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7화 〉2구역(16)
비밀방에서 나온 이후의 돌파는 대체적으로 순조로웠다. 나온 지 얼마 안 되서 스카우팅까지 발동됐고, 그 덕분에 함정도 대부분 피할 수 있었다. 중간에 베이파를 만지작거리다 독침을 못 피한 일루미나나 낙석을 피하기 위해 움직인 곳에서 갑자기 송곳이 튀어나오는 이중 함정에 당한 나를 제외하면 말이다.
[체력]
셰이 : 17/24
카야 : 19/20
유진 : 7/20
일루미나 : 10/15
[멘탈리티]
셰이 : -20
카야 : -4
유진 : -12
일루미나 : -34
‘7체력… 스읍. 간당간당하긴 하지만 3열이기도 하고, 셰이에겐 미안하지만 여차하면 집념 스킬도 있으니까.’
스카우팅으로 미리 봐두었던 오른쪽 길로 접어들었다. 슬슬 미지의 영역에 가까워졌다.
“조심하자. 언제 어디서 괴물이 튀어나올지도 몰라.”
“예. 대장.”
카야의 대답을 끝으로 침묵이 찾아왔다. 평소와 같은 침묵이었지만 그래도 느낌이 달랐다. 휴식을 잘 취한 덕에 멘탈리티 상태도 아주 양호했고, 두 개의 방을 건너뛰었다. 그래, 이 정도면 기분 좋은 침묵이었다.
뚜벅뚜벅-
잠시 1구역 때가 떠올랐다. 1-5를 돌파했을 땐 어땠더라. 너무 굴러서 그런가 큰 틀은 기억나지만 세세한 것까진 기억이 잘 안 났다.
‘일반이었나? 정예였나?’
중간에 공전(공포의 전사)을 만나서 뒤질뻔했던 건 확실한데 그게 몇 번 방이었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났다. 1-5, 아니면 1-6 근처였던 거 같긴 한데….
“대장님.”
“어?”
“잠시 와서 봐주세요.”
셰이의 부름에 상념이 깨졌다. 그녀가 한쪽으로 비켜서자 그녀가 뭐 때문에 불렀는지 알 수 있었다.
‘선악의 거울….’
전신을 비출 정도로 길었지만 군데군데 거미줄처럼 금이 가 있는, 반절 정도가 뿌옇게 흐려진 거울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선악의 거울이라 불리는 이 거울은 예전에 1구역에서 봤었던 신언서와 마찬가지로 통로에서 낮은 확률로 발견할 수 있는 기물이었는데, 저걸 이용하면 상당히 높은 확률로 부정적 특징이 생기곤 해서 정말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거르는 일이 95% 이상이었다.
저거 공식 설정이 사람의 내면 속에 들어있는 선악과 지금껏 저질러온 일들의 선악을 종합해서 긍정적 특징이나 부정적 특징을 비추어준다는 것인데, 6할이상은 부정적 특징만 생겼고 3할 이상은 둘 다 생겼다. 세일럼으로 용사하러온 이들 중에 사연 없는 이들이 거의 없다는 걸 생각해보면, 부정적 특징이 더 좆같은 게 붙는 경우가 많았다.
“신경 쓰지 말자.”
아무리 내 동료들이 선한 편이라고 해도 특별한 조치 없이 선악의 거울에 제 모습을 비추는 건 하책. 지금 당장 긍정적 특징이 그렇게 고픈 게 아니었다.
“궁금하긴 한데.”
“꺼림칙하긴 합니다.”
“그래도 신언서 때랑은 다르니까요. 그땐 성수도 있었고, 교리가 적혀 있었으니 우리 전문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니까요.”
겉으로만 보면 그저 여기저기 금이 간 낡은 앤티크 전신 거울이었다. 일루미나가 호기심을 보이긴 했으나 욕심을 부리진 않았다. 아쉬운 마음을 접어두고 선악의 거울을 지나쳤다. 그리고추가로 함정 두 개를 돌파한 후, 드디어 2-6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상 없으면 바로 가자. 셰이, 부탁해.”
“네, 대장님.”
쿠구구궁-
언제나 그렇듯 방의 문은 요란하게 열렸다. 쓸데없이 큰 사이즈랑 복잡한 문양과 으스스한 소리 등 모든 요소들이 용사들에게 두려움을 주기 위해 디자인된 것 같았다. 이 문을 여는 순간 어떤 공포가 도사릴지 모른다는 미지에서 오는 공포 또한 절대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린 초보가 아니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고통이 수반된 좌절이나 시련을 많이 겪어봤다. 이깟 디자인 때문에, 이깟 소리 때문에, 이깟 어두운 것 때문에 새삼 두려울 일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방심하지 않는다고 했으면서 내심 조금은 긴장을 늦췄던 것일까.
