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화 〉청산(1)
셰이가 눈을 떴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가슴과 음부를 가렸지만, 이내 나를 비롯한 일행들의 반응이 이상하다는 걸 깨닫고는 고개를 내려 스스로의 몸을 살폈다.
“………말도 안 돼.”
제 몸을 뒤늦게 확인한 그녀의 반응은 우리 이상이었다. 우리가 있다는 것도 잊은 건지 손으로 이곳저곳을 쓸고 주무르며 연신 믿을 수 없다, 말도 안 된다는 말을 중얼거렸다.
‘하기야, 우리도 믿을 수 없는데 본인은 더하겠지.’
기품 있고 아름다운 얼굴과 길쭉하고 풍만하면서도 탄력 있는 몸매를 보유한 셰이였으나, 지금껏 밖에서는 제 살갗을 드러내는 옷을 입은 적이 없었다. 목 아래에는 끔찍한 흉터들로 가득 찼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 흉터들마저 긍정해주고 보듬어준 이후에야 우리 앞에서, 밀폐된 공간에 한해서 피부를 드러내긴 했지만… 셰이에게 있어서 전신의 흉터는 영영 지울 수 없는 낙인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 낙인이 있기에 과거에 당했던 끔찍한 기억들이 계속 떠오르는 거고, 끊임없는 증오의 근원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흉터들이 사라졌다.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전신에 빼곡했던 봉합의 흔적들, 급격하게 살이 쪘다가 쪼그라들기를 반복하면서 피부가 텄던 흔적들, 불에 타서 화상을 입었던 흔적과 한기에 노출되어 동상을 당했던 흔적들, 이곳저곳 찔리고 꿰뚫리고 뜯어졌던 흔적들과 그 외에 짐작하기 힘든 흔적들….
셰이는 흉터가 있었던 곳을 하나하나 만지며 여신이 강림한 ‘기적’을 인지하고 있었다.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기억과는 너무나 다른… 매끈하면서도 평탄한 피부.
셰이는 울고 있었다.
“셰이!”
양팔을 끌어안고 흐느끼는 셰이에게 다가가 그녀를 껴안았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카야도, 일루미나도, 세스티아도 셰이를 감쌌다. 셰이의 몸짓과 눈물은 우리의 감정선을 자극했다. 어느 새 우리도 전부 울고 있었다.
기쁨의 눈물이었다. 안도의 눈물이었다. 그리고해방의 눈물이었다.
셰이는 용맹하고 믿음직한 성전사였지만, 그 이전에 이제 겨우 22살인 여자였다. 아무리 내가 그녀의 모든 것을 긍정한다 하더라도, 그녀 스스로가 계속 신경 쓰였을 것이다.
그런 그녀의 트라우마 스위치와 콤플렉스 덩어리가, 일거에 사라졌다.
지금껏 고생했다는 유스티티아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긍정적 특징 : 유스티티아의 강림체(降臨體)*]
- 본 특징 습득 즉시 임의의 부정적 특징 한 개 삭제, 모든 질병 및 후유증 완치
-향후 습득할 부정적 특징 한 개 방어
- 최대 체력 +5
- 공격력 +3
- 방어력 +3
- 속도 +1
- 멘탈리티 저항 +1
- 빛과정의가 들어간 스킬의 효율 +10%
‘와… 말도 안 되는데 이건.’
분위기 깨는 메시지가 떠올랐지만 쉽사리 치우지 못했다. 처음 겪는 이벤트였던 것만큼, 처음 보는 칭호와 그 효과가 눈에 아른거렸으니까. 어느 하나 버릴 것 없는 옵션들로만 꽉꽉 가득 찬 종합선물세트같은 느낌이었는데, 심지어 고정이었다. 셰이를, 그리고 우릴 밀어주겠다는 유스티티아님의 강한 의지가 보였다.
‘역사에 몇 없다는 강림인데… 이 정도는 당연한 건가?’
Pray for Justitia!
라엘라님도 좋지만, 유스티티아님도 엄청 좋아졌다. 라엘라님의 수도원을 뭔가 제2의 여관처럼 사용하고는 있지만, 이제부터라도 유스티티아님을 위한 기도를 두 배로 늘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믿습니다! 더 빡세게 믿겠습니다! 유스티티아님! 아니, 장모님!’
속으로 유스티티아님을 향한 감사와 셰이가 무사한 것에 대한 감사를, 겉으론 셰이의 등을 토닥이며 그녀가 감정을 추스리길 기다렸다.
훌쩍-
며칠 만에 만지는 셰이의 등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매끈해졌지만….
그녀의 체온.
그녀의 목소리.
그녀의 향기.
그리고 맞닿을 때만 느낄 수 있는 이 충만한 기분까지.
‘축하해, 셰이.’
