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화 〉여신강림(2)
[여, 여신님! 지금 무슨 말씀하시는 거예요?]
‘왜? 위에서 지켜볼 때 이 맹랑한 아이가 장모님 장모님 할 때마다 얼마나 어이없었는지 알아?’
[네? 장모님이요? 아, 아니 그런데 왜 그런 말씀을!]
‘근데 듣다보니까 기분이 이상한 거 있지? 그 호칭이 좋다는 건 아닌데, 안 들으면 뭔가 허전한… 아무튼 그런 게 있어.’
[여신니임…!]
유스티티아는 셰이의 말을 가볍게 흘러넘겼다. 살짝 한숨이 나왔다. 격의 차이를 최대한 줄였다고 생각했는데, 잠깐 눈이 마주친 것만으로 맹랑한 아이가 기절해버렸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꽤 있었는데, 아쉬웠다.
“라엘라의 아이들아.”
“예, 여신님.”
“예, 여신님.”
“여러모로 모자란 내 아이를 잘 챙겨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네.”
“감사합니다, 여신님. 셰이 성전사는 이미 훌륭해서 더 챙기고 말고 할 것도 딱히 없었습니다.”
“너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셰이가 없었다면 저는 오늘 여신님을 배알할 기회를 놓쳤을 것입니다. 제가 셰이를 챙긴 것이 아니라, 셰이가 저를 챙겨주었습니다. 제겐 과분할 정도로 좋은 동료입니다.”
유스티티아는 미소를 지었다. 저들의 말에서 거짓이나 과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음?”
“죄송합니다, 여신님. 일루미나라고 하는 음유시인인데, 여신님의 존안을 보려 시도하다….”
“죄송할 거 없어. 그나저나.”
유스티티아는 손에 들고 있던 자신의 상징물들을 뒤로 휙 던졌다. 천칭과 검은 바닥에 부딪치기 전 은빛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생각보다 오래 머무를 수 있을 거 같은데, 조금 움직여도 되겠지?”
“물론입니다, 여신님.”
“음.”
유스티티아는재주 좋게 무릎으로 몸을돌려 일어선 세스티아의 뒤를 따랐다. 카야는 기절해버린 헨드릭과 일루미나를 챙기기 위해 남기로 했다.
“여신님. 익히 아시겠지만 지척에 여신님을 모시는 수도원이 있습니다.”
“아니. 굳이 가서 귀찮은 일은 사양이야. 교단을 위한 게 아니라, 이 아이를 위한 일이니까.”
“여신님. 이 앞부터는 직접 걸으시기엔 바닥이 다소 더럽습니다.”
“괜찮아. 그런다고 안 죽어.”
“여신님.”
“라엘라의 아이야. 그냥 잔말 말고 조용한 곳 위주로 안내해주면 안 될까? 그저 직접 걷고 싶으니.”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응.”
세스티아는 유스티티아를 원래부터도 인적이 적었던, 헨드릭과 산책을 즐겼던 코스로 이끌었다. 뒤따르는 여신이 흙길을 맨발로 걷는다는 것에 신경이 곤두선 세스티아였지만, 여신이 괜찮다는데 일개 인간이 뭐 어쩔 도리는 없었다.
“오랜만에 밟는 흙이야.”
“그렇습니까?”
“응. 몇 년이나 됐는지 기억조차 나질 않네. 예전에 강림한 적은 몇 번 있었지만, 얼마 못 버텼거든.”
세스티아는 유스티티아가 말한 ‘예전’과 ‘오랜만’이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영겁의 세월을 감히 가늠할 수 없었다.
“라엘라의 아이야. 내가 왜 이러는지 궁금해?”
“셰이 성전사를 위해서….”
“아니, 그거 말고. 조금 더 본질적인 이유 말이야.”
“으음… 죄송합니다. 거기까진 잘 모르겠습니다, 여신님.”
“이상한 아이네. 난 궁금한지 아닌지를 물었는데. 뭐 아무튼, 넌 라엘라가 꽤 아끼는 아이이기도 하고 또 내 아이를 위해 여러 편의를 봐줬으니까 말해줘도 되겠지.”
자박거리는 소리가 멈췄다. 세스티아는 무심코 뒤돌아보려다 가까스로 몸을 제지했다.
“뒤를 돌아도 좋아, 라엘라의 아이야.”
“여신님.”
“이제 눈을 가렸으니까 괜찮아. 이 이상 지상의 풍경을 두 눈에 직접 담으려는 건 내 욕심이겠지.”
거부할 수 없는 목소리에 세스티아가 몸을 돌렸다. 유스티티아의 장담대로, 전과 같은 거대한 압박은 대부분 사라져있었다. 어느새 그녀의 두 눈에 검은 천이 빙빙 둘러져있었기 때문이었다.