“수확할 시간이 다가왔군.”
[정예 괴물 ‘공포수확자’가 등장했습니다.]
“수확할건네놈의흉측한대가리겠지쓰레기만도못한버러지가!!!”
“히익!!”
‘홀리 쒯…!’
쿠웅-!
방을 두 개 건너뛰었던 만큼, 다시 정예 괴물을 맞닥뜨릴 가능성도 생각했어야 했다. 물론 미리 알았다고 해도 뭐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없었지만, 그래도 마음가짐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2-2에서 공포의 예술가, 2-3 갈림길에서 최후의 문지기에 이어 2-6에서 공포수확자까지… 방을 생각 안 하고 전투만 따져본다면 우린 지금 3연속 정예괴물과 전투하는 중이었다.
‘좆됐네.’
저놈, 공포수확자는 더 롱 테러에서도 스톨링이 거의 불가능한 괴물이었다. 무조건 빠르게 딜로 찍어눌러야 하는 극딜형 괴물이었다. 근데 하필이면 일루미나가 스킬 사용이 불가능할 때 조우하다니.
내가, 해내야했다.
[속도 체크]
셰이 : 4
카야 : 4
유진 : 7
일루미나 : 5
공포수확자 : 5
[유진의 턴이 앞서게 됩니다.]
[공포수확자]
최대체력 : 104/104
공격력 : 10~15
방어력 : 4
속도 : 5
‘와씨, 공격력 존나 살벌하네 진짜로.’
최대공격력 15? 이거 맞아? 일루미나 최대 체력이 15인데?
이게… 최고난도의 매운맛?
‘일루미나 버프 불가. 따라서 한 대도 안 맞고 조지는 건 불가능.’
그나마, 정말 그나마 최대 체력이랑 방어력이 낮은 편이긴 했다.
“겁먹지 말자. 침착하게, 그리고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하면 돼.”
“헤, 헨드릭. 나는? 나는 뭘 해야 돼?”
“베이파가 고쳐질 때까지 무사히 응원해줘. 그러면 돼.”
“아….”
저놈이 아무리 정예 괴물 치고 체력과 방어력 수치가 낮다지만, 그렇다고 낙인을 찍는 한 턴이 아깝다고 생각하는 건 금물이었다. 최대한빨리 조져야 했다.
[수배범 발견]
[유진이 공포수확자를 수배범으로 낙인을 찍습니다.]
[유진이공포수확자에게 1의 데미지를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103/104]
[낙인은 3턴 간 유지됩니다.]
[낙인이 유지되는 한, 모든 물리적 데미지가 25% 증폭됩니다.]
3라운드.
저 낙인이 꺼지기 전에 못 잡는다면, 우리가 죽을 각오를 해야 했다. 아니, 당장이라도 저 사이드가 셰이나 카야가 아닌, 내게 꽂힌다면….
[일루미나와 공포수확자의 속도가 같습니다.]
[속도굴림]
일루미나 : 3
공포수확자 : 6
[공포수확자의 턴이 일루미나의 턴보다 앞서게 됩니다.]
“아.”
조졌네.
“어디 한 번, 수확을시작해볼까.”
드는 것조차 버거워보이는 사이드의 섬뜩한 날이 높이 솟아올랐다. 족히 수 미터 이상 치솟은 날의 첨단이, 기이한 궤도로 움직이며 누군가의 심장을 향해 쇄도했다.
카아아앙-!!!
“크윽!!”
“흐음.”
첨단의 목표는 카야였다. 가까스로 반응한 그녀가 내민 철퇴와 맞부딪치며 섬뜩한 불꽃을 튀겼다.
[저항 굴림]
카야 : 2
공포수확자 : 4
[카야가 방어에 실패합니다.]
하지만 긴박했던 길항 상태는 얼마 유지되지 못했다. 철퇴는 밀려났고, 사이드가 그녀의 갑옷에 그대로 꽂혔다.
[심장 수확]
[공포수확자가 카야의 방어력의 70%를 무시합니다.]
[공포수확자가 카야에게 7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10/20]
[카야가 상태이상 ‘출혈’(3턴)에 걸렸습니다.]
[턴당 2의 체력이 감소합니다.]
“카하악!!”
“카야!!”
“언니!!”
사이드에 꿰뚫린 카야는 한순간 낚시대에 낚인 물고기처럼 드높이 치솟았다가 공포수확자놈이 팔을 휘두르자 형편없이 바닥에 추락했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받아내고 어쩌고 할 겨를이 없었다. 바닥에 떨어진 카야가 전신을 경련했다.
“흐음, 생각보다 튼튼하군.”
“저 새끼가 뒤질라고! 언니! 카야 언니!”
“쿨럭… 괜찮, 습니다….”
“어떡해… 어떡해!!”