셰이는 셰이였다.
**
“대장님! 이 옷 어때요?”
“예쁜데?”
“대장님대장님! 이 옷은요? 이거는요?”
“잘 어울리는데?”
“대장님대장님대장님! 이거, 이거는요? 로자리오랑 조금 안 맞는 거 같은데….”
“아냐. 다 이뻐.”
“정말요?”
“그럼. 네가 걸치면 안 이쁜 옷이 어딨어.”
“다 이쁘다고 하니까 그러죠!”
“정말로 다 이쁘니까 그러지. 이쁜 사람은 뭘 입어도 이쁘거든.”
“치이….”
유스티티아님께서 셰이의 몸에 잠시 강림하신 이후, 우리 용사대의 분위기는 하늘을 치솟을 기세였다. 일루미나는 유스티티아님과 말 한마디 섞지도 못하고 거의 대부분 기절해 있던 주제에 엄청난 영감을 받았다면서 창작활동에 열중했고, 셰이는 이제 마음껏 입고 싶은 옷을 입고 돌아다닐 수 있게 됐다며 그간 억눌렸던 욕구를 마음껏 풀어내고 있었다. 원래도 활발했지만 지금은 정말로 제 나이대의 여자를 보는 듯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나는 그런 그녀들을 보는 것만으로도기분이 좋았지만, 그것 말고도 다시 넉넉해진 예산과 한층 더 성장한 스펙들 또한 날 기쁘게 했다.
‘이젠 정말로 베테랑 용사대라는 느낌이란 말이지.’
수많은 용사들과 용사대가 존재하는 세일럼에서도 아주 독보적인 성장세였다. 당연했다. 내 예상이 전부 맞다는 가정 하에, 우리가 보상이 가장 높은 최고난도 던전을 2구역까지 단기간에 돌파한 것에 비해 금화를 노리는 절대다수의 타 용사들은 우리보다 낮은 난이도의 던전을 찔끔찔끔 공략해서 어느 정도 벌었다 싶으면 바로 후퇴하기를 반복하며 살았으니까.
그들이 어떤 난이도에서 괴물을 어느 정도 잡고 나오는지는 내가 알 길이 없기도 하고, 또 자세한 산정 방식까지는 몰랐기 때문에 그들이 얻을 정확한 경험치는 모르지만… 확실한 건, 그런 식으로 던전을 왔다갔다하는 이들 중에 상위 구역으로 진입한 이는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애초에 사명감도 없고, 목숨은 소중하고, 근데 돈은 많이 벌고 싶고. 다람쥐 쳇바퀴 돌듯 던전을 돌다가 어디 한군데 다치거나 던전의 기운에 누적되어 정신이 오락가락하면 하루살이로 전락하거나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게 그들이었다.
오죽했으면 장모님, 아니 유스티티아님이 직접 내려오셨겠는가.
“…언니에 비해 이쪽 방면은 좀 모자라니까… 대장님! 듣고 있어요?”
“아, 어. 그럼. 카야도 셰이도 다 예뻐.”
“아휴, 대장님도 참.”
셰이는 양손 가득 들고 있던 옷을 번걸아 보더니 오른손에 있던 옷들을 도로 제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응? 그 옷들을 더 마음에 들어하는 거 아니었어?”
“그러긴 한데… 어휴 진짜. 대장님은 자상한 거 같으면서도 가끔씩 무심할 때가 있다니까요.”
“…휴일 아침부터 너랑 같이 여기 온 내가 그런 말을 듣는 건 좀 억울한데?”
“아까부터 계속 물어봤잖아요! 저 말고 카야 언니한테도 어울릴 거 같냐고! 다 예쁘다고 대충 끄덕이기만 했으니 기억이 안 나는 거예요! 맞죠? 맞죠!”
“그….”
“그건 아니라는 말은 필요 없어요. 제가 지금 필요한 건 대장님의 금화거든요! 에잇.”
셰이의 손놀림은 재빨랐다. 한 손으로 재주 좋게 안주머니에 들어있던 금화 주머니를 꺼내고는 금화를 탈탈 털어갔다. 결제를 마치고 가게를 나선 셰이는 옷이 들어있는 가방을 앞뒤로 흔들며 흥흐흥 콧노래를 불렀다.
“아니, 네 옷 사는 거 아니었냐고….”
“대장님, 바보.”
“뭐?”
“요즘, 카야 언니. 어딘가 이상하단 생각 안 들어요?”
“카야가? 아니? 이상한 게 뭐가 있어.”
카야는 평소대로였다. 표정도, 성격도, 하는 행동도. 식성도 변함이 없었다. 화났다거나 서운한 게 있다든가 삐친 게 있다든가 한 적도 없었고, 사랑도 제대로 나누었다. 어색한 것도 없었다. 근데 다짜고짜 바보라면서 무심한 면이 있네 어쩌네 하니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이건 제 감인데요.”
