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화 〉2구역(20)
“후우… 푸우우….”
“….”
카야는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몸을 뒤척였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오히려 잠이 더 깨버렸다. 깨버린 김에 자면서도 자신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헨드릭의 품에 더 가까이 달라붙었다.
‘유진은… 불안해하고 있어.’
셰이가 불현듯 표출했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헨드릭이 그 불안감을 흡수해버렸다는 게 보였다. 헨드릭에게 물어보면 그런 거 아니라고, 자긴 괜찮다고 말했겠지만 카야는 알 수 있었다. 대장이라서 괜찮은 척 하고 있는 거라고.
‘모르는 게 속 편하다는 말이 있듯이, 유진은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어서 더 불안해하는 거겠지.’
‘그 고백’ 이후, 헨드릭은 자신이 알고 있는 걸 많이 말해주는 것 같으면서도, 생각해보면 그중에 심각하거나 엄청 무거운 이야기는 별로 없었다. 이번에 맞닥뜨릴 괴물도 그랬다. 저번 던전행에서 상대했던 보스만큼 엄청 강하다는 것, 본신의 무력에 강한 유형이 있고 정신을 주로 건드리는 유형이 있고 하수인을 부리는 유형이 있다는 것 정도만 말해주었다. 그 이상을 물어봐도 ‘어차피 그 이상은 운이니까.’라며 고개를 저었다.
처음엔 약간 서운했지만, 괴물들의공격을 가장 믿음직하게 막아내던 셰이가 이번에 불안감을 드러내니 그제서야 헨드릭의 의도를 알 거 같았다.
미리 안다고 해서 뭘 어떻게 할 수 없는 이상, 알아봐야 불안감만 커지니까.
‘헨드릭이 알고 있는 걸 글자 하나 안 빼먹고 다 알려주든, 지금처럼 적당히 알려주든, 설령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든… 내가 할 일은 변하지 않아.’
눈앞의 남자를 따라가는 것.
단순히 따라가는 것만이 아니라 함께하는 것. 그의 전진을 가로막는 것들을 철퇴로 으깨는 것. 마침내 그 길의 끝에서 그와 소소한 행복을 꿈꾸는 것.
그것은 그녀가 헨드릭의 ‘운명’을 들었을 때 자각했고, 헨드릭과 처음으로 하나가 되었을 때 각인이 된 사실이었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분명 라엘라님의 계시가 있어서였지만….
지금은 카야, 그녀가 오롯이 가진 의지였다.
‘유진을 위해서라면.’
카야는 뭐든지 할 수 있었다.
“으음냐… 카야….”
“예, 유진. 언제나 당신 곁에 있습니다.”
헨드릭의 잠꼬대에 미소를 지은 그녀는 그가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한쪽 다리를 얽었다. 몸이 맞닿은 느낌이 너무 좋았다. 카야는 곧 잠에 들었다.
**
“몸 상태는 다들 어때?”
“아주 좋습니다.”
“멀쩡해요!”
“나도 그래.”
[체력]
셰이 : 24/24
카야 : 20/20
유진 : 20/20
일루미나 : 15/15
[멘탈리티]
셰이 : -9
카야 : -0
유진 : -0
일루미나 : -27
최상의 컨디션이었다. 일루미나의 멘탈리티가 조금 튀었지만 저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수인족 자체가 멘탈리티에 역보정이 걸려있는 데다가 스톨링 할 때도 그녀는 직접 타격하지 못했기에 추가 멘탈리티 회복의 기회가 없었다. -27은 그런 점들이 누적된 결과였다. 이것에 아쉬워한다는 건 정말 배부른 소릴 넘어 배 터지는 소리였다.
“어… 그 뭐냐. 원래 출발하기 전에 이것저것 말하려고 어제부터 계속 고민했었는데, 막상 출발하려니까 정리가 잘 안 나오네.”
“천천히 하셔도 괜찮습니다.”
“으음, 아냐. 지금 생각해보니까 대부분은 쓸데없이 장황한 말인 거 같아.”
배낭을 짊어진 내가 출구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끝까지 포기하지말자. 이게 내가하고 싶은 말이었어. 혹시 너희들도 하고 싶은 말 있어?”
“제가 포기하는 일은 결단코 없을 겁니다.”
“대장님도 포기하시면 안 돼요!”
“음유시인인 내가 현도 끊어봤어. 내 각오는 그걸로설명 끝이라고 생각해.”
솔직히 2구역 보스, 너무 쫄렸다. 우리들의 모든 공격이 치명타가 터지지 않는 이상, 한 명 이상은 높은 확률로 잠식당할 것 같았다. 아니, 잠식당하기만 하는 건 다행이지 만약 사망자가 생긴다면….
‘씨발 또, 또!’