세스티아가 몸을 돌리자 유스티티아가 팔을 뻗어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내가 이 아이에게 강림한 가장 본질적인 이유는, 저 깊숙한 곳에 틀어박힌 놈의 뿌리를 뽑아 없애기 위해서야.”
“던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내 아이는 저곳을 멸하겠다는 자신만의 사명을 가지고 있어.”
“셰이 성전사가….”
“하지만 라엘라의 아이야. 묻겠어. 이곳, 세일럼에 저 던전이 생긴 지 얼마나 됐지?”
“적어도 백 년은 지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여신님.”
“그 이전에는 던전이 없었을까. 그 이전에는 그놈을 광적으로 숭배하는 미물들이 없었을까. 이 장소에 있는 던전이라는 게 최초이자 유일한 것이었을까. 이런 생각, 한 번도 해본 적 없어?”
유스티티아의 말뜻을 이해한 세스티아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자신이 믿고 따르는 여신과 동급의 존재의 말이었으나, 여태껏 인지하고 있던 것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그녀는 감히 여신의 말에 반박했다.
“하오나 여신님. 던전의 입구는 세일럼에만 있고, 그 이전의 던전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너희들이 시시콜콜한 것까지 기록하는 습성이 있다 해도, 모든 걸 기록할 수 있는 건 아니지. 무언갈 기록하기 위해서, 전달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기억이 수반되어야 하는 일이니까.”
“…네?”
“던전 깊숙한 곳에 숨어든 놈은나나 라엘라와 동급, 혹은 그 이상의 존재야. 격을 최대한 낮춘 나조차 직시하지 못하고 기절하는 너희들이, 놈을 제대로 목격하고 기억하고 기록할 수 있을 것 같아?”
“………….”
“이 던전이 생긴 지 적어도 백 년이라고 답했지. 그것도 너희들 입장에서나 백 년이야. 실상은… 그보다 훨씬 더 오래됐지. 세일럼이라는 도시가 생기고,그것이 기록이 된 게 약 백 년 정도 된 것일 뿐.”
그동안 배운 역사, 지식, 경험, 교리 등 개념의 근간을 모두 뒤흔드는 비화에 세스티아는 충격을 받았다. 순간 몸을 비틀거렸지만 가까스로 중심을 잡았다. 그녀는 홑몸이 아니었다.
“지금 내가 말한 것들도 내가 떠나고 나면 네 머릿속에서 증발될 확률이 매우 높아. 너희들에겐 아직 허락되지 않은 사실이라는 뜻이겠지. 그건 내 뜻도 아니고, 라엘라의 뜻도 아냐. 우리라고 이 사실을 감추고 싶진 않았어.”
“그렇다면….”
“공포. 놈의 힘이겠지. 나랑 라엘라를 비롯한 여럿은 수도 없이 놈을 짓눌렀어. 하지만 완전히 박멸하진 못했지. 짓밟으면 짓밟을수록 놈은 더욱 더 끈질겨지고, 음험해지고, 강해졌어. 던전이라 불리는 장소는 놈의 은신처이자 충전의 장소야. 자신을 불나방처럼 따라다니는 미물들을 미끼로 삼아, 미끼에 꾀인 수많은 미물들에게서 힘을 갈취하고 회복하기 위한 놈의 요새.”
“그럼 세일럼에있는 던전은…!”
“우리가 제일 최근에 놈을 봉인하다시피 억제하고 생성된 곳이야. 봉인에 가까웠던 억제는 봉인은 아니었고, 결국 풀려나서….”
유스티티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놈은 벌레보다도 끈질겨. 없애고 싶은 놈이지만, 그놈이 지껄이는 말들 중 몇 개 정도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들도 있어. 공포는 원초적 본능에 의거한 감정이라느니, 자긴 죽어도 죽지 않는다느니….”
“…그럴 수가.”
“하지만 이 아이들에게서 가능성을 봤어. 어쩌면, 이 아이들이라면. 비록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그놈을 진정한 의미에서 무찌를 수 있겠다고. 완전한 박멸은 불가능할지도 모르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놈을 크게 약화시킬 수 있겠다고.”
유스티티아가 손을 내렸다. 그녀의 몸에서 다시 은빛 광채가 발하고 있었다.
“이런, 슬슬 한계인가보네.”
“여신님.”
“마지막으로 이 아이와 함께하는 아이들을 다시 한 번 보고 가고 싶은데.”
“다시 안내하겠습니다.”
“고마워.”
세스티아는 아까보다 빠르게 걸었다.
“그런데 라엘라의 아이야.”