“뭐? 감? 확실하지 않다는 거잖아.”
“제가 여신님을 모신 이후였던 거 같아요. 카야 언니한테서 이상함을 느낀 것이.”
셰이의 어조가 갑자기 진지해지자 나도덩달아 집중하게 되었다.
“그 이상함이라는 게 뭔데.”
“명확히 한 단어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이면의 감정이라고 말해야 할까요? 언니가 절 진심으로 축하하는 건 분명한데, 예나 지금이나 절 잘 챙겨주고 배려해주는 건 똑같은데….”
셰이는 머뭇거렸다.말 자체를 못하는 게 아니라, 감히 이런 단어를 내뱉어도 되는지를 망설이는 것 같았다.
“나잖아. 괜찮으니까.”
“절 이상하게 보시면 안 돼요? 그냥, 그렇게 느꼈다는 거니까.”
“당연하지.”
내가 수차례 고개를 끄덕인 후에야 셰이가 입을 열었다.
“절망. 질투.좌절. 의심. 초조.”
“뭐?”
“여신님께서 빠져나가신 직후, 카야 언니에게서 느껴졌던 이상함에서 느껴지는 감정들이었어요. 맨 처음엔 강림의 여파 때문에 내가 잘못 느꼈겠거니 했지만, 아니었어요. 계속 느껴졌어요. 카야 언니는 아무렇지 않은 듯 평상시처럼 행동하고 있지만….”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믿기지가 않는데… 일루미나도 그런 건 못 느끼고 있는 거 같고.”
“일루미나 언니는 거의 방 안에 틀어박혀 있으니 논외구요. 아무튼, 유스티티아님이 강림하신 이후니까… 관련이 있지 않겠어요? 언니는 전혀 티를 안 내고 있는데, 그렇다고 원인제공자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제가 먼저 말을 꺼내는 건 뭔가 부채질하는 거 같아서요.”
“그래서 이 옷이다?”
“네. 대장님이 한 번 진솔한 대화를 해보셨으면 좋겠어요.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대장님한테는 다 말할 거 같으니까요.”
“일단 무슨 말인지 알았어.”
“웬만하면 제가 이런 말이랑 제안을 했다는 건 일이 해결될 때까지 숨겨주세요.”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셰이의 과민반응이었으면 했지만, 그녀의 말을 다 듣고 나니 무지하게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착한 카야가, 그런 부정적인 감정을? 그것도 셰이에게?
여관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조금 무거워졌다.
**
‘라엘라님. 라엘라님. 라엘라님.’
카야는 속으로 제 여신을 부르며 묵묵히 철퇴를 휘둘렀다. 2구역에 들어가기 전 일루미나를 훈련시켰던 공터는 여전히 인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곳을 고른 것이었다. 여기라면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껏 무기를 휘두를 수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치밀어오르는 초조함은… 이젠 단순히 기도하는 것만으로 온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셰이는 잘못 없어. 여신님도 잘못 없어. 오로지 내가… 내가 자격이 모자라서 그런거야.’
잊을 수 없었다. 강림이 완전히 풀린 셰이에게서 한순간 보였던 드높은 존재의 격, 그 흔적을. 그리고 느꼈다. 셰이가 전보다 유의미하게 강해졌음을.
던전행을 통해 수준이 올라간 것도, 금화를 사용해서 장비 수준을 올리거나 스킬 업그레이드를 한 게 아니었다.
그냥 셰이의 ‘격’ 자체가 상승한 느낌.
셰이가 자랑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자신 또한 그런 기회가 오지 않을까 하는 아주 조금의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카야의 여신은 대답이 없었다.
카야는 인정했다. 자신이 여러모로 부족한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친한 동료에게 그런 일이 생겨서 분수에 맞지 않는 기대감을 품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감정은 그렇지 않았다.
셰이가 미치도록 부러웠다.
자신에게도 라엘라님이 강림해주신다면, 그래서 더 강해질 수 있다면…!
후우웅-!
‘아냐. 아냐. 아냐. 헛된 욕심이야. 난, 내 할일에 집중하고 지금처럼 꾸준히 정진하자. 그거면 돼. 그거면….’
“많이 쌀쌀해졌는데, 그러다 감기 들라.”
“흐엣.”
콰아앙-!
깜짝 놀란 카야가 반사적으로 휘두른 철퇴에 근처에 있던 나무가 박살났다. 그 뒤에서 헨드릭이 머릴 긁적이며 나타났다.
“하하, 원래 나무 바로 뒤에 숨어서 놀래키려 했는데… 안 하길 잘했네?”
“대, 대장!”
그의 왼쪽 뺨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