어느새 내 곁에 다가온 동료들이 정석 대형을 갖추며 한마디씩 거들었다. 그들의 시선엔 나에 대한 신뢰가 깃들어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그에 걸맞은 행동을 해야 했다. 속으론 존나 쫄려도, 불안해도, 긴장되어도.
“가자. 조지러.”
“예. 대장.”
한 점의 의심도 없는 승리로 향하는 길을 이끄는 것.
그것이 바로 공포에 맞서는 용사들의 대장인 내가 할 일이었다.
**
“누가 나설 것인가.”
“누가 나서도 상관없지 않나?”
“저 불신자들은 어중이떠중이와는 다르다. 손에 꼽는 진짜 용사들이다. 저놈들에게 손이 당했었다.”
“저놈들이 그놈들이었다?”
“그래.”
“내가 나서지.”
“내가 나서려 했는데?”
“그만. 모든 것은 그분께서 결정하실 일이다.”
가장 기나긴 공포시여.
가장 오래된 근원이시여.
답을 내려주소서.
누가 저 불신자들을 상대할 것인지 서로 신경전을 벌이고 있던 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조아렸다. 저마다 강력한 힘을 보유하고 있는 이들이었지만, 결국 그들의 힘의 근원은 ‘가장 기나긴 공포’.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기나긴 공포의 뜻은 감히 거절을 생각할 수 없는 만고불변의 진리였다.
- 「눈」
어느새 단 한 글자로 된단어가 허공에 둥둥 떠다녔다. 하나를 제외한 나머지가 탄식을 내뱉었다.
“당신의 뜻을 이행하겠습니다. 가장 기나긴 공포시여.”
**
2-10엔 금방 도착했다. 2-9에서 2-10까지의 거리가 엄청 짧았기 때문이었다. 새삼 당부의 말이나 각오 다지기 같은 걸 다시 할 필요는 없었다. 지금 이 감정, 이 기세 그대로. 우린 저마다 무기를 꾹 쥐며 문 앞에 섰다.
셰이와 눈이 마주쳤다. 이번엔 같이 밀었다.
쿠그그긍-
다른 방보다도 훨씬 더 짙은 어두움. 들어가는 모든 자들을 움츠리게 만드는, 정예 괴물을 상회하는 압도적인 존재감.
이를 악물었다.
앞서 걸어가는 셰이와 카야, 그리고 뒤에 있는 일루미나를 강하게 의식하며 계속 다리를움직였다. 그러지 않으면 저 존재감에 짓눌리고 어둠에 잡아먹힐 것 같았다.
누군가가 내 모든 걸 샅샅이 꿰뚫어보고 해체하는 듯한, 아주 불쾌하고 구역질나는 느낌.
‘아. 씨발….’
용사 캐릭터들이 내뱉었던 대사에 적혀있던 현상을 실제로 겪어보니, 저 암흑 너머에 있을 놈의 정체를 깨닫고 말았다.
‘공포의 눈깔새끼…!’
“네놈들의 마음속은 거짓된 것들로 가득 차 있구나.”
“다들 눈 감아!”
“소용없다.”
“씨발, 안 돼!”
[2구역 보스 괴물, ‘공포의 눈’이 등장했습니다.]
[공포의 눈이 용사대를 직시했습니다.]
[용사대의 굴림에 역보정이 생깁니다.]
[저항 굴림]
용사대 : 4
공포의 눈 : 5
[공포의 눈이 용사대를 분석합니다.]
[공포의 눈의 최대체력이 40% 증가합니다.]
[공포의 눈의 방어력이 4 올라갑니다.]
[섬뜩한 시선에 용사들의 용기가 움츠러듭니다.]
[셰이 멘탈리티 –12]
[카야 멘탈리티 –6]
[유진 멘탈리티 –13]
[일루미나 멘탈리티 –13]
“씨발!”
“대장!”
“대장님!”
“으으… 뭐, 뭐야 이건…!”
“제자리 지켜! 한눈팔면 안 돼!”
1-10에서 공포의 손을 마주했을 때만큼은 아니었다. 그땐 조금만 움직여도 온몸이 짜부라질 것 같은 압박감이었다면, 지금은 뭘 어떻게 해도 다 간파당할거 같다는 무력감에 가까웠다. 육체적 압박감은 덜했지만 정신적 압박감이 장난 아니었다.
‘씨발, 들어가자마자 턴 소모 없이 최체 40%에 방어력 4 뻥튀기에 광역 멘탈 공격?’
저 어처구니없을 정도의 행패는 안다고 어떻게 대비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모두 눈을 감았다고 저걸 안 당했을까? 모든 게 까발려지는 거 같은 느낌상 그건 아닐 거 같았다.
그냥… 재해였다.
[속도 체크]
셰이 : 4
카야 : 4
유진 : 7
일루미나 : 5
공포의 눈 : 5
[유진의 턴이 앞서게 됩니다.]
그나마 위압까지 안 거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일단 눈깔새끼의 스펙부터 확인했다.