[일루미나가 턴을 넘깁니다.(남은 턴 : 3)]
카야를 끌고 온 셰이가 이를 갈았다.
[카야와 셰이의 속도가 같습니다.]
[속도굴림]
셰이 : 2
카야 : 1
[셰이의 턴이 카야의 턴보다 앞서게 됩니다.]
셰이가 휙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가 꼭 불타고 있는 것 같았다.
“셰이. 최후의 성전을.”
“…알겠어요.”
셰이는 수확이니 어쩌니 중얼거리는 저 건방진 새끼한테 칼밥을 못 먹이는 걸 안타까워하는 것 같았다. 나도 마음 같아서는 공격을 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카야가 당한 공격을 직접 보니, 간담이 서늘했다. 만약 내가 공격당했을 때도 관통이 터진다면? 일루미나가 공격당한다면?
셰이의 집념을 발동하라 했을 때, 저놈이 낮아진 체력의 셰이를 직접 타격한다면?
“날 먼저 쓰러뜨려라 이 비겁한 새끼야!!!”
[최후의 성전]
[셰이가 자신에게 낙인(1턴)을 새깁니다.]
[낙인이 유지되는 한, 모든 괴물은 셰이를 공격합니다.]
[상태이상 ‘절대 뒤로 밀려나지 않음’을 얻습니다.]
[셰이의 각종 상태이상 저항력이 상승합니다.]
[셰이의 방어력이 1 증가합니다.]
[피격 시 셰이의 체력이 1 회복됩니다.]
[피격 시 셰이가 일정 확률로 반격(데미지 보정 –25%)합니다.]
[낙인이 해제되고 한 턴간 행동할 수 없습니다.]
나와 일루미나를 음흉하게 바라보고 있던 수확자놈의 고개가쩌렁쩌렁 고함을 지르는 셰이에게 돌아갔다. 저놈은 광역 기술이 하나도 없었고, 무조건 다음 턴엔 셰이만을 공격하게 될 것이다.
내 생각엔 지금으로선 이게 최선이었다.
이제 우린 내 공격 두 번, 카야의 공격 두 번, 셰이의 반격 한 번으로 저놈을 조져야 했다. 안 그럼 위험했다.
“카야.”
“예, 대장.”
“복수, 해야 하지 않겠어?”
“물론, 입니다.”
[카야의 체력이 2 감소합니다.]
[남은 체력 8/20]
[지혈에 성공했습니다.]
[카야가 상태이상 ‘출혈’(2턴)에서 벗어났습니다.]
카야는 뻥 뚫린 곳에 손을 가져다댔다. 출혈은 멎었지만 상처는 그대로였다. 물론 던전에서 안 다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꼴사나운 흔적을 남기고 싶진 않았다. 한 순간이지만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그게 너무나 수치스러웠다.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갑옷에, 육체에, 자존심에 구멍을 뚫어버린 저 괴물에게 기필코 응징의 철퇴를 내리리라.
카야의 부릅뜬 두 눈에 귀기가 흘렀다.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파멸적인 일격!]
[카야가 공포수확자에게 42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61/104]
[괴물을 파멸로 이끄는 공격에서 용사들이 희망을 얻습니다.]
[셰이 멘탈리티 +4]
[카야 멘탈리티 +3]
[유진 멘탈리티 +4]
[일루미나 멘탈리티 +4]
“크아아악--!!”
“그렇지!!!”
카야의 철퇴가 수확자놈의 면상을 제대로 짓뭉갰다. 저놈이 최후의 문지기에 비해 방어력이 낮기도 했고 또 처음부터 치명타를 제대로 터뜨린 게 주효했다.
그때 그렇게 안 터졌으니, 이번엔 터지는 것. 운빨 총량의 법칙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카야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앞으로 나섰다. 격통에 시달렸을 그녀가 이렇게 제몫 이상을 해주었다. 나만 효과를 받고 있는 아티팩트도 두 개 이상 장착한 지금,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대가리 분쇄]
[유진이 공포수확자에게 28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33/104]
하지만 내가 필살의 각오로 휘두른 도끼는 정타로 들어갔지만, 딱 그 정도였다. 치명타를 먹였을 때만 느낄 수 있는 찌릿한 손맛이 없었다. 데미지 자체는 나쁘지 않았으나 저놈을 죽이진 못했다.
“씨발….”
“적어도 하나는 데려가야겠군.”
거뭇거뭇하고 끈적한 피를 쏟아내고 있던 수확자놈에게서 검은 기운이 피어올랐다. 그 기운은 이윽고 사이드에 응축되더니, 이번엔 수평으로 치켜들었다.
“공포에 굴복하지 않는 그 건방진 목, 받아가겠다.”
[가차 없는 수확]
반드시 머리를 따버리겠다는 악의가 담긴 검은 파도가 셰이에게 짓쳐들었다.