보는 푸른 하늘은 정말 좋았지.”

“근데왜.”

“직접 강림해보니까 알겠어. 그 이상한 기운이 있어서 내가 예상보다 오래 있을  있었다는 거.”

“그래? 그렇다면 나도 내 아이한테 강림을….”

“근데, 네 아이는 그 기운이 너무 커. 지금도 계속 커지고 있고.”

“뭐?”

“네가 그 아이에게 강림하면 단순히 평균보다 오래 강림하는 수준이 아니라….”

유스티티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 순간, 저 아이에게서 못 빠져나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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