[공포의 눈]
체력 : 173/173
공격력 : 6~13
방어력 : 10
속도 : 5
‘젠장… 저거 뻥튀기 안 됐으면 최체 120언저리에 방어력 6이었다는 거 아냐. 시작부터 개빡치네?’
2구역의 피지컬 최약체 보스답게 뻥튀기되기 전 스펙은 그야말로 정예괴물급이었다. 하지만 피지컬이 그렇게 약하면 그만큼 다른 쪽에 강점이 있지 않겠는가.
저 새끼는 멘탈 파괴에 있어선 2구역 보스 중 제일이었다.
‘공포수확자와는 다른 의미에서 최대한 빨리 조져야 해!’
[수배범 발견]
[유진이 공포의 눈을 수배범으로 낙인을 찍습니다.]
[유진이 공포의 눈에게 1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172/173]
[낙인은 3턴 간 유지됩니다.]
[낙인이 유지되는 한, 모든물리적 데미지가 25% 증폭됩니다.]
언제나 그렇듯, 첫 턴은 낙인 시작이었다. 모든 폭딜의 근간이었기 때문에 빼먹을 수 없었다.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
[일루미나와 공포의 눈의 속도가 같습니다.]
이번 속도 굴림을 일루미나가 이기느냐 지느냐에 따라 이번 보스 공략의 난이도가 떡상할수도, 떡락할수도 있었다.
저놈의 첫 번째 공격을 지금 바로 맞을 수도 있고, 맨 끝에 가서야 맞을 수도 있으니까!
‘제발. 일루미나. 믿는다!’
[속도 굴림]
일루미나 : 2
공포의 눈 : 6
[공포의 눈의턴이 일루미나의 턴보다 앞서게 됩니다.]
‘아.’
일루미나를 노려보던 눈깔새끼의 눈깔이 희번득 움직였다.
“거짓된 것으로 가득 차도 너무 가득 찼어. 보는 내가 어지러울 정도로 말이야.”
“뭐라지껄이는거야병신눈깔새끼가확뽑아서터뜨려버릴라!”
“정신 차려! 말려들면 안 돼!”
“네놈들도 보아라. 내가 보았던, 네놈들의 추악함을.”
놈의 비정상적으로 커다란 눈동자가 경련하듯 떨었다. 흰자와 검은자의 구분이 모호해졌고, 곧 모든 곳이 시커멓게 변한 소름끼치는 눈깔이 우리에게 레이저 같은 무언가를 쏘아보냈다.
피하고 말고 할 것 없이 모두의 심장에 검은 레이저가 직격했다.
“아.”
그 순간, 더 롱 테러에서 저놈을 상대했을 때 멘탈리티가 붕괴해 죽어가던 어떤 용사 캐릭터의 처참한 일러스트가 떠올랐다.
“모두! 정신 똑바로 차려! 절대 믿음을 잃으면 안 돼! 절대로!”
가까스로 외쳤다.
내 외침이 제대로 전달되었을까?
아… 모르겠다.
**
“씨발 존나 쓸모없는데 갈아버릴 수도 없고… 하.”
“죄송, 죄송합니다.크나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면 다야? 네년 때문에 다 뒤질 뻔했잖아! 거기서 미스를 띄워? 거기서 1뎀이 모자라?”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추방만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쯧. 최선을 다하는 건 필요 없다고! 잘해야지!”
“죄송합니다….”
“아 씨발 그놈의 죄송하다는 소리 빼면 할 말이 없는 거냐? 어? 죄송하단 소릴 아예 안 해야 할 거 아냐!”
“….”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쥐 잡듯 잡고 있었다. 실루엣처럼 생겼지만, 실루엣과 말투만으로 그게 누군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나랑 카야였다.
‘씨발 이게 뭐야.’
당황하는 사이, 실루엣남자가 실루엣여자를 거칠게 밀쳤다. 그리고 옷을 벗기는 건지 실루엣의 모양이 전보다 적나라해졌다. 그것 자체는 별 부끄러움이 없었다. 실루엣이기도 했고 부끄러움보다는 당황스러움이 더 컸으니까.
“어차피 백 번 싸도 천 번 싸도 불임이라는데,다리라도 잘 벌리라고 씨발년아. 이거라도 쓸모가 있어야지. 안 그래?”
“….”
“뭐야 그 표정은. 불만이야? 불만이면 당장 말해.”
“아… 아, 아, 아닙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실루엣남자의 선 넘은 폭언을 들은 순간, 내 정신은 아찔해지고 말았다. 내가 카야에게 저런 말들을 할 리가 없었고 한 적도 없었다. 저건 허상이다, 눈깔새끼의 수작이다라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이, 이 씨발새끼가…?’
허리를 움직이려던 실루엣남자와 체념한 듯 가만히 누워있던 실루엣여자의 고개가 어느새 한 곳을 향하고 있었다.
내 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