“네, 여신님.”
“네 뱃속의 아이, 어떻게 할 거야?”
“……네?”
세스티아의 몸이 덜컥 멈췄다.
“어떻게 할 건지 궁금해서.”
“아, 아아.”
“왜 그래?”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라엘라에게 말해서 축복을 내려줄 수도 있어.”
“…말씀은 정말감사합니다. 하지만 밝히고 싶지 않습니다.”
“흐응. 그래.”
유스티티아는 관심이 사라졌다는 듯 태연히 대답했고, 세스티아는 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재차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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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
“….”
“…아이야.”
“….”
“맹랑한 아이야. 같은 말을 세 번이나 하게 할 거야?”
“……유스티티아님?”
“그래. 대답은 바로 했으면 좋겠다고 하지 않았어?”
“죄, 죄송합니다!”
“응. 그나저나, 아직 못 들었는데.”
“예?”
“자꾸 못 들은 척, 이해못한 척 할 거야? 듣고 싶다고 했잖아. 그러니 말해봐. 장모님이라고.”
“어, 어어….”
기절한 거 같은데, 눈 떠보니 다시 유스티티아님의 새하얀 발등이 보였다. 아니, 단순히 새하얀 게 아니라 은빛 광채에 휩싸여 계셨다.
“나 곧 올라가야 하는데, 언제 다시 내려올 수 있을지 모르거든. 그러니까 빨리 말해봐.”
“그, 그으….”
“지금까지 능청스럽게 잘 말해놓고는, 왜. 못하겠어?”
어떻게 여신님에게 장모님 소릴 내뱉겠는가.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아. 그 미친놈이 나구나.’
아니, 근데 이 여신님도 참 깬다.
내려와서 한다는 말이 자기한테 장모님이라 불러보라니. 그래도 어쩌겠나. 셰이가 잘못됐다면 모를까, 그런 것 같지도 않으니 까라면 까는 수밖에.
“얼른.”
“자….”
“….”
“장모님….”
“하.”
비웃음?
아니었다.
고갤 들어보니 눈에 검은 천을 두른 유스티티아님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있었다.
“나쁜 기분은 아니네. 좋아. 앞으로도 계속 장모님이라 부를 것을 허락하지.”
“예?”
“배 아파 낳은 딸은 아니지만, 내 딸이니까 말이야. 이 아이가 널 생각하는 마음이 얼마나 갸륵한지 지금도 내게 아우성치고 있는데… 알았으니 그만 징징대라 아이야.”
“예?”
“더욱 더 소중히여기되, 애물단지로 여기지도 않았으면 좋겠네. 내 아이는 결국 전사니까 말이지. 지금껏 지켜본 바, 맹랑한 아이 너라면 잘 해낼 거라 생각해.”
“가, 감사합니다.”
“그리고….”
크흠, 유스티티아님이 헛기침을 하셨다. 얼굴이 살짝 붉어지신 거 같은데… 왜지?
“내아이랑은 그, 그거는 적당히 해. 적당히.”
“…예? 그거, 라니. 뭘 말씀하시는지.”
“그거 있잖아. 그거. 차라리 적당히, 자주하라고. 한 번에 너무 심하게 하지 말고. 내 아이 몸 상하니… 아 알았다 알았어. 이거 참. 걱정도 못 해? 장모가 사위에게 할 수도 있는 말 아냐?”
어안이 벙벙해졌다.
“심심하면 언제든지 내 쪽 수도원에 놀러와도 좋아, 사위. 아. 이 말 한 번쯤은꼭 해보고 싶었어.”
“아, 예….”
“올곧은 자신의 정의를 갖춘 그대의 앞길에 빛이 함께할지니.”
그 말을 끝으로 은색 광채가 유스티티아님의 신체를 완전히 가렸다. 그 빛은 얼핏 보면 차갑고 날카로운 것 같았지만 더없이 신성했고 든든하고 안심이 됐다.
은색 광채가 조금씩 줄어들면서 키가 조금 줄어들고, 대신 몸매가 조금 풍만해졌다. 머리카락이 다시 날개뼈 부근가지 길어지고 황금색으로 돌아왔다. 눈과 눈썹도 마찬가지였고 코와 입도 조금 커졌다. 얼굴형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마지막으로 몸을 감싸고 있던 특이한 형태의 드레스가 사라지자 알몸으로 되돌아온 셰이가 눈을 감고 서 있었다. 유스티티아님의 강림이 무사히 끝난 것이었다. 여신님이 셰이로 되돌아오는 모습은 그 자체로 진기한 모습이었지만….
“세상에…!”
“홀-리….”
며칠 만에 다시 보는 셰이의 몸이, 완전히